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큰넓궤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서귀포시 지역구분(읍면) 안덕면 지역구분(마을별) 동광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90번지 일대
GPS 위도 33.31075, 경도 126.357638888889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〇 동광리의 큰넓궤와 도엣궤는 동광목장 안에 있는 용암동굴로 1948년 11월 중순 이후 동광 주민들이 2개월 가량 집단적으로 은신생활을 했던 곳이다. 동광리 주민들이 대거 이 굴로 숨어들게 된 것은 11월 15일 중산간마을에 대한 초토화작전이 시행된 이후였다. 이 날 토벌대는 무동이왓 주민들을 전부 모이게 한 후 그 중 10명을 무자비하게 총살하고 간장리를 불태웠다. 그 후 동광 주민들은 마을 인근 여기저기에서 숨어 사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주민들은 주로 도너리오름 곶자왈에서 숨어 살았다. 그러다 주민들은 큰넓궤를 발견하게 되고, 폭설이 쏟아지자 이 굴로 들어갔다. 큰넓궤는 험한 대신 넓었고, 사람들이 숨어 살기에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 후 이 굴로 찾아든 사람은 120여 명이 되었다. 당시 어린아이들이나 노인은 이 굴속에서 살았다. 청년들은 주변 야산이나 근처의 작은 굴에 숨어 토벌대의 갑작스런 습격에 대비하여 망을 보거나 식량이나 물 등을 나르는 일을 했다. 동광리 신원숙 씨는 당시 생활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밥은 큰넓궤에서 하지 않았어요. 근처에 작은 굴들이 많았는데 주로 거기서 며칠에 한 번씩 해서 밥을 차롱에 담았다 먹었어요. 또 물은 삼밧구석의 소 먹이는 물을 항아리로 길어다 먹었어요. 밖에 다닐 때는 발자국이 나지 않게 돌만 딛고 다니거나, 마른 고사리를 꺾어다가 빌 디뎠던 곳에 꽂아 발각되지 않게 했죠. 똥도 밖에 나가서 누지 못했어요. 굴 한쪽을 변소로 정해서 거기에다 변을 보도록 했지요. 하동 사람들은 아랫굴에 살았고, 상동 사람들은 주로 윗굴에 살았어요. 그러다 보니 상동 사람들은 변소가 있는 굴까지 가기 힘들어 항아리에 쌌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버리곤 했지요.

동광리 주민들은 큰넓궤에서 40~50여 일을 살았다. 그러나 주민들은 토벌대의 집요한 추적 끝에 발각되고 말았다. 곧 토벌대는 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청년들은 노인과 어린아이들을 굴 안으로 대피시킨 후 이불 등 솜들을 전부 모아 고춧가루와 함께 쌓아 놓고 불을 붙인 후 키를 이용하여 매운 연기가 밖으로 나가도록 열심히 부쳤다. 토벌대는 굴속에서 나오는 매운 연기 때문에 굴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총만 난사했다. 그러다 토벌대는 밤이 되자 굴 입구에 돌을 쌓아 놓고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게 막은 다음 철수했다. 

 

