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정방폭포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서귀포시 지역구분(읍면) - 지역구분(마을별) 서귀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GPS 위도 33.2448888888889, 경도 126.570972222222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〇 서귀리는 서귀면뿐만 아니라 산남 지방의 중심지였다. 면사무소와 남제주군청이 있었고 서귀포경찰서도 서귀리에 있었다. 때문에 토벌이 강화되면서 토벌대의 주요 거점지가 되었다. 서귀면사무소에 대대본부(2연대 1대대)가 설치되고, 군부대의 수용소는 수감자로 넘쳐났다. 특히 군부대 정보과에서 주민들을 고문 취조했던 농회창고는 악명이 높았으며, 정방폭포에서는 매일같이 주민들이 죽어나갔다.


정방폭포 ‘소남머리’는 정보과에서 취조 받은 주민들 중, 즉결처형 대상자들 대부분이 희생당한 곳이다. 흔히 정방폭포에서 희생당했다고 하는 희생자 대부분이 정방폭포 상당과 이어지는 이곳에서 총살당했다. ‘소남머리’는 동산에 소나무가 많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서귀중학교 학생이었던 송세종씨는 "그때 당시 어디 여자인지는 모르지만, 도망가다가 절벽으로 떨어졌는데 노송에 걸렸어. 그 여자가 임신을 하고 있었지. 떨어지니까 군인들이, 이건 하늘이 도운 사람이라 해가지고 살려줬어. 사람 두 번 죽인다는 것이 없으니까. 나도 직접 눈으로 본 건 아니지만" 이라고 회고했다. 서귀리 및 서귀면, 중문면 일대뿐만 아니라 남원면, 안덕면, 대정면, 표선면 주민에 이르기까지, 정방폭포 희생자들은 삼남 지역 전체에 이른다.

<출처: 제주4·3연구소, 「4·3유적 Ⅱ」(2008)>

 

 

 〇 정방폭포 희생자 수감처 ‘농회창고’

 서귀포시 서귀동 556-2번지에 위치했던 ‘농회창고’는 2연대 1대대 2과(정보과)에서 취조실 및 유치장으로 활용했던 곳이다. 당시 1대대 본부는 농회창고 옆 서귀면사무소에 주둔했다. 이곳에 주둔한 대대본부는 산남지방 토벌의 주력부대였다. 서귀면 및 중문면, 남원면 등 서귀포 인근 지역뿐만 아니라, 안덕면, 대정면, 표선면에 이르기까지 산남 지방 주민들 중 도피했다가 붙잡히거나 혐의자로 분류된 사람들은 대부분 관할 지서를 거쳐 농회창고로 이송됐다. 4·3 당시 제주도 곳곳 군부대 주둔지와 취조실은 도민들에게 악명을 떨쳤다. 이런 곳에 한 번 들어가면 혹독한 취조는 물론이고 대부분 즉결 처형자로 분류되어 살아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농회창고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선 죽음을 넘나드는 혹독한 구타와 고문이 자행됐다. 우선 몽둥이로 구타를 당한 후 취조에 들어갔으며, 취조는 옷을 벗겨 고문을 하면서 진행됐다. 특히 부녀자들이 연행될 때 옷을 벗겨 이송시켰다는 증언도 있다.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사람들 중 일부는 즉결처형자로 분류되어 곧바로 정방폭포 '소남머리'에서 총살당했고, 일부는 재판에 넘겨져 육지형무소로 이송되기도 했다. 현재 창고건물은 헐리고 송산동사무소가 들어서 있다.

 

당시 서귀면에는 농회창고 이외에 단추공장(서귀동 674-1번지) 및 인근 절간창고, 감자창고(서귀동 738-2번지) 등이 토벌대에 연행된 산남지역 주민들의 수감처로 사용됐다.

<출처: 제주4·3연구소, 「4·3유적 Ⅱ」(2008)>

 

 

〇 정방폭포 주요 사건

 

1. 서귀면 주민 희생사건

 

① 서귀면 서호리 주민 희생사건

11월 10일 서호리 주민 김일화(金日化, 59)는 고근산 옆 메밀밭에서 일하다 토벌대에게 잡혀 정방폭포 인근에서 총살됐다. 김일화의 유족을 비롯해 많은 주민들은 희생자들이 학살당할 때 마을의 소들이 일제히 구슬피 울었던 기이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다(김만오, 김일화의 손자 김두수 증언)

 

<출처 :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4(1998)>

 

