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다랑쉬굴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제주시 지역구분(읍면) 구좌면 지역구분(마을별) 세화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2608-6번지 일대
GPS 위도 333.469722222222, 경도 126.831805555556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제주시 북제주군 구좌읍 세화리 2608-6번지 일대에 소재한 다랑쉬굴은 4·3사건 당시인 1948년 12월 18일, 하도리, 종달리 주민 11명이 피신해 살다가 굴이 발각되어 집단희생 당한 곳이다. 이 날 군경민 합동 토벌대는 다랑쉬오름 일대를 수색하다가 이 굴을 발견했다. 토벌대는 수류탄 등을 굴속에 던지며 나올 것을 종용했으나, 나가도 죽을 것을 우려한 주민들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토벌대는 굴 입구에 불을 피워 연기를 불어넣었고 굴 입구를 봉쇄했고, 굴 속의 주민들은 연기에 질식되어 하나 둘 죽어갔다.

 

한 때 이들과 같이 다랑쉬굴에 은신해 있었던 채정옥(남, 1923년생) 씨는 "사건 발생 다음 날 굴속에 들어가 흩어진 시신들을 나란히 눕혔다. 굴 안에는 그때까지도 연기가 가득차 있었다. 희생자들은 고통을 참지 못한 듯 돌틈이나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죽어 있었고 코나 귀로 피가 나 있는 시신도 있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제민일보 1992년 4월 4일자>에 의하면 종달리 출신으로 당시 민보단 간부를 역임했던 故오지봉 씨는 생전에 “그날 작전은 함덕에 주둔했던 대대본부가 지휘한 군경민 합동작전이었다. 다랑쉬굴을 발견, 군경은 처음에 수류탄을 던졌으나 그래도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입구에서 짚에다 불을 지펴 질식사시킨 것으로 알고있다”고 말했다. 같은 자료에서 채정옥 씨는 희생자들이 왜 그 굴속에 있었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종달리는 47년 6․6사건의 여파 때문인지 그 후 4․3사건이 나자 더욱 군경과 서청의 주목을 받아 일부 젊은이들이 산으로 피신하게 됐다”고 밝히고 굴 안에 총기류는 없었고 희생자들이 무장대도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또 피해자의 유족들은 민보단원들로부터 가족들의 희생소식을 전해 들었으나 당시의 상황은 사체를 수습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고, 세월이 흐르다보니 굴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일부 유족들은 음력 11월 18일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 전날인 음력 11월 17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한편 다랑쉬굴은 잃어버린 마을을 조사하던 ‘제주4․3연구소’ 연구원들에 의해 1991년 12월 발견되었으나, 당시 엄중한 사회현실을 감안 공개치 않다가 전문학자 및 언론사, 의사, 법률가들의 자문을 얻어 1992년 4월 1일 공개했다. 

 

유해 공개는 당시 충격적인 파장을 몰고오면서 4․3 희생의 무모함과 참혹함을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했고, 큰 사회적 파장을 몰고왔다. 특히 현장 공개 후 채정옥씨 등에 의해 희생자의 신원이 밝혀지면서 그 충격은 더해졌다. 즉, 강태용(남, 34세), 박봉관(남, 27세), 고순환(남, 27세), 고순경(남, 25세), 고태원(남, 25세), 고두만(남, 21세), 함명립(남, 21세), 김진생(여, 51세), 부성만(여, 24세), 이성란(여, 24세), 이재수(남, 9세) 등의 희생자 명단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여자는 물론 어린아이까지 포함된 무분별한 토벌대의 만행이었다. 더군다나 굴 속 현장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의복류(단추, 버클, 의복, 비녀, 안경, 가죽신, 일본군화 등)와 생활용품(됫병, 작은병, 자귀, 횃불통, 호리병, 양푼, 반합, 식칼, 솥, 놋숟가락, 쇠스랑, 젓갈단지, 호미, 놋접시, 철사뭉치, 석쇠, 나무밥주걱, 허벅, 사기그릇, 접시, 간장항아리, 솥뚜껑, 나대, 곡괭이, 가위 등)이어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피난생활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1992년 4월 1일 공개한 11구의 희생자 유해는 45일만인 5월 15일 한줌의 재로 변해 바다에 뿌려졌다. 이날 새벽 다랑쉬 굴 현장에서는 구좌읍과 유족들의 주관 아래 유해인도와 조촐한 장례식이 거행됐다. 장례식 직후인 새벽 7시 현장을 떠난 유해는 제주시 화장장으로 옮겨져 화장된 후, 다시 희생자들의 고향인 종달리 앞바다 등지에 뿌려졌다. 이는 유해 발굴의 파장을 차단하려는 정보기관과 행정당국이 서둘러 유족들을 회유했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였다. 다랑쉬굴은 유해들이 밖으로 꺼내진 뒤, 나머지 유물들을 그대로 남긴 채 입구가 콘크리트로 봉해졌다.

