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 집단희생과 사건 종결

‘초토화작전’실시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다. 그런데 10월 19일 제주에 파견하려던 여수의 14연대가 반기를 들고 일어남으로써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되었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에 앞서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하여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대대적인 강경 진압작전이 전개되었다.

이와 관련, 미군 정보보고서는 “9연대는 중산간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고 적고 있다. 1948년 10월 당시 9연대 군수참모를 지냈던 김정무는 중산간 마을에 불 지른 작전을 군 내부에서 ‘초토화작전’이라고 불렀다고 증언하였다.

“제주4·3사건을 완전히 진압해야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미국의 원조가 가능하다”고 생각한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군에 지시했다. 이 지시는 ‘초토화작전’이 미국과의 교감 속에 진행됐음을 암시하고 있다.

미·소 냉전이 심화되는 가운데 아시아에 공산주의로부터의 방벽을 구축하겠다는 미국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 송요찬 제9연대장의 포고령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의 포고문 본도의 치안을 파괴하고 양민의 안주를 위협하여 국권 침범을 기도하는 일부 불순분자에 대하여 군은 정부의 최고 지령을 봉지(奉持)하여 차등(此等) 매국적 행동에 단호 철추를 가하여 본도의 평화를 유지하며 민족의 영화와 안전의 대업을 수행할 임무를 가지고 군은 극렬자를 철저 숙청코자 하니 도민의 적극적이며 희생적인 협조를 요망하는 바이다. 군은 한라산 일대에 잠복하여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는 매국 극렬분자를 소탕하기 위하여 10월 20일 이후 군 행동 종료기간 중 전도 해안선부터 5㎞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此)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임. 단 특수한 용무로 산악지대 통행을 필요로 하는 자는 그 청원에 의하여 군 발행 특별통행증을 교부하여 그 안전을 보증함.
「조선일보」, 1948. 10. 2.


△ 송요찬 연대장의 포고문에 명기된 적성(敵性)지대

◇ 정부의 계엄령

제주도지구 계엄선포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서 제정한 제주도지구 계엄선포에 관한 건을 이에 공포한다.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단기 4281년 11월 17일
대통령령 제31호 제주도지구 계엄선포에 관한 건 제주도의 반란을 급속히 진정하기 위하여 동 지구를 합위(合圍)지경으로 정하고 본령(本令) 공포일로부터 계엄을 시행할 것을 선포한다. 계엄사령관은 제주도주둔 육군 제9연대장으로 한다.
「官報」 제14호, 1948. 11. 17.

◇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문

1948년 1월 21일 이승만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諭示文) 시정일반에 관한 유시의 건(대통령)=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拔根塞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며 지방 토색(討索)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
「국무회의록」, 1949. 1. 21.

집단 희생과‘죽음의 섬’

‘초토화작전’에 의해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5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참혹한 집단 살상이 행해졌다. 4·3사건 전 기간 동안의 희생자 수는 2만 5,000~3만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초토화작전’이 시작되기 전인 1948년 9월말까지의 사망자 수는 대략 1,000명 미만으로 알려져 있다.

토벌대는 무장대와 민중의 연계를 막기 위해 중산간마을 주민들을 해안마을로 강제 소개(疏開)시키고 100여 곳의 중산간 마을을 불 태웠다. 소개령이 내려졌는데도 병자·노인·어린이 등을 포함한 일부 주민들은 마을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나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이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은 자행되었으며 소개령을 전달하지도 않고 방화와 학살을 저지른 곳도 많았다. 일부 중산간마을에 소개령이 전달돼 해변마을로 소개해온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가족 중 한 명만 사라지면 ‘도피자 가족’이라 하여 총살했다(代殺). 이러한 소개작전은 주민들을 오히려 도피 입산하게 만들었다. 이는 수많은 주민 희생과 사태의 장기화를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무장대의 보복 습격도 끊이지 않았다. 1948년 11월 이후 무차별 토벌작전이 벌어진 이후에는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고 토벌대 편으로 기울었다고 판단한 일부 마을을 지목해 주민들을 무차별 살해했다. 구좌면 세화리, 표선면 성읍리, 남원면 남원리·위미리 등은 ‘토벌대 진영’이라 하여 무장대로부터 큰 피해를 당했다.