② 서귀면 서홍리 주민 희생사건

1948년 11월 7일 군인들은 서귀포를 습격한 무장대를 쫓아 서홍리 입구까지 갔으나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일단 철수했다. 그러나 군인들은 주둔지인 모슬포로 돌아가지 않고 서귀국교에 임시 머물면서 연일 토벌전에 나섰다. 이날 이후 서홍리 주민들은 숨는 것 말고는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다. 군인들은 매일 마을을 덮쳤고 주민들은 숲으로 피하거나 일부는 아예 산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잡힌 주민 고찬식(高贊植, 27)과 변우중(邊禹重, 23)이 11월 11일 서귀면 속칭 ‘소남머리’로 끌려가 총살됐다. 이들의 희생에 대해서는 삼매봉 벌목작업에 동원됐다가 총살됐다는 증언이 있다(변창호 증언). 그런데 왜 위험을 무릅쓰고 순순히 출역명령에 응했을까 의문이 든다. 이에 대해 고찬식의 아들 고윤배 씨는 “아버지는 마을이 위험해지자 서귀포 고모할머니댁으로 갔는데 경찰 수색 때 잡혀 이튿날 총살됐다.고 말했다”(고윤배 증언, 53세, 서홍동). 아마도 삼매봉 벌목작업은 서귀포 피습 이전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그리고 피습사건이 나자 서홍리 출신이란 점 때문에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출처 :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4(1998)>

 

 

③ 서귀면 서귀리 주민 희생사건

서귀면 서귀리는 한라산 남쪽 지역의 행정 중심지였다. 서귀면사무소는 물론 남제주군청도 서귀리에 있었다. 또한 토벌대 진영이기도 했다. 서귀포경찰서 소재지였고, 서귀국민학교에는 군인들이 주둔했다. 서북청년단이나 철도경찰도 한 자리씩 차지해 진을 치고 있었다.

 

초토화작전이 벌어지자 서귀리 주민들은 중산간마을에서처럼 산으로 도망치지도 못하고 토벌대 틈바구니에 끼어 숨막히는 삶을 살았다. 1948년 11월 7일 무장대가 서귀포를 습격한 사건은 토벌대의 학살극을 부채질했다. 토벌대는 관내 중산간마을 주민들을 대거 끌고 와 총살했는데 희생자 중에는 서귀리 주민도 포함됐다. 

 

총살 집행은 군인들이 했지만 서북청년단이 늘 앞잡이 노릇을 했다. 1948년 12월 2일 서북청년단은 이일백(李日白, 48) 강인숙(姜仁淑, 여, 39) 강진옥(姜進玉, 38) 송두윤(宋斗潤, 31) 등을 끌고가 정방폭포 부근에서 총살했다. 이중 강인숙은 11월 11일 희생된 김병수의 어머니였다.

 

유족들은 한 서청단원의 이름을 기억했다. 희생자 이일백의 아내는 1960년 4․19직후 국회에서 진상조사를 벌일 때 ‘12월 1일 밤 서청단원 전복선(全福先)이 끌고 간 후 이튿날 아침 정방폭포 부근에서 총살했다. 학살한 이유를 밝혀 달라.’고 청원했다. 희생자 강인숙의 아들도 “밤에 막 잠자리에 들었을 때 서북청년단 전복선이 ‘아줌마, 나와 보라.’며 끌고 갔다.”면서 “어머니 시신을 찾으러 가보니 50여 구의 시신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고 말했다. (김광수, 제주시 연동)

 

한 증언자는 “전복선은 키가 작아 별명이 ‘꼬마’였는데, ‘이북에서 빨갱이들에게 당한 것만큼 보복하겠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녔다.”고 말했다(김영옥). 한번 서청의 눈밖에 난 사람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다. 한 유족은 이렇게 증언했다.

 

12월 1일 밤 잠자다 아버지(강진옥)와 함께 끌려갔습니다. 군인들은 아무런 취조도 없이 무조건 때렸습니다. 아버지는 건강한 몸이었지만 곧 운신조차 못할 지경이 됐습니다. 아버지는 ‘아무래도 저들이 우릴 죽일 작정인 것같다. 모든 걸 하늘에 맡기자.’고 했습니다. 난 지금도 아버지가 죽임을 당한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양복점을 했습니다. 서북청년단원들이 옷을 맞춰 입고도 돈을 주지 않자 이를 재촉한 적이 있는데 이에 앙심을 품은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도 학련(學聯)에게 주목을 받아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도망쳤습니다. 그후 어머니(金甲仙, 34)마저 토벌대에게 총살됐습니다.(강봉주, 제주시 일도2동)

 

1949년 2연대가 주둔하게 되면서부터 서청의 위세가 더욱 드세졌다. 2연대에는 서북청년단으로만 구성된 특별중대가 있을 정도로 2연대와 서청은 밀접한 관계였다. 서청의 횡포가 극심해 지면서 제주 출신 경찰들조차 죽을 뻔한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현직 경찰 간부가 무고 한마디로 죽을 고비에 이르고 면장이 줄줄이 희생되는 상황이었다. 이러니 일반 주민들에게는 말단 군인이나 일개 서청 단원도 무소불위의 염라대왕 같은 존재였다. 이미 사태가 완화돼 무장대와의 충돌 사건이 전혀 발생하지 않을 때에도 토벌대는 불가항력의 주민들을 처형했다. 주로 재력 있는 사람들이 금품을 갈취하려는 서북청년단에게 끌려가 희생됐다.