토벌대가 간 후 근처에 숨어 있던 청년들이 나타나 굴 입구에 쌓여 있는 돌을 치우고 주민들을 밖으로 나오게 했다. 그리고 주민들에게 다른 곳으로 피하도록 했다. 그러나 굴속에 숨어 있던 사람들은 갈 곳이 막연했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고 눈이 많이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민들은 달리 어쩔 수 없었다. 옷이나 신발 모두 변변치 않았지만 한라산을 바라보며 무작정 산으로 들어갔다. 그 후 이들은 영실 인근 볼레오름 지경에서 토벌대에 총살되거나 잡혀 서귀포로 갔다. 이들은 정방폭포나 그 인근에서 학살됐다.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좁은 입구를 지나면 5m 정도의 절벽이 나오고, 이곳을 내려서면 이 굴에서 가장 넓은 장소가 나온다. 바닥이 제주도 현무암 그대로여서 울퉁불퉁해 위험하다. 이곳을 지나면 토벌대의 총알을 막으려고 쌓아 놓은 돌담이 한 쪽에 쌓여진 곳이 있고, 양쪽으로 깨진 그릇 파편들을 볼 수 있다. 이곳부터 굴이 좁고 낮아져 조금 가면 약 30m 정도 기어들어가야 하는 곳이 나온다. 이 굴에서 가장 드나들기 어려운 곳이다. 이곳만 지나면 굴은 다시 높아져 다니기 쉬우며 그 안에는 이층굴도 나오고 좀 넓은 곳이 나온다. 최근에는 큰넓궤를 소재로 한 영화 <지슬>이 제작되기도 했다. 

<출처: 제주4.3연구소, 「4.3역사의길 조성 기본계획수립 용역보고서」, 2015>

 

 

〇 큰넓궤를 가기 위해선 제주시에서 모슬포로 가는 서부산업도로 버스를 타고 한라산자락을 넘어야 한다. 동광마을은 해발 300m에 위치해 있는 산간마을로 원래 동.서광을 합해  광청이 라 불리웠다. 그후 행정구역의 동서광으로 분류되면서 동쪽의 너븐드르라는 뜻에서 동광(東廣)이라 부른다. 지금도 동광마을 주변의 마을사람들은  광챙이  광챙이 웃드르 놈 하고 부르는 소리가 오히려 정겹다며 궂이 옛말을 버리려하지 않는다.

 

마을을 지나 곧바로 이어지는 목장길을 따라 목장마루턱을  오르려니  숨이 턱턱 차다. 목장 마루는 제법높다. 언제 이렇게 높이 올라왔냐 싶게 저 멀리 모슬포가 한눈에 들어온다. 산방산, 단산 ,모슬봉이 어우러지는 그림이 마음을 흔든다. 장두의 위용을 자랑하는 산방산 밑으로 바다를 휘감는 듯한 낮은곡선의 송악산, 한반도의 끝을 에워싸는 가파도와 마라도가 파도에 출렁인다.

 

목장 부근은 작은궤가 천지에 널려 있다. 당시의 산사람들은 이런 용암지대를 지날때면 발을 쿵쿵 굴려 땅에서 울리는 소리에 따라 궤와 빌레(암반)를 식별하였다고 한다. 나도 발을 통통 굴려보지만 도무지 어림이 없다.

 

돌담을 경계로 동광목장 숲속에 있는 궤가 도엣궤(큰넓궤 입구에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고, 돌담을 넘어 가지가 무성한 종나무 밑에 가려진 궤가 큰넓궤(부근에서 제일크고 넓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큰넓궤가 있는 곳도 원래 동광마을 공동목장이었으나 지금은 돈많는 재벌에 넘겨져 버렸다  한다. 외지인의 땅이란 말에 한없이 슬프고 분했다.

 

동광마을에서 처음 4`3사태가 나기 시작한 것은  보리공출반대사건 이라. 면서기들이 와서 보리를 공출하라는 거라. 일제때도 그렇게 공출로 시달렸는데 해방이 되어서도 공출을 하라고 한다면서 마을사람들이 면서기 잡아서  때려 버렸지.그후 경찰들이 주모자들을 잡으러 오고 마을이 시끄러워 지자 마을사람들은 하나 둘씩 산으로 오르기 시작했어. 또 그후에 무자년 음력 시월 열나흘날은 군인들이 올라와서 마을 사람들을 팡팡 쏘아 죽여불고 소개명령이 내려 집을 불태워 없애 버렸어. 집잃은 마을 사람들은 피난처를 찾아 헤메다 큰넓궤를 찾아가 살게 된거라 

 

동광마을 주민의 말처럼 당시 마을주민들은 토벌대에 의하여 마을을 잃고 마을주변을 헤매다 결국 큰넓궤로 하나 둘씩 모여 서로 어우러져 살게 된것이다. 주민들은 이궤에서 토벌대에 발각되기까지 60여일 동안 살았다. 그러나 마을에서와 같은 공동체와 엄격한 규율속에 생활 하였다.

