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성산초등학교 서청특별중대 주둔지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서귀포시 지역구분(읍면) 성산면 지역구분(마을별) 성산면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면 성산리 171-9번지
GPS 위도 33.4626944444444, 경도 126.931916666667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〇 서북청년단을 중심으로 구성된 특별중대가 약 3개월 정도 주둔하던 곳이다. 이 곳은 당시 성산동국민학교 건물이었다. 정확한 규모와 주둔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서청으로 구성된 특별중대가 주둔했었다. 약 100여 명의 군인들이 주둔했었다고 증언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구좌면 월정리의 구좌중앙국민학교에 주둔하던 서청특별중대가 이  곳으로 이동해 주둔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성산동국민학교 건물에 주둔하면서 숙식을 해결했고, 붙잡아 온 주민들을 수감하고 취조하는 곳은 국민학교 바로 앞 담장 너머에 있었던 감자창고를 이용했다. 학교 담을 허물고 출입을 용이하게 하여 일제 때부터 있었던 주정공장에 딸린 창고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 곳을 기억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혀를 내두른다. 매일 같이 고문에 못 이겨 질러대는 비명소리와 형장으로 끌려나가는 주민들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당시 이 곳에 몇 번 끌려가 고문을 받았던 이기선 씨는 그들은 사람을 데려오면 무조건 때려놓고 취조를 시작했다며 '심지어는 성산 사람 하난 뭐, 죽이러 가면서도 걷지 못하니까, 단가에 들러가서 죽였단 말이여. 그렇게 취조를 해놨으니까.'라며 자신도 지금 고문후유증이 그대로 있다고 말했다. 또 그는 여성들의 수난에 대해서도 말했다. 

 

잡아오면은 그 간수들이, 감시허는 놈들이 마음에 맞으면 끌어다가 무조건 강간해놓고 돌려보내지 않고 무조건 쏘아 죽였다는 그런 말도 들었어요. 일단 그 여자들은 나가면은 들어오진 않으니까. 그런 현상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 장소는 어디서 죽였는진 모르고. 하여튼 마, 수마밑에 광치기 있는 데 하고 우뭇개 정도죠.   

성산국민학교는 성산동국민학교로 1946년 2월 개교하였고 1957년 6월에는 학교명을 성산국민학교로 개칭하였다. 이 곳에 있던 학교는 1972년 12월 이설했다. 지금은 당시 사용하던 학교건물을 조금 개보수를 한 상태지만, 일본식 건축양식을 사용한 건물의 틀과 바닥, 천정, 복도 등의 형태가 그대로 남아있다. 하지만 주민들을 감금하고 고문했던 감자창고는 허물어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현재 블록공장의 창고로 사용하고 있는 이 곳 성산동국민학교 옛 건물은 성산면 주민들의 아픈 기억을 간직한 곳이다. 이곳을 역사박물관화 해서 후세 교육의 장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출처: 제주도·제주4·3연구소, 『제주4·3유적 Ⅱ』(2003); 제주도·제주4·3연구소>

 

〇 성산포동공립고등소학교는 1919년 일본인의 자녀 교육을 시키기 위하여 설립한 학교로서 성산포에 있었다. 광복 직후 성산포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학교설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일본인이 운영하던 학교 건물을 인수하여 1946년 1월 15일 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같은 해 2월 22일에 성산동국민학교를 개교하였다. 1947년 8월 25일에 석조 4교실을 준공하였고 이후 1956년 2개 교실을 증축하여 학교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1957년 6월 30일 학교명을 성산국민학교로 개칭하였다.

 

 1948년 겨울에 서청으로 구성된 특별중대(대장은 최소위, 부관은 강아무개)가 성산포서교에 주둔. 30∼40명 정도로 3개월쯤 머물렀다. 서청 특별중대는 군복을 입었으나 계급장은 달고 있지 않았다. 늘 이동하며 다닌 듯했다. 학교 창고를 유치장으로 사용했는데, 이곳에서 항상 50∼60명 정도의 많은 사람들이 수감되어 고문과 처형을 당했다.(당시 성산포서교 교사 홍경토의 증언)

 

<출처: 제주도교육청, 󰡔4・3 관련 교육계 피해 조사 보고서󰡕, 2001>

 

 

〇 제9연대장 송요찬은 민간인 신분의 서청단원들로 이른바 ‘특별중대’를 만들어 토벌작전에 활용하였다. 노윤복은 계몽연극단원으로 제주에 왔다가 서청 특별중대원이 되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이 특별중대는 4개 소대 80여 명으로 구성됐으며 대원들은 군복만 입었을 뿐 명찰도 계급장도 없었다. 이들은 당연히 군번이 없었고 군적에도 이름이 등재되지 않은 ‘군인 아닌 군인’이었다. 송요찬은 제9연대 장교와 헌병들에게 이들의 활동을 간섭하지 못하도록 했다. 특별중대는 한림, 구좌면 월정리, 성산 등지를 순회하며 주둔했다. 제9연대가 철수하고 제2연대가 주둔하자 월정리에 주둔하고 있던 특별중대원 88명은 그대로 제2연대 제11중대 소속이 됐다고 했다. 부대 교체에도 불구하고 제주도 현지에 잔류하고 있다가 제2연대 제3대대(후술하는 ‘서북 대대’)에 배속된 것이다. 

