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영모원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제주시 지역구분(읍면) 애월면 지역구분(마을별) 하귀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하귀1리 1130-1번지
GPS 위도 33.4722222222222, 경도 126.418277777778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〇 영모원은 일제강점기 때 도내에서 가장 많은 항일운동가를 배출했고, 4·3 당시에도 엄청난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당했던 대표적인 마을인 하귀리 주민들 스스로의 노력으로 조성된 데 큰 의미가 있다. 그동안 한 자리에 모시기 어려웠던 4·3희생자의 신위를 한 곳에 모심으로써 화해와 상생의 표본이 되고 있으며, 4·3이후 동서 마을 간에 존재했던 갈등도 풀어내어 마을과 주민화합에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하귀 영모원은 이후 다른 마을에까지 영향을 주었으며, 제주도민의 평화역량을 과시한 귀중한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제주시 애월읍 하귀리는 4·3 당시 1구와 2구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1구는 속칭 '군냉이'로 불리어졌고, 2구는 미수동, 가문동, 학원동, 답동 번대동의 5개 마을을 아우르는 큰 마을이었다. 전대미문의 4·3의 난리를 겪은 하귀 주민들은 이후 1구는 동귀리, 2구는 귀일리로 마을 이름을 바꾸었다. 이것은 이념으로 덧칠된 '하귀리 출신'이란 피해의식의 소산이었다. 

 

이후 동귀리와 귀일리는 마을개발과 기관유치 등의 문제로 잦은 마찰과 갈등이 있기도 했으나, 한편에서는 갈라진 마을이 다시 하나의 마을로 합쳐져야 한다는 의견이 모아지기도 했다. 결국 1993년 두 마을은 하귀리로 하나가 되었으며, 2년 뒤에는 북제주군 조례로 동귀리는 하귀1리, 귀일리는 하귀2리로 마을 이름이 환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즈음 하귀리민들은 '하귀발전협의회'를 조직하여 마을이 발전과 화합을 추진하던 중 4·3희생자 위령단을 세워 마을의 화합을 이루자는 의견이 모아져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게 된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은 4·3희생자와 함께 일제시기 항일운동가와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 희생된 호국영령들을 한 곳에 모셔 추모하기로 하고 3년여 준비 끝에 2003년5월27일 영모원 제막식을 가졌다. 이 날 행사에는 도지사, 군수, 의원들의 모습은 없었고 관에서 참석한 귀빈은 애월읍장 정도였다. 관의 지원없이 주민들 스스로 만들어 낸 자존의 표현이었다. 

 

또한 제주현대사의 걸출한 선각자들을 배출한 하귀리 주민들의 뛰어난 역사의식의 발로이기도 했다. 

마을 통합 10주년을 맞이하는 2003년에 영모원을 조성한다는 계획에 따라 추진위원회는 모금운동에 들어갔다. 우선 마을의 축제 분위기 속에서 해야한다는 취지로 걸궁단을 만들어 자생단체와 기관, 상가, 가가호호를 돌며 이틀간 모금운동을 한 결과 만족할 만한 성금이 모였다. 여기에 제주시, 서울 등 출향인사와 하귀 출신 제일동포들이 성금이 보태져 마을 스스로 만들어 낸 제주도 유일의 4·3추모공원이 조성된 것이다. 

 

또한 소설가 고원정 등 하귀 출신 문인들이 비문을 집필하여 감동적인 명문장으로 영모원을 빛내고 있다. 

 

4·3당시 하귀리는 하귀중학원을 계승한 단국중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죽음, 가문동 원뱅듸 학살사건, 개수동 진수리 학살사건, 외도지서 장작사건, 비학동산 학살사건, 붉은 질 학살사건, 하귀초등학교 '눈 감으라' 사건, 외도지서 서쪽밭 학살사건 등 토벌대의 무도한 진압으로 다양한 사건을 겪으며 320여명이 희생되었다.

 

억울한 일은 배두봉, 강창선 선생 등 항일애국지사들이 4·3의 광풍에 희생되어 지금도 이 일로 독립운동가로 선정이 되지 않고 있는 점이다.

 

마을의 발전과 화합을 위해 역사의 수렁에서 죽어간 모든 이들을 평등하게 추모하는 하귀마을 사람들의 고결한 역사의식에 숙연하지 않을 수 없다. 

 

4·3희생자의 영령을 순국지사 및 호국영령과 함께 추모함으로써 하귀리 사람들 스스로 이념의 굴레에서 해방되는 자기 승리의 역사를 만들어낸 것이다.

