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원동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제주시 지역구분(읍면) 애월면 지역구분(마을별) 소길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소길리 1364번지 일대
GPS 위도 33.4020277777778, 경도 126.380305555556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〇 원동마을

42년 전인 1948년 11월 13일(음, 10. 13), 원동마을에서는 30여 명이 군인들에 의해 집단학살을 당했다. 당시 학살에서 겨우 살아 남은 늙은이들과 부모를 잃은 10세 미만의 어린아이들 30여 명이 하귀, 곽지, 고내 등지로 소개되어, 40여 년간 고향을 등진 채 뿔뿔이 흩어져 살다가 40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자신의 선조들이 살았던 땅에 잃어버린 40여 년간의 삶을 되찾으려고 모여들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40여 년간 가슴속에 꼭꼭 묻어 두었던 고향의 집과 땅을 찾아가 보았을 때는 이전의 평화스럽던 마을터는 짙푸른 대나무숲과 하늘을 가릴 정도로 빽빽이 자란 삼나무들로 뒤덮여져 버렸고, 자신들의 소유로 남아 있어야 할 그 땅들은 하나도 남김 없이 이이 남의 손에 넘어가 버린 상태였다.

 

이러한 사실들을 확인하기 위하여 원동 마을에서 살았던 할머니 두 분과 당시 부모를 잃은 오누이 두 분과 함께 우리가 처음 원동마을을 찾아가 보았을 때는 1989년 9월 어느날이었다. 활짝 핀 억새꽃이 한라산 자락에 지천으로 깔려있는 넓은 들판 한가운데로 제주시와 모슬포를 잇는 서부산업도로가 시원스럽게 뚫려 있다.

 

이 도로는 옛날부터 〔웃한질〕이란 이름으로 제주목과 대정현을 연결했던 매우 오래된 도로였다. 제주목을 출발해서 여덟참(1참은 2km)을 걸으면은 배가 출출하고 갈증이 날 쯤해질 때에 당도하게 되는 곳이 바로 이 원동마을이었다. 그 당시에는 제주와 대정을 왕래하던 사람들이 가다가 쉬면서 술과 간단한 요기를 할 수 있는 주막도 두 채나 있었다. 이 주막을 중심으로 원동마을에는 15가구에 60여 명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외에는 사람들의 내왕도 별로 없었을 것이고 외부와는 거의 단절된 채로 하루하루 목숨을 부지해 나가기에 급급한 채 돌과 바위투성이 밭을 일구고 소를 키우는 일로 여념이 없는 생활이었다.

 

 

 

〇 마을공동목장

 주막이 있었던 자리에서 길을 가로질러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면 냇가가 보인다. 이 냇가를 끼고 10여 분이 걸어 올라가면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란 숲 가운데로 무너진 돌담들이 무심하게 놓여져 있는 마을터가 언뜻언뜻 보인다. 이 마을터 위쪽에 수풀이 무성한 〔머홀곶〕이 바로 〔원자활〕이라고 불리워지던 원동마을 공동소유의 목장이다. 이곳은 확인 결과 등기상으로는 상거리 246, 248번지로 되어있고 이 땅의 소유자는 신용원(57세) 씨와 김병찬(60, 신용원의 천) 씨로 되어 있다. 이 사실은 1985년에 처음으로 학살 당시 부모를 잃은 강응필씨(강기승의 아들)가 확인했다.

 

 마을공동목장 소유권에 대한 재판에 연관된 9가구인데  모두 ’48년 11월 집단학살 당시에 부모님을 모두 잃어버린 사람들 혹은 그 후손들이다.

 

부모들까지 뺏긴 것도 서럽고 기가 막힌데 땅까지 뺏긴다는 건 정부에서도 좀 너무....... 이 동네는 어른들을 하나도 없이 싹 다 죽어버렸으니까, 우리들 나이의 어린아이들만 남았어요. 어른들은 다 죽어버리고 어린아이들만 남았으니 다 빼앗아간거지요. (강기송씨의 딸 강춘부씨의 말)

〔원자활〕 공동목장(상거리 246~248번지)은 대략 15만평이나 된다. 이 땅의 등기부 등본상의 원래 소유자들은 9명이나 신용원씨가 이 땅을 매입할 때 이 곳이 33인으로 구성된 마을 공동목장이라고 주장하면서 전체토지를 1/33씩 지분을 나누어 살아있는 사람들이나 그 후손들에게는 1/33지분 만큼씩의 해당되는 돈을 사람에 따라 250원내지 1,250원씩 준다음 매매영수증에 도장을 찍게 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당시에 15가구가 살고 있었기 때문에 공동목장 소유자가 33인이나 될 수가 없다. 이러한 사실에는 토지매수과정에서 여러 가지 의혹은 자아내게 하고 있다.

 

신용원이는 33인이 소유주라고 주장하는데 현재 등기부상에는 246번지가 5인, 248번지가 4인으로 모두 9명이 되니까 15만 3천평을 9인분으로 나누어서 분배시켜야 할텐데 보상액을 적게 주려고 머리를 쓰고 있다고요. 이렇게 매입해 놓고는 자기 땅도 아닌 것을 다시 서울사람에게 5억을 받고 팔어먹었어요. (강계송씨, 아들 강춘경씨의 말)

원동마을 사람들이 신용원씨에 대해 더욱 울분을 느끼는 것은 그가 바로 땅을 매입하는 시기인 ’65년도에 소길리 리장을 3년간 했었던 사람이었고, 해방 후 자유당 시절엔 면의원을 지낸 적도 있는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면의원을 지낼 당시에는 원동마을로 올라가 사면서 땅소유자들이나 그 후손들이 학살과정에서 죽거나 대가 끊겨서 땅임자가 없다는 사실을 이용했던 것이다.