당시 굴속에 생활을 생생히 기억하는 신원숙씨는

 

굴속에서의 생활을 엄격해서 똥도 밖에가서 함부로 누지 못했어.한쪽 가지의 굴을 변소보는 곳으로 정해서  거기에다가 똥을 누도록 했지. 굴속에서 밥을 하면 연기가 새어나가니까 근처에 있는 작은궤나 숲에서 밥을 하여다가 먹었는데 사람들끼리 수눌거나 가보시끼허영(합작하여) 며칠치 밥을 한꺼번에 지어서 차롱(대나무로 만든 뚜껑달린 바구니)담아다가 먹어서. 밥이렌  허여봐야 잘해야 조밥이라. 지금도 어머니가 밥차롱을 손으로 밀면서 굴속을 기어가던 생각이 눈에 선해  

차마 믿기 어려운 마을 사람들의 증언을 떠올리며 궤로 들어서니 암흑천지였다. 궤는 입구부터 험했다. 좁은 목을 기어서 지나니 발아래 2-3m의 험한 절벽이 나타났다. 당시에는 이곳에 사다리를 놓아서 다녔다고 하는데 지금은 썩어 없어져 절벽을 타고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절벽아래는 상상외로 넓었다. 손전등을 들고 사방을 살펴보니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돌로 쌓았던 방어벽이 그대로 남아 있다. 궤안쪽에는 토벌군이 들어오면 굴의 좁은목을 막으려고 했던 돌덩이도 보인다. 이 얼마나 삶에 대한 처절한 몸부림인가?

 

돌로 쌓은 방어벽 주변에는 깨진 질그릇과 소화시대 양철대야, 대 일본제국 이라 쓰여진 병조각들이 나뒹굴고 있다.  유물 하나 하나에 당시 제주민중들의 생활상과의 아픔을 보는 듯 하다. 궤속은 들어갈수록  좁아져서 배를 바닥에 대고 무릅과 팔굽으로 포복하듯이 기어들어 갈수 밖에 없다. 깜깜한 이곳에 숨어 긴장과 불안함에 애간장을 태웠을 이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싸늘해지며 한기마저 느껴진다. 휴-한숨을 몰아쉬며 좁은목을 빠져나와 안으로 들어가보니 궤바닥의 돌을 치우고 골라 잠자리로 사용했던 넓은 곳이 나왔다. 여기에는 새(띠)를  베어다 깔고 그위에 멍석을 깔아 잠을 잤다고 한다. 40년이 지나는 세월동안 이러한 흔적들은 거이 찾아볼수 없고 누군가 잃어버려 애를 태웠을 썩어가는 고무신 한짝과 놋숟가락등이 나뒹굴고 있을 뿐이다.

 

깜깜한 굴속에서 60여일 동안의 삶, 그들은 모질게 밟아도 죽지않는 질경이 같은 목숨 때문에, 대명천지를 마음껏 활보할수 있는 그날 때문에, 각지불조차 제대로 켜보지 못하고 칠흑보다도 깜깜한 어둠속에서 가슴을 조였는지도 모른다. 이 궤속에 숨어 살았던 이들에게  광명은 진정 어떠한 것이었을까? 이들이 삶의 의미는 무었이었을까? 어쩌면 이들이 학수고대하였던 삶의 내용이  우리들이 살아갈 삶의 모범답안이 될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출처: 제주4.3연구소, 「4.3장정」>

 

 

 

○ 밑으로 내려가지 못한 대다수 마을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그들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끼지 시작했다. 당시는 내려갔다가는 무조건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해안마을로 내려가지도 못하고 숨어 다닐 수밖에 없었다. 숨어 다니면서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수많은 학살을 보고 들으면서 더욱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 헤매다닌 끝에 그들이 발견한 곳은 바로 동광리 서북쪽으로 약 2.5km정도 떨어진 도노미오름 근처의 ‘큰넓게’였다. 

