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무등이왓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서귀포시 지역구분(읍면) 안덕면 지역구분(마을별) 동광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230번지 일대
GPS 위도 33.3093888888889, 경도 126.351527777778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〇 안덕면 중산간 한복판에 자리잡은 동광리는 1670년대 任씨가 정착한 이래 만수동, 마전동(麻田洞), 무동동(舞童洞), 자단동(自丹洞), 광청리(廣淸里) 등으로 불렸으며 1839년 동광리로 개칭되었다. 4·3사건 당시에는 무등이왓(무동이왓, 130여호), 조수궤(10여호), 사장밧(3호), 간장리(10여호), 삼밧구석(마전동, 45호) 등 5개의 자연마을, 약 200여호 규모의 전형적인 중산간 농촌마을이었다. 

 

동광리(무등이왓)는 조선시대부터 끊임없는 관의 경제적 수탈에 항거해 일어난 농민봉기인 1862년 임술민란(강제검의 난)과 1898년 제주민란(방성칠의 난)의 진원지이다. 또한 일제강점기 일제의 탄압에 반대하여 일어났던 1918년 보천교(普天敎) 사건의 중심적인 지역이다. 

 

일제강점기의 공출, 징용, 징병 등으로 인한 극심한 경제적 수탈과 강제노동에 시달리던 동광리 사람들은 8·15해방을 맞으면서 자신들의 손으로 자치적인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를 만들어 일제 식민지가 남기고 간 가난과 정치적 공백을 신속하게 메꾸어나갔다. ‘해방은 바로 공출이 없는 세상’일 것이라고 기대했던 그들에게 해방이 되어도 일제 식민지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계속되는 공출에 대한 거부는 당연한 것이었다. 동광리 사람들의 보리공출 반대는 마을의 진정한 해방을 만들어가기 위한 항쟁의 시작이었다. 

 

동광리에서는 4․3이 발발하기 이전인 1947년 8월 8일 보리수매 독려 차 마을을 방문했던 관리들이 마을 청년들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한, 소위󰡐성출반대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미군정 곡물수집정책에 반대하던 마을 청년 3명이 체포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 동광리는 미군정이 주목하는 마을이 되어 수시로 경찰이 들락거렸고, 동광마을 청년들은 경찰을 피해 일본, 육지부, 도내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 사건으로 마을을 떠난 청년들이 많은 탓인지 4·3사건 당시 동광마을은 2~30대 젊은이들보다(32.6%) 오히려 장년층의(38.6%) 희생이 컸다. 주민들은 “우리 마을의 4․3사건은 바로 ‘보리공출 사건’ 때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1948년 11월 15일 새벽, 광평리에서 토벌작전을 수행하고 내려온 군 토벌대가 안덕면 동광리를 포위한 채 주민들을 무등이왓에 집결시켰다. 당시 동광리 주민들은 마을 소개령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한 상태로 대부분 마을에 남아있었다. 토벌대는 주민들을 상대로 연설을 한 후, 강신학(57), 강군봉(51) 등 주민 10여명을 무등이왓 속칭 ‘강귀봉 댁 우영밧’에서 집단 총살했다. 이 사건은 소개령도 없이 시작된 동광리 초토화 작전과 학살의 신호탄이었다. 

 

집이 불타고 사람들이 학살되기 시작하자, 주민들은 마을 인근으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마을 부근에 숨었던 사람들 역시 토벌대에게 잇따라 붙잡혀 희생됐다. 12월 11일에는 마을 인근에 남아 있던 주민 20여명이 학살됐으며, 다음날인 12일에는 전날 총살당한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하던 가족 10여명(여성, 노인, 어린아이들)이 잠복 중이던 토벌대에게 집단학살 당하기도 했다. 이제 살아남은 주민들은 더 안전한 곳을 찾아 도망쳐야 했다.

 

마을 북쪽 도너리오름(道乙岳) 기슭에 위치한 ‘큰넓궤’는 가장 많은 주민들이 은신했던 곳이다. 동광리 주민 약 120여명이 보초 서기, 식량준비하기, 물 길어오기 등 역할을 나눠 ‘큰넓궤 공동체’를 이루며 약 50일간 이곳에서 생활했다.