 

판 것도 아닌데 등기이전 해서 먹어버린 땅이 많이 있어요.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 어리니까 그 당시를 전혀 모르지요. 그때 (‘48년 11월 집단학살) 대가 끊어진 사람들의 땅은 우리가 알면서도 어떻게 찾을 방법이 없어요. (강춘경씨의 말)

 

 그는 당시 자신의 기득권을 이용하여 정부로무터 무상으로 나무를 융자받아 대규모 조림사업을 원동마을에 해놓기 시작했다.  굶기를 밥먹듯 하던 당시에 보리쌀 3되 품이라도 벌기 위해 원동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소유인지도 모른 채 그 땅에 가서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신용원이는 면의원 할 적에 원(원동마을)에 올라가서 집지어 살면서 부자가 됐지요. 우린 우리가 살았던 원에 돌아가려고 해도 못 올라갔는데....... 사태 때 행세를 했던 모양이지 ’65년에 정부에서 융자받아 나무를 심을 때 원사람들은 삯받아 먹어 보려고 거기 올라가서 나무를 심었어요. 내 밭인 데도 내 밭인 줄을 몰랐지요. 아들, 딸 모두 데리고 가서 하루 심으면 보리쌀 3되씩 줍디다. (장병기씨의 말)

신용원씨는 자신의 기득권을 이용한 대규모 조림사업을 통해 토지에 대한 경작권리를 획득하고 난 후 ’70년대 ‘토지개발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발동되면서 고스란히 불하 받을 수 있었던 것이고, 이 땅을 다시 서울사람에게  팔아 넘겨 엄청난 투기이익을 챙긴 것이다.

 

 만약에  그 땅을 사회에 환원해서 사태 때 억울하게 죽어간 원동마을 사람들을 위해서 탑을 세운다든지 하면 지금이라도 고소를 취하할 수도 있지만 개인 신용원이가 혼자 착복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지요. 그 땅에 관계된 후손들이 지금 대책위원회를 구성했어요.” ‘48년 11월 학살 당시 죽은 강기송씨의 손자되는 아주 오래된 사건이라는 점에서 민사로 다룰 수밖에 없는 재판과정상의 어려움이 있다.

원동마을 사람이 후손인 강응보씨인 경우도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땅을 빼앗겨 현재 재판진행중에 있다.

 

 

 

〇 고소장

강응보씨가 박운각씨와 조승무씨를 상대로 낸 고소장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원동마을은 애월면 소길리와 상가리에 걸쳐있던 15가구정도 살던 작은 마을로 속칭 원동마을로 불린다. 1948년 4․3 사건 당시 원동마을에 반란자들이 출몰한다고 군경합동 수사대가 출동하여 주민을 몰살시키고 가옥을 불태웠다.

 이후 18년동안 원동마을은 군부대의 관리하에 들어가 민간인 출입이 전면 통제되었다. 마을은 황폐화되고 잡초가 무성한 상태로 있다가 1960년대 이후 민간인 출입이 허용되기 시작했다. 본 건 임야(애월읍 상가리 산 110번지 임야 220,066㎡)는 일제시대 때부터 강양호, 김재반씨가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었던 임야로서 4․3 사건이후 후손들이 타관으로 헤어져 일시적으로 방치된 땅이다. 따라서 이 땅이 애월리 마을 공동목장으로 사용된 적도 없었으며 애월리에서 8~10㎞ 떨어져 있어 소를 방목하기에는 어려운 먼 거리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애월리 주민들이 사용하던 리민용 공동목장이 애월쪽에 가까운(어름비) 라는 곳에 따로 있었기 때문에 구태어 애월리 사람들이 남의 마을목장을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당시는 각리마다 리민용 마을공동목장을 따로 갖고 있었다. 또한 원동마을 공동목장인 속칭 〔궤주이왓〕은 산 110번지가 아니라 산 120번지 임야였기 때문에 산 110번지 임야를 애월리민들이 매수할 이유도 없었고 매수한 사실도 허위일 뿐이다.

당시 원동마을 공동목장 조합원으로 올라가 있는 23인(김성현, 강공팔, 강문준, 강공석, 양운용, 김귀영, 강창수, 강기송, 김유홍, 강계송, 강경출, 양이룡, 이두일, 변덕순, 박운갑, 안홍련, 장재권, 김승호, 문재평, 강문주, 김종업, 김팽아, 김후선)의 명단도 허위라는 것이 드러나는 데 당시 가호수가 15가구였기 때문에 조합원이 될 수 있는 가구주가 15인 이상이 될 수도 없다는 점이다. 또한 조합원이라고 되어 있는 23인중에서 4․3 당시 원동에 거주한 사람은 김성현, 강공팔, 강문준, 강공섭, 양운용, 김귀영, 강창수, 강기송, 김유홍, 강계송, 강경출, 양이룡, 이두일, 등 13명뿐이고 나머지 10인은 원동마을에 살았던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피고인인 박운각과 조승무의 증언을 서로가 상치되고 있는 부분이 있다. 박운각씨의 증언은 산 110번지를 1985년도부터 애월리민들이 매수하였다고 주장하는 반면 조승무씨의 증언에서는 일제시대부터 애월리민들이 매수하였다고 주장하는 반면 조승무씨의 증언에서는 일제시대부터 애월리민들이 산 110번지 임야를 목장으로 사용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어서 임야매수여부나 매수시기가 전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박운각씨의 증언에 의하면 1958년 당시 애월리장이였던 김예현씨가 애월리 마을발전을 위해 애월리 마을공동목장 조합을 만들어 원동마을 공동목장 조합원 23인으로부터 위 임야를 매수하여 애월리 마을 공동목장도 관리․운영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1958년은 군의 통제로 민간인출입이 불가능하였다는 점에서 합법적인 매매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1958년도 매도 당시에 영수증에 날인한 것으로 되어 있는 사람들중 현재 살아 있는 양창석씨 증언에 의하면 영수증 작성이나 날인을 해 준 사실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고 있어 영수증이 허위로 꾸며져 있음이 분명하다. 허위 영수증임을 입증하는 또 한가지 사실은 ‘전서출’로 날인되어 있는 영수증이다. 전서출은 당시 나이 90세인 양운용씨의 어머니인 김서출씨를 잘못 기재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에 양운용씨의 장남인 양창석씨가 충분히 성장해 있던 시기여서 늙은 할머니로부터 매수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볼 때 허위 영수증임이 분명하다. 현재 생존해 있는 김영, 강봉현, 강기송씨 등은 영수증작성 사실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또한 당시 원동마을에 거주한 가구주로서 조합원 명단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강봉권, 고명학, 고우길, 이영갑, 장명관, 양창석, 김재헌(김귀영 부친) 등으로 만일 마을공동목장 조합원이 구성되었다면 이들이 명단에서 빠질 리가 없다.