 

<출처 :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4(1998)>

 

 

2. 중문면 주민 희생사건

 

① 중문면 도순리 주민 희생사건

1948년 11월 15일 중문면 도순리에 토벌대가 들이닥쳤다. 토벌대는 주민들을 모두 도순국민학교에 집결시킨 가운데 몇몇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서시평(徐時平, 47) 서시옥(徐時玉, 43) 이사길(李巳吉, 42) 이정흥(李丁興, 41) 김욱생(金旭生, 33) 윤두일(尹斗逸, 33) 등이 호명됐고 이들은 서귀포로 끌려가 총살됐다. 당시를 겪었던 주민들은 희생자 대부분이 유지급에 속하는 인물들이었다고 기억했다. 이들의 죽음으로 마을은 발칵 뒤집혔고 순식간에 공포 분위기에 빠졌다.

 

일주도로변에 위치한, 약 180가호의 작은 마을이었던 도순리에서 입산자로는 이만흥(李晩興, 23)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만흥은 서인부(徐仁富, 40)와 함께 마을에서 단 두 명뿐인 민족청년단 멤버였다. 이들 중 서인부는 행방이 묘연했고, 이만흥은 입산해 무장대로 활동하고 있었다. 아무튼 11월 15일 총살 사건이 벌어지자, 일부 주민들 사이에서는 이만흥을 원망하는 여론이 급속히 형성됐다. 이만흥 때문에 마을이 경찰의 주목을 받아 희생자가 생겨났다는 논리가 퍼진 것이다. 급기야 주민들은 이만흥을 잡아 경찰에 넘겼다. 그러자 11월 17일 즉각 무장대가 마을에 내려와 임대성(任大成, 26)을 살해했다. 임남용 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11월 15일 희생자 중 외삼촌(이정흥)도 포함됐습니다만 그는 사상과는 무관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외삼촌은 입산한 이만흥과 6촌간이었지요. 어머니를 비롯해 외가쪽 어른들은 이만흥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 나게 됐다며 밤에 그가 혼자 마을에 내려왔을 때 붙잡아 경찰에 넘겼습니다. 그러자 곧 폭도들이 보복하러 내려와 우리 집안 종손이자 당시 마을 서기이던 임대성을 살해했습니다. 폭도들이 본래 나를 노렸으나 오인해 그를 살해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이만흥을 경찰에 넘기는데 관여했기 때문이지요. 이웃마을에는 나를 처단했다는 벽보가 붙기도 했다 합니다.(임남용, 도순동)

 

산쪽에 협력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무장대원을 잡아 넘기기까지 했지만 한번 시작된 토벌대의 총살극은 그치지 않았다.(인근 마을의 경우 대개 중문리로 끌려갔는데 어쩐 일인지 도순리 주민들은 주로 서귀포로 끌려가 정방폭포 부근에서 총살됐다)

 

11월 21일에는 임남진(任南辰, 46) 이원려(李元呂, 21, 아명 이기우)가 끌려가 총살됐다. 이중 이원려는 11월 15일 희생된 이사길의 아들이었다. 부자가 6일 차이로 같은 장소에서 희생된 것이다.

 

12월 1일에는 이용수(李鏞洙, 53) 한봉옥(韓鳳玉, 48) 조화옥(趙化玉, 32) 백문관(白文官, 28) 임대협(任大協, 26) 김성두(金性斗, 25) 김팔만(金八萬, 25) 한대효(韓大孝, 24) 등이 대거 서귀포로 끌려가 집단총살됐다. 이어 12월 4일 서평윤(徐平尹, 28) 이두구(李斗球, 20)가, 12월 8일에는 서군선(徐君善, 46) 이진생(李辰生, 26)이 역시 서귀포로 끌려가 희생됐다.

 

이쯤 되니 주민들은 누구도 내일의 삶을 장담하지 못했다. ‘아무개도 잡혀갔다더라’는 소문이 끊이지 않는 숨막히는 삶이었다. 다른 마을과 마찬가지로 토벌대가 주민을 끌고 가는 근거는 ‘무장대 지원 혐의자 명단’이었다. 어느 마을이나 ‘백지날인’과 ‘왓샤시위’, 그리고 도로차단과 전주절단 사건에 자발적이든 무장대의 강요에 의한 것이든 많은 주민들이 연루돼 있었다. 특히 도순리에서는 1948년 10월 1일 무장대가 마을에 주둔한 응원경찰을 습격한 사건이 벌어져 토벌대의 주목을 받아 오던 터였다. 그렇다고 토벌대가 정확한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토벌대는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을 받거나 때론 함정을 파기도 했다. 한 증언자는 “토벌대가 ‘자수하라’고 할 때 자수했던 사람들이 끌려가 죽었다.”고 말했다(서인수, 도순동). 이만흥을 제외하고 도순리에서는 도피한 사람도 없었다. 희생자 모두 자신의 집에 있다가 끌려가 수난을 당했다.

