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영남동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서귀포시 지역구분(읍면) - 지역구분(마을별) 서귀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영남동 224번지 일대
GPS 위도 33.2888888888889, 경도 126.570972222222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〇   영주산  첫 남쪽 마을의 비극 영남동

4·3 때 토벌대의 초토화작전으로 제주도내 많은 중산간 마을들이 피해를 입었고 그 가운데는 없어져 버린 마을도 많다. 서귀포시 영남마을(瀛南洞)도 그 당시 없어져버린 중산간 마을 가운데 하나다. 서귀포시 중문동 회수에서 신시가지로 가는 우회도로를 따라가다 용흥마을 지경에서 내려 북쪽으로 난 좁은 길로 접어들면 영남마을을 만날 수 있다. 지금은 길이 잘 뚫려 있어 제2산록도로를 타고 가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뒤쪽으로는 한라산 밀림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동남쪽으로는 고근산과 파랗게 펼쳐진 바닷가 한눈에 들어오는 영남마을은 ‘영주산(한라산) 남쪽마을’이라는 마을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바로 한라산 밀림이 끝나는 지경에 고즈넉히 자리잡고 있다. 행정구역상 과거에는 중문면 영남리였다가 4·3당시는 중문면 강정2구로 편입됐으나 지금은 서귀포시 용흥동에 속해 있다.

 

이곳에는 전씨 성을 가진 한 노인이 농사를 지으며 외로이 30여년을 살고 있다. 그러나 1800년대 중반에 마을이 생긴 이후 4·3이 있기 전에는 50여 가구가 넘는 비교적 큰 마을이었다. 

 

영남마을 주민들은 중산간이라는 지형조건 때문에 한말 제주지역에서 일어난 방성칠란과 1901년의 이재수란 등 민란과 일제 강점기 때의 항일투쟁에 참가하기도 했다. 

 

1918년에 일어난 법정사 항일투쟁에 참여했던 이자춘(당시 43)은 4·3 당시에 영남동 근처 야산에 숨어지내다가 군경토벌대에 발견돼 학살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부 사람들은 해안마을로 내려오기 시작하고 해방이 되면서는 20여가구만이 남아있게 된다. 

 

영남마을의 소개는 48년 10월18일(음력)께 이뤄졌다.  한라산 밀림지대와 접해 있어 무장대와의 왕래가 있다고 판단한 토벌대에 의해 소개되고 토벌된 것이다. 

 

그러나 16가구 가운데 1가구만이 내려갔고 나머지는 곧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을 근처의 궤(작은 동굴) 등에 숨어 생활하다가 이듬해 2월까지 토벌대의 무차별 토벌작전에 희생됐다. 일부는 해안마을로 들어와 살아보려고 하였으나 마을에서 받아주지 않아 다시 영남마을 근처에서 숨어살다가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한 주민은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이렇게 얘기한다.

 

집도 다 불태워 버려 인근 서호리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에 외할머니가 계셨어요. 그러나 서호리에서는 중산간마을 사람들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마땅히 갈 곳도 없고 해서 다시 영남마을로 돌아왔어요. 며칠 지내다가 이제는 안되겠다고 생각해 죽어도 아래 마을로 내려가서 죽는다고 얘기를 하고 내려가려는데 새벽에 토벌대가 들이닥쳐서 빗발치듯 총을 쏘아대는겁니다. 할아버지는 제 동생을 업고 뛰다가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지고 할머니도 총에 맞아 죽었어요. 한살짜리 동생은 총알이 비켜갔는지 죽지는 않았었는데 2-3일 있다가 죽었습니다.  아버지도 토벌대에게 잡혀서 길안내를 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해 지로인으로 얼마간 일하다가 군인들이 죽여버렸습니다. (이ㅇㅇ․서귀포시 법환동) 

 

4·3을 거치면서 영남동은 완전히 폐동이 되어버렸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거의 대부분 희생돼 대가 끊어져 버린 집안도 많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대부분 고아로 자랄 수 밖에 없었던 주민들은 이 처참했던 일을 잊으려고 영남마을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영남동은 4·3 대토벌의 기간에 지금까지 희생이 확인된 사람들만 해도 50여명에 달한다. 열살이 채 못된 어린 아기들도 10여명에 이르며 일가족이 몰살한 집안도 여럿이다.

 

아무런 죄 없이, 단지 유격대와 교류가 있음직한 중산간 마을이라는 이유로 순박하게 하루 하루 밭벼를 짓고, 보리, 콩을 갈던 주민들은 하나 둘 눈도 감지 못한 채 숨져갔다.

