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사건 피해와 족쇄

4‧3사건은 미군정기에 발생하여 우리나라 건국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한국 현대사에서 6‧25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사건이다.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사건으로 촉발되었던 4·3은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2만 5,000∼3만여 명의 인명 피해를 가져왔다. 가옥 4만여 채가 소실되었으며, 중산간 지역의 상당수 마을이 폐허로 변했다. 학교·면사무소 등 공공기관 건물이 불탔으며 각종 산업시설이 파괴되었다.

1954년 4‧3이 종료되면서 폐허가 된 마을의 복구와 정착사업이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4‧3이 제주공동체에 남긴 후유증은 쉽게 치유되지 않았다. 연좌제와 국가보안법의 족쇄가 유가족들을 얽어맸으며, 고문 피해로 인한 후유장애, 레드 콤플렉스 등 정신적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4‧3으로 인해 일본으로 피신한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했고, 수형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사람들은 공안기관의 감시에 시달렸다.

인명 피해 실태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약칭 : 4‧3위원회)는 2002년 처음으로 희생자 심사를 실시하여 2014년 5월 23일까지 희생자 14,231명과 유족 59,225명을 결정하였다.<표 1-1, 표 1-2, 표 1-3 참조>

여러 자료와 인구 변동 통계 등을 감안할 때, 4·3사건 인명 피해는 2만5,000~3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표 1-1> 4·3희생자·유족 결정현황 (단위 : 명)
<표 1-1> 4·3희생자·유족 결정현황
구분 희생자(명) 유족(명)
사망자 행방
불명자
후유
장애가
수형자
소계 14,311 10,249 3,583 233 246 59,599
인정 14,231 10,245 3,578 163 245 59,225
불인정 78 4 3 70 1 371
철회 2   2     3
<표 1-2> 성별 희생자 현황 (단위 : 명)
<표 1-2> 성별 희생자 현황
구분 사망자 행방
불명자
후유
장애가
수형자
소계 14,231 10,245 3,578 163 245
11,241 7,704 3,217 97 223
2,990 2,541 361 66 22
<표 1-3> 연령별 희생자 현황 (단위 : 명)
<표 1-3> 연령별 희생자 현황
구분 사망자 행방
불명자
후유
장애가
수형자
14,231 10,245 3,578 163 245
10세이하 770 679 73 18 -
11~20세 2,464 1,684 601 90 -
21~30세 5,461 3,277 2,027 46 91
31~40세 2,291 1,652 601 9 109
41~50세 1,383 1,190 181 - 29
51~60세 959 886 69 - 12
61~70세 557 541 16 - 4
70세이상 344 334 10 - -
연령미상 2 2 - - -

‘4‧3위원회’에서 심사하여 확정된 희생자의 가해별 통계는 토벌대 84.3%(12,000명), 무장대 12.3%(1,756명)이다. 특히 10대 이하 어린이 5.4%(770명)와 61세 이상 노인 6.3%(901명)이 전체 희생자의 11.7%를 차지하고 있고, 여성의 희생(21.1%, 2,990명)이 컸다는 점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과도한 진압작전이 전개됐음을 알 수 있다.

물적 피해와‘잃어버린 마을’

1948년 11월부터 9연대에 의해 이루어진 ‘초토화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고 많은 인명이 희생됐다.

4‧3으로 인한 물적 피해는 크게 마을공동체의 파괴 및 소실, 공공시설의 소각 피해, 산업부문의 피해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마을 피해는 300여 마을(자연촌, 洞)이었으며, 가옥 피해는 2만여 호(戶), 4만여 채이다. 이러한 수치는 1953년 제주도 당국이 공식 발표한 이재 호수 19,934호, 소실 동수 39,285동과도 일치한다.

4‧3 전개 과정에서 무장대와 군·경 토벌대와의 잦은 무력 충돌로 학교·관공서·경찰지서 등 공공시설이 소각·파괴되었다. 안덕면과 구좌면·중문면·조천면사무소가 소각되어 호적이 소실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각종 산업부문의 침체를 가져왔다. 농업·목축업·어업·나잠업·교역 등 각종 산업부문이 정체되어 주민 생활에 극심한 어려움을 주었다.

1949년 5월 현재 제주도 전체 인구의 28.8%가 실업 상태에 놓여 있을 정도로 제주도민의 생활상은 극도로 피폐했다.