<출처 :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4(1998)>

 

 

② 중문면 대포리 주민 희생사건

약 350호 규모의 중문면 대포리는 중산간마을이 아닌 까닭에 토벌대의 소개령이나 마을 방화가 없었다. 그러나 초토화작전의 광풍이 완전히 비껴 가지는 않았다. 

 

본격적인 희생은 11월 중순께부터 시작된 초토화작전 기간 발생했다. 12월 15일 마을에 들이닥친 토벌대는 주민 임기방(林基邦, 29) 정복선(鄭福善, 28) 김서운(金瑞雲, 22) 원문구(元文玖, 20) 강문호(姜文鎬, 19) 이동훈(李東勳, 19) 등을 서귀포로 끌고 가 정방폭포 부근에서 집단학살했다.

<출처 :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4(1998)>

 

3. 남원면 주민 희생사건

 

① 남원면 태흥리 주민 희생사건(무장대 남원리 습격사건에 대한 보복학살)

태흥리는 무장대 근거지와 거리가 먼 해변마을인데다 이웃마을 남원리가 토벌대 주둔지여서 한동안 평온함을 유지했다. 그러나 초토화작전의 광풍은 어김없이 몰아쳤다. 사태가 본격적으로 악화된 것은 11월에 접어들면서부터이다. 다른 마을들처럼 단기간에 수십 명씩 집단 희생되는 경우는 적었지만, 주민들은 토벌대와 무장대 사이에 끼어 초토화작전 기간 내내 참으로 길고도 지루한 악몽의 터널을 지나왔다. 11월 8일 토벌대가 태흥1구를 덮치자, 이틀 뒤인 10일에는 무장대가 태흥1구를 습격해 우익인사를 살해했다. 17일에는 다시 토벌대가 태흥2구에 올라와 일본으로 도피한 청년들의 집을 불지르고, 주민을 총살했다. 다음은 무장대 차례. 23일에는 무장대가 태흥2구에서 보초를 서던 주민들을 살해했다. 

 

11월 28일, 무장대는 경찰지서 소재지인 남원리와 위미리를 대대적으로 공격한 뒤, 토벌대의 지원을 차단하기 위해 태흥리를 습격했다. 무장대가 물러가자 토벌대의 보복 총살극이 곧바로 이어졌다. 당일 토벌대는 태흥리 주민들을 붙잡아 남원지서로 끌고 가 총살했으며, 일부 주민은 서귀포로 연행된 뒤, 정방폭포 부근에서 총살당했다. 

 

경찰들은 ‘태흥1구는 폭도 마을이다’면서 마구잡이로 끌고 갔습니다. 내게는 ‘네 친척 중에 폭도가 있는데 언제 연락했느냐’고 다그쳤습니다. 그때 지서 마당에 쳐진 천막에는 태흥1구 사람만 약 30명이 갇혀 있었습니다. 토벌대는 우릴 취조하면서 일부는 풀어 주고, 일부는 서귀포경찰서로 넘겨 지서에는 나이 어린 나와 노인 2명만 남게 됐습니다. 그런데 내가 끌려간지 사흘 만인 11월 28일에 남원리가 피습을 받자 풀어 줬던 사람들을 다시 끌고 와 서귀포 정방폭포 부근에서 학살했습니다. 그리고 앞서 서귀포경찰서로 넘겨진 사람들은 육지형무소로 간 후 행방불명됐습니다.(양경자)

<출처 :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4(1998)>

 

 

② 남원면 신흥리 주민 희생사건(홀치기 사건)

남원면 신흥리에 대한 소개령은 1948년 12월 14일께 내려졌다. 해변마을인 신흥1구(알동네, 방구동)는 해당되지 않았지만 약 3Km 북쪽에 위치한 신흥2구(여우내, 고수동)는 소개 대상 지역이었다. 2구 주민들은 주로 1구로 소개했다. 연고를 찾아 이웃마을인 태흥리나 표선면 토산리로 소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소개는 토벌대의 총살극 없이 무사히 진행됐다. 마을 방화도 없었다. ‘폭도들이 사용할지 모르니 지붕을 모두 뜯어내라’는 토벌대의 명령에 따라 모든 가옥의 지붕이 없어진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그런데 소개한지 불과 사나흘 지났을 때인 12월 18일, 신흥1구에 들이닥친 토벌대가 마을 주민들을 집결시켰다. 주민들 대부분이 모이자 토벌대는 약 40여명을 호명했다. 불려나온 청장년들은 일단 남원지서에 수감됐다. 이튿날에는 약 30여명의 주민이 스스로 남원지서를 찾아 ‘자수’했다. 그러나 이들은 앞서 호명돼 간 사람들과 함께 곧 처형됐다. 