따라서 위의 토지매입 사건은 4․3 사건 때 원동마을 거주자였던 15가호 60여명중 집단학살에 의해 노인과 어린아이들 30여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몰살당하고 집들이 모두 불에 타 없어지게 되자 해방전에 원동에 올라와 2년 가량 거주한 적이 있던 박운각씨가 이러한 사실들을 이용하여 산 110번지를 뺐을 목적으로 신용원과 강응보씨가 제주지법에 낸 고소장 내용)

 

강응보씨는 강양호씨의 장손으로 학살 당시 부모를 모두 잃고 다섯 오누이들과 함께 살아난 사람이다. 처음으로 위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강응보씨의 둘째 동생 강응필씨에 의해서였다. 자신의 부모가 학살당했던 고향의 집터와 땅을 찾아보기 위해서 등기부등보 서류를 뒤져보자 그들이 살았던 집터와 밭은 곽지리에서 늘상 같이 지내면서 평소 강응필씨 오누이의 처지를 동정해 주곤하던 가까운 이웃인 신용원씨의 소유로 이미 넘어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추궁해 본 결과 ‘81년 8월에 강응보씨의 아버지인 강기송씨 명의의 소길리 임야 4천 5백여평이 신용원씨의 이름으로 등기 이전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소길리 산 248번지 임야 약 7만여평도 당시 허훈, 강양호, 양재산, 이두일, 김재반, 강영숙, 박치순 등 7인 공동소유의 땅이었는데 이것 역시 그 후손들이 알지도 못하는 과정을 통해 신용원씨가 7인으로부터 2백만원~4백만원씩에 매입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〇 1948년 11월 13일

 재판은 원동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40여년 전의 아픈 기억 속으로 되돌아가게 만들었다. 대나무와 삼나무로 뒤덮힌 마을터를 찾은 강응보씨의 뇌리에는 42년전의 학살장면이 다시 떠오르고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 끝내는 울음을 죽이지 못하고 만다. 학살 당시 17살이었던 누님(강춘부씨) 이 울음으로 고개를 듣지 못하는 강응보씨를 대신해서 말을 잇는다. 

 

 바로 여기가 마당도 되고 길도 되었어. 이 자리가 터잡고 ....... 여기서(주막번데기) 다 죽였어. 지붕위에 올라가서 기관총으로 쏘아 죽였지. 그때 내가 17세야. 까망 치마를 입었었지. 치마를 푹 뒤집어 쓰고 얘기를 하나 업고 구석에 있으니까 군인이 와서 ‘너 여기 왜 앉아있어’라고 물어보는 거야. 그래서 ‘중대장님이 아이들 밥해주라고 보내주었어요’ 대답하니까, ‘너 여기 가만히 있어봐, 확인하러 갔다 온다’하고 가버리길래 무서워서 애들을 데리고 저쪽(머흘곶) 가시밭 길로 막 도망을 쳤어. 가만히 숨어있는데 조금 있으니까 돼지 태우는 냄새 같은 게 막 나는거야. 사람을 죽여놓고 불을 질러 버리니까 그랬던거지. 다음날 내가 확인해 보았더니 배가 갈라져서 내장이 나온 사람, 팔 다리가....... 그때 우리 어머니는 5개월 된 애기를 구덕에 뉘어 놓았는데 살점이 이 만큼씩 찢겨 나와 구덕 속에 막 들어가 있더라고 제사가 시월 열이틀 날이니까 시월 열사흘에 그 일이 있었던 거지. 머흘곶에 숨어서 한 사나흘쯤 숨어서 지냈어. 그러다가 배가 고파 가지고 아무거나 찾아 먹으려고 나왔는데 동네사람들이 다 죽었지뭐야. ‘어머니, 아버지도 다 죽고 난 어떻게 살아가느냐’고 군인들한테 말하니까 군인이 하는 말이 ‘그럼 하귀로 내려가라’고 하대. 나는 막 땅바닥에 뒹굴면서 ‘차라리 몰살시켜달라. 어떻게 어린 동생들하고 살아가느냐’고 울고불고 했었지. 군인들이 ‘누가 그렇게 죽였냐, 빨갱이들이 그랬냐’고 하는 거야, ‘당신네들이 그랬잖아요’ 하니까 그 군인들도 고개를 돌려보리더라고 마을에 가서 보니까 이마가 갈라진 사람, 배창자가 나와 죽은 사람, 다리가 부러진 사람 천지야. 엄청 많이 죽었어. 원부락 사람들뿐만 아니고 어디서 왔든 사람들도 애매하게 다 죽었지. 죽은 사람들이 60여명은 되는 것 같아.

 

어머니, 아버지 시체를 찾아야 하는데 찾을 수가 있어야지. 사람 죽어 놓은 후에 기름 뿌려 놓고 불을 질러버렸으니까. 우리 어머니는 머리까지 다 타버려 가지고 알아보지 못했는데 손을 보니까 겨우 알 수 있더라고. 어머니가 어릴 때 방망이질 하다가 찧어서 뭉툭해져 버린 손을 보고 알아 보았지. 시체를 요쪽으로 뒤짚어 보니까 타다가 다 안탄 내복을 보니 이건 영락 없는 엄마꺼야. 아버지는 가슴하고 허벅지에 총을 맞았더라고. 그때 생각이 선해. 그 일이 나기 직전에 엄마가 ‘너 잘 해야 한다. 열일곱 살이라고 하지 말고 열두 살이나 열 살이라고 해라’고 하던 말이 생각나. 내가 그때 까망치마를 입고 애기를 업고 있었으니까 군인들이 나이를 잘 몰랐지. 결국은 찾아 가지고 묻어야 하는데 그 어린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집 대문을 뜯어 겨우 재판을 해 묻었지.

 

 흐느낌으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만다. 옆에서 눈물이 글성글성하면서 가만히 듣던 동생 응보씨는 끝내 누님이 말을 잇지 못하자 얼굴을 숙이고 울음을 삼키고 있다.

