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임문숙 가족 헛묘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서귀포시 지역구분(읍면) 안덕면 지역구분(마을별) 동광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807-4번지
GPS 위도 33.3091388888889, 경도 126.340611111111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〇 1948년 11월 중순 토벌대가 초토화작전을 벌이기 시작한 후, 큰넓궤로 들어가 피신생활을 하던 동광리 주민들은 굴이 발각되자 대부분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을 재촉하는 길이었다. 토벌대는 눈 덮인 한라산을 누비며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체포했다. 볼레오름에 숨어 있던 사람들은 1949년 1월경 거의 붙잡혔다. 토벌대는 이들을 서귀포의 한 단추공장 건물에 일시 수용했다 옥석을 가리지도 않고 정방폭포 위에서 집단학살했다. 그 중에는 동광리 주민들도 많았다. 그 후 유족들은 시신이나마 찾으려고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정방폭포에서 죽은 사람들의 시신은 찾을 수가 없었다. 바다에 떠내려갔기 때문이었다.

 

현재 동광리 육거리 인근 밭에 희생자 9명을 헛묘 7기(2기는 합묘임)로 조성한 임문숙씨(남, 04년 79세, 동명리)는 그간의 경위를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4․3사건이 진정되니까 살아남은 친척들 사이에서 시신이라도 찾아서 장례를 치러야 될 것 아니냐는 얘기들이 나왔습니다. 칠성판을 만들고 학살터라는 정방폭포 위에 갔습니다. 가서보니까 뼈들이 다 엉켜져서 도저히 누구누구의 시신인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위치를 아는 사람들과 여럿이 갔었지요. 거기는 우리 집 방(대략 5평 크기)만큼 했는데 구덩이를 조금 파고 그 안에서 전부 죽였던 것 같습니다. 주변에 옷도 일부 흩어져 있고 하였지만, 이미 살이 삭아들어 뼈만 남아 있었지요. 우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서 그냥 돌아왔어요. 그래서 시신은 못 찾았지만 비석이라도 세우고 해야 하지 않겠냐 해서 죽은 이들의 혼을 불러다 헛 봉분을 쌓고 묘지를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한림에서 굿을 하고, 죽은 사람들이 저승에 가서 잘 살도록 길도 쳤습니다. 그 후 한 번 시신들이 있는 곳을 가 봤는데 그 곳은 다 바뀌어 집들이 들어서 있었어요.

 임문숙씨 가족 묘지로 봉분 7기가 있는데, 모두 시신이 없는 헛묘이다. 5기의 비석 중 이성보의 비문은 다음과 같다. 

 

 '氏 李成寶는 濟州 四․三 事件 時 西歸浦 正房폭포에서 悲痛하게 死去하시니 屍體 確認치 못하여 墓所를 設定하니 子孫들의 至誠으로 省墓하며 永世不忘하소서.'  

 

 

〇 동광리 마을 재건은 매우 늦게 이루어졌다. 동광리 주민들이 재건을 시작한 것은 고향을 떠난 지 7년이 되는 1956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재건을 하면서도 무등이왓이나 삼밭구석 등의 옛 마을터로 돌아갈 수 없었다. 재건은 성을 쌓고, 그 안에서 생활해야 하는 조건이었던 것이다. 당시 주민들은 자신들의 집터로 돌아가기를 원했으나 재건을 주관하고 있던 관과 경찰에서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마을을 재건하기에 앞서 간장리 마을을 둘러싸는 성담을 쌓았다. 성의 높이는 3미터 가량이며, 밑은 2미터, 위족은 1미터가 조금 못되는 길쭉한 마름모꼴 형태였다. 다시 성 안에서는 누구 땅이든 마음대로 집을 지을 수 있게 허가를 했다. 그 기간은 3년이었으며, 3년이 지나면 능력대로 땅을 사서 소유하기 시작했다. 

 

마을로 돌아온 사람들은 해마다 8월 초하룻날이면 벌초를 했다. 그러나 시신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벌초를 할 묘지조차 없었다. 특히 정방폭포에서 학살된 사람들은 대부분이 시신을 거둬오지 못했다. 정방폭포의 희생자가 유독 많았던 임씨 일가에서는 사태가 진정되자 조상과 일가의 시신을 수습하려고 했다. 

 

4.3사건이 진정되니까 시신이라도 찾아서 장례라도 치러야 할 것 아니냐는 얘기들이 살아남은 친척들 사이에서 나왔습니다. 칠성판을 만들어 들고 학살터라는 정방폭포 위에 갔습니다. 가서 보니까 뼈들이 막 엉켜져서 도저히 누가 누구의 시신인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위치를 아는 사람들과 여럿이 같이 같습니다. 거기에는 우리집 방(대략 5평 크기) 만큼 했었는데 구덩이를 조금 파고 그 안에서 전부 죽였던 것 같았습니다. 주변에는 옷들도 일부 흩어져 있고 하였지만 이미 살이 삭아들어 뼈만 남은 것이지요.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서 그냥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시신은 못찾았지만 죽은 이들의 혼을 부르고, 비석이라도 세우고 그래야 되지 않느냐고 해서 묘소를 헛봉붐으로 만들었습니다. 한림에서 굿을 하고 죽은 사람들을 위해 길을 쳤습니다. 그 후에 한번 시신들이 있는 곳을 가봤는데 전부 변경을 하여 집들이 들어섰어요.(임문숙)

 

이 헛묘는 현재의 동광육거리 검문소 대각선쪽 밭 한켠에 있다.  모두 아홉기의 묘지가 있는데, 묘지를 만들고 비석을 세운 이는 임문숙씨로 되어있다. 