 

신흥리에서는 불과 며칠 사이에 70명 가량이 희생된 이 사건을 ‘홀치기 사건’이라고 부른다. 바늘이 여러개 매달린 낚싯줄을 고기가 지날 만한 곳에 드리웠다가 확 잡아채면 낚시바늘이 여기저기에 꽂힌 고기들이 올라온다. 이런 원시적 낚시법을 ‘홀치기 낚시’라고 하는데 갑작스런 집단희생을 이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주민들은 왜 ‘홀치기’ 당했으며, 이 사건이 갖는 시기적 의미는 무엇인가. 우선 주민 김일천 옹으로부터 그날의 상황을 들어보자.

 

그 즈음은 토벌대의 명령에 따라 민보단을 편성해 마을 보초를 설 때입니다. 하루는 민보단 조직 개편을 한다며 모이라기에 가 봤지요. 1구 주민은 물론 소개해 온 2구 사람들까지 모두 모였습니다. 주민들이 집결하자 토벌대가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호명을 다 끝날 때까지 김철홍(金哲洪)을 비롯한 두 명은 나타나지 않았어요. 가족들은 ‘몸이 아파 집에 남아 있다’고 했지만 토벌대는 직접 그들을 끌고 와 우리가 보는 앞에서 총살했습니다. 모두들 기겁을 했지요. 아무튼 이날 약 40여명이 호명돼 남원지서로 끌려갔습니다.(김일천, 신흥1리)

 

청장년들이 대거 끌려가자 마을에선 난리가 났다. 일단 남원지서로 찾아가 사태 경위를 파악하는 게 급선무였다. 김일천 옹은 당시 민보단 소대장이었던 관계로 이 일을 떠맡았다.

 

끌려간 사람들은 그냥 지서 마당에 모여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가둬 둘 유치장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요. 뜻만 있으면 도망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나는 지서 차석(次席)에게 ‘큰 잘못이 없다면 어린 사람들만이라도 보내 달라.’고 했지만 ‘일단 취조는 해봐야 하지 않겠소’라는 차석의 대답에 더 이상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남원지서를 향해 가는 동네 사람 30여명을 만났습니다. 어쩐 일이냐고 물으니 ‘과거에 조금이라도 잘못한 게 있다면 자수하라. 그러면 모든 걸 용서하고 양민임을 인정해 주겠다.’고 했다는 겁니다.

 

한편 신흥리에서 주민들이 끌려가던 바로 그 시각, 태흥리에서도 신흥리 소개민들에 대해 같은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태흥리로 소개했던 김만권 씨는 “토벌대는 신흥리에서 소개간 사람들을 태흥2구 사무소 앞에 모아 놓고 몇몇 사람들을 호명해 끌고 갔다.”면서 “호명한 것으로 봐서 무슨 ‘명단’이 있었던 것같다.”고 말했다. 아무튼 이때 남원지서로 끌려간 신흥리 주민들은 12월 20일부터 불과 며칠 동안에 남원지서 인근 밭이나, 혹은 서귀포경찰서로 넘겨진 후 정방폭포 부근에서 집단총살됐다.

 

그러면 이쯤에서 앞에서 제기했던 의문으로 돌아가 보자. 왜 한동안 무사했던 주민들이 집단총살됐으며, 하필 이때 희생됐는가.

 

신흥리민이 갑자기 집단학살된 이 사건은 무엇보다도 그 시기의 토벌 전략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주민들이 집결했다가 ‘홀치기’ 당했다는 12월 18일은 9연대의 토벌작전이 극에 달했을 때이다. 이즈음 토벌대는 많은 사람들을 총살하는 ‘전과(戰果)’를 올렸다. 그러나 구체적 상황을 들여다보면, 무장대와 교전을 벌인 것이라기보다는 주로 중산간을 휩쓸고 다니다 은신해 있던 주민들을 총살하거나 해변마을에서 멀쩡히 살고 있는 주민들을 향해 학살극을 벌인 것이었다.