 학살했던 군인들은 바로 그 전날에 더럭마을에서 집단 학살한 후에 이튿날 새벽녘에 원동마을에 몰려들었다고 한다.

 

처음에 산에서 왔다고 산사람이라고 했어. 북선서 왔다고. 우린 산사람인지 군인인지 어떻게 알아. 그런데 군인으로 철모자에 흰띠를 두르고 다들 총들을 매고 있었어. 구두도 이만큼씩 한 것들을 신고. 칼도 찼는지....... 무서워서 제대로 볼 수도 없었어. 북선서 왔다고 해도 북선이 어디에 있는 곳인지 우리 같은 여자들이 알긴 뭘 알아. (장병기 할머니의 말)  나중엔 보니까 9연대야. 말들 들어보면 서울말이었어. (강춘부씨의 말)

 9연대는 1946년 11월 16일 창설되었는데 원동마을 집단학살 당시는 4대 연대장이었던 박진경이 피살된 후, 11연대와 9연대가 같이 토벌작전에 투입되게 된다.  1948년 7월 15일부터 11연대와 9연대가 재편성되어 연대장 송요찬에 의해 소탕작전을 벌이게 되는데 이 당시 토벌작전은 ‘토끼몰이식 수색작전’(한국전쟁사 Ⅰ, 437~444쪽) 이라고 얘기될 만큼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졌다. 더럭마을이나 원동마을 집단학살도 1949년 5월 20일 토벌이 완료될 때까지의 과정 중에서 토벌이 가장 극에 달하는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여진다.

 

그날 아침엔 조반해 먹고 밭에라도 가보려고 생각했는데 아침이 곧 밝아올 때 구련대(9연대)들이 철모에다가 하얀 띠들을 딱딱 두르고 총들 어깨에들 매고 날이 들었어. 더럭에서 사람들 다 죽여놓고 날아들은거지. 더럭에서도 많이 죽었다고 해. 차로 몇 차난 실어왔는지 한 백여명은 되는 것 같았어. 오늘은 애기나 데리고 밭에 가서 모밀(메밀)이나 베어야지 생각하면서 조반을 준비하는데 ‘총이어’하는 소리가 나서 애기 안은 채 밖에 나가보니 다 포위했어. 어디 숨을 수도 없었지. 어떻게 할지 몰라 허둥대면서 조를 다듬고 있는데 군인 두 명이 질칵질칵 오는 소리가 나더니 ‘지금 뭐 하느냐, 빨리 어디어디로 가라’ 막 재촉했어. 애기 업고 해서 가서 보니 윗집에 사람들이 다 결박당한 채로 포위되어 있었어. 우리 집도 세 형제가 한꺼번에 하루에 다 죽었지.

 처음엔 죽이진 않고 어디로 데려갈 듯 했어. 질문한 하고 보내주겠거니 생각했어. 저물어 갈 때쯤 한 7시경 되어가니까 아래서 죽여 버리라는 명령을 받았던지 주막번데기에서 모조리 다 죽어버렸어. 원마을 사람이고, 웃한질로 넘어가는 사람이고간에 그 날은 눈에 뜨인 사람은 다 잡아다가 죽였어. (장병기 할머니의 말)

 

〇 고향을 등진 생활

일제 때부터 원동마을은 가난하고 힘겨웁게 살기는 했어도 평화스럽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모밀 (메밀), 산디 (밭벼), 피, 콩, 감자, 고구마 등을 거친 돌밭에 부쳐 먹는 일과 소를 키우는 일이 생활의 전부였다. 때문에 일제 당시에도 고사리 공출은 많았지만 곡식공출은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해방이 되어도 원동마을엔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른데서 그 흔했던 인민위원회 활동이나 서북청년단원들의 폭행, 5.10 선거 거부운동의 뜨거운 열풍, 3.1 기념대회, 2.7 총파업, 산사람들의 활동 모두 원동마을 사람들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먼 세계의 이야기들일 뿐이었다. 

 

인민위원회? 그런 거 있는 줄도 몰라. 그저 해뜨면 밭으로 뒹굴어 가고 어두워지면 집으로 기어 들어오고 다들 그렇게 살았지. 사태 나기 전에도 순경들이나 서북청년단이나 산사람들이나 전혀 와 본 적도 없었어. 5.10 선거? 선거가 뭣인지 우리야 알 수가 있나. 시집 와서 돈 벌러 일본 가서 대여섯해 살다가 돌아와 얼마 없으니 그 위험한 시국을 만났지. 그저 일들이나 할 줄 알지 아무것도 몰라 (장병기씨의 말)

학살 당한 후 사흘째가 되자 살아 남은 사람들에게 전부 소개령이 떨어졌다. 주로 하귀, 곽지, 고내 등지로 뿔뿔이 흩어져 내려왔다. 소개 후의 생활은 고향을 등진 서러움이나 부모 잃은 슬픔조차 느낄 수 없는 배고픔 속에서의 유랑생활뿐이었다. 

 

고구마 껍데기 (돼지먹이로 이용되었음) 줏어 먹고, 풀 뜯어 먹으며 살았다구요. 어떻게 해서 보리 약간 생기면 볶아서 동생들 먹이면 오랫동안 굶다가 물에 섞어 먹으니까 배가 갑자기 불러서 배탈이 가라 앉을 때까지 한 이삼일 가만히 드러누워 있어야 했어. 너무 배가 고파 담하나 넘어갈 힘조차 없었다고. 어린 동생들 데리고 우린 참 험하게 살았어. 

 나는 곽지에서 27살에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해서 서울 갈 때까지 10여 년을 살았는데 누구 하나 우릴 걱정해 주는 사람 없었어. 우릴 살려줄 만한 친척도 없었어. 내가 결혼할 때도 우리 어머니가 18년 동안 덮고 잤던 헌 이불 하나 달랑 물려받았고 신 한짝 사준 사람도 없었어

울음 섞인 말에는 그 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참아냈던 분노와 서러움이 가득 찼다.  