 

4·3이 있은 지 45년이 흐른 영남동은 한많은 역사를 굵은 나이테만큼이나 간직하고 있는 큰 팽나무가 말없이 서 있고, 지금도 잘 남아 있는 좁은 마을길을 따라 한걸음씩 내딛으면 가지런히 정비된 집터와 무수히 쌓아놓은 돌담, 대나무 숲에 둘러쌓인 우물가 사이에서 영남마을 주민들의 체취가 스며든다.

 

봄철이면 인근 농가에서 유채를 심었는지 집터에는 노란 유채꽃이 활짝 피는 영남동. 4·3은 우리 마을 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도 짊어질 문제라고 외치는 영남마을 주민들을 금방이라도 만날 것 같다.

 

이 마을 출신의 어떤 주민은 무려 15명의 친인척 희생자를 도의회에 신고했다. 그의 증언은 다른 4·3 피해자와 마찬가지로 4·3의 역사를 만나는 듯 하다.

 

소개를 내려가지 못하고 처음에는 마을 근처에 숨어지냈습니다. 이 난리가 얼마 오래가지 않으리라고 생각을 한 것이지요. 처음은 호근리 마을공동목장 근처로 피해 지내다가 소년궤니 뭐니 하는 곳에 숨어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쌀오름(미악)근처에도 피신하기도 했습니다. 그 근처에서 숨어지내는데 토벌대가 올라와서 발견되었어요.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는데 여러사람이 죽고 제 누님은 나무밑에 ‘푹’ 하고 넘어졌는데 나무 위에 있는 눈이 떨어져 덮이는 바람에 그 눈속에서 토벌대가 하는 말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누님은 그렇게 산에서 숨어지내다가 배가 너무 고파 보리 이삭을 잘라 굶주림을 채우려고 내려왔다가 토벌대에게 발각돼 죽었습니다. 친족들이 숨어살았던 동굴은 사람이 드나들기 힘든 장소였는데 토벌대들이 총을 쏘아도 친족들이 나오지 않자 나무에 불을 붙여 연기로 실신시킨 뒤 한사람씩 끌어내 모두 총살해 버렸습니다

< 출처: 제주4·3연구소, 「연구소 소식지 29호」(1997) >

 

 

〇 영남동은 영주산(瀛州山, 한라산을 의미함) 남쪽 마을이라는 마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한라산 남쪽 밀림이 끝나는 지경에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다. 4․3 이전에는 50여 호 정도의 주민이 살았던 마을이나 4․3 당시에는 16가호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당시 호주로는 이자춘, 문만권, 문두견, 김창헌, 문일권, 김원희, 김원옥, 문필권, 강성무, 김종원, 김두칠, 이동화, 이병화, 오영이 등이 있었다.  

 

1948년 11월 18일경 토벌대의 초토화작전에 따른 소개령이 내려지자 대부분의 주민들은 해안으로 내려가기보다는 금방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을 근처의 밀림이나 궤에 숨어 생활했다. 그러다가 대다수 주민들이 토벌대의 토벌작전에 희생되거나 잡혀가서 학살됐다. 그 후 마을은 복구되지 못한 채 잃어버린 마을로 남아 있다. 영남동에서 일가족을 잃은 김종원(남, 03년 69세) 씨는 당시를 이렇게 증언했다.

 

소개를 내려가지 못하고 처음에는 마을 근처에 숨어 지냈습니다. 이 난리가 얼마 오래 가지 않으리라고 생각을 한 것이지요. 처음은 호근리 마을공동목장 근처로 피해 지내다가 '소님궤'니 뭐니 하는 곳에 숨어 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쌀오름 근처까지 피신하기도 했습니다. 우린 쌀오름 근처에 숨어 지내다가 토벌대에게 발견되었어요. 토벌대는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았어요. 여러 사람이 죽고 제 누님은 나무 밑에 󰡐푹󰡑하고 넘어졌는데 나무 위에 있는 눈이 떨어져 덮는 바람에 살아났어요. 누님은 그 눈 속에서 토벌대가 하는 말소리를 다 들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누님은 그렇게 숨어지내다가 배가 고파 보리 이삭을 잘라 굶주림을 채우려고 내려왔어요. 그 때 누님은 토벌대에게 발각돼 죽었습니다. 또…… 친족들이 숨어 살았던 동굴은 사람이 드나들기 힘든 장소였어요. 토벌대가 총을 쏘아도 아무도 나오지 않자 나무에 불을 붙여 연기로 실신시킨 뒤 한 사람씩 끌어내 모두 총살해 버렸습니다. 그 겨울 몇 달 동안 일가족 15명이 다 토벌대의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김종원 씨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친족들을 모두 비참하게 잃은 당시의 충격으로 19세 때부터 정신과 치료를 받아오고 있다. 수면장애와 우울증으로 인해 병원 치료와 약으로 삶을 버텨 온 김종원 씨는 '우울증' 판정을 받아 정부에 '4․3 후유장애자 추가신고'를 했다.   