 

미군 비밀보고서는 이즈음의 경비대 작전을 ‘성공적’이라고 평가하면서 그 이유로 “수준 높은 작전을 펼치려는 욕망과 제2연대 성공자들의 훌륭한 업적에 부응하려는 욕망 때문이다”(주한미군사령부, 「G-2 일일보고서」, 1948. 12. 17)고 분석했다. 즉 제주 주둔 9연대는 12월말로 대전의 2연대와 맞바꿔 교체키로 돼 있었다. 특히 ‘홀치기 사건’이 벌어진 다음날인 12월 19일은 9연대 선발대가 2연대와 교체하기 위해 대전에 도착한 날이다.(주한미군사령부, 「G-2 일일보고서」, 1948. 12. 20) 이에 9연대 수뇌부는 ‘여순사건’을 진압한 2연대 보다 높은 성과를 올리기 위해 적극적인 토벌전을 벌였다는 것이다. 다음의 보고서도 그 시기 토벌전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제9연대 제2대대는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군사작전에서 민간인과 경찰의 도움을 받아 12월 18일에 130명을 죽이고 50명을 체포했다. 소총 1정, 칼 40자루, 창 32자루를 노획했다.(주한미군사령부, 「G-2 일일보고서」, 1948. 12. 24)

 

무려 180명을 총살하거나 체포하는 전과를 올렸으면서 노획한 소총이 단 1정이라는 사실은 이 ‘마지막 군사작전’의 성격이 어떤 것이었나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무장대를 지원한 사람들의 명단이 드러났다거나 남원리 피습에 대해 응징했다는 것은 겉으로 내세운 총살 명분일 뿐이고, 실제는 전과를 올리기 위해 머릿수를 채운 것이었다. 이는 같은 시기에 조천면 주민들이 ‘자수공작’에 걸려 박성내에서 집단학살된 것이나(12월 21일, 95명 희생), 이웃마을 토산리 주민들이 12월 19일 18세부터 40세까지 무차별 학살된 사건(85명 희생)과 같은 성격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뒤늦게 소개령을 내려 주민들이 안심하고 모두 소개한 직후 잡아다 총살한 것도 더 많은 전과를 올리려는 전략의 일환으로 보인다.

<출처 :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4(1998)>

 

 

③ 남원면 한남리 주민 희생사건: 고태춘 일가족 4명 희생사건

고태춘 씨(32)는 우리 일가인데 ‘떡 구덕을 지키라고 하면 일년이 가도 떡 하나 축내지 않을 사람’이라는 말을 듣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내(정수철)와 두 딸(고금자, 고영자)을 데리고 피신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군인들에게 발각됐습니다. 부부가 딸 한 명씩 업고 도망쳤지만 총에 맞아 붙잡혔어요. 이들 가족은 서귀포로 넘겨져 정방폭포에서 학살됐습니다. 어른들이 죽은 것도 기막힌 데 특히 어린것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죽였는지 모르겠습니다.(고병순 증언)

<출처 :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4(1998)>

 

 

4. 안덕면 주민 희생사건

 

① 안덕면 동광리, 감산리, 상창리, 광평리 주민 희생사건

1948년 12월 18일은 전도적으로 대토벌이 벌어진 날이다. 그런데 이때 토벌대는 ‘전과(戰果)’를 과시하려 함인지 이전처럼 현장에서 즉결총살하지 않고 주둔지로 끌고 가 처형했다. 동광리는 한림, 중문, 대정면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였던 탓에 각 지역의 토벌대가 경쟁적으로 올라왔다. 한림 주둔 토벌대에게 붙잡힌 사람들은 한림국민학교로, 중문 주둔군에게 붙잡히면 정방폭포에서, 대정 주둔군에게 걸리면 모슬봉으로 끌려가 각각 총살됐다.

 

마을 북쪽 도너리오름(道乙岳) 기슭에 위치한 ‘큰넓궤’는 가장 많은 주민들이 은신했던 곳이다. 그러나 연일 계속되는 토벌에 굴은 곧 발각됐고, 더 깊은 산중으로 피신하는 주민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주민들이 밤새워 오른 곳은 영실 부근 ‘볼레오름’이었다. 그러나 한겨울 쌓인 눈 위에 난 발자국 때문에 곧 토벌대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김복남 씨는 9살 때 한쪽 눈을 실명했다. 김 씨는 당시 겪었던 일들을 이렇게 증언했다.

 

큰넓궤에서 나왔을 때 누군가 ‘영실(靈室)로 가면 안전하다’고 일러줬습니다. 그날 밤 7시께 출발해 영실에 도착하니 이튿날 오전 8시가 됐습니다. 짚신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얼어붙은 눈길을 걷느라 버선이 다 헤져 발목만 남았더군요. 부근에는 산사람들의 ‘철공소’가 있었는데 칼과 창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토벌대가 들이닥쳤어요. 이때 산사람들이 많이 죽거나 잡혔습니다. 군인들은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숨어 있는 우리에게 ‘왜 이런 데서 고생하느냐. 내려가자’고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그 말에 ‘이젠 살았구나’ 생각했지요. 일단 중문리로 끌려 내려와 하루를 지내고 이튿날 서귀포로 보내져 정방폭포 부근에 갇혔습니다. 거기서는 어른들 머리가 터질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대했습니다. 난 겁에 질려 막 울었습니다. 그러자 한 군인이 시끄럽다며 개머리 판을 휘둘렀는데 그만 왼쪽 눈을 맞아 실명했습니다. 잡힌지 3일째 되던 날 군인들은 학교 운동장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아이들을 살릴 사람은 손들라’고 했습니다. 죽어도 같이 죽겠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손을 들었습니다. 그날 다른 마을 주민들까지 포함해 86명이 한꺼번에 희생됐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세 살 위인 누나와 함께 서귀포 거리를 울며 헤매던 기억이 나는군요.(김복남, 표선면 하천리)