 

친척이고 뭐고 없어. 우선 자기가 살아야지. 숨어 다니다가 동네 사람들은 만나면 혹시 잡으러 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서로가 서로를 무서워하게 되었어. 낯익은 동네분이라도 만나면 ‘그간 어떻게 살아 있었구나’하는게 인사라. 그렇게 숨어 다니다가 큰넓게 소문을 들었어. 왜정 때 폭탄으로 때려도 끄떡하지 않은 안전한 큰 굴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을 찾아가게 됐지.(동광리, 신○숙)

이미 그곳에는 동광리 하동에서 온 아래 마을 사람들이 숨어 지내고 있었다. 두려움 속에서 숨어 다니던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모여 있게 되자 어느 정도 두려움도 없어지고 서로가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그 굴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들어가는 입구가 숲더미에 가려져 있어 주의해서 살펴보지 않으면 좀체로 발견되기 어려운 안전한 은신처였다. 

 

‘큰넓게’에 숨어 살던 120여 명 정도의 사람들 중에서 주로 어린아이들이나 노인들은 굴 속에 살았고, 일부 젊은 청장년들은 대나무로 만든 창을 가지고 다니면서 주변 야산이나 근처의 작은 굴엣 숨어 있으면서 토벌군들의 갑작스런 습격에 대비하여 망을 보거나 식량이나 물 등을 나르며 유격대들의 피신 연락을 안에다 알려주는 일 등을 하였다.

 

“밥은 큰넓게에서 하지 않고, 근처에 있는 작은 굴들이 많았는데 주로 거기서 밥을 해서 차롱(대나무로 만든 뚜껑달린 바구니)에 담아 며칠에 한 번씩 지어다가 먹었고, 물은 마전동에 소 먹이던 물을 항아리에 길어서 날라다가 먹었어. 밤에 다닐 때는 발자국이 나지 않게 돌만 딛고 다니거나 마른 고사리를 꺾어다가 발 디딘 곳에 꽂아두면서 다녔지. 똥도 밖에 나가서 누지 못했어. 한쪽 굴을 변소 보는 데로 정해서 거기에다가 변을 보도록 했지. 하동 사람들은 밑에 굴에 살았고, 상동 사람들은 주로 윗굴에 살았는데, 상동 사람들은 변소가 있는 굴까지 가기 힘드니까 항아리에 누었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버리곤 했지.”(동광리, 신○숙) 

 

큰넓게에서 한 40~50여 일 정도 살았으나 그곳도 결국 토벌대의 집요한 추적 끝에 발각되고 말았다. 굴 밖에서 보초를 서던 사람이 토벌대에게 잡히고 만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굴을 안내할 것을 강요하는 토벌대의 위협에 못 이겨 토벌대를 데리고 큰넓게까지 왔다. 굴이 매우 복잡하고 험했기 때문에 그 굴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면 제대로 걸어 들어갈 수가 없었다. 굴에 익숙해 있는 그는 토벌대가 뒤로 따돌리고 재빨리 굴 속에 들어와 토벌대에 발각되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는 토벌대가 쏘아대는 총에 허벅지를 맞았으나 살아났다. 

 

일단 노이들이나 어린아이들이 굴 안 쪽으로 피신시켜 두고 피신생활에 쓰여졌던 이불이나 솜들을 전부 모아 굴 입구 쪽에 고춧가루와 함께 쌓아놓고 불을 붙였다. 키를 사용하여 매운 연기가 밖으로 나가도록 열심히 부쳤다. 토벌대들은 굴 속에서 나오는 매운 연기 때문에 더 이상 굴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만 총을 쏘아댔다. 밤이 가까워지기 시작하자 토벌대들은 굴 입구에다 돌을 쌓아놓고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게 막은 다음 철수하였다. 