주로 군·경 주둔지인데다 이들 마을에서 ‘도피자 가족’ 총살이 벌어지는데 대한 보복이었다. 무장대 세력이 궤멸 상태에 놓인 이후에는 굶주림에 처한 잔여 무장대들이 식량을 약탈하러 마을에 들어갔다가 보초 서던 주민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1949년 4월 1일 미군 정보보고서에는 “1948년 한 해 동안 1만 5,000여 명의 주민이 희생되었다. 그 중 80%가 토벌군에 의해 사살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부터 1949년 봄까지 겨우 몇 달 사이에 군·경 토벌대의 진압작전과 무장대의 보복 살상으로 수만 명의 인명이 희생되었으며, 130여 마을이 소개령 등으로 초토화됨으로써 제주공동체는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

12월 말 진압부대가 9연대에서 2연대로 교체됐지만, 함병선 연대장의 2연대도 강경진압을 계속하였다. 군 수뇌부는 2연대의 강경작전을 위해 전투력 강화에 힘썼다. 우선 과격한 반공주의자인 서청 단원들을 군·경에 파견하였다. 2연대의 3개 대대 중 3대대는 많은 서청 단원들로 편성되었다. 토벌대는 재판 절차도 없이 주민들을 집단으로 사살하였다. 가장 인명 피해가 많았던 1949년 1월 17일 ‘북촌사건(1949년 1월 17일 육군 제2연대 3대대 병력이 북촌리 어귀에서 무장대의 기습으로 군인 2명이 전사한데 대한 보복으로 북촌마을 주민들을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켜 350여 명을 집단 총살한 사건)’도 2연대 3대대에 의해 집행되었다.

한라산 피난자의 복귀와 무장대 소멸

1949년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의 선무공작에 따라 많은 입산자들이 피신해 있던 은신처를 나와 삼삼오오 귀순하여 왔다. 귀순자들은 젊은 남자들은 물론이고, 여자·어린이·노인들도 제주읍내와 서귀포의 임시수용소에 가두어졌다. 선무작전이 4월까지 수행되면서 많은 사상자와 포로가 계속 속출 하였다. 당시 작전 과정에서 희생된 민간인과 자진 귀순하거나 체포되어 포로가 된 자를 합쳐 거의 1만여 명에 달하였다.

“내려오면 살려 준다”는 선무작전에 따라 백기를 들고 하산한 주민들은 제주읍내 주정공장 등에 갇혀 있다가, 일부는 석방되었으나 상당수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군 당국은 원래의 회유 방침을 무시하고 강경한 처리로 일관하였다. 형량도 죄명도 모른 채 형식적인 군법회의를 거쳐 1,650여 명의 귀순자들은 육지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1949년 6월 7일 무장대 총책 이덕구가 사살됐다. 무장대 세력이 이미 와해된 상태이긴 하지만, 이덕구는 김달삼에 이어 무장대의 상징적 존재였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주는 영향은 컸다. 이에 고무된 국방부는 제2연대의 활약으로 사살했다고 발표했다.

사실 이덕구는 경찰의 작전에 의해 사살된 것이다. 경찰은 이덕구의 사체를 나무 십자가에 묶어 하루 동안 제주경찰서 정문 앞에 전시했다가 화장 처리했다.

행방불명된 사람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또 다시 제주에 비극이 찾아왔다.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및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되어 처형되었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 되었다. 예비검속으로 인한 희생자와 형무소 재소자 희생자는 3,0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유족들은 아직도 그 시신을 대부분 찾지 못하고 있다.

제주에서도 예비검속이 실시되었다. 경찰 공문에 따르면, 1950년 8월 17일 당시 제주도내 4개 경찰서에 예비검속된 자의 수는 1,120명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7월 29일, 8월 4일, 8월 20일에 각각 서귀포, 제주항 앞 바다, 제주읍 비행장, 송악산 섯알오름 등지에서 집단적으로 수장되거나 총살·암매장되었다.

모슬포 양곡창고에 갇혀있던 250여 명의 검속자들은 8월 20일 밤중에 끌려나와 모슬포 섯알오름 기슭 탄약고 터에서 총살 암매장되었다. 그 뒤 1956년 3월 한림지서 예비검속 희생자 유족들이 61구의 시신을 수습하여 한림읍 금악리 ‘만벵듸 공동장지’에 안장하였다.

같은 해 5월에는 대정지역 유가족들이 132구의 유골을 수습하여 안덕면 사계리에 부지를 마련해 묘역을 조성했다. 이 묘역은 1960년 유족들이 성금을 모아서 비를 세우고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라고 이름을 붙였다.

제주경찰서에 수감돼 있던 예비검속자 수백 명이 산지항 앞 바다에서 수장되거나, 정뜨르비행장에 끌려가 총살 암매장되었다는 증언이 전해진다. 서귀포경찰서에도 솔동산 근처 창고에 수감되어 있던 약 250명의 검속자들이 두 차례에 걸쳐 계엄군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가서 희생되었다.

6·25전쟁 직후 4·3과 관련된 살상은 제주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이루어졌다. 사선을 뚫고 살아나 일반재판 및 군법회의를 거쳐 육지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수천 명의 제주출신 형무소 재소자들이 죽어갔다. 6·25전쟁 발발 당시 전국 형무소 재소자는 37,335명이었고, 이 중에 평택 이남의 형무소 재소자는 20,229명이었다.