 

외삼촌이 지금 남편을 소개 시켜주었는데 처음에 나는 싫었어. 그래도 그 사람이 동생들 다 키워 주고 학교 보내준다고 하길래 같이 살게 된 거지. 우리 남편도 6.25때 월남하신 분이야 (강춘부씨의 말)

 소개한 다음 해부턴 계속 흉년이 듭디다. 전분찌꺼기 갈아다가 죽 쑤어 먹고. . . 삶이 삶이 아니었어. 난 남편을 사태에 잃고 다리 병신되어 가지고 움직거리지도 못하는데 애기는 배고프다고 밥만 달라고 울고불고. . .  그때 죽지 않은 것도 다행이지. 나무 베어다가 팔면 쌀 한되 정도나 조기새끼 한 마리 정도는 얻을 수 있었어요. 나무는 한림에도 가서 팔고 귀덕에도 가서 팔았어요. 토끼 먹는 풀 뜯어다가 죽 쑤어 먹고, 쑥은 아주 고급이었어요. 소 먹는 풀인데 익모초 비슷한 풀도 있었어요. 땅 위로 뻗는 풀이면 아무거나 다 배를 채웠어요. 물웃 (무릇풀) 도 뜯어다 먹고 (장병기씨의 말)

소개 후에 내려 와 살 때 배급 준다고 해서 가면 안 줍디다. 세력 있는 사람이나 행세하는 사람들만 배급도 타 먹고 우린 맨날 굶으면서 살았어요. 소가 먹을 둥 말둥한 들에 나는 풀들, 옷궤기, 배체기(질경이), 개자리(토끼풀), 물옷(무릇), 콩쿨(콩잎) 같은 것들을 장에 담궜다가 배고픈 김에 먹다 보면 막 속이 쓰렸어요. 그 때 부두에 가서 맥주보리 겨를 살 수 있었어요. 그 때 돈 20전이면 몇 해나 묵었는지 좀벌레가 드랑드랑한 보리겨를 두 가마니 살 수가 있었어요. 20전이면 차를 탈 수 있었지만 돈이 없으니까 그거 두 가마니를 맬빵으로 져서 시에서 곽지까지 걸어 왔지. 발이 다 부르트고 죽을 지경이야. 말똥을 신에 담아서 신어 보거나 소금을 담아 신으라고 누가 얘기 해 주길래 나도 참 어리석었지. 소금을 담아 신으니까 발이 견뎌냈겠어요? (웃음) 집에 오면 맬빵을 벗지도 못하고 그냥 쓰러져 버렸어요. 친정어머니하고 딸이 겨우겨우 끌어다가 방에 옮겨다 놓았어요. 한번은 어머니가 불을 떼라고 하는 거예요. 집에는 먹을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어머니가 무얼 해주려는가 좋아서 불을 뗐는데 물이 다 끓으니까 불을 끄라고 하는 거예요. 어머니한테 ‘왜 불을 끄냐?’고 물으니까 어머니 하는 말이 ‘저 집은 불 꺼져버렸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 끼니때가 되면 불이라도 내는 척해서 남들 보기에 굶지 않고 밥이라도 해먹는다는 소리를 들어야지’하시는 거예요. 그러니 죽지 않고 사는 삶이 참으로 기가 막혔어요. 원에서 내려 와서 사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살았어요. 자기 밭이 있나, 자기 집이 있나, 아무것도 없어서 남의 집 겨우 빌어 살았지 (양신출씨의 말)

 양신출씨에게는 4․3이 일어나기 전부터 아껴 키웠던 숫송아지 한 마리가 있었다. 주인을 따라 오려고 하는 것을 몇 번이나 돌로 쫓아 버리는데도 돌아서면 쫓아오고 뒤돌아보면 다시 쫓아 오면 숫송아지의 슬픈 두 눈이 아직도 눈에 선한 듯 양신출씨는 목이 매인다.

 

예쁜 부랭이(숫송아지) 한마리 키웠었지. 그 시국 나니까 데려 오지 못했지만 ... 해변 내려오면 먹일 풀이 어디 있어야지. 내가 내려오려니까 꽁무니에 졸졸 쫓아 오는 거야. 해변가면 먹을 것이 없어 죽을게 뻔한데... 올라 가라고 돌을 던지면 으상으상 가다가도 오다가 돌아서 보면 또 따라 오고 있어. ‘아이구 가라. 내려가면 죽는다. 빨리 가버려라.’ 막 두둘겨대면 뒤돌아 가는 척하다가 다시 돌아서서 귀만 쫑긋쫑긋 세우면서 눈치만 보는 거라. 나도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판에 그 소를 어떻게 키워. 그래도 그 부랭이는 내가 잘 키워 보려고 무척 애를 썼는데 끝내 내 것이 못됐지. 

양신출씨는 태어나서 결혼하고 줄곧 살아 온 곳이 원동마을이다.  4․3후 원동마을 떠나 40여 년간을 살아 온 곽지가 이제는 그의 고향이 되어버렸다고 씁쓸하게 웃어 넘긴다.

 지척에 두고도 살아 생전 한번도 마음 놓고 가볼 수 없었던 원동마을은 이미 서울사람들의 투기대상으로 변했다. 원동마을에서 쫓겨난 후손들은 그들의 부모들과 선조들이 땀흘려 일구어 왔던 땅 한뼘 물려 받지 못하고 유랑하면서 문득문득 되살아 나는 쓰라린 기억을 잊어버리려고 모질게도 살았다. 그들이 찾으려고 애쓰는 것은 단순히 선조들의 땅만은 아니다.  4․3때 영문도 모르고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부모님과 그 선조들이 살아온 삶과 40여 년간 가난과 외로움과 두려움 속에서 지내온 자기들의 삶을 되찾고 싶은 것이다. 이 땅이 되찾아지지 않는 한 아직도  4․3은 후손들에게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 4.3연구소, 4.3장정(90년 월, 통권 3호)>

 

 

〇 원동(院洞)은 마을 입구에 세워진 '院祉' 표석대로 조선시대 제주목과 대정현을 잇는 웃한질의 중간지점으로 4․3 당시에도 나그네가 쉬어 가는 주막이 있었던 마을이다. 행정구역상 마을을 관통하는 하천을 경계로 동쪽은 소길리, 서쪽은 상가리에 해당되었으나 전체 16가구 중 상가리 지경에는 약 5호 정도밖에 살지 않아 보통 소길리로 취급됐다. 주민들은 주막을 운영하던 1가구 외에 주로 메밀, 산뒤, 조, 콩 등을 경작하거나 마소를 길렀다.