 

근처 도노미오름에서 망을 보던 마을 청년들과 유격대들이 이 광경을 목격하고 토벌대들이 완전 철수한 것을 확인한 후, 큰넓게로 내려와서 토벌대가 쌓아놓은 돌을 전부 허물어 내고 마을 사람들에게 안전한 곳에 피신할 것을 권유하였다.

 

큰넓궤에 있었던 120여 명의 사람들은 더 이상 갈 곳이 막연해졌다. 게닥 그 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고 눈이 많이 내렸다. 옷이나 신발이 제대로 갖춰지지 못한 그들에게 그 혹한의 눈 덮인 산은 바로 죽음으로 몰아가는 잔인한 학살이나 다름없었다.

 

“그때가 12월달이라. 눈이 이 만큼씩 쌓였어. 그 해는 왜 그렇게 눈이 많이 왔는지...... 눈에 팡팡 빠져서 도저히 걸을 수도 없었어. 따뜻한 굴에 살다가 굴 밖을 나오니까 덜덜 떨리고 동상이 걸릴 판이야. 우리 아버지는 ‘차라리 여기서 죽어 버리겠다’고 안가시겠다며 주저앉아 버리고, 우리들은 ‘죽어도 도망가다가 죽어야지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울고불고......”(동광리, 신○숙)

 

대부분의 사람들은 볼레오름으로 피신해 갔다. 볼래오름은 한라산 영실 근처에 있는 유격대들의 활동 근거지로, 큰넓궤에서 직선거리로 1.5km정도 떨어져 있는 먼 곳이다. 

 

“우리가 듣기로는 볼래오름이 산사람들의 본부라고 했는데, 사람들이 제일 많이 피신한 곳이라서 토벌군들이 쫓아와 총으로 쏘아대도 산에서는 맞대응을 못한 모양이라. 큰넓궤에 있었던 사람들 중에 백여 명이 볼래오름으로 갔다가 한 60여 명이 죽었을거라. 안덕면 일대 사람들이 전부 갔으니까 수로 셀 수도 없어. 무자년 12월이라. 볼래오름에서 잡힌 사람들은 정방폭포에 끌려가서 죽었는데 시체도 찾지 못했어.”(동광리, 신○숙)

 

이들은 유격대들과는 약간 떨어진 볼래오름 근처 초기밭(표고 버성르 재배하는 밭)에서 주로 살았는데, 피난민이라고 따로 취급받았다. 여기서 약 보름 후에 토벌대의 추격을 받아 모두 잡힌 것이다 (「제주신문」‘4·3의 증언’, 1989.4.3.). 15km의 눈 덮인 산을 단지 살기 위해서 갔던 사람들이다. 

 

“무자년 섣달 스무 나흘 날이야. 서귀포 정방폭포 우녘편(위쪽편)에서 다 죽였는데, 뒷해 섣달이 되어서야 겨우 시체를 찾으러 갈 수 있었어. 시체가 다 썩어져서 너것 나것도 몰라. 그냥 총 쏘아서 쓰러지니까 흙만 덮어 내버린 거지. 찾지 못한 시신들이 많아. 시신들을 찾지 못한 가족들은 나중에 칠성판을 만들고 옷 지어다가 무당들을 불러 놓고 정방폭포에서 혼만 불러다가 영장을 치렀지.”(동광리, 김○수)

 

그렇게 해서 시신이 없는 무덤인 ‘헛묘’가 생겨났다. 동광 육거리 근처에도 헛묘라는 시신없는 무덤이 9자리나 된다. 이 중 합묘(부부를 하나의 묘지에다 합쳐서 묻은 무덤)가 2자리나 된다. 이러하 헛묘는 이 외에도 많다. 