 

‘서청 특별중대’는 주로 소대 단위로 이동하면서 토벌활동을 벌였다. 현역 장교가 아닌 서청단원이 대부분 중대장・소대장을 했는데, 중문에서 한림으로 이동・주둔한 특별중대와 구좌면과 성산포에서 활동한 특별중대가 동일 부대인지 불확실하다. 따라서 이러한 특별중대가 하나인지 아니면 2개 이상이 존재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송요찬 연대장은 기존의 제9연대 병력은 제1대대, 부산 제5연대에서 파견된 병력은 제2대대, 대구 제6연대에서 차출된 병력은 제3대대로 편성하였다. 그리고 제1대대를 제주읍 지역(대대본부 오등리), 제2대대를 조천면・구좌면 지역(대대본부 함덕리), 제3대대를 대정면 지역(대대본부 모슬포)에 분산 배치하였다.

 

그런데 제2대대는 북제주군의 조천면, 구좌면, 성산면, 표선면을 비롯하여 애월면, 한림면까지 담당했다. 다른 대대와 비교하여 제2대대의 관할구역은 매우 넓었다. 당시 제1대대의 병력 수는 매우 적었고, 대구 병력인 제3대대에 대해서는 연대장의 신뢰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지역의 광대성에 견주어 볼 때 제2대대 병력의 상대적 부족은 더욱 무차별적인 토벌로 전개될 소지가 있었다. 더구나 송요찬은 제9연대의 편제상에도 없는 ‘서청 특별중대’를 이 지역에 배치했다. 12월 3일~12월 6일 기간의 제9연대 일일보고서에는 ‘서북 중대’(Sawbuck Company)가 장달리(좌표 990- 1159)로 파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민간인 희생자가 더욱 컸던 것 같다.

 

예하 부대별로 살펴보면 제1대대에서 사살 45명 생포 1명, 제2대대에서 사살 887명 생포 449명, 제3대대에서 사살 403명 생포 48명으로 나타났다. 제2대대가 다른 대대에 비해 훨씬 높은 전과를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제2대대는 전사자가 10명인데, 이 가운데 9명이 12월 19일의 (애월면) ‘신엄리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때 제7중대는 중대장까지 희생되는 피해를 당했다. 그러나 ‘서청 특별중대’가 주로 활동했던 구좌면・성산면 지역에서는 군인 희생자가 없었다.

 

<출처: 양봉철 논문>

 

〇 성산초등학교 등사판 분실 사건 

홍아무개씨는 당시 성산면 동남국민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가 이 학교에서 밤중에 등사판을 잃어버린 사건과 관련된 혐의를 받고 잡혀가 고문을 당하다, 사살 직전에 구출된 바 있다. 그의 증언에 다르면 서북청년으로 구성된 특별중대(대장은 최소위였으며 부관은 강아무개였다)가 인근 마을 성산국민학교에 주둔한 것은 사건이 나던 해인 1948년 겨울이었다. 그들은 3개월쯤 주둔해 있었으며 대원은 30∼40명쯤이었다. 군복을 입었으나 계급장은 달고 있지 않았으며 늘 이동하며 다닌 듯했다. 이들은 당시 성산국민학교의 창고를 유치장으로 사용, 보통 50∼60명의 유치인을 가두고 있었다. 

 

등사판을 도난당한 것은 특별중대가 주둔해 있던 그해 음력 11월 말쯤, 밤중의 일이었다. 당시 게릴라들은 삐라 제작을 위해 등사판을 절취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당시 이 학교의 교사는 12명이었는데, 날이 밝자 특별중대에 등사판 도난사건이 보고되고, 교장 사택이 수색 당하던 중 일본도가 발견되었다. 이 때문에 사건이 확대되어 교장과 홍씨를 비롯한 교사 5명, 이웃 학교인 성산국교의 교사 2명 등 모두 8명이 연행되어 고문을 당했다.