제주에서 이송된 4·3 관련 재소자는 일반재판 수형인 200여 명과, 두 차례 군법회의 대상자 중에 만기 출소한 사람을 제외한 2,350여 명이 6·25전쟁 직후에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이들 2,500여 명 대부분은 제주로 돌아오지 못하고 행방불명되었다.

대전형무소에 있던 제주사람 300여 명은 7월 초에 충남 대덕군 산내면에서 집단희생되었다. 대전시 동구 낭월동 골령골에는 그때 시신이 아직도 수습되지 않고 땅 속에 묻혀있다.

대구형무소에 있던 제주출신 수형인 142명도 군·경에 인계되어 대구 달성군 가창골로 끌려가 총살되었다. 이들 형무소 재소자 총살은 정부 최고위층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다. 사형수가 아닌 재소자들을 총살한 것은 또 하나의 불법 학살이었다.

1947년 3·1사건과 뒤이은 총파업으로 상당수 제주도민은 피검되거나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물 막은 섬에서 쫓기는 자의 도피처로 떠오른 곳이 일본이었다. 또 1948년 4·3 발발 이후에도 감시의 눈을 피해 조그만 밀항선으로 섬을 떠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4·3 사건 발발 후 제주도 도령(道令)에 의해 전 지역과의 해상교통을 일체 차단하고 미군 함정을 동원해 해안을 봉쇄했다.

그 결과 해상교통이 단절되고 해군에 의한 공중정찰과 해안마을의 경비, 야간 통행금지, 여행증명제, 계엄령 선포, 경찰·경비대·우익청년단의 증강 등이 이뤄졌던 상황을 고려하면 제주도에서 출항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증언을 통해 이 시기에도 일본으로 밀항해 들어간 사람들이 다수 확인된다.

일제강점기 먹고 살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던 제주인들은 광복 이후 부푼 꿈을 안고 귀향했으나 4·3사건으로 생활이 불안해지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오사카 등지를 중심으로 모여 한을 품은 채 살아왔다. 이들 중 일부는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이어진 ‘북송(北送)’ 때 북한으로 가기도 했다. 이들은 고향 제주도에 다시 돌아오고 싶어도 이념과 분단의 장벽 때문에 눈앞의 바다를 건너지 못했다. 4·3으로 인한 운명적인 ‘디아스포라(Diaspora)’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7월 8일 전국적으로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제주도에서는 4·3의 마무리 토벌을 위해 주둔하던 해병대 신현준 사령관이 제주지구계엄사령관을 겸임하였다.

정부는 7월 16일 제주주정공장에 육군 제5훈련소를 설치해 신병 양성에 나섰다. 8월 3일 중고생으로 조직된 학도돌격대가 결성되었고, 이들을 비롯한 제주도 청년들 3,000명이 해병 3·4기로 지원 입대하였다. 제주 출신 해병들은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어 서울 탈환에 나섰고, 9월 27일 중앙청에 태극기를 올렸다.

1951년 3월 21일 기존의 대구 제1훈련소, 부산 제3훈련소 및 제주의 제5훈련소를 통합하여 육군 제1훈련소를 대정읍 상모리에 설치하였다. 이와 함께 미군 제5공군 군고문단이 주둔하게 되었다. 동시에 제주도위수지구사령부가 설치되어 제주지역의 경비, 육군의 질서 및 군기의 감시, 육군 소속 건축물 및 시설의 보호에 관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위수사령부는 제주도 일원의 경비를 담당하고 군사시설을 보호할 책임이 주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때까지도 남아있던 재산 무장대 토벌작전에 부분적으로 참여했다.

모슬포 육군 제1훈련소에서 양성된 병력은 50만 명에 이른다. 제1훈련소에도 수많은 제주 청년들이 입대하였다. 6·25전쟁 당시 육군과 해병대에 입대해 참전한 제주 청년들은 1만여 명에 달한다. 정부에서 ‘빨갱이섬’으로 낙인찍은 제주도가 거꾸로 북한의 침략을 막아내는 방패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

1952년 제주도경찰국은 ‘100전투경찰사령부’를 설치, 한라산 기슭 곳곳에서 무장대에 대한 토벌전을 벌였다. 1953년 1월 대유격전 특수부대인 무지개부대(부대장 박창암 소령)가 한라산 작전지역에 보강 투입되었다. 이때 재산 무장대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1957년 4월 2일 최후의 무장대원 오원권이 구좌면 송당지역에서 생포되면서 4·3은 종식되었다.

1954년 9월 21일 제주도경찰국장 신상묵은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을 해제, 전면 개방을 선언하였다. 지역주민들이 담당했던 마을성곽 보초 임무도 없어졌다. 소개되었던 중산간 마을에 대한 복구 및 이주·정착사업이 전개되었다.

상처받은 영혼을 향한 희망이 불어오는 곳
평화·상생·해원 바람의 진원지

제주4·3평화재단

사건으로 보는 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