당시 불래오름으로 오르지 못한 사람들은 속칭 ‘당애머들’이라고 하는 도노미오름 동쪽에 있는 밀림지대로, 혹은 일본군들이 파놓은 근처의 굴에, 혹은 미오름(戊岳)으로 오르다가 토벌군들에게 잡혀 죽어갔다. 

 

“우리는 강○주 씨 부친으로부터 ‘미오름으로 가면 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큰넓게에서 나와서 미오름으로 갔어. 밤새껏 걸어서 미오름에 도착해 보니 해가 흐지근하게 밝아 오는거라. 그 굴은 넓지는 않았지만 골갱이(호미)로 한 시간 정도 파면 한 식구 정도는 들어가 살 수 있어. 송이흙이니까 파서 아래로 던져도 흔적이 안 남으니까 숨기엔 좋은 곳이었어.”(동광리, 김○수)

 

미오름에 올랐던 사람들은 강씨나 신씨네 가족들 이외에도 서너 가호쯤 더 있었다. 같이 올랐던 강○주 씨네는 큰넓게를 나와서 눈길을 올라가다가 같이 데리고 갔던 5살된 아이 하나가 추위에 얼어 죽어 눈길에 묻어두고 와야 했다. 미오름도 토벌대에게 발견되고 말았다. 미오름에서 숨어지낸 지 2,3개월 정도 지난 때였다. 신씨는 밥을 짓기 위해 미오름을 내려와 근처 숲속에서 밤을 지내고 있었다. 그 날 밤 미오름에서 켜놓은 조그만한 각지불이 토벌대의 눈에 띤 것이다. 

 

“그 날 밤, 밥 짓는 데서 보니까 미오름에서 연기가 막 났어. 무서워도 그 날 밤은 그 곳에서 꼼짝않고 지내다가 새벽이 되니까 같이 지내던 강○주 씨네 형제분 둘이 내가 있는 곳을 찾아왔어. 그 분들은 우리랑 같이 살지는 않고 주로 산에서 지내는 것 같았는데 가끔씩 미오름에 식구들이 안전하게 있는지 확인하고 돌아가곤 했어. 그분이 와서 ‘네 아버지하고 식구들은 다 잡혀가고 우리 아버지는 죽었다.’라고 말해 주는 거라. 같이 굴에 가보니까 그분네 아버지는 총에 맞고, 불에 타서 죽었어. 같이 흙을 파서 묻어 주려는데 시신의 눈이 제대로 감기지 않아. 그러자 그 강씨 형제들이 ‘우리가 아버지 원수를 갚아 드릴테니까 이제는 안심하고 눈을 감으세요.’하고 슬퍼하는 거라. 같이 묻어주고 난 후에 나는 그 분들과 헤어졌어.”(동광리, 신○숙)  

<출처: 제주4.3연구소, 「4.3장정 3」>

 

 

〇 동광리의 큰넓궤와 도엣궤는 동광목장 안에 있는 용암동굴로 1948년 11월 중순 이후 동광 주민들이 2개월가량 집단적으로 은신생활을 했던 곳이다. 동광리 주민들이 대거 이 굴로 숨어들게 된 것은 11월 15일 중산간 마을에 대한 초토화 작전이 시행된 이후였다. 이 날 토벌대는 무동이왓 주민들을 전부 모이게 한 후 그 중 10명을 무자비하게 총살하고 간장리를 불태웠다. 그 후 동광 주민들은 마을 인근 여기저기에서 숨어 사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주민들은 주로 도너리오름 곶자왈에서 숨어 살았다. 그러다 주민들은 큰넓궤를 발견하게 되고, 폭설이 쏟아지자 이 굴로 들어갔다. 큰넓궤는 험한 대신 넓었고, 사람들이 숨어 살기에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 후 이 굴로 찾아든 사람은 120여 명이 되었다. 당시 어린아이들이나 노인은 이 굴속에서 살았다. 청년들은 주변 야산이나 근처의 작은 굴에 숨어 토벌대의 갑작스런 습격에 대비하여 망을 보거나 식량이나 물 등을 나르는 일을 했다. 