 

영모원 조성 이후 확연하게 마을이 화합분위기로 바뀌었다. 청년회, 부녀회에서도 자주 공원을 깨끗이 단장하고 있으며, 음력 1월 3일에는 전 주민이 참석하여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주민들도 자주 방문하여 참배하기도 한다. 

 

특히 마을을 방문하는 재일동포들은 "이제는 마을에 와도 꼭 찾아 볼 곳이 생겨 기쁘다"며 즐거워 한다고 한다. 

 

찾아가는 길은 제주시에서 일주도로를 따라 하귀로 가다가 하귀1리 신호등에서 파군봉 쪽(한라산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이 길은 광령3리 자종이마을로 이어지는 길인데 약2km 정도 올라가면 길 우측에 영모원이 나온다. 영모원 조금 위쪽이 잃어버린 마을인 '광동'이고, 광동에서 조금 더 가면 자종이 마을이다.
 

다음은 영모원 4·3위령비의 비문의 일부이다. 

 

'여기와 고개 숙이라.  섬나라 이 땅에 태어난 이들은 모두 여기 와서 옷깃을 여미라.


죽은 이는 죽은 대로, 살아남은 이는 살아 있는 대로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채 허공에 발 디디고 살아오기 어언 50여 년. 아버지보다 오래 살고 어머니보다 나이 들어서야 여기 모인 우리들은 이제 하늘의 몫은 하늘에 맡기고 역사의 몫은 역사에 맡기려 한다.  


오래고 아픈 상채기를 더는 파헤치지 않으려 한다. 다만 함께 살아남은 자의 도리로 그 위에 한 삽 고운 흙을 뿌리려 한다. 그 자리에서 피가 멎고 딱지가 앉아 뽀얀 새살마저 살아날 날을 기다리려한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모두가 희생자이기에 모두가 용서한다는 뜻으로 모두가 함께 이 빗돌을 세우나니 죽은 이는 부디 눈을 감고 산자들은 서로 손을 잡으라. 이제야 비로소 지극한 슬픔의 땅에 지극한 눈물로 지극한 화해의 말을 새기나니, 지난 50여 년이 길고 한스러워도 앞으로 올 날들이 더 길고 밝을 것을 믿기로 하자. 그러니 이 돌 앞에서는 더 이상 원도 한도 말하지 말자. 다만 섬나라 이 땅에 태어난 이들은 모두 한번쯤 여기 와서 고개를 숙이라.' 

<출처: 한라일보(2007.6.19.)>

 

 

 

〇 하귀리민들이 <하귀발전협의회>를 중심으로 일제시기 爲國節士(항일운동가)와 4․3희생자, 4․3 및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 희생된 호국영령들을 한 곳에 모셔 추모하기로 하고 3년 여 준비 끝에 2003년 5월 27일 제막식을 가졌다. 이 영모원은 일제시기 도내에서 가장 많은 항일운동가를 배출했고, 4․3 기간 많은 희생을 당했던 대표적인 두 마을(조천, 하귀) 중 한 마을인 하귀에서 주민들 스스로 논의하고, 준비하여 개원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그간 한 자리에 모시기 어려웠던 4․3 시기 군경 희생자와 4․3 희생자를 한 곳에 모심으로써 화해와 상생의 표본이 되고 있어 향후 다른 마을에서 비슷한 묘역을 개설하는 데는 물론 평화의 섬을 지향하는 제주도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제주시에서 일주도로를 따라 하귀로 가다 하귀1리 신호등에서 파군봉 쪽(한라산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이 길은 광령3리 자종이마을로 이어지는 길인데 약 2Km 정도 올라가면 길 우측에 영모원이 나온다. 영모원 조금 위쪽이 잃어버린 마을인 '광동'이고, 광동에서 조금 더 가면 자종이마을이다.  

<출처: 제주4.3연구소, 『4.3유적 Ⅰ』>

 

 

 

 

 

 현장사진

 

 

 

 

 

 

 

 

 

 

 사료(문서, 사진, 증언)

  

〇 위령단을 세우는 글

 

<전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사명을 다하였다면 이는 애국자로서 그 정신과 위업을 길이 보전하고 계승시켜나가는 것은 우리 모두의 사명이다.

