4·3사건의 배경

광복 직후 제주도의 정세

1945년 8월 한민족은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 국권을 되찾았다. 그러나 미군과 소련군이 남과 북에 들어와 38도선을 경계로 주둔함으로써 원하지 않는 분단 상황이 이루어졌다. 광복 이후 새로운 통일 민족국가의 수립은 모든 사람들의 희망이었으나 정치 지도자들은 좌우로 이념이 갈라져 대립하였고, 미국과 소련은 냉전의 대립으로 치달아갔다. 결국 광복 3년 만에 남한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곧이어 북한에도 또 다른 정부가 세워짐으로써 분단은 굳어져 버렸다.

태평양전쟁이 끝나자 제주도에 주둔했던 7만여 명의 일본군은 철수하고 군사시설은 모두 파괴되었다. 일본군이 물러가고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일본에 건너갔던 6만여 명의 제주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지길 기대했다.

광복 직후 자주 독립적인 국가를 세우기 위한 건국준비위원회(약칭 : 건준)가 전국적으로 조직되자, 제주에서도 대정면 건준을 시작으로 1945년 9월 10일에는 제주도 건준이 결성되었다. 이어 건준은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제주도인민위원회는 9월 23일 제주농업학교에서 각 읍·면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결성되었다. 인민위원회 조직을 계기로 1945년 말에 이르기까지 청년동맹·부녀동맹·농민위원회·소비조합 등 각종 사회단체가 속속 조직되었다.

제주도인민위원회는 치안 활동에 가장 주력하였다. 치안 업무는 주로 일본군 패잔병의 횡포를 막는 일과 토지·산업체 등 적산(敵産)이나 군수물자를 멋대로 처리하는 것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인민위원회는 각 면별로 국민학교·중학원 등을 설립하여 자치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인민위원회는 실질적으로 도내 각 면과 마을 행정을 주도하였다. 미군정에 의해 행정이 실시되었지만 여러 마을에서 인민위원장이 이장이 되었고, 인민위원회는 어김없이 마을 향사를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인민위원회의 자율적인 움직임과 함께 제주도에도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미군이 제주도에 진주한 것은 1945년 9월 28일, 실질적인 군정 업무를 담당할 제59군정중대가 도착한 것은 11월 9일이었다. 제59군정중대는 인력 부족과 정보 부재로 원만한 통치 업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따라서 영향력이 강했던 인민위원회의 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인민위원회를 공식적인 행정기관이나 통치기구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미군정은 도청과 경찰의 요직에 일제 때의 관리를 그대로 앉혔으며, 서서히 우익인사들을 조직화시켜 인민위원회에 대항할 세력으로 키워갔다.

○ 미군정 당국 : 제주도인민위원회는“도내의 유일한 정당으로서, 모든 면에서 정부나 다를 바 없는 유일한 조직체”라고 평가하였다. (「자유신문」, 1946. 12. 19)

○ 「동아일보」, 寶庫 제주도 시찰기 (1946. 12. 21)
“세간에서 제주는 좌익 일색이며 인위(人委)의 천하라는 말이 있으나, 제주의 인위는 건준 이래 양심적인 반일제 투쟁의 선봉이었던 지도층으로써 구성되어 있으며, 최근에 분립된 한독(韓獨), 독촉국민회(獨促國民會) 등의 우익단체와도 격렬한 대립이 없이 무난히 자주적으로 도내를 지도하고 있다.”

1946년 8월 1일 제주도(島)의 도(道) 승격은 우익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도 승격을 줄곧 주장하여 왔던 우익세력의 손을 미군정이 들어준 셈이 되었다. 이후 도(道)수준에 맞게 경찰 병력이 증강되고 조선경비대 9연대가 창설되는 등 공권력이 강화되었다. 이에 맞추어 1946년 말부터 인민위원회에 대한 미군정의 직접 탄압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미군정의 정책 강행은 도민의 반대에 부딪쳤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중첩되면서 도민들의 불만은 더욱 커져갔다. 미군정은 경제정책에서 현상 유지를 위해 원활한 생필품 수급과 물가 안정에 역점을 두었다. 그러나 광복 직후 식량 생산이 감소하여 양곡이 부족한 사태가 계속되는 가운데 가격도 폭등하였다. 식량난은 광복 직후 6만여 명에 이르는 귀환인구가 불어나 더욱 심해졌는데, 해결책으로 제시된 미곡수집 정책의 실패로 도민들은 불만이 높았다.