 

동광리 신원숙 씨는 당시 생활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밥은 큰넓궤에서 하지 않았어요. 근처에 작은 굴들이 많았는데 주로 거기서 며칠에 한 번씩 해서 밥을 차롱에 담았다 먹었어요. 또 물은 삼밧구석의 소 먹이는 물을 항아리로 길어다 먹었어요. 밖에 다닐 때는 발자국이 나지 않게 돌만 딛고 다니거나, 마른 고사리를 꺾어다가 빌 디뎠던 곳에 꽂아 발각되지 않게 했죠. 똥도 밖에 나가서 누지 못했어요. 굴 한쪽을 변소로 정해서 거기에다 변을 보도록 했지요. 하동 사람들은 아랫굴에 살았고, 상동 사람들은 주로 윗굴에 살았어요. 그러다 보니 상동 사람들은 변소가 있는 굴까지 가기 힘들어 항아리에 쌌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버리곤 했지요.”    

 

동광리 주민들은 큰넓궤에서 40∼50여 일을 살았다. 그러나 주민들은 토벌대의 집요한 추적 끝에 발각되고 말았다. 곧 토벌대는 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청년들은 노인과 어린아이들을 굴 안으로 대피시킨 후 이불 등 솜들을 전부 모아 고춧가루와 함께 쌓아 놓고 불을 붙인 후 키를 이용하여 매운 연기가 밖으로 나가도록 열심히 부쳤다. 토벌대는 굴속에서 나오는 매운 연기 때문에 굴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총만 난사했다. 그러다 토벌대는 밤이 되자 굴 입구에 돌을 쌓아 놓고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게 막은 다음 철수했다. 

 

토벌대가 간 후 근처에 숨어 있던 청년들이 나타나 굴 입구에 쌓여 있는 돌을 치우고 주민들을 밖으로 나오게 했다. 그리고 주민들에게 다른 곳으로 피하도록 했다. 그러나 굴속에 숨어 있던 사람들은 갈 곳이 막연했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고 눈이 많이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민들은 달리 어쩔 수 없었다. 옷이나 신발 모두 변변치 않았지만 한라산을 바라보며 무작정 산으로 들어갔다. 그 후 이들은 영실 인근 볼레오름 지경에서 토벌대에 총살되거나 잡혀 서귀포로 갔다. 이들은 정방폭포나 그 인근에서 학살됐다. 

 

큰넓궤는 험하다.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좁은 입구를 지나면 5m 정도의 절벽이 나오고, 이 곳을 내려서면 이 굴에서 가장 넓은 장소가 나온다. 바닥이 제주도 현무암 그대로여서 울퉁불퉁해 위험하다. 이 곳을 지나면 토벌대의 총알을 막으려고 쌓아 놓은 돌담이 한 쪽에 쌓여진 곳이 있고, 양쪽으로 깨진 그릇 파편들을 볼 수 있다. 이 곳부터 굴이 좁고 낮아져 조금 가면 약 30m 정도 기어들어가야 하는 곳이 나온다. 이 굴에서 가장 드나들기 어려운 곳이다. 이 곳만 지나면 굴은 다시 높아져 다니기 쉬우며 그 안에는 이층굴도 나오고 좀 넓은 곳이 나온다. 

 

<출처: 제주4.3연구소, 『4.3유적 Ⅱ』>

 

 

 

 

 현장사진

 

 

 

 

 

 

 

 

 

 

 

 

 

 

 

 

 

 

 

 

 

 

 

상처받은 영혼을 향한 희망이 불어오는 곳
평화·상생·해원 바람의 진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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