 

그러나 연일 계속되는 토벌에 굴은 곧 발각됐고, 더 깊은 산중으로 피신하는 주민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주민들이 밤새워 오른 곳은 영실 부근 ‘볼레오름’이었다. 그러나 한겨울 쌓인 눈 위에 난 발자국 때문에 곧 토벌대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주민들은 일단 중문리로 끌려갔다가 하루를 지내고 이튿날 서귀포로 보내져 정방폭포 부근 수용소에 갇혔다. 그리고 며칠 뒤인 1월 22일, 수용소에 수감 중이던 다른 마을 주민들과 함께 정방폭포로 끌려가 집단총살 당했다. 이날 희생된 동광리 주민만 약 40여명에 달하며, 대부분 여자와 어린아이, 노인들이었다. 희생자 가족들은 사건이 발생한지 1년이나 지난 후에야 총살 현장에 갈 수 있었다. 시신은 이미 썩어 구별할 수 없었고, 당시 정방폭포 부근에서의 총살극은 이날 외에도 여러 차례 벌어졌기 때문에 엄청나게 쌓여 있는 시신 중에서 자기 가족을 찾기란 불가능했다.   결국 시신을 찾지 못한 유족들은 비석만 세우거나, 일부 유족은 ‘헛묘’를 만들어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동광리 4․3희생자는 166명으로 조사됐다.

 

동광리 주민들은 1949년 봄 서광 동리가 복구되자 서광 동․서리 주민들과 함께 서광동리 성 안에 임시 거처를 마련해 몇 년을 살았다. 동광리의 복구는 면의 지원을 받아 1953년도에 이루어졌다. 당시 면에서는 동광리 주민들만이 아니라 안덕면 주민들을 대거 동원해 중간 마을인 간장리에 성을 쌓도록 했다. 다음 해 4월경, 동광리 주민들이 간장리에 입주하면서, 동광리는 간장리를 중심으로 재건됐다. 결국, 4․3 당시 동광리의 중심지였던 무등이왓을 비롯해 삼밧구석, 조수궤 등은 복구되지 못한 채 폐촌됐다.  

 

 

〇 무등이왓(무동이왓)은 300여 년 전에 설촌된 마을로 주민들은 그 후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무동이왓이라는 지명은 지형이 󰡐춤을 추는 어린이를 닮았다󰡑는 데서 나왔다. 대나무가 많아 탕건(조선시대 벼슬아치들이 갓 아래 받쳐 쓰던 관), 망건(상투를 틀고 머리를 단정히 매던 머리띠처럼 생긴 그물), 양태(갓의 밑 둘레 밖으로 둥글넓적하게 된 부분), 차롱(음식을 보관하는 대바구니) 등 제주의 대표적인 수공예품의 주산지였다. 일제시기인 1939년에 무동이왓에는 2년제인 동광간이학교가 건립됐는데 이 학교는 감산리에 있었던 안덕공립보통학교를 제외하고는 이 지역 유일의 교육기관이어서 창천, 서광, 덕수, 상천 등지에서는 물론 중문면 색달리에서도 학생들이 취학했다. 그러나 4․3은 공동체적 성격이 강하고, 진취적이었던 이 마을을 영원히 앗아가 버렸다. 초토화작전 이후 뿔뿔이 흩어져 숨어살던 무동이왓 주민들도 하나둘 토벌대의 총칼에 스러져 갔다. 4․3 당시 호주로는 이일봉, 김찬옥, 강문구, 강행익, 김두백, 고군옥, 김시호, 이임길, 고군현, 임경송, 신송, 양평원, 강위경, 고신천, 고여수, 소일환, 강군평, 김을돌, 강석주, 강창주, 신인표 등이 있었다. 마을 규모가 컸던 만큼 피해도 큰 마을이었으나, 이제는 대나무 숲과 팽나무들만이 남아 당시 마을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〇 1948년 11월 15일 학살터(강귀봉 댁 우영밧: 동광리 483번지)

1948년 11월 15일(음력 10월 15일) 광평리에서 무장대 토벌작전을 수행하고 내려온 토벌대들은 동광리를 포위하고, 주민들을 동광리 ‘무등이왓’에 집결시켰다. 당시 소개령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한 주민들은 해안마을로 이주하지 않고 마을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토벌대는 주민들을 상대로 연설을 한 후 강군봉(51), 강신학(57), 고군욱(44, 이명 고군호), 고군협(49), 고만석(60), 고윤재(49), 고재언(43), 김원규(32), 김을돌(57), 이임길(35) 등 10여 명의 주민을 호명하고 줄로 묶고 일렬로 정렬시킨 뒤, 강귀봉 댁 우영 밧에서 집단 총살시켰다. 이 날의 상황을 동광리에 살고 있는 신원숙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 날 11명이 불려나갔습니다. 그 중 임○송이란 분은 좀 덜 얻어맞아서 도망칠 수 있었던지 총살당하기 직전에 도망쳐서 살았습니다. 막 총질을 해도 용케 총을 안 맞고 살아난 거지요. 딴 분들은 하도 두들겨 맞아서 팔이 꺾어져 고무줄 같이 그랑그랑, 다리가 꺾어져 그랑그랑, 도저히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우리가 확인하러 가보니까 그 밭이 완전히 피바다가 되었어요. 죽은 분 중에 강군봉씨는 아들이 순경이라서 "난 아무 죄도 없다. 순경 아버지가 무슨 죄가 있겠느냐?"고 해도 "순경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 여기 있는 것들은 다 빨갱이야" 하면서 같이 죽여버렸습니다.