 

한편, 2002년 4월 5일, 제주민예총에서는 다랑쉬굴 유골 발견 10주년을 맞아 다랑쉬굴 현지에서 ‘해원상생굿’을 마련하여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굴 입구에 자그마한 표석을 세우기도 했다.

2005년 말 북제주군에서 입구의 밭까지 농로 포장을 했다.

 

송당에서 15분정도 성산쪽으로 가다보면 남동쪽에 다랑쉬오름이 보인다. 다랑쉬오름 옆으로 난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가면 비포장 길이 나오고 이 길을 얼마안가 다랑쉬 마을의 팽나무를 볼 수 있다.  팽나무 앞에서 동쪽으로 난 길을 50여미터 쯤 따라가다 남동쪽의 밭으로 접어들어 두세 개의 밭을 넘어가면 다랑쉬굴이 있는 억새밭이 나타난다. 

 

<출처: 제주도·제주4·3연구소, 『제주4·3유적 Ⅰ』(2003); 제주도·제주4·3연구소, 『제주4·3유적 종합정비 및 유해발굴기본계획』(2005)>

 

 

 〇 1992년 제주도 구좌읍 중산간지대에 있는 ‘다랑쉬굴’에서 유골 11구가 발굴된 사건은 제주4‧3사건 당시 은신자에 대한 무분별한 작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확인 결과 이들 유해의 주인공들은 1948년 12월 18일 제9연대의 진압작전에 의해 희생된 도피 입산자들인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희생자들의 신원은 구좌읍 종달리와 하도리 주민들로서 그 중엔 여자 3명과 아홉 살 난 어린이도 포함돼 있어 충격을 주었다. 다랑쉬 굴 속에서는 플라스틱 안경, 흰색 단추, 혁대, 버클, 옷감, 고무신, 질그릇, 놋그릇, 놋수저, 가마솥, 항아리, 물허벅, 접시, 놋쇠로 만든 제기용 잔받침, 물통, 프라이팬, 가위, 요강, 철사뭉치, 석쇠, 화로, 구덕, 주전자, 나무주걱 등의 생활용품과 낫, 도끼, 톱, 나대, 자귀, 곡괭이, 숫돌 등 연장류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외따로 떨어져 있던 유골 1구 옆에는 그가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철모, 군화, 철창, 대검이 놓여 있었다. 

 

<출처: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②(1994) ; 제주4·3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2003)> 

 

 

 

  현장사진 


 

 

 

 

 

 

 

 사료(문서, 사진, 증언) 

 

 

                                         

<출처: 김동만・김기삼, ​다랑쉬굴의 슬픈 노래​ (2002) >​

 

 

 

 

 

 

 

다랑쉬굴 유해발굴 당시(1992)

<출처: 김동만・김기삼, [다랑쉬굴의 슬픈 노래](2002)> 




다랑쉬 발굴 10주년 기념, 제1회 찾아가는 위령제(2002)

 

 

다랑쉬 발굴 10주년 기념, 제1회 찾아가는 위령제(2002)

 

 

다랑쉬굴 발굴 20주년 기념, 제주MBC 내부탐사(2012)

 

 

다랑쉬굴 발굴 20주년 기념, 제주MBC 내부탐사(2012)

 

 

다랑쉬굴 발굴 20주년 기념, 제주MBC 내부탐사(2012)

 

 

〇 증언 : 채정옥(구좌 종달, 1923년생) 증언(2001.11.15.)