원동은 지리적 여건 상 항상 토벌대의 주목을 받았다. 토벌대는 마침내 원동에서 1948년 11월 13일 원동 주민들과 마침 원동을 지나가던 사람들을 무차별 체포했다. 이 날 토벌대는 50~60명을 마을 중심인 속칭 '주막번데기'에 모아 놓고 총을 쏘고, 휘발유로 불질렀다. 이 날 희생된 원동 주민들은 다음과 같다.

 

강공부(남, 20), 강기송(남, 40대), 강창수(남, 31), 강창권(남, 29세), 강창욱(남, 28), 강창욱 부인(24), 강창욱 아들(4), 고남옥(여, 16), 고병규(남, 43), 고남주(고병규 아들, 7), 고임생(여, 28, 임신 중), 고태원(남, 21), 김귀환(남, 28), 김귀휴(남, 21), 김성만(여, 29), 김승홍(남, 58), 김유홍(남, 40), 김기용(남, 60), 김길홍(남, 49), 양이룡(남, 48), 양춘생(여, 18), 양춘희(여, 21), 양운룡(남, 29), 양정생(여, 41), 이무생(여, 양이룡의 아내), 이두익(남, 64), 이달호(여, 36), 임세옥(남,), 장봉호(여, 19), 허홍(여, 40), 현두병(남, 50), 현봉완(남, 14), 현창하(남, 20), 홍성규(남, 22) 

이 날 소길리의 임세옥(20)과 고원효(21)는 원동에서 방목 중이었던 가축을 돌보러 갔다 희생됐다. 

외도 주둔 제9연대 군인들의 이 날 토벌작전은 하가리를 통과하다 우연히 제사집에 모인 사람들을 발견하고 주민들을 육시우영에서 학살한 것을 시작으로 원동 마을 → 화전 마을 → 광평 마을로 이어지며 3개 마을이 폐허로 변하고 많은 주민들이 희생되는 참변을 낳았다. 그 후 원동은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어린이들은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는 등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1990년 9월 22일부터 이틀 간 유족들은 옛 원동마을 터에서 억울하게 돌아가신 영혼들을 위해 무혼굿을 했다. 이때 유족들은 유인물을 통해 위령제를 지내는 이유를 설명하고, 몇 년 전 확인한 조상들의 땅을 되찾기 위해 법정투쟁을 벌일 것을 공표했다.

 

무자년 음력 10월 13일 군인들에게 희생당하고 어린아이들 몇 명만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해변가나 고아원으로 흩어져 살았습니다. 순식간에 부모를 비명에 보낸 아이들은 냉대와 굶주림 속에서 모진 목숨을 부지하며 원통함과 그리운 마음을 가슴속에 꼭꼭 묻고 이제 어언 40대 중년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자나깨나 비명에 가신 분들의 영혼을 달래드리지 못함을 자식된 도리로서 항상 뼈저리게 안타까와 몸부림치다가 지금에야 비로소 돌아가신 분들의 영전 앞에 무릎을 꿇고 빌고저 위령제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법정투쟁은 유족들이 자신들의 땅을 1960년대 정부가 추진하던 대규모 조림사업을 맡아 하던 사람들이 '임야 소유권 이전등기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빌미로 명의 이전했다며 제기한 것이었다. 유족들은 몇 년 소송으로 일부 조상들의 터전을 되찾았다. 

이 문제는 4․3 진상규명운동이 간단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당시 나이든 사람들이 다수 희생되고, 멸족한 집안의 경우 토지 문제 등이 현재까지도 문제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서부산업도로 변 제주경마장 서쪽 약 2Km 지점이다. 1990년 8월에 세운󰡐院祉󰡑표석이 있다. 현재 당시 주민들이 거주했던 마을터와 희생터인 주막번데기 주변은 서부산업도로 확장 당시 도로에 편입돼버렸다. 

<출처: 4.3연구소, 『4.3유적 Ⅰ』>

 

 

〇 '4·3'은 제주의 공동체를 철저히 파괴했다. 그래서 중산간지역에는 마을의 흔적만 남은 곳들이 여럿있다. 북제주군 애월읍 소길리 원동마을은 4·3으로 없어져버린 마을의 대명사다.

서부산업도로를 따라 제주면허시험장을 지나면 도로가에 ‘원동’이라는 입간판이 보인다.

 

원동은 지난 92년 4·3 당시 마을에서 학살된 주민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진혼굿을 벌여 제주사회에 새롭게  4·3의 참상을 말해주기도 했다. 당시 굿에 참석했던 주민들 가운데 흐느끼지 않은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40여년 이상 마음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고향 원동과 원동에서 숨져간 가족과 친지들의 한을 풀어냈다.

 

마을 터에서 이뤄진 굿판에서 이제는 당시 희생된 부모들보다 더 나이가 들어버린 주민들은 잡목으로 무성한 집터를 바라보면서 ‘이 땅이 우리 마을이었던가’ 하면서 통곡했다. 40여년 만에 가까운데 있으면서도 그날의 참상 때문에 찾지 않다가 이날에야 한데 모인 것이다. 

 

원동의 들머리에는 재일동포 김화숙씨가 어머니의 고향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원지(院址)’라는 표석이 서 있다.

 

원동의 역사는 꽤 오래됐다. 구한말 이전에는 웃한길(지금의 서부산업도로)을  따라 제주와 대정을 오가는데 중간에 쉬어가기 위해 원이 설치되고, 주민들이 모여살게 되면서 원동이 됐다. 제주에 있던 2곳의 원 가운데 동쪽에 있는 원은 ‘동원, 서쪽은 ’서원‘으로 불렸다. 

 

4·3직전 주막들을 중심으로 화전과 목축을 하면서 15가구에 60여명의 주민들이 내 것, 네 것 없이 사이좋게 살던 원동마을. 

 

1948년 가을 도 전역의 중산간마을에 대해 내려진 소개령은 이 마을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해 11월13일 철모에 하얀 띠를 두른 제9연대 군인들이 원동마을 포위하고 들이 닥쳤다. 갑자기 나타난 군인들은 주민들에게 공비출몰지역, 적성지역에 살고 있다며 주막거리로 모두 모아놓고 집단 학살했다.