외세의 침략과 전란, 재난과 시변에 고귀한 목숨을 잃었거나 모진 형옥의 고초를 겪고 무고한 죽음을 당하였던 영혼들이 지역마다 없지 않겠으나 우리 마을 하귀리는 유독 그 수가 많았음에도 이를 기려 추모하거나 위령의 빗돌 한 점 없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제 晩時之歎(만시지탄)이 있어 일제 강점으로 국권을 빼앗겼을 때 야학을 개설하여 청소년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경찰에 피검되어 모진 고문과 형옥을 치르셨던 선열들의 넋과 세계평화와 자유수호를 위해 국방전선과 해외전장에서 散華(산화)한 戰歿護國英靈(전몰호국 영영)을 追慕(추모)하고, 4․3에 무고히 犧牲(희생)된 채 구천을 헤매는  ?魂(원혼)들의 冥福(명복)을 빌고자 鄕民(향민)의 뜻을 모아 이곳에 靈域(영역)을 造成(조성)하여 英顯碑(영현비), 忠義碑(충의비), 慰靈碑(위령비)를 세운다.

이 靈域(영역)은 先人(선인)들이 남긴 崇高(숭고)한 忠節(충절)의 정신을 기리며, 後世敎育(후세교육)의 場(장)으로 삼고자 한다.

 

<측면 1>

趣旨文 世丁  글   

時文    장재성 지음

碑文    고원정 지음

檀碑    昔山  姜昌和 書

施工    兄弟石材社 

 

<측면 2>

下貴里民一同     建立

下貴發展協議會   主管

後援   在京下貴里民會

在濟州市下貴親睦會

京甫電氣  株式會社

檀紀  四三三六年 癸未  春

西紀  二ΟΟ三年  月  日

 

〇 爲國節士 英顯碑

 

<전면>

爲國節士 

英 顯 碑

 

<측면>

康文一 건국포상(1995.8.15) 

朴英淳 건국포상(1995.8.15) 

金弘奎 

裵斗鳳 

金乙鳳 

康庚生

高鵬益 

梁君三 

梁君七 

康昌善 

張奎賢 

金容範 

姜尙彦 

金禮太 

姜尙舜 

康昌孫

吳性善 

朴申淑

高公淑 

裵在出 외 80여 명 

 

<후면>

지난날 우리 국토가 제국주의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 침묵을 강요받던 시절에도 지표면 아래를 흐르는 지하수처럼 뜨거운 민족혼에 바탕한 크고 작은 저항운동은 삼천리 강산 어느 곳에서도 그친 바가 없었다. 남녘의 섬 제주 또한 예외가 아니었으니, 진취적인 기상으로 도내에서 손꼽히던 하귀의 청년들이 그 뒷줄에 설 리는 만무했다. 당시 강문일, 박영순, 김홍규, 배두봉 선생 등 하귀의 피끊는 청년들은 조국의 독립을 되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이 우선이라는 점을 자각하고 야학을 개설하였다. 하귀 1, 2구 두 곳에 각각 야학소를 운영하였으며 애국심과 신학문에의 동경을 안고 모여든 학생이 근 백 여명에 달했으니 그 열기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하겠다. 그 정열은 만세운동으로 번졌으니 1935년 봄(5월 5일) 야학생 80여명은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와 관전동에서 미수샘까지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다 왜경에 강제진압을 당하고 20여명이 외도주재소에 끌려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위 네 분 외에 강경생, 강창선, 김을봉, 고붕익, 양군삼, 양군칠 선생 등 10여명이 제주경찰서에 이송되었고 이어서 목포지청에까지 끌려가면서 선각자의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그 중 강문일, 박영순, 김홍규 세 분은 목포에서의 1심 재판과 대구에서의 2심 재판을 거치면서 각각 징역 1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이토록 자랑스러운 투쟁의 기억과 기록이 뚜렷하고 분명하건만 해방이후 파란 많은 정국으로 말미암아 이제야 작은 빗돌 하나를 세우기에 이르렀으니 이 어찌 부끄러운 일이라 하지 않으랴. 열사들의 후손 우리들 모두 새삼 옷깃을 여미며 이 자리에 섰으니 피끓은 그 분들의 목소리가 지금인 듯 들려오지 않는가. 그 날의 교훈이 이토록 생생하니 고향을 사랑하고 나라를 생각하는 청소년들이라면 이 작은 빗돌이 그분들을 기리는 마음의 끝이 아니라 작은  시작임을 다짐해야만 하리라. 