3·1사건과 민·관 총파업

1947년 3월 1일 오후 2시 45분께 제주읍 관덕정 앞에서는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경찰의 총탄에 맞은 주민 여러 명이 피범벅이 된 채 나뒹굴었고 결국 6명이 사망하였다. 이 총격 사건 이후 제주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고, 이듬해 4·3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는 기점이 되었다.

1947년 3월 1일은 해방 후 두 번째 맞이하는 3·1절로서 제주도 좌익진영은 이 날 기념식을 전도민적 행사로 치르기로 준비하였다. 이보다 앞서 2월 17일 관공서를 비롯한 사회단체·교육계·유교계·학교단체 등 각계각층을 망라하여 ‘3·1투쟁기념행사제주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어서 2월 23일 제주도 민주주의 민족전선(약칭 : 제주민전)이 결성되자 3·1절 기념행사 준비는 민전이 주도하게 되었다.

한편 미군정 당국은 2월 23일 충남·북 응원경찰 100명을 제주에 급히 파견하여 비상경계에 들어갔다. 미군정은 3·1절 행사 때 시위는 절대 불허한다는 방침과 집회 사전 허가 원칙을 정하였다. 민전 의장단과 미군정 당국은 몇 차례 만나 협의하였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3·1절 행사는 당초 계획대로 강행되었다.

3·1절 기념대회는 각 읍·면 별로 치러졌고 제주북국민학교에는 제주읍·애월면·조천면 주민 3만여 명이 모였다.

제주읍에서는 북국민학교의 3·1절 행사가 오후 2시에 끝나자 군중들은 곧바로 가두시위에 나섰다. 시위대가 관덕정을 거쳐 서문통으로 빠져나간 뒤 관덕정 부근에 있던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여 다쳤다. 이때 기마경찰이 다친 어린이를 그대로 두고 지나가자 흥분한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했고 관덕정 부근에 포진하고 있던 무장경찰은 이에 대응하여 총격을 가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구경나온 민간인 6명이 사망했다. 이들 가운데는 15세 국민학생과 젖먹이 아이를 가슴에 안은 채 피살된 여인도 있었다.

이 발포사건으로 제주도내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러나 미군정과 경찰은 사태 수습보다는 시위 주동자를 검거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좌익진영은 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미군정과 경찰의 탄압을 폭로하며 희생자 구호금 모금에 나섰다. 이어 3월 10일에는 제주도청을 시발로 민·관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도청 등 관공서는 물론 은행·회사·학교·운수업체·통신기관 등 도내 156개 기관 단체 직원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현직 경찰관까지 파업에 동참했다.

미군정청은 3월 8일 합동조사반을 제주에 파견하여 사건의 진상을 조사했으나 공식적인 진상 발표는 하지 않고 3월 13일 돌아갔다. 3월 14일에는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이 내도하여 총파업을 와해시켜 나갔다. 미군정은 3월 15일 전남·북 응원경찰 222명, 3월 18일 경기도 응원경찰 99명을 증파해 총파업에 강경 대응하였다.

조병옥 경무부장은 3월 19일 담화문을 발표하여 경찰의 발포를 정당방위로 주장하고, 이 사건은 북조선과의 통모로 발생했다는 내용을 공표하여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조작하였다. 이 사건 직후 미군정 보고서에는 “제주도는 70%가 좌익정당에 동조적이거나 가입해 있을 정도로 좌익의 본거지”라고 기록되었다.

또한 미군정은 3월 15일부터 파업 주모 혐의로 민전 간부들을 연행하기 시작하여 4월 10일까지 500명을 검속했다. 검속된 자들 가운데 5월말까지 328명이 재판에 회부되고, 52명이 실형을 언도 받아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7년 3·1사건 이후 1948년 4·3사건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검속됐다.

