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터진목 & 성산면 4·3희생자 위령비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서귀포시 지역구분(읍면) 성산면 지역구분(마을별) 고성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224-1번지 일대
GPS 위도 33.4524166666667, 경도 126.920138888889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〇 설촌 200년인 성산리는 제주도 동쪽 끝에 반도처럼 튀어나온 섬 아닌 섬이다. 지금은 해안도로 등이 있어 다른 지역으로 통할 수 있는 길이 많지만, 일제 말엽 194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성산리는 물때에 따라 육지길이 열리고 닫혔었다. 즉, 고성리에서 성산일출봉으로 이어지는 󰡐터진목󰡑의 좁은 길만 막아버리면 오갈 수 없는 곳이었다. 이런 지리적 여건 때문에 성산리에는 4․3 발발 초기에 한번의 지서습격이 있었으나 인명피해는 없었고, 그 이후로도 무장대로부터 이렇다 할 기습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서청특별중대의 존재는 성산면․구좌면 지역주민들에겐 악몽이었다. 툭하면 잡혀가 곤욕을 치르는가 하면, 그 곳에 한번 잡혀가면 살아 돌아오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자기도 무슨 혐의를 뒤집어 써 특별중대 주둔지에 몇 번 끌려갔었다는 이기선(남, 03년 77세) 씨는 "거기서 취조는, 그 뭐, 입으로 말할 수 없어요. 좌우간 무조건 잡아놓으면 두드려 패는 게 일이고. 죽어나가는 사람도 많았어요."라고 말했다. 

 

이렇듯 성산면과 구좌면 등을 관할했던 특별중대는 잡아 온 주민들을 혹독하게 고문하다가 대부분 총살했는데, 그 장소가 성산리의 '터진목'과 '우뭇개동산'이었다. 때문에 성산리민들은 날마다 잡혀온 주민들이 고문 받는 비명소리를 듣고 총살당한 시체의 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다.

 

 

터진목은 특별중대에 끌려온 성산, 구좌면 관내 주민들이 감자공장 창고에 수감되어 고문당하다 총살됐던 학살터였다. '터진목'이란 지명은 터진 길목이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실제 194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성산리는 물때에 따라 육지길이 열리고 닫혔었다. 이후 주민과 행정당국이 공사를 벌여 육지와 완전히 이어지게 됐는데, 지금도 이 일대를 '터진목'이라 한다. 

 

성산면의 온평리, 난산리, 수산리, 고성리 등 4․3 당시 희생된 성산면 관내 주민 대부분이 이 곳 터진목에서 희생됐다. 그들은 대부분 인근 지서에 끌려갔다가 성산포에 주둔하던 서청특별중대에 끌려오거나, 토벌대의 포위 습격에 걸려들어 역시 서청특별중대에 끌려와서 고문 취조를 당하다 터진목에서 총살됐던 것이다. 성산면 이외에도 구좌면 세화, 하도, 종달리 등에서도 붙잡혀온 주민들이 이 곳에서 희생된 경우도 많았다. 

 

이곳에서 형을 잃은 고성리 주민 홍성기(남, 03년 76세) 씨는 "그 때 형님이 희생됐는데, 그 때 우리 형님은 일본서 살다가 발동기를 하나 사가지고 마침 해방을 맞아서 왔는데. 불과 4개월 정도 살아가지고. 그 때는 서북청년들 사진을 가져와 가지고, 그 때는 서북청년한테 누구 협조도 안 해주니까 말이여. 게니까 사진, 대통령 이승만 사진을 해가지고 집에 돌아다니면서 사라고 해가지고. 우리 형님은 필요 없다. 그것뿐이 없는데…. 제일 억울한 것이, 총으로 한 번 해서 쓰러지면 그걸로 죽어서 말아불민 좋은데. 그 때는 의용대, 특공대 해 가지고 몇 사람씩 성산포 주둔했단 말이여. 그런데 죽은 놈 위에 매질한다고, 총 쏘아서 쓰러진 것을 대창, 철창으로 시험으로 하라고 막 찔러놨단 말이여. 그러니까 부모로서, 동생으로서 그걸 눈으로 볼 수 없단 말이여. 나도 직접 그 날 못 가서 뒷날 가 가지고서 형님 시신을 모시기도 했는데. 그 때는 차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말구르마 끄성 가서 시신을 모셨는데. 이거는 사람을 잡아도 그렇게 잡을 수가 없단 말이지. 막 찔러노니까 상처 안 난 데가 한 군데도 없어."라며 고개를 떨구었다. 

 

또 성산리 주민 이기선 씨는 "또 말 들어보면, 터진목 가서 죽이는데 총알이 아깝다고 대창으로 찔러 죽이라고 했다는 그런 말을 들었어요. 순 그런 악질이었주"라고 증언했다.