 

영남동은 남쪽으로는 고군산과 멀리 범섬이, 북쪽으로는 어점이악과 시오름이 보이는, 경관 좋고 아늑한 곳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계단식 화전은 옛 형태 그대로 남아 있어 보존방안 마련이 시급하다. 현재 이 곳에는 전씨 할아버지가 농사지으며 외로이 40여 년을 홀로 살고 있다. 

 

한편 현재 마을 중심에는 조그만 암자가 들어섰고, 북쪽 자락에는 주)부오카티코리아에서 대규모 사우나, 풀장, 놀이터, 체험농장 등을 겸비한 펜션을 짓고 있어 영남동 훼손이 가속화되고 있다. 

<출처: 제주4·3연구소, 『4·3유적Ⅱ』(2008)>

 

 

〇 영남동은 영주산(瀛州山, 한라산을 의미함) 남쪽 마을이라는 마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한라산 남쪽 밀림이 끝나는 지경에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는 마을이다. 남쪽으로는 고군산과 멀리 범섬이, 북쪽으로는 어점이악과 시오름이 보인다. 4․3의 와중인 1948년 11월 20일경 마을이 전소되어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이 마을에는 19세기 중반 무렵 생활이 어려웠던 제주도 각지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화전을 일구며 살아가기 시작한 이래 호수가 많을 때는 50여 호가 넘기도 했다. 마을의 중심에서 서쪽으로 화전으로 일군 다랑이밭(층계밭)이 원형을 유지하며 남아있다. 주민들은 감자, 메밀, 콩, 산디(밭벼)를 주식으로 삼았고 목축을 하였으며 마을에는 서당이 있어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재수의 항쟁 등 여러 항쟁에 많은 주민들이 참여했고, 1918년 법정사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한 주민 6명이 일제에 구속되기도 하였다. 그 중 옥사한 김두삼(당 25세)은 독립 유공자로 추서되어 마을의 명예를 높여주고 있다.

 

4․3 당시에는 16가호의 주민 90여 명 중 피신하지 못한 50여 명이 희생되는 불운을 맞았다. 당시 호주로는 이자춘, 문만권, 문두견, 김창헌, 문일권, 김원희, 김원옥, 문필권, 강성무, 김종원, 김두칠, 이동화, 이병화, 오영이 등이 있었다.

 

1948년 11월 18일경 토벌대의 초토화작전에 따른 소개령이 내려지자 대부분의 주민들은 해안으로 내려가기보다는 금방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을 근처의 밀림이나 궤에 숨어 생활했다. 피난생활을 하던 대다수 주민들이 토벌대의 토벌작전에 희생되거나 잡혀가서 학살됐다. 그 후 마을은 복구되지 못한 채 잃어버린 마을로 남아 있다. 현재 마을 중앙 팽나무 아래에는 제주도가 만든 '잃어버린마을표석'이 있다.

  <출처: 4.3유적정비계획보고서>

 

 

 

 현장사진

 

 

 

 

 

 

 

 

 

 

 

 

 

 

 

 

 

 사료(문서, 사진, 증언)

 

 

 

〇 4.3당시 영남동 세부도 

<출처: 제주4.3 제50주년 학술문화사업추진위원회, 『잃어버린 마을을 찾아서』(1998)>

 

 

〇 잃어버린 마을 표석

 

 

영남동

 

여기는 4․3의 와중인 1948년 11월 20일경 마을이 전소되어 잃어버린 서귀포시 영남동 마을터이다. 이 마을에는 19세기 중반 무렵 생활이 어려웠던 제주도 각지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화전을 일구며 살아가기 시작한 이래 호수가 많을 때는 50여 호가 넘기도 했다. 주민들은 감자, 메밀, 콩, 산디(밭벼)를 주식으로 삼았고 목축을 하였으며 마을에는 서당이 있어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재수의 항쟁 등 여러 항쟁에 많은 주민들이 참여했고, 1918년 법정사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한 주민 6명이 일제에 구속되기도 하였다. 그 중 옥사한 김두삼(당 25세)은 독립 유공자로 추서되어 마을의 명예를 높여주고 있다.

 

4․3사건은 이 마을을 피해가지 않았다. 16가호의 주민 90여 명 중 피신하지 못한 50여 명이 희생되는 불운을 맞았다. 주위로 눈을 돌려 화전갈이 흔적이 뚜렸한 층계밭을 보라. 옛 우물터를 찾아 시원한 물 한 모금 마시며 영남마을 주민들의 아팠던 삶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라. 이 곳에 밝은 햇살이 영원히 머물기를 바라며 이 표석을 세운다.

 

 

2001년 4월 3일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실무위원회  위원장

제주도지사    

 

 

 

 

 

상처받은 영혼을 향한 희망이 불어오는 곳
평화·상생·해원 바람의 진원지

제주4·3평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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