 

1949년 1월 22일 정방폭포 부근에서 벌어진 이 집단총살에서 동광리 주민으로는  강군석(40)·오충정(여, 39) 부부와 딸 강순복(여, 17), 강순열(여, 8), 고군조(37)·임부덕(여, 27) 부부와 딸 2명, 김봉은(57)·이영군(여, 51) 부부와 아들 김여옥(34), 며느리 임정욱(여, 29), 손자 김석진(3), 임인자(여, 3), 김유생(여, 27)과 시부모 김경호(여, 67), 장정숙(여, 59), 임원현(62)·김무생(여, 57) 부부와 강익순(여, 25)과 아들 고○○(3), 임해생(여, 47)과 아들 부태근(3), 이방근(58)·김효생(여, 49) 부부, 김찬(51)·한지생(여, 60) 부부, 김두병(41)·김여산(52) 부부, 김이수(59) 박순여(여 57) 부부, 강순여(여, 21), 변봉어(여, 59), 양창인(여, 25), 이성보(李成寶, 여, 72), 조인화(여, 51) 등이 희생됐다.

 

당일 희생자 중에는 산에서 숨어지내다 토벌대에 붙잡힌 안덕면 감산리, 상창리, 광평리 주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상창리 희생자는 강봉향(여, 48), 강순자(여, 8), 강흥필의 아들(3), 김원수(여, 22), 김학수(여, 26), 오미향(여, 50), 오여붕(52), 오창연(42), 진기향(여, 40), 오두석(17), 오재기(46), 감산리 희생자는 강원귀(46), 오응호(71), 광평리 희생자는 이병출(43), 이영규(37), 이영수(38) 등이다. 

 

상창리 강병생 씨는 3살 때 사태를 겪으며, 이날 어머니와 남동생을 잃고 고아가 됐다. 그후 강 씨는 역시 토벌대에게 아버지를 잃고 고아가 된 한마을 사람에게 시집 가 새출발을 했으나 4․3의 어두운 그림자는 내내 그녀를 따라다녔다. 강 씨는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이렇게 말했다.

 

어렸을 때 일이라 기억도 없습니다. 날 키워 준 고모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가 행방불명되자 어머니와 오빠(당시 6살) 그리고 남동생(2살) 등 네식구가 소개지인 감산리 향사에 갇혔다고 합니다. 그런데 폭도들이 향사를 습격해 우릴 몰고 갔습니다. 우린 결국 산에서 토벌대에게 잡혀 내려왔지요. 어머니(김학수)는 1949년 1월 22일 정방폭포에서 총살됐습니다. 젖먹이 남동생도 어머니 품에서 같이 죽었습니다. 그때 토벌대는 어린아이들을 풀어 주면서 몸에 글씨를 써서 감산리에 퍼 놓고 갔다 합니다. 표식을 보고 친척들이 알아서 찾아가라는 것이지요. 나와 오빠는 고모 댁에 의탁해 살았으나 고모마저 돌아가시자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며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그후 자라 결혼했는데 남편도 고아였습니다. 남편이 4살 때 시아버지(1948년 11월 13일 희생된 문규병)가 돌아가시고 시어머니 되는 분이 재가해 버리자 어렵게 살고 있었지요. 그런데 남편은 17살 때 4․3당시 가매장했던 시아버지의 묘를 옮기면서 큰 충격을 받은 모양입니다. 이빨은 물론이고 하이칼라한 머리카락도 온전했는데 가슴에 총알이 박혀 있었다고 하더군요. 남편은 자꾸 그 총알 이야기를 하며 술을 마셨습니다. 세상을 비관하며 하루에 한 되도 넘는 술을 폭음하다 38살 되는 해에 죽었습니다. 그 동안 혼자 살아온 삶은 너무도 서러웠습니다. 딸은 내게 시대를 잘못 만난 탓이라고 합니다. 우리 자식들 세대에는 절대 이런 일이 있어선 안됩니다.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강병생 증언)

 

1949년 1월 27일 정방폭포에서 희생된 대정면 영락리 희생자들과 달리, 안덕면 관내 희생자 유족들은 1년이나 지난 후에야 총살 현장에 갈 수 있었다. 시신은 이미 썩어 구별할 수 없었다. 또 정방폭포 부근에서의 총살극은 이날 외에도 여러 차례 벌어졌기 때문에 엄청나게 쌓여 있는 시신 중에서 자기 가족을 찾기란 불가능했다.