 

 

고성리에서 성산포로 성산일출봉으로 1㎞쯤 가다 보면 우측에 해녀공원을 볼 수 있다. 그 곳에서 500m쯤 가면 성산리 바로 못 미쳐 오른쪽에 소나무 군락을 볼 수 있는데, 그 소나무 건너 해변에 암반이 드러난 곳이 속칭 󰡐광치기여󰡑고, 그 앞 모래사장이 '터진목'이다. 지금은 소나무로 가려져 길에서는 '터진목'을 볼 수 없으나, 당시에는 지금처럼 소나무가 없었기 때문에 훤히 터진목 해안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당시의 풍광과 다를 바 없는 해안으로 남아 있다. 또 성산일출봉의 위용을 남동쪽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곳이어서 관광객들도 자주 찾는다. 당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현재 터진목 초입에는 성산읍 4·3희생자 유족회가 2010년 11월 5일에 세운 위령비가 자리하고 있다. 이 위령비에는 추모글과 함께 성산면 4·3희생자 467위의 이름이 마을별로 새겨져 있다. 한편 이곳에는 2008년 프랑스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르 클레지오의 ‘제주기행문’ 일부가 새겨진 빗돌이 자리해 ‘어떻게 이 아름다운 곳이 학살터로 변했는지?’ 그 연유를 우리에게 묻고 있다. 

 

<출처: 제주4·3연구소, 『4·3유적Ⅱ』, 2008; 제주4·3희생자유족회, 『제주4·3희생자유족회 27년사』, 2016>



〇 일출봉이 불쑥 솟아올라 제주섬 최고의 절경을 자랑하는 성산리는 일제 말엽까지만 해도 물때에 따라 땅 길이 열리고 닫히는 섬 비슷한 마을이었다. 고성리에서 성산일출봉으로 이어지는 '터진목'의 좁은 길만 막아버리면 오갈 수 없었으므로 4·3 당시 민보단이나 특공대 주민들이 유일하게 보초를 서는 곳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성산리에는 군부대와 경찰서가 주둔하고 있었음에도 무장대의 본격적인 기습은 거의 없었다. 1948년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사령관 송요찬 중령)가 새로 설치되어 본격적인 초토화 작전이 시작된다.  게다가 11월 17일에는 대통령령 31호로 제주도에 한정된 계엄령이 선포되어, 이후 군경의 토벌은 점점 무차별 학살로 변해갔다. 특히 국군 제9연대와 2연대의 교체시기 였던 1948년 12월과 1949년 1월, 2월의 잔인한 토벌에 따른 도민들의 희생은 엄청났으며 제주도는 '죽음의 섬'으로 가엾게 존재할 뿐이었다.4·3당시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된 특별중대가 주둔하기 시작하면서 성산리는 죽음과 통곡의 소리가 끊이지 않은 곳으로 변하고 말았다. 당시 그들은 성산국민학교를 접수하여 1년 정도 주둔하였다. 하지만 서청특별중대의 존재는 성산면·구좌면 지역주민들에겐 악몽이었다. 툭하면 잡혀가 곤욕을 치르는가 하면, 그 곳에 한번 잡혀가면 살아 돌아오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자기도 무슨 혐의를 뒤집어 써 특별중대 주둔지에 몇 번 끌려갔었다는 이기선씨(81)는 "거기서 취조는, 그 뭐, 입으로 말할 수 없어요. 좌우간 무조건 잡아놓으면 두들겨 패는게 일이고. 죽어나가는 사람도 많았어요"라고 말했다. 이렇듯 성산면과 구좌면 등을 관할했던 특별중대는 잡아 온 주민들을 혹독하게 고문하다가 대부분 총살했는데, 그 장소가 성산리의 '터진목' 과 '우뭇개동산' 이었다. 때문에 성산리민들은 날마다 잡혀온 주민들이 고문 받는 비명소리를 듣고 총살당한 시체의 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다.당시 이곳에 몇 번 끌려가 고문을 받았던 이기선씨는 그들은 사람을 데려오면 무조건 때려놓고 취조를 시작했다며 "심지어는 성산 사람 하난 뭐, 죽이러 가면서도 걷지 못하니까, 단가에 들러가서 죽였단 말이여. 그렇게 취조를 해놨으니까. 잡아오면은 그 간수들이, 감시허는 놈들이 마음에 맞으면 끌어다가 무조건 강간해놓고 돌려보내지 않고 무조건 쏘아 죽였다는 그런 말도 들었어요. 일단 그 여자들은 나가면은 들어오진 않으니까. 그런 현상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 장소는 어디서 죽였는지 모르고. 하여튼 마, 수마밑에 광치기 있는 데 하고 우뭇개 정도죠" 라며 자신도 지금 고문후유증이 그대로 있다고 말했다. 성산면의 온평리, 난산리, 수산리, 고성리 등 4·3 당시 희생된 성산면 관내 주민 대부분이 이곳 터진목에서 희생됐다. 그들은 대부분 인근 지서에 끌려갔다가 성산포에 주둔하던 서청특별중대에 끌려오거나 토벌대의 포위 습격에 걸려들어 역시 서청특별중대에 끌려와서 고문·취조를 당하다 터진목에서 총살됐던 것이다. 터진목은 성산일출봉을 남동쪽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곳이어서 관광객들도 자주 찾는다.

<출처: 한라일보(2008.6.10.)>

 

 

 

 

 현장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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