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사건과 무력충돌

1948년 4월 3일 4·3사건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중허리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4·3사건의 신호탄이 올랐다. 350명의 무장대는 이날 새벽 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했다. 경찰과 서북청년회 숙소, 독립촉성국민회,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지목해 습격하였다.

이 사건으로 4월 3일 하루 동안에 △경찰=사망 4명, 부상 6명, 행방불명 2명 △우익인사 등 민간인=사망 8명, 부상 19명 △무장대=사망 2명, 생포 1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무장대는 4월 3일 행동을 개시하면서 2개의 ‘호소문’을 뿌렸다.

하나는 무장대가 공격 대상으로 삼았던 경찰·공무원·대동청년단 단원들에게 보내는 경고문이다.

친애하는 경찰관들이여! 탄압이면 항쟁이다. 제주도 유격대는 인민들을 수호하며 동시에 인민과 같이 서고 있다. 양심 있는 경찰원들이여! 항쟁을 원치 않거든 인민의 편에 서라. 양심적인 공무원들이여! 하루빨리 선을 타서 소여된 임무를 수행하고 직장을 지키며 악질 동료들과 끝까지 싸우라. 양심적인 경찰원, 대청원들이여! 당신들은 누구를 위하여 싸우는가? 조선사람이라면 우리 강토를 짓밟는 외적을 물리쳐야 한다. 나라와 인민을 팔아먹고 애국자들을 학살하는 매국 매족노들을 거꾸러뜨려야 한다. 경찰원들이여! 총부리란 놈들에게 돌리라.
당신들의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란 돌리지 말라. 양심적인 경찰원, 청년, 민주인사들이여! 어서 빨리 인민의 편에 서라, 반미 구국투쟁에 호응 궐기하라.

다른 하나는 무장대가 도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이다.

시민 동포들이여! 경애하는 부모 형제들이여!‘4·3’오늘은 당신님의 아들 딸 동생이 무기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매국 단선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당신들의 고난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제 식인종과 주구들의 학살 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오늘 당신님들의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하여! 우리들은 무기를 들고 궐기하였습니다. 당신님들은 종국의 승리를 위하여 싸우는 우리들을 보위하고 우리와 함께 조국과 인민의 부르는 길에 궐기하여야 하겠습니다.

무장대는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 산하 조직으로서, 정예부대인 유격대와 이를 보조하는 자위대, 특공대 등으로 편성되었다. 4월 3일 동원된 인원은 350명으로 추산된다. 4·3사건 전 기간에 걸쳐 무장세력은 500명 내외였다. 무기는 4·3사건 당시 소총 30정에서 경찰지서 습격과 경비대원 입산사건 등을 통해 보강되었다.

미군정의 대응과 평화협상

미군정청은 4·3사건이 발생하자 4월 5일 아침 전라남도 경찰 약 100명을 응원대로 제주에 급파하는 동시에 제주경찰감찰청 내에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였다. 또 서청 단원들도 증원되었다.

미군정은 4월 17일, 그동안 관망 상태에 있었던 모슬포 주둔 국방경비대 9연대에게 사태 진압을 명령했다. 그러나 경찰에 비해 민족적인 성향이 강했던 9연대는 이 사건을 경찰 및 서청과 같은 극우 세력의 횡포로 인해 야기된 것으로 판단하여 ‘선선무 후토벌’을 원칙으로 정하고 무장대와의 평화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

이 결과 1948년 4월 말 9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연대 정보참모 이윤락 중위, 그리고 무장대 측 군사총책 김달삼 등이 만나, “72시간 안의 전투 중지, 무장 해제와 하산이 이루어지면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평화협상을 성사시켰다.

4월 말 평화협상은 미군정 하지사령관의 무력 진압 방침 결정으로 깨졌다. 하지 사령관은 4월 27일 미 24군단 작전참모부 슈(M. W. Schewe) 중령을 제주에 보내어 사태 진압을 위해 귀순 공작과 무력 진압의 두 가지 방법을 함께 고려했다.

그러나 제주에서 작전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간 슈 중령의 4월 29일자 보고서에서 제주도 상황에 대해

“미 59군정중대장이 제주도에 있는 병력을 확실히 통솔한다면 현재의 주둔 병력만으로도 상황을 진정시키는 데 충분하다. 공산주의자들과 게릴라 세력이 오름들에 있기 때문에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신속하고 활발한 작전이 요구된다”고 평가했다.

현재의 병력만으로도 진압이 가능하다는 내용의 이 보고서는 하지사령관으로 하여금 무력 진압을 결정하게 하였고, 결국 김익렬과 김달삼의 평화협상은 미군정 수뇌부에 의해 무시되었다.

평화협상 직후인 5월 1일에는 오라리 마을 방화사건이 발생, 협상을 파기하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였다. 이 방화는 우익 청년들이 저질렀지만, 미군정과 경찰은 “폭도들이 한 행위”로 조작하였다. 미군이 이 불타는 마을을 촬영, ‘제주도의 메이데이(May Day on Cheju-Do)’란 영상 기록물을 제작하기도 했다.