3일 뒤 8명 중 6명이 불려 나가 강마무개 부관으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홍씨는 집행 직전에 이웃 마을에 주둔 중인 특수부대 문남수 상사의 도움으로 구출되었다. 문 상사는 성산국교 교사였던 홍씨의 애인 정아무개 교사의 간청으로 그를 구출해낸 것인데, 홍씨는 동료 교사의 등에 업혀 친구 집에 가서 엎드려 있다가 15분쯤 후에 일출봉 기슭 해변 우뭇개 쪽에서 나는 수발의 총소리를 들었다.(홍OO 증언)

<출처: 『한라의 통곡소리』> 

 

〇 성산이 불쑥 솟아올라 제주섬 최고의 절경을 자랑하는 성산리는 4·3당시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된 특별중대가 주둔하기 시작하면서 죽음과 통곡의 소리가 끊이지 않은 곳으로 변하고 말았다. 당시 그들은 성산국민학교를 접수하여 1년 정도 주둔하였다.정확한 규모와 주둔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이북말을 쓰는 50여명의 군인들이 주둔했었다고 증언하는 이들이 많다. 구좌면 월정리의 구좌중앙국민학교에 주둔하던 서청특별중대의 일부가 성산리로 이동해 주둔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성산동국민학교 건물에 주둔하면서 숙식을 해결했고 붙잡아 온 주민들을 수감하고 취조하는 곳은 국민학교 바로 앞 담장 너머에 있었던 감자창고를 이용했다. 학교 담을 허물고 출입을 용이하게 하여 일제 때부터 있었던 주정공장에 딸린 창고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 곳을 기억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혀를 내두른다. 매일 같이 고문에 못 이겨 질러대는 비명소리와 형장으로 끌려나가는 주민들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당시 이 곳에 몇 번 끌려가 고문을 받았던 이기선씨(81)는 "그들은 사람을 데려오면 무조건 때려놓고 취조를 시작했다"며 "심지어는 성산 사람 하난 뭐, 죽이러 가면서도 걷지 못하니까, 단가에 들러가서 죽였단 말이여. 그렇게 취조를 해놨으니까"라며 자신도 지금 고문후유증이 그대로 있다고 말했다. 또 그는 여성들의 수난에 대해서도 말했다.  

 

잡아오면은 그 간수들이, 감시허는 놈들이 마음에 맞으면 끌어다가 무조건 강간해놓고 돌려보내지 않고 무조건 쏘아 죽였다는 그런 말도 들었어. 일단 그 여자들은 나가면은 들어오진 않으니까. 그런 현상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 장소는 어디서 죽였는진 모르고. 하여튼 마, 수마밑에 광치기 있는 데 하고 우뭇개 정도죠.

현재 성산리는 해안도로 등이 새로 생겨 다른 지역으로 통할 수 있는 길이 많지만, 일제 말엽 194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성산리는 물때에 따라 육지길이 열리고 닫혔었다. 즉 고성리에서 성산일출봉으로 이어지는 '터진목'의 좁은 길만 막아버리면 오갈 수 없는 곳이었다.  이런 지리적 여건 때문에 성산리에는 4·3 초기에 한번의 지서습격이 있었으나 인명피해는 없었고, 그 이후로도 무장대로부터 이렇다 할 기습을 당한 적이 없다.하지만 서청특별중대의 무자비한 폭력은 성산면과 인근 구좌면 지역주민들에겐 치 떨리는 악몽의 연속이었다. 툭하면 잡혀가 갖은 고문과 곤욕을 치렀는가 하면, 한번 잡혀가면 살아 돌아오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렇듯 성산면 일대를 관할했던 서청특별중대는 잡아 온 주민들을 혹독하게 고문하다가 대부분 총살했는데, 그 장소는 성산리의 '터진목'과 '우뭇개동산'이었다. 때문에 성산리민들은 날마다 잡혀온 주민들이 고문 받는 비명소리를 듣고 총살당한 시체의 모습을 보는 게 일상사 였다. 

 