 

“당시 우리가 있었던 곳(다랑쉬굴)이 12월 18일날 토벌을 당해서, 토벌당시 굴 속에서 전부 희생을 당했다. 상당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 토벌날(12월 18일) 당시에는 나는 굴 안에서 나와 있었다. 굴 밖에 나와 있는데, 사방에서 동시에 올라오니까, 경찰관인지 누군지 몰랐다. 그게 처음 토벌이다. 군과 경찰이 합동으로 한 토벌이다. 남은거 하나 없이 다 없애버렸다. 숨었다가, 나중에 저녁에 와서 보니, 전부 죽어 있었다. 

처음에는 토벌대가 굴을 파괴할려고 했던 모양인지, 굴 위에가 막 파헤쳐져 있었다. 안에서 사람들이 나오지 않으니까, 거기다가 잡풀 부스러기를 모아다 불을 지펴서 질식시켰다. 내가 들어가서, 종달리 사람을 전부 한 줄로 눕히고, 하도 사람은 하도에서 온 분이 시체 정리를 했다. 가서 보니, 손톱이 없을 정도로 땅을 파서 죽어 있는 사람도 있었다. 총 맞아 죽은 사람은 없었다. 전부 질식사이다. 희생자들은 도피자 가족과 납치된 사람들이다. 

하도 출신 오문규씨가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었다. 그분 아들이, 거기 아들도 역시 좌익인데, 국민학교 선생이었다. 부산에서 잡혀서 죽었다. 그 분 가족들이 굴 속에서 희생당했다. 그리고, 여자가 3~4명 있었다. 

다랑쉬굴 희생 이후, 남은 사람들은 각자 다 피했다가, 잡혀가는 사람도 있었다. 잡혀가면, 평대인가, 함덕까지 잡혀와서 죽임을 당했다. 다랑쉬굴 사건 전에는 다 같이 지냈는데, 그 이후에는 각자 흩어졌다. 그래도, 여기 내려와도 도피자 가족이다 뭐다 해서 죽을 거니까, 그날그날 살기 위해서 소개당한 부락 같은데 가서 식량 남은 것으로 밥지어 먹고, 아는 사람들을 통해 숨어서 살았다.”

 

 

〇 자료 : ‘다랑쉬굴’ 참사

 

 

1. 몰살 모습의 유해 11구 발견

‘4‧3’ 희생자들의 원혼은 아직도 허공 중에 헤매야 하는가. 44년 전 ‘4‧3’의 회오리 속에서 집단학살된 것으로 보이는 11구의 시신들이 구좌읍 중산간 지대 자연동굴 속에서 희생된 당시의 모습으로 발견돼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유골이 발견된 곳은 구좌읍 세화리 남서쪽 6km 지점으로 해발 170m에 위치한 속칭 ‘다랑쉬굴’. 

 

입산 주민들의 은신처로 추정되는 연장 30m의 좁디좁은 이 굴 속에는 유골  뿐만 아니라 항아리, 가마솥, 질그릇, 물 허벅, 요강 같은 생활용품과 낫, 곡괭이, 도끼 등 연장류들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어서 44년 전의 처절했던 생활상을 한눈에 보여주고 있다. 유골들이 있는 곳에서 초록색의 녹이 슨 비녀와 여자용 버클들도 발견돼 희생자 가운데는 최소한 2~3명의 여자도 포함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동굴은 4‧3때 중산간 지대의 없어진 마을을 조사하던 제주4‧3연구소 조사팀에 의해 1992년 3월 22일 처음으로 발견됐다. 이 소식을 접한 제민일보 4‧3취재반은 3월 29일 연구소팀과 1차 합동조사를 벌인 결과 동굴 안에 당시 무장유격대가 사용했던 총기류는 없는 반면 생활용품과 연장류 등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입산주민들의 은신처로 추정했다.