전 도민의 공동체적인 3·1절 기념식 참여와 3·10총파업 동참은 미군정으로 하여금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오인하게 하였으며, 이후 제주는 일방적인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4·3으로 가는 길목에서 제주 사람들은 고립된 작은 섬에서 세계 냉전 구도가 빚어낸 엄청난 희생을 강요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4·3으로 가는 길목

미군정은 3·1사건 처리 과정에서 제주도 군정장관 등 고위관리들을 극우 성향의 인물들로 교체하였다. 1947년 3월 31일 제주경찰감찰청장에 김영배를 임명하고, 4월 2일에는 군정장관을 스타우트 소령의 후임으로 베로스(Russel D. Barros) 중령으로 교체했다. 4월 10일 박경훈 도지사의 후임으로 극우 인물 유해진을 임명하였다.

미군정은 관공서와 교육계에 대한 숙청 작업에 착수하여 총파업에 가담한 사람들을 파직시켰다. 파업에 동참한 경찰관 66명도 파면되었다. 이때 철도경찰 245명을 모집하여 제주도에 배치시킴으로써 4월말 제주도의 경찰 병력은 500명에 이르렀다. 서북청년회(약칭 : 서청) 회원이 대거 제주도에 들어와 만행을 저지른 것도 이후의 일이었다.

8월에 접어들자 미군정은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도지사 사임 후 제주민전 의장으로 추대된 박경훈을 비롯한 민전 간부 30여명을 구속하였다. 많은 청년들이 검거를 피해 도외로 혹은 일본으로 빠져나갔고, 일부는 한라산의 동굴 등에 은신처를 마련해야 했다. 주민들의 불만도 커져갔다. 그 과정에서 1947년 8월 안덕면 동광리에서 하곡수집 담당 공무원 폭행사건이 발생하였다.

1948년 1월 남한 단독선거안이 명백해지자 남한 내의 많은 정당과 단체에서 잇따라 반대성명을 발표하면서 격렬하게 반발하였다. 반대 이유는 한반도가 영구히 남과 북으로 분단된다는 것이었다. 이 반대 대열에는 좌파 진영만이 아니라 우파 일부와 중도파까지도 가세하고 있었다. 남한 단독선거 찬반 문제를 놓고 우파 진영도 두 갈래로 나누어져 있었다.

하나는 단독정부 반대·남북협상의 추진을 내걸고 통일운동을 주창한 김구·김규식 등의 노선이고, 다른 하나는 미군정과 보조를 맞춰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던 이승만과 한민당 계열의 노선이었다.

이런 정치 흐름 속에서 남조선노동당(약칭 : 남로당)은 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강력한 투쟁계획을 세웠다. 이것이 1948년 2월 7일을 기해 전국을 총파업으로 몰고 간 ‘2·7사건’이었다.

1948년 초 제주도 내 좌익진영은 조직의 핵심 간부들이 대거 검거됨으로써 궤멸 상태에 빠졌다. ‘2·7사건’을 거치면서 전도적으로 검거 바람이 불었고, 붙잡힌 청년들에 대한 가혹한 취조가 이루어졌다.

조천에서는 3월 6일 조천중학원 학생 김용철이 혹독한 고문으로 숨졌고, 14일에는 모슬포지서에 끌려간 대정면 영락리 출신 양은하가 경찰의 구타로 숨졌다. 3월 말 한림면 금릉리에서는 청년 박행구가 서청 단원에 붙잡혀 무수히 구타당한 뒤 총살되었다.

궁지에 몰린 제주도내 좌익진영은 결사 항쟁을 하자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결국 여러 번에 걸친 비밀회의 끝에 경찰과 서청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와 함께 다가오는 5·10 단독선거를 4·3사건 결행의 주요 명분으로 내걸었다.

상처받은 영혼을 향한 희망이 불어오는 곳
평화·상생·해원 바람의 진원지

제주4·3평화재단

사건으로 보는 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