성산면의 온평리, 난산리, 수산리, 고성리 등 4·3 당시 희생된 성산면 관내 주민 대부분은 인근 지서에 끌려갔다가 성산포에 주둔하던 서청특별중대에 끌려오거나, 토벌대의 포위 습격에 걸려들어 역시 서청특별중대에 끌려와서 고문 취조를 당하다 터진목에서 총살됐던 것이다. 이 곳에서의 희생은 성산면 주민들에 국한되지 않았다. 인근 지역인 구좌면 하도, 종달리 등에서 붙잡혀온 주민들이 희생된 경우도 많았다. 특히 1948년 11월 28일, 18세 이상 80세 까지의 하도리 주민들을 도피자 가족이라는 죄명으로 감자창고에 감금 시켰다가 다음날인 29일 주민 20여명을 터진목에서 집단 총살하였다. 1960년 국회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 특별위원회에 보고된 당시 성산면 유족들의 신고를 보면 서청특별중대의 무소불위의 권력과 횡포가 얼마나 지독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오조리 출신의 고태현씨는 1948년 10월, 9연대 11중대에 끌려가 수감 중 무죄로 석방되어 의용대에 근무하며 충실히 살고 있었다. 그러나특별중대는 과거에 수감되었다는 이유로 감자창고에 끌고가 고문을 가한 후 1949년 1월 2일, 일출봉 우뭇개동산에서 총살했다. 당시 학살집행자는 김우희 서청중대장이였다고 밝히고 있다.이 외에도 그들은 도피자 가족, 고기잡이용 다이너마이트 소지, 인민위 명단에 기록, 이승만 사진을 사지 않은 죄 등 갖가지 죄명을 붙여 선량한 양민들을 학살했다고 당시 성산면 유족들은 신고한 바 있다. 신고서에 나타난 유족들의 요망사항은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서청악질을 조사하고 엄벌하여 불쌍한 영혼들의 원한을 풀어달라는 애절한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서북청년단은 해방 이후 이북에서 월남한 사람들이 만든 평남, 함북, 함남, 황해청년회 등 이북출신 청년단체가 통합하여 1946년 11월 30일 서울에서 결성된 대표적인 반공우익 집단이다. 서청 제주지부(단장 김재능)는 1947년 11월 2일 조직됐다. 이후 이들에 의해 자행된 무자비한 테러행위는 제주도민의 감정을 자극하여 4·3 발발의 원인으로 작용했으며, 진압과정에서도 그들에 의해 무수한 생명들이 사라져 갔던 것이다. 서청특별중대가 주둔했던 성산초등학교 옛터는 성산동국민학교로 1946년 2월 개교하였고 1957년 6월에는 학교명을 성산국민학교로 개칭하였다. 이 곳에 있던 학교는 1972년 12월 현재의 터로 이설했다. 당시 학교 건물은 양철지붕이었으나 4·3 이후 기와 건물로 개축하였다.  그러나 당시 서청이 주둔했던 곳과 현재 남아있는 건물의 장소는 동일하다. 지금은 일본식 건축양식을 사용한 건물의 틀과 바닥, 천정, 복도 등의 형태가 그대로 남아있다. 하지만 주민들을 감금하고 고문했던 감자창고는 허물어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2008년 현재 블록공장의 창고로 사용하고 있는 이 곳 성산동국민학교 옛 건물은 서청특별중대원들의 하나 둘 사라져 가듯, 기와지붕이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다. 이 곳은 성산면 주민들의 아픈 기억을 간직한 곳이다. 당시의 역사를 설명하는 안내판이라도 세워 후세 교육의 장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성산리사무소 앞 킹마트 뒤편에 있다. 

 

< 출처: 한라일보( 2007.5.1.)>

 

 

  

 현장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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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료(문서, 사진, 증언)

 

 

 

 

〇 증언 : 윤종선

 윤종선 할아버지(77)는 4·3당시 열여섯 살이었다. 서청특별중대 감자창고 고문실 바로 앞에 집이 있었기 때문에 매일 밤 벌어지는 고문과 비명소리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감자창고에 임시 마련된 특별중대원들을 위한 식당에서 일했다고 한다.

성산포에는 일제가 남기고 간 학교 동쪽의 주정공장과 간스매 공장, 옥도정기를 만들었던 감태공장이 있었주. 4·3이 나난 서청특별중대는 이런 시설을 이용하여 사무실로도 쓰고, 잡아온 사람들을 가두어 고문한 후 터진목이나 우뭇개에 데려당 팡팡 총살해 부렀주. 이북말을 쓰는 서청특별중대원들은 군복입은 놈, 사복입은 놈 등 복장도 각양각색이라. 총은 거의 99식을 들고 다녔는데 너무 무서워서 '이북놈 왐쪄' 허멍 봐지민 피해 부렀주.

윤종선 씨는 줄에 묶여 부대로 끌려가는 사람들을 보며 내일 쯤 어디서 또 몇 명 죽겠구나 하는 생각을 늘 했다고 한다.

 

내가 아는 어떤 할머니를 잊지 못하주. 우뭇개에서 한 20명쯤 집단으로 총살당했는데 그놈들이 가부난 밤에 기어나완 살아난 거라. 서청들이 알아도 사지에서 살아났덴 살려주더라고.

 그 당시 성산지서에 여섯명이 경찰이 있어도 서청특별중대가 들어온 후에는 꼼짝 못하고 그들의 하수인 역할만 했다고 그는 말했다.

<출처: 한라일보(20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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