 

〇 護國英靈 忠義碑

 

<전면>

護國英靈 

忠 義 碑

 

<측면>

陸軍 少領 康大鉉

一中 金容彦 高南浩 梁漢? 李雲成 裵南植

二中 裵萬石 姜宗一 秦碩日  

下士 梁榮雨 康日煥 全崙弘 高昌謹 金祥賢 金善潭

徐己南 文藏盛 姜吉宋 

一兵 康濟植 姜益善 裵鎬卿 高龍先 任憲洙 康文俊

姜達鉉 金景宅 金明玉 金龍振 高碩道 

二兵 金太海

海兵 三曹 文性天 尹龍河

二水 高在斗 宋瑢奎

一兵 高忠佑

巡警   文元定

張才善

敎師   金璟淳

民保團 金德洙 配 申禮 

高承天 配 文戊生 

鄭達洙 金容鶴 金乙出 

姜仁   趙?兒

 

<후면>

한라 정기 굳게 맺힌 양지바른 곳에

온 향민 정성을 모아 신성한 영단을 마련하여

고귀한 충혼을 모시도다.

청춘 바쳐 나라 지킨 거룩한 넋들이여

그 공훈 천추에 길이 빛날진저.

혹은 부모 형제 남겨 두고 지아비가 떠났도다.

비통한 심정 절규하며 가슴이 에이고,

옷소매 적신지 어언 수십 성상이라.

한 맺힌 탄식으로 잊은 날이 없다오.

아아! 슬프도다!!

숱한 세월 구천을 헤매이던 원혼들이시여 !

이제 향민의 지극 정성에 감응하사 

원한의 상처 씻고 부디 안식하소서.

호국 간성으로 산화한 충 열의 넋 높이 기려

향 사르고 헌화하며 삼가 명복을 비나니

여기 고향의 품에 안겨 고이 잠드소서.

 

〇 4․3 犧牲者 慰靈碑

 

<전면>

4․3 犧牲者 

慰 靈 碑 

 

<후면>

여기 와 고개 숙이라

섬나라 이 땅에 태어난 이들은 모두 여기 와서 옷깃을 여미라

해방의 감격도 채 가시기 전, 6․25의 아픔이 한반도에 닥치기도 전에 

이 죄없는 땅 죄없는 백성들 위에 아직도 정체모를 먹구름 일어나서 그 

수많은 목숨들이 지금도 무심한 저 산과 들과 바다 위에 뿌려졌으니, 어느

주검인들 무참하지 않았겠으며 어느 혼백인들 원통하지 않았으랴. 단지 살아

있는 죄로 소리내어 울지도 못한 마음들은 또 어떠했으랴.

죽은 이는 죽은대로 살아남은 이는 살아있는대로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채 

허공에 발 디디고 살아오기 어언 50여년... 아버지보다 오래 살고 어머니보다 

나이 들어서야 여기 모인 우리들은 이제 하늘의 몫은 하늘에 맡기고

역사의 몫은 역사에 맡기려 한다. 오래고 아픈 상채기를 더는 파헤치지 

않으려 한다. 다만 함께 살아남은 자의 도리로 그 위에 한 삽 고운 흙을 뿌리려 

한다. 그 자리에서 피가 멎고 딱지가 앉아 뽀얀 새살마저 살아날 날을 기다리려 

한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모두가 희생자이기에 모두가 용서한다는 뜻으로 

모두가 함께 이 빗돌을 세우나니 죽은 이는 부디 눈을 감고 산 자들은 서로 

손을 잡으라. 이제야 비로소 지극한 슬픔의 땅에 지극한 눈물로 지극한 화해의 

말을 새기나니, 지난 50여년이 길고 한스러워도 앞으로 올 날들이 더 길고 

밝을 것을 믿기로 하자. 그러니 이 돌 앞에서는 더 이상 원도 한도 말하지 말자.

다만 섬나라 이 땅에 태어난 이들은 모두 한번쯤 여기 와서 고개를 숙이라.    

 

〇 四․三 朔風에 흩날린 꽃잎

 

<전면> 

四․三의 朔風(삭풍)에 흩날린 꽃잎들이여…

여기 -

罪(죄) 없이 사라져간

이웃사람들의 넋을 달래는

碑(비)를 세운다

思想(사상)도 갈등도 모르던

숫접은 이웃들

모진 바람에 어쩌다 꺾이어

洛花(낙화)되기 半世紀(반세기)

따뜻한 이웃의 體溫(체온)으로

다시 돌아가

옛날처럼 살고픈

和合(화합)의 表象(표상)앞에

너와 나 손 마주잡고

미쁜 마을 만들기를 다짐하노니

떠도는 寃魂(원혼)들이시여

돌아와

故鄕(고향)의 언덕에 안기소서

 