 

제민일보 4‧3취재반은 인근 마을을 중심으로 탐방조사를 벌인 결과 중산간 지대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이 벌어지던 1948년 12월께 다랑쉬 굴에 숨어있던 주민들이 토벌대에 발각됐고, 토벌대는 굴 입구에 불을 질러 굴속의 사람들을 질식 몰사케 했다는 풍문이 전해지고 있음을 확인하고 구좌읍 일대를 중심으로 희생자들의 신원과 사망경위에 대한 광범위한 진상조사를 벌이고 있다.

 

한편 4‧3 44주기를 이틀 앞둔 4월 1일 오후 보도진과 의사 변호사 제주대 박물관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2차 합동조사가 있었다.

 

성형외과 전문의 전신권씨는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4‧3때 사망한 것으로 보이며, 치아와 두개골 모양 등으로 볼 때 나이 많은 여자와 10대 등 2~3명의 여자를 포함한 다양한 계층이 일시에 숨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제주대 박물관장 이청규 교수는 “그동안 말로만 듣던 4‧3의 수난현장이 이렇게 생생하게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전제한 뒤 “이렇게 깜깜하고 좁은 곳에서 사람들이 살았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소감을 털어놨다. 이 교수는 “골동품의 역사가 아닌, 살아있는 생생한 현장의 역사로서 차후 세대들에게 전하기 위해서도 이곳의 유물에 대한 보존이나 현장의 재연사업 등이 모색돼야 한다”고 말했다.

 

최병모 변호사는 “그들이 어떤 입장에 있던 저렇게 죽어서 시신들이 내버려져서는 안된다”고 못박고 이 문제는 법률적 문제 이전의 정치적 문제로 치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현장을 처음 접했던 제주4‧3연구소 고창훈 소장(제주대 교수)은 “4‧3의 문제가 그동안 말로 글로 표현되어 왔지만 이처럼 좁은 공간에서 4‧3의 모든 것을 보여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다랑쉬굴은 한마디로 4‧3의 총체적 현장이나 다름없다”고 전제한 뒤 “이제 살아있는 사람들의 의무는 가신 넋들을 옳게 진혼하고 최소한 유골들을 깜깜한 동굴 속에서 해방시켜 양지바른 곳에 안장시키는 일”이라고 말했다.

 

 

2. 다랑쉬굴 유해 발굴취재기

소주와 과일 몇 개, 그리고 향을 피워 간단한 제(祭)를 지낸 일행은 겨우 사람 한 명이 뒷걸음질치며 기어들어갈 만한 좁은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칠흑같이 어두운 굴속은 손전등 불빛만 어지럽게 움직였고 굴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차가워 목을 움츠려야 했다.

 

직경 약 60cm 정도의 좁고 낮은 굴 입구를 거위걸음으로 조심스럽게 한 발짝 한 발짝 움직여 3m 정도 지나 타원형 공간에 이르렀을 때 일행은 숨이 턱 막혀왔다. 그리고 눈이 부셨다. 여러 구의 유골들이 손전등 빛을 반사해 눈을 찔러왔기 때문이다.

 

구좌읍 세화리 남서쪽으로 6km 지경, 해발 170m 중산간에 있는 ‘다랑쉬오름’(月郞峰)을 좌표삼아 제주4‧3연구소와 제민일보 4‧3취재반, 그리고 이청규 제주대 박물관장, 최병모 변호사, 외과전문의 전신권씨 등 합동조사반 일행이 ‘다랑쉬굴’ 입구에 도착한 것은 4월 1일 오후 4시.

 

비 개인 오후 햇살은 따사로웠다. 다랑쉬오름은 넓게 펼쳐진 동부지역 대평원 위에 놓여 있었지만 주변에 동쪽으론 은월봉, 서쪽엔 돝오름, 남쪽에 손자봉 등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서 황량함보다는 아기자기한 맛이 있었다. 굴은 억새로 뒤덮힌 들판 사이 옴팡 들어간 밭 터 중앙쯤에 있어 얼른 눈에 띄지 않았다.

 

굴 서쪽으로 약 300m 지경에 위치한 ‘다랑쉬 마을’은 4‧3으로 인해 지금은 폐촌되고 없지만 오래된 팽나무와 대나무 숲, 그리고 우물 터 등이 남아 있어 당시의 흔적을 보여줬다.