 

학살 현장에서 총에 맞았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난 장병기 할머니는 이렇게 전한다.

 

9연대 군인들이 마을에 나타나서 사방으로 포위하고 주막번데기로 사람들을 전부 집합시켰습니다. 그러다가 어디로 데려 갈듯 하더니 여자는 여자끼리 남자는 남자끼리 앉혀 놓고 총으로 와작착 와작착.... 난 그때 총알이 겨드랑이로 들어가 젖가슴으로 나왔어요. 정신을 차려 보니 아기를 안은 채 죽은 사람들 사이에 있었어요. 죽은 사람들 위로 기름을 부어 불 태워 버렸어요. 난 겨우 기어서....

이날의 집단 학살로 27명의 주민의 그 자리에서 숨지고, 여러명이 중상을 입었다. 4~5명의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해안마을로 겨우 피했을 뿐 14가구 60여명의 주민들은 대부분 학살되고, 마을은 폐허가 됐다.

 

당시 학살에서 겨우 살아남은 늙은이들과 부모를 잃은 10살 미만의 어린이들은  하귀, 고내, 곽지마을로 가거나 고아원에 들어가는 등 뿔뿔이 흩어져 어려운 삶을 살아야 했다. 결국 이로 인해 원동마을은 페허가 됐고, 원동마을 주민들에게는 치유할 수 없는 아픔과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기고 말았다.

 

기억속에서 조차 사라져버릴  뻔한 이 마을의 역사는 40여년 만에 부활했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장년이 된 주민들의 후손이 조상들의 땅을 찾아 나선 것이다.  4·3 때까지만해도 우리 땅이었는데 부모친척이 없어지자 어느 날 다른 사람의 소유로 됐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후손들은 지난 89년9월  등기상 소유자로 돼 있는 ㅅ씨 등을 상대로 애월읍 소길리 이른바 ‘원머흘곶’ 일대  14만여평에 대한 ‘소유권보존등기말소’ 소송을 제기했다.

 

91년 제주지법에서 내려진 1심 재판 결과 이중 5만평정도에 대해 일부 승소판결이 내려졌으나 고법을 거쳐 대법원에서는 2만8천여평에 대해서만  권리를 인정했다. 새 소유자인 ㅅ씨가 60년대  이곳에 조림을 함으로써 20년간의  취득시효에 따른 소유권을 인정받은 것이다. 도민들의 관심을 모았던 이 소송은 법적 복원이 가능하다는 희망감을 안겨줬으나 동시에 ‘시효취득’이라는 냉엄한 법의 논리로 재단됨으로써 ‘4·3’의 치유가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상기시키기도 했다.

 

평화스럽던 마을은 짙푸른 대나무 숲과 빽빽이 자란 삼나무로 뒤덮인 채 지금은 ‘원지’ 표석만이 이곳이 마을 터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〇 제주시에서 서부산업도로를 따라 제주경마장을 지나면 조그마한 커피숍을 만난다. 이곳이 4․3 때 토벌대의 초토화작전으로 사라진 북제주군 애월읍 소길리 원동이다.

 

조선시대 원동은 제주목과 대정현을 오가는 사람들이 가다가 술과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주막거리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은 태종 16년에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 3읍이 정립될 때 원(원)이란 마을이 있었던 곳으로 당시 출장하는 관리들에게 숙식의 편의를 주기 위하여 숙식소를 두게 하였고, 이에 따라 5, 6채의 인가가 형성돼 농경과 목축업에 종사하던 지역민들이 이곳을 지날 때는 잠시 휴식을 취하고 갈증을 풀었다. 이 마을은 8.15 해방 때까지 남아 있어서 오가는 사람들에겐 ‘사막의 오아시스’이기도 했으나 4․3 이후 사라지고 해가 바뀔수록 도민의 생각 속에서 잊혀져 가는 것이 안타까워 인가가 있던 이 마을에 정성을 새겨 이 돌을 세운다”

 

원동의 들머리를 들어서면 길가에 한 재일동포가 어머니의 고향을 기념하기 위해 90년 8월 세운 ‘원지’(원지)라는 돌비석의 내용이다. 아마도 이 재일동포는 어머니의 고향이 4․3으로 없어진 것을 가슴아파하며 세운 것 같다. 

 

원지 표석 뒤로는 대나무숲과 빽빽이 자란 삼나무가 옛 마을터였음을 알려준다.

 

4․3 때 원동에는 16가구 60여명의 주민들이 메밀과 밭벼, 콩, 감자 등을 재배하며 어렵지만 그날 그날 평화롭게 살았다.

 

지금은 제주시와 서귀포, 대정을 오가는 수많은 차량으로 꼬리를 물었지만 당시는 산간마을이어서 해방이 됐다는 사실도 늦게 알았고, 4․3이 발발한 48년 가을까지도 평상시와 다르지 않게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경토벌대의 초토화작전 대상에는 이곳 중산간마을도 예외가 아니었다. 48년 11월13일 새벽 갑자기 들이닥친 토벌대는 ‘공비를 찾아내라’며 이날 오후 주민들을 주막거리로 모아놓고 지붕위에 올라가서 기관총으로 학살했다.

 

이날의 집단학살로 30여명의 주민들과 제주시로 가다가 원동에서 쉬던 사람 등 다른 마을 주민들까지 60여명이 학살됐다.

 

유족들은 토벌대가 학살이 끝나자 시체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말한다.

 

이날의 집단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나이든 노인들과 대를 잇게 하기 위해 살려주었다고 하는 10살 안팎의 어린아이 등 30여명은 부근 해안마을로 내려가거나 고아원에 수용돼 뿔뿔이 흩어쳐 이 마을 출신 주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한과 아픔을 남겼다.

 

유족들의 아픔은 또 있다. 이들의 땅은 임자없는 땅으로 버려져 외지인이 이전해버리거나 헐값에 팔려나가 버린 것이다.

 

원동마을 근처에 살면서도 한번도 모이지 못했던 당시 어린이들이 한꺼번에 만난 것은 노인이 다 된 지난 92년 조상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원동에서 진혼굿을 벌일 때였다.