당시 강귀봉댁은 무등이왓의 중심지였다. 지금은 집들은 다 없어지고 밭으로 변해 버렸다.

 

 

〇 1948년 12월 12일 잠복학살터(김군필댁 뒷 밧: 동광리 193-2번지)

1948년 12월 12일 토벌대가 김두백 일가족 10여명을 김군필 댁 뒷밧에서 학살한 사건을 이 마을주민들은󰡐잠복학살󰡑이라 부른다. 12월 12일 새벽, 김두백 등 일가족 10여명은 전날인 11일 토벌대에 의해 총살당한 부친 김군현 등 마을 주민 20여명의 시신을 수습한 후, 종숙 김군필 자택 뒷밧에서 시신을 매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장에는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하러 올 것을 예상한 토벌대가 이미 잠복 중이었다. 잠복 중이던 토벌대는 시신을 수습 하던 주민들을 포위해 한곳에 모아놓고, 짚더미나 멍석 등을 쌓아 그대로 불을 질렀다. 말 그대로 생화장이었다. 이 날 희생된 이들은 김두백을 제외하고는 모두 여성, 노인, 어린아이들이었다. 

 

동짓날 열하룻 날 죽은 사람이 일곱, 열 이튿날에 죽은 사람이 열 아홉으로 기억합니다. 제 남편과 시동생, 70세의 사촌, 어린 조카들까지 죽었어요. 다음 날 새벽, 제 조카뻘 되는 김두백이와 여러 사람들이 그 시신이나마 수습하려고 그 곳에 갔는데, 군인들이 계획적으로 숨어 있다가 부친의 시신을 수습하려는 김두백이며 아기들까지 전부 몰살시켰습니다.(강춘화, 여, 04년 87세, 연동)             

이 날 박경생 할머니(작고)는 돼지우리에 숨어서 살아났다. 할머니는 그 후 맷돌을 갈 때마다 "나는 돗집에 숨언 살아낫수다. 살려줍서, 살려줍서 허는 애기 놔두고 나만 혼자 살앗수다"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곤 했다. 현재 김군필 자택 터에는 양씨가족묘가 조성되어 있는데, 가족묘 산담 바로 옆 밧이 학살현장이다. 

 

<출처: 제주4.3 제50주년 기념 학술문화사업추진위원회, 『잃어버린 마을을 찾아서』, 1998 ; 제주4.3연구소, 「4.3역사의길조성 수립계획용역보고서」, 2015>

 

 

 

 

 사료(문서, 사진, 증언)

 

 

 

 

 

 

 

 

 

 

 

 

 

 

 

 

 

 

 

 

 

 

 

 현장사진

 

 

4·3당시 동광리 마을 지도




4·3당시 무등이왓 세부도



 ○ 잃어버린 마을 표석

 

무등이왓

 

여기는 4․3사건의 와중인 1948년 11월 21일 마을이 전소되어 잃어버린 남제주군 안덕면 동광리 무등이왓터이다. 약 300년 전에 관의 침탈을 피해 숨어든 사람들이 화전을 일궈 살아가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된 이래 4․3 당시 동광리에는 무등이왓 이외에도 삼밭구석, 사장밭, 조수궤, 간장리의 5개 자연마을이 자리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주로 조, 메밀, 콩 등을 재배했고, 교육열이 높아 일제 때에는 광신사숙과 2년제 동광간이학교가 세워졌다. 

 

4․3사건은 이 마을을 피해가지 않았다. 폐촌 후 주민들은 도너리오름 앞쪽의 큰넓궤에 숨어드는 것을 시작으로 눈 덮인 벌판을 헤매다 유명을 달리했다. 한 할머니는 그 후 맷돌을 갈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노래했다. “난 돼지 집에 숨언 살앗수다. 살려줍서, 살려줍서 허는 애기 놔두고 나만 혼자 살아낫수다.” 4․3으로 무등이왓(130호)에서 약 100명, 삼밭구석(46호)에서 약 50명, 조수궤(6호)에서 6명이 희생됐다.

 

인가가 자리했을 대숲을 지나 아이들이 뛰어 나올 듯한 올렛길을 걸어보라. 시신 없는 헛묘도 찾아보고 유일하게 복구된 간장리 마을을 지나 큰넓궤로 발길을 돌려보라. 평화를 기원하는 외침이 들려올 것이다. 다시는 이 땅에 4․3사건과 같은 비극이 재발하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이 표석을 세운다.

 

2001년 4월 3일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실무위원회 위원장

제주도지사


 

 

상처받은 영혼을 향한 희망이 불어오는 곳
평화·상생·해원 바람의 진원지

제주4·3평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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