 

시신을 찾지 못한 채 비석만 세우는 사람도 있었고 일부 유족은 ‘헛묘’를 만들기도 했다. 동광리 6거리에 어머니와 아내 등 가족과 친척 희생자 9명의 헛묘 7기를 조성(2기는 부부 합묘)한 임문숙 씨는 지난 가을에도 무덤에 벌초를 했다.

 

칠성판까지 마련해 현장에 갔지만 뼈들이 엉켜 도저히 수습할 형편이 못됐습니다. 그래서 심방을 빌어 혼(魂)을 불러다 헛묘를 만들어 벌초도 합니다. 섭섭해서 만들었지만 허망한 일이지요.(임문숙 증언)

<출처 :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4(1998)>

 

5. 대정면 주민 희생사건

 

① 대정면 영락리, 동일리, 하모리 주민 희생사건

대정면 영락리 상동 주민인 김시화(43)를 비롯해 송군옥(38), 송대언(21) 등은 소개 직후 토벌대에게 끌려가 한달 가량 수감됐다가 1949년 1월 27일 서귀포 정방폭포 부근에서 집단 총살당했다. 김시화의 아들은 중학교 1학년 때 겪었던 아픈 기억들을 이렇게 증언했다.

 

소개 오자마자 아버지(임우길)가 먼저 끌려갔습니다. 그 사이 어머니(김시화)마저 무릉지서로 끌려갔어요.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여동생이 ‘어머니가 아기를 업은 채 끌려갔다’고 하더군요. 무릉지서 창고에는 수십 명이 갇혀 있었습니다. 그 안에 있던 신도리 사람들이 총살된지 2~3일 후 어머니도 아기와 함께 총살됐습니다. 무릉지서에서는 ‘보기 싫으니 얼른 시신을 치우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모부와 같이 가서 시신을 모셔 왔지요. 당시 15살이던 나는 6남매 중 장남인데 막내가 어머니 등에 업힌 채 총살당하니 5남매만 남게 됐습니다. 우리는 친척집에 한 명씩 뿔뿔이 흩어져 살았습니다. 학교에 다니며 밭일 한번 안했던 내가 그후에 살았던 삶은 정말로 힘들었습니다. 한편 동네 어른들 말씀에 의하면, 당시 무릉지서 주임은 키가 큰 서북청년단 출신인데 그는 ‘부모가 없는데 애들을 살려 봤자 고생뿐이니 총살하자’고 했답니다. 그러나 제주 출신인 차석 강아무개씨가 극구 말려 총살을 모면했다는 겁니다. 어른들은 ‘네가 커서라도 공을 잊어선 안된다’고 했지만 이름도 고향도 정확히 몰라 아직껏 찾아보지 못했습니다.(김인화 증언)

 

4․3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으며 아픈 기억들을 오래도록 남겼다. 1949년 1월 27일 정방폭포에서 희생된 사람 중 한 명인 송군옥의 아내는 남편이 죽은 후 눈이 멀었다. 주민 백문수 씨는 어린 손녀가 할머니의 지팡이 노릇을 하며 길을 지나던 모습을 이렇게 증언했다.

 

당국에서는 희생자들이 죽은 지 몇 개월이 지난 후에야 시신을 찾아가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송군옥 씨의 아내는 정방폭포 부근으로 가서 시신을 찾아 헤맸습니다. 그러나 여름철이라 이미 시신이 문드러진데다 그 많은 시신 중에 자기 가족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지요. 울고불고 하면서 열이 팡팡 나는 많은 시신을 만졌던 손을 눈에 갖다 대는 바람에 독이 올라 눈이 멀은 겁니다. 그 후 눈 먼 40여 년의 생을 살았지요. 나이 어린 손녀의 손을 붙잡고 겨우 움직이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 손녀는 참으로 착한 아이였지요. (백문수 증언)

 

남편의 시신을 찾아 헤매다 눈까지 멀었지만 시신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송군옥의 아들인 송재우 씨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제야 아버지의 위령비를 세웠다.

 

어머니는 평생 눈이 먼 채 40여 년 간 한 맺힌 삶을 사시다 4년 전인 1993년에 80세의 일기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어머니의 묘소를 만들면서 옆에 아버지의 위령비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간 내가 사업이다 뭐다 하며 고향을 떠나 사는 바람에 어린 딸이 어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딸은 부모보다 할머니에게 더 정이 들었지요. 지금도 고향에 오면 혼자서라도 꼭 할머니 무덤에 다녀옵니다.(송재우 증언)

<출처 :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4​ (1998)>

 

 

 

 현장사진

 

 

 

 

 

 

 

 

 

 

 

 

 사료(문서, 사진,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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