1954년 9월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된 후 중산간마을 사람들 상당수는 원주지를 찾아 돌아갔다. 마을로 돌아간 주민들이 농토를 개간하고 새로 집을 지어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중산간지대는 ‘공비출몰 지역’이라 하여 자주 소개 대상이 되었고, 사건 과정에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희생된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어서 복귀를 원하지 않는 주민들도 많았다.

중산간마을에 살던 사람들 가운데 이미 사망한 사람도 많았고, 해안지대로 소개되어 정착한 주민들은 각지에 분산되었으므로, 다시 원주지 마을로 돌아가는 것이 원만하지 않았다.

4‧3사건 발생 15년이 지난 1962년까지 원주지로 복귀하지 않은 이재민은 7,704세대, 40,419명이었다.

정부와 제주도 당국의 적극적인 복구사업 실시에도 불구하고 전체 이재민의 절반 가까운 주민들이 원주지 복귀를 꺼렸다는 것이다. 오히려 정부의 복구사업에 의해 다른 지역에서 유입된 6‧25전쟁 피난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중산간지대 새로운 주민으로 자리 잡기도 하였다.

결국 4‧3 이후 오랜 기간에 걸친 난민정착 복구사업을 실시했으나 원주민들이 복귀하지 않아 폐허가 되어버린 마을들이 제주도내 각지에 남아있다. 4‧3으로 인해 소실된 마을, 곧 ‘잃어버린 마을’이라 할 수 있다. ‘잃어버린 마을’은 4‧3 때 집중적인 피해를 입은 마을 가운데 일부로서, 주민들이 돌아와 마을을 이전처럼 복원하지 못해 버려지거나 단순 농경지로 바뀌면서 더 이상 마을로 형성되지 않고 사라진 경우를 말한다.

연좌제의 족쇄

4‧3의 또 다른 아픔은 당시 사망·행방불명된 사람들의 무고한 희생이 당대에 그치지 않고 그 유가족들에게 대물림되었다는 것이다. 사태의 와중에서 군·경 토벌대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사법 처리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희생자 유가족들은 연좌제에 의해 감시당하고 사회 활동에 심한 제약을 받아왔다. 제주도민들과 희생자 유가족들은 법적 근거도 없는 연좌제로 인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누리지 못하고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우리나라에서 연좌제는 1894년 갑오개혁의 과정에서 제도적으로 철폐되었다. 그러나 연좌제는 일제 강점기 ‘요시찰 명부’를 통한 감시를 거쳐 광복 후 남북의 체제 대립 상황 속에서 ‘신원조회’를 통해 ‘특이자’를 걸러내는 사회적 관행으로 사라지지 않고 공공연히 실시되어 왔다.

4‧3사건의 경우 이미 1950년 8월에 보도연맹원 2만 7,000명과 5만여 명의 사건 관련자 가족들이 사찰 당국에 의해 별도로 관리 되었다.

1980년 8월에 이르러서야 국가보위비상대책 상임위원회는 연좌제를 폐지할 것을 발표했고, 1981년 3월 내무부는 후속 조치로 연좌제 폐지 지침을 발표했다.

1980년에 제정된 제5공화국 헌법(제12조 3항)과 제6공화국 헌법(제13조3항)에도 연좌제 금지를 명문화 했다.

제주도민 대다수는 4‧3으로 인한 연좌제 피해 경험을 갖고 있다. 2000년 8월 ‘제주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가 4‧3 유가족 75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전체의 86%가 연좌제 피해를 겪었다고 응답했다.

이들 유가족이 겪은 연좌제 피해는 다음과 같이 조사되었다(복수 응답).

피해사례
피해사례 비율(%)
공무원 임용시험 26
사관학교 등 각종 입학시험 23
국·공기업이나 사기업 취직 또는 승진 18
군·경찰의 승진 16
국내외 여행 및 출입국 과정 8
일상생활 감시 30
각종 신원조회 60

4‧3으로 인해 죽은 희생자들의 명예회복과 더불어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한 근본적인 인권보호·명예회복 또한 절실한 과제임을 연좌제 피해 실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상처받은 영혼을 향한 희망이 불어오는 곳
평화·상생·해원 바람의 진원지

제주4·3평화재단

사건으로 보는 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