 

< 출처: 제주4.3 제50주년 기념 학술문화사업추진위원회, 『잃어버린 마을을 찾아서』, 1998 >

 

 

 

 

 

 현장사진

 

 

 

 

 

 

 

 

 

 

 

 

 사료(문서, 사진, 증언)

  

 

〇 임문숙(林文淑, 1926년생) 증언(1997.09.05)

“큰어머니(김씨), 어머니(張씨), 아내(김씨), 사촌 임승수 부부 합묘

왼쪽엔 5촌 임원현 부부 합묘, 제수(조씨), 5촌 임원호의 아내(이씨) 등 모두 9명이며, 합묘가 둘 있으므로 묘 숫자는 7기다. 9명 중에서 임승수는 정방폭포에서 죽은 게 아니다. 그러니까 정방폭포에서 죽은 사람은 8명이다.

섭섭하기도 했고 어른들이 권유해서 헛묘를 했다. 6·25 전에 칠성판까지 마련해 정방폭포 현장(물 떨어지는 위에서약 20미터 거리. 물 아래 쪽으로 떨어뜨린 것 아님)에 가보니 시신도 썩고 뼈들이 엉켜있어서 도저히 수습할 형편이 안됐다. 그 후에는 어디론가 치워져 없었다. 그래서 군대 갔다 온 후에 심방을 동원해 현장에 가서 혼을 불러 왔다. 며칠 전에 벌초했다. 섭섭해서 헛묘를 만들었지만 허망한 일이다.“

 

 

〇 임문숙(林文淑, 1926년생) 증언(2001.12.26)

“다른 가족들은 같이들 숨어 다녔다. 큰넓궤 토벌 이후 산사람을 따라 일단 볼레오름으로 올라갔다. 그러면 천막을 치던가 해서 일단 수용을 한다. 거기서 사는 도중에 습격을 받았다. 그때에도 노인들은 그대로 있고 젊은 사람들은 나무를 해다가 밥을 했다. 그러다 토벌대한테 잡히니까 우리는 피해 나와서 삼밧동(마전동) 근방에서 살았다. 우리는 남자고 힘이 있고 그래서 도망을 쳤는데 그때 부인이나 어른들은 노인들이고 여자여서 도망을 못 친 것이다. 그때 아이들도 한 15세 정도 되는 아이들도 몇이나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서귀포로 내려갔다. 서귀포에서 수용되어 살다가 정방폭포에서 희생당한다. 1948년 음력 12월 24일이다. 

그날 희생자가 많다. 어머니 두 분(김경호 장정숙-생모)하고 사촌형수(양창인)가 같이 돌아가셨다. 우리 5촌들도 다 돌아가셨다. 다 같이 돌아가신 것이다. 동광사람은 거의 다 서귀포에서 희생당했다

나중에 들었는데 무등이왓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동광 고씨 집안 사람들이 서귀포에서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 대개는 어린 아이들 뿐이었다. 열댓살 난 아이들이다. 

그날 돌아가신 분들의 시신을 찾아온 사람은 없다. 나도 군대를 갔다 와서 시신을 찾아  보려고 했는데 이미 뼈가 다 혼합된 상태여서 수습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와버린 적이 있다. 그때도 폭포 근처에 시신이 있었다. 유골은 하나도 수습이 안됐다. 송악산 예비검속으로 희생된 사람들은 신 옷 등으로 구분을 해서 수습을 했다고 하는데 서귀포에서는 일절 그런 일이 없다.“ 

 

“동광출신이 한 40~50명이 죽었을 것이다. 나는 군대 갔다 온 다음에 거길 가봤다. 뼈다귀들이 있었다. 폭포에서 물 떨어지는 옆에 굴처럼 파져있었다. 넓지 않았는데 거기 시신이 다 있었다. 흙은 덮은 척 한 것이다. 시신이 혼합되어 있어서 자기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 시신을 찾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처음 갔을 때 시신을 확인할 수 없으니까 다시 가보지 않았다. 바닷물이 들어오는 곳은 아니었다. 조금 나온 곳이었다. 

내가 서귀포를 갈 때 보니까 거기 건물들이 쫙 들어와 있었다. 거기도 두 군데였다. 바닷가인데 두군데이다. 정방폭포 물 떨어지는 주위에 두 군데이다. 거기는 총으로 쏘아 죽였다. 폭포 위에 물 떨어지는 양 옆이다. 그래서 그 동산에 지금 다 건물들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옛날 실습학교 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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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상생·해원 바람의 진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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