<측면1>

4․3犧牲者 靈位

康奉熙 康昌善 康基有 康斗翊 康ßë孝 康啓孝 康京洙

姜致南 姜致生 姜班錫 姜致碩 姜桃化 姜 敦 姜在生

高熙善 高完炳 高昇熙 高承祚

金元昌 金恩澤 金應培 金益中 金仁贊 金 貞 金千鍊

宋太榮 宋太玉 申龍杓 申在勛 申昌欽 申以信 安誠厚

張萬齊 張永閏 張永萬 張燦珍 張燦立

 

<측면 2>

姜淳平 姜餘化 姜庸淑 姜宗洙 姜宗浩 姜昌斗 姜昌瑥 姜昌鉉 配李氏 姜昌欽

高昌植 高昌進 高昌休 高正卓 高鉉述 高戊生 高仁孝 高泰鳳 高南玉 高元貞

金容珍 金容雲 金容玉 金容彦 金容哲 金容澤 金元甲 金元益 金元國 金源浩

白大錫 邊圭文 邊恒燦 邊尙燦 孫  賢 宋權萬 宋燦基 宋책상 宋春晶 宋春華

李경생 張才俊 張才塾 張才班 張才珣 張才雲 張才日 張才寬

幼兒不記

 

<후면> 

康南鶴 康在松 康奉煥 康相敦 康相培 康相彦 康相周 康相進 康信勳 康完熙 

康時善 康乙振 康斗浩 康鍾熙 康昌夏 康桃原 康善熙 康水一 康時林 康時鍾 

康榮淑 康子善 康洪京 康花春 康尙庸 康炳善 姜基亮 姜仁弘 

姜在哲 配秦氏 姜奉壽 姜太臣 姜承鶴 配白氏 姜武中 姜時中 姜斗中 姜朝順 

姜和順 姜在貞 姜喜善 姜熙道 姜雲河 姜昌宅 姜  順 姜啓萬 姜達柱        

高瀅禧 高景善 高萬平 高熙琮 高斗柱 高斗福 高益中 高衡重 高丙奎 高丁奎

配金氏 高大奎 配金氏 高君湜 高明湜 高碩富 高碩鎬 高鮮寶 高順厚 高昇彦 

高昇柱 高榮基 高仁平 高英鶴 高完鍾 高用基 高用曦 高昌萬 金斗昊 

金行文 金杓吉 金元中 金中鳳 金斗洙 金容仁 金容喆 金翊中 金貴南 金公南 

金公信 金權洙 金鎬全 金武京 金大京 金斗旭 金永中 金得中 金明崙 金在奉 

金炳浩 配梁氏 金尙範 金碩範 金瑞玉 金承立 金成泰 金英洙 金奉珠 金永玉 

金永? 金容範 金容明 金容善 金容奎 金容淑 金容植 金知中 金田中 金在恩 

金正福 金貞順 金丁后 金智洙 金昌奎 金昌洙 金昌鉉 金봉희 金行錫 金鉉澤 

金鎬中 金瀅澤 金樂俊 金季生 金昇滿 金春伊 金박길 金順子 金昌和 金奉珠 

金太中 金萬玉 羅昌均 文銖澤 文辛松 文在玉 文在彦 文정무        

朴允卓 朴榮卓 朴榮鎬  裵斗鳳 裵完平 裵南七 梁君七 梁君信 

梁君碩 梁君奉 梁君植 梁敬薺 梁基順 梁千鵬 梁福秀 梁仕鳳 梁成鶴 梁時雨 

梁在文 梁珍元 梁漢有 梁창언 梁현수 梁辛出 梁子星 吳大鉉 

吳昌瑢 任錫富 李白旭 李在昌 李炳善 李重培 李重珩 李重根 李昌成 

李千松 李太元 李起閏 李福童 李성율 李성란 李요심 全吾鳳 全基練 

全榮律 全海允 全정봉 鄭達勳 趙丁夏 趙性夏 趙君夏 趙昌浩 趙在一 

趙在斗 趙昌洙 秦丁鳳 玄乙浩 玄석종 玄공일 玄升旭 玄在昆

洪重錫 洪重峯 洪重化 洪升鉉 洪南基 配文氏 洪種基 洪長生 洪甲出        

     黃南連 黃河松 河松配

 

 

 

상처받은 영혼을 향한 희망이 불어오는 곳
평화·상생·해원 바람의 진원지

제주4·3평화재단

4·3유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