 

차를 타고 3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인데도 살아가기가 바쁘고, 진저리나는 과거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 긴 세월 동안 찾지 않았던 것이다.

 

학살의 현장에도 개발의 바람은 불고 있다. 대학 이설계획이 마련되고, 다른 지방의 대기업체가 대규모 레저타운을 조성할 계획이다. 

 

머지않아 이곳이 비극의 현장이었음을 알리는 것은 재일동포가 세운 돌비석 하나밖에 없을지 모른다.

 

 

 

〇 4·3은 제주의 공동체를 철저히 파괴했다. 그래서 중산간지역에는 마을의 흔적만 남은 곳들이 여럿있다. 북제주군 애월읍 소길리 원동마을은 4·3으로 없어져버린 마을의 대명사다. 서부산업도로를 따라 제주면허시험장을 지나면 도로가에 ‘원동’이라는 입간판이 보인다.

 

원동은 지난 92년 4·3 당시 마을에서 학살된 주민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진혼굿을 벌여 제주사회에 새롭게  4·3의 참상을 말해주기도 했다. 당시 굿에 참석했던 주민들 가운데 흐느끼지 않은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40여년 이상 마음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고향 원동과 원동에서 숨져간 가족과 친지들의 한을 풀어냈다.

 

마을 터에서 이뤄진 굿판에서 이제는 당시 희생된 부모들보다 더 나이가 들어버린 주민들은 잡목으로 무성한 집터를 바라보면서 ‘이 땅이 우리 마을이었던가’ 하면서 통곡했다. 40여년 만에 가까운데 있으면서도 그날의 참상 때문에 찾지 않다가 이날에야 한데 모인 것이다. 

 

원동의 들머리에는 재일동포 김화숙씨가 어머니의 고향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원지(院址)’라는 표석이 서 있다.

 

원동의 역사는 꽤 오래됐다. 구한말 이전에는 웃한길(지금의 서부산업도로)을  따라 제주와 대정을 오가는데 중간에 쉬어가기 위해 원이 설치되고, 주민들이 모여살게 되면서 원동이 됐다. 제주에 있던 2곳의 원 가운데 동쪽에 있는 원은 ‘동원, 서쪽은 ’서원‘으로 불렸다. 

 

4·3직전 주막들을 중심으로 화전과 목축을 하면서 15가구에 60여명의 주민들이 내 것, 네 것 없이 사이좋게 살던 원동마을. 

 

1948년 가을 도 전역의 중산간마을에 대해 내려진 소개령은 이 마을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해 11월13일 철모에 하얀 띠를 두른 제9연대 군인들이 원동마을 포위하고 들이 닥쳤다. 갑자기 나타난 군인들은 주민들에게 공비출몰지역, 적성지역에 살고 있다며 주막거리로 모두 모아놓고 집단 학살했다.

 

학살 현장에서 총에 맞았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난 장병기 할머니는 이렇게 전한다.

 

“9연대 군인들이 마을에 나타나서 사방으로 포위하고 주막번데기로 사람들을 전부 집합시켰습니다. 그러다가 어디로 데려 갈듯 하더니 여자는 여자끼리 남자는 남자끼리 앉혀 놓고 총으로 와작착 와작착.... 난 그때 총알이 겨드랑이로 들어가 젖가슴으로 나왔어요. 정신을 차려 보니 아기를 안은 채 죽은 사람들 사이에 있었어요. 죽은 사람들 위로 기름을 부어 불 태워 버렸어요. 난 겨우 기어서....”

 

이날의 집단 학살로 27명의 주민의 그 자리에서 숨지고, 여러명이 중상을 입었다. 4~5명의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해안마을로 겨우 피했을 뿐 14가구 60여명의 주민들은 대부분 학살되고, 마을은 폐허가 됐다.

 

당시 학살에서 겨우 살아남은 늙은이들과 부모를 잃은 10살 미만의 어린이들은  하귀, 고내, 곽지마을로 가거나 고아원에 들어가는 등 뿔뿔이 흩어져 어려운 삶을 살아야 했다. 결국 이로 인해 원동마을은 페허가 됐고, 원동마을 주민들에게는 치유할 수 없는 아픔과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기고 말았다.

 

기억속에서 조차 사라져버릴  뻔한 이 마을의 역사는 40여년 만에 부활했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장년이 된 주민들의 후손이 조상들의 땅을 찾아 나선 것이다.  4·3 때까지만해도 우리 땅이었는데 부모친척이 없어지자 어느 날 다른 사람의 소유로 됐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후손들은 지난 89년9월  등기상 소유자로 돼 있는 ㅅ씨 등을 상대로 애월읍 소길리 이른바 ‘원머흘곶’ 일대  14만여평에 대한 ‘소유권보존등기말소’ 소송을 제기했다.

 

91년 제주지법에서 내려진 1심 재판 결과 이중 5만평정도에 대해 일부 승소판결이 내려졌으나 고법을 거쳐 대법원에서는 2만8천여평에 대해서만  권리를 인정했다. 새 소유자인 ㅅ씨가 60년대  이곳에 조림을 함으로써 20년간의  취득시효에 따른 소유권을 인정받은 것이다. 도민들의 관심을 모았던 이 소송은 법적 복원이 가능하다는 희망감을 안겨줬으나 동시에 ‘시효취득’이라는 냉엄한 법의 논리로 재단됨으로써 ‘4·3’의 치유가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상기시키기도 했다.

 

평화스럽던 마을은 짙푸른 대나무 숲과 빽빽이 자란 삼나무로 뒤덮인 채 지금은 ‘원지’ 표석만이 이곳이 마을 터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장사진

 

 

 

 

 

 

 

 사료(문서, 사진, 증언)

  

 

<출처 : 제주4.3 제50주년 기념 학술문화사업추진위원회, 『잃어버린 마을을 찾아서』, 1998>

 

<1990년 9월23일, 잃어버린 마을인 원동에서 ‘원동4·3희생자 추모굿’을 벌이고 있는 장면>

 

 

<재일동포 김화숙씨가 어머니의 고향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원지(院址)’라는 표석>

상처받은 영혼을 향한 희망이 불어오는 곳
평화·상생·해원 바람의 진원지

제주4·3평화재단

4·3유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