5월 5일 제주에서 미군정 수뇌부가 참석한 가운데 긴급대책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강경 진압을 주장한 조병옥 경무부장과 선무귀순공작의 필요성을 역설한 김익렬 연대장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졌다. 결국 김익렬은 문책을 받아 해임되고, 다음날 9연대장은 박진경 중령으로 교체되었다. 이제 강경 진압의 길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5·10선거 거부

무장대는 5·10단선에 대한 적극적인 거부 투쟁을 전개하였다. 5월 7일부터 10일까지 선거사무소를 집중 공격하고 선거관계 공무원을 납치·살해하는 한편, 선거인명부를 탈취했다. 5월 10일 선거 당일에 무장대는 중문·표선·조천 등지에서 투표소를 공격했다. 다수의 주민들은 무장대에 동조하여 입산, 선거를 거부하였다.

결국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 2개 선거구는 투표수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되었다. 제주도 선거구는 3개 중 남제주군 선거구만 선거를 치러 무소속의 오용국이 당선되고, 북제주군의 2개 선거구는 투표율이 모자라 무효로 처리된 것이다.

미군정은 북제주군 2개 지역의 선거 무효화를 공표함과 동시에 6월 23일에 재선거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선거를 치를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아 결국 재선거는 무기 연기되었다.

5·10선거의 거부는 미군정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져, 제주도민들에 대한 대탄압이 예견되었다. 미군정은 브라운(Rothwell H. Brown) 대령을 제주지구 사령관으로 임명, 강도 높은 진압작전을 전개하며 6월 23일 재선거를 실시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경비대 병력은 기존 9연대 1개 대대와 부산 5연대에서 차출된 1개 대대, 새로이 11연대 1개 대대가 파견되어 모두 3개 대대로 강화되었다.

박진경은 11연대장에 취임하여 본격적인 토벌에 나섰다.

조병옥 경무부장도 담화를 발표하여 ‘강경 진압 방침’을 분명히 하고, 경찰 특수부대를 파견하는 한편 서청 단원을 계속 증파했다. 경비대가 주도하는 본격적인 토벌작전이 전개되었다. 5월 27일까지 붙잡힌 입산자는 3,126명에 달했고, 6월 중순에는 무려 6,000여 명에 달하게 되었다.

무리한 토벌이 이루어지자 서서히 경비대의 강경 방침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5월 20일 밤 9연대 병사 41명이 탈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은 무기와 장비, 5,600발의 탄약을 소지하고 모슬포 주둔지를 빠져나가 대정지서를 공격하고 일부는 입산하였다. 경비대에서는 병사들이 10여명 씩, 혹은 몇 명씩 부대에서 탈출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6월 18일에는 박진경이 부하에게 사살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배경용·신상우 등이 체포되고, 군법회의를 거쳐 문상길과 손선호 하사가 처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통일정부의 건설을 바라는 여러 정치세력들의 반대 속에 1948년 5월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기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총선거에는 김구와 김규식을 비롯한 남북협상 참가 세력과 많은 중도계 인사들이 참가를 거부함으로써, 이승만과 한국민주당, 그리고 일부 중도세력만 출마하였다.

이승만은 선거 결과 가장 많은 당선자를 낸 무소속 중 우익 성향의 의원들을 끌어들여 국회에서 다수의 세력을 확보했다. 국회에서는 3권분립과 대통령중심제, 국회의 간접 선거에 의한 대통령 선출 등을 요지로 하는 헌법을 만들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마침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했다.

한편 1948년 7월 중순경부터 남한 전역에서 ‘지하선거’가 열렸다. 이는 북한의 정권 수립에 따른 것이었다. 4·3의 와중에 있던 제주도에서의 지하선거는 주로 백지에 이름을 쓰거나 손도장을 받아가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무장대의 강요에 마지못해 가명으로 이름을 쓰고 손도장을 누르는 경우가 많았다. 뒤에 이 일이 빌미가 되어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백지날인’한 게 죄가 되어 총살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1948년 8월 21일부터 해주에서 북한 정권의 수립을 위해 남한의 지하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자들이 모여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가 열렸다. 이 날 참석자 1,002명 중에는 김달삼을 비롯한 제주 대표 6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김달삼은 이 자리에서 토론자로 나서 4·3사건의 정당성과 성과를 정리한 연설을 하였다. 김달삼을 비롯한 무장대 지도부가 북한 정권을 지지하고 나섬으로써 제주도는 더욱 정부의 강경 진압 대상이 되었다.

무장대 총책이던 김달삼이 제주도를 떠남에 따라 무장대 조직은 제2대 무장대 사령관이 된 이덕구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상처받은 영혼을 향한 희망이 불어오는 곳
평화·상생·해원 바람의 진원지

제주4·3평화재단

사건으로 보는 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