 

10구의 시신들은 몸을 맞댄 채 비교적 가지런히 누워 있었고 그들의 유품인 작고 둥근 플라스틱테 안경, 흰색 단추, 혁대, 버클, 옷감, 고무신 등이 44년 전 순서 그대로 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주변에 총알이나 탄피가 없는 것으로 봐서 사망원인은 질식사로 추정됐다.

 

외과전문의 전신권 씨는 사랑니의 유무(有無), 골반 뼈의 모양 등을 관찰하면서 “할머니를 비롯, 10대 후반과 20대 중반 등의 여자 2~3명을 포함, 다양한 연령층의 남녀의 시신”이라고 말했다. 과연 유골 주위를 자세히 살펴보니 초록색 녹이 슨 비녀나 여자용 버클, 여자 고무신등이 놓여있었다.

 

남자들의 일반 가죽혁대와 버클과는 달리 여자용 버클 하나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마치 과거 여학생 검정 교복에 착용하던 것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버클엔 두개의 타원이 X자로 겹쳐있고 그 가운데에 푸를 청(靑)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제각각 다른 이빨 모양을 보며 노소(老少)를 추정하던 중 반짝이며 눈에 들어온 것은 니켈로 만든 이빨이었다. 부러졌거나 충치를 앓아 새로 박았을 이빨, 만일 유족이 있어 이를 기억하고 있다면 식별도 가능하리라.

 

굴은 다시 좁아져 입구처럼 낮게 기며 3m 가량 내려가 다시 제 2굴이 나타나자 일행은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변 여기저기에는 질그릇, 놋그릇, 놋수저, 가마솥, 항아리, 물 허벅, 접시, 놋쇠로 만든 제기용(祭器用) 잔 받침, 물통, 프라이팬, 가위, 요강, 철사뭉치, 석쇠, 화로, 구덕, 주전자, 나무주걱 등 온갖 생활용품들이 모여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낫, 도끼, 톱, 나대, 자귀, 곡괭이, 숫돌 등 연장류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항아리 하나엔 된장으로 보이는 물질이 그대로 담겨져 있어 그 날의 삶이 엊그제 일인 양 그려졌다.

 

그리고 다시 유골 1구. 부근에 철모와 군화, 철창, 대검이 놓여있었다. 뼈의 크기로 봐서 꽤 체구가 컸던 사람인 듯 했다.

 

굴 끝에 이르자 M-1 소총의 것으로 보이는 탄피가 3~4개 흩어져 있었다. 질식사한 것이 사실이라면 토벌대가 불을 피운 후 굴에 들어오면서 확인발사를 한 탄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일행에서 따로 떨어져 있는 이 1구의 유골은 나름대로 전위에서 토벌대의 진입을 막으려 했던 것 같다.

 

굴의 전체적인 모습은 사람의 허파모양인데 약 30m 가량 계속되다 끝난다. 굴 끝은 약 40cm 가량 낮게 이어지는 듯 하지만 윗부분이 함몰돼 있어 잠정적으로 이곳을 굴 끝으로 결정했다. 아마 이곳도 입구 중의 하나인데 폭발 등으로 막힌 것이 아닌가 추정됐다. 

 

현장조사를 마치고 굴 밖으로 나오자 눈이 부셨다. 따스한 봄볕이 여전히 내리쬐고 있었다.

 

세화리, 하도리 등 주변마을을 취재하던 중 1948년 12월께 다랑쉬굴에 은신해 있던 주민들이 토벌대가 굴 폭파를 시도하다 여의치 않자 굴 입구에 불을 피우는 바람에 질식해 몰사했다는 풍문이 있었다. 4‧3당시 제주도 중산간 대개가 그렇듯이 48년 11월, 12월은 악몽이었다. 마을에 소개령이 내려지고 집집마다 불을 붙여 마을이 불바다를 이루었다. 그리고 수많은 주민들이 토벌대에 의해 학살된 것이다.

 

그 처절했던 겨울날, 춥고 배가 고파 서로의 몸을 맞댄 채 풀뿌리로 연명하던 살아서의 그 고생이 죽어 40여년이 지난 후에도 계속되어야 하는가.

 

그들도 부모 형제 자식이 있었을 것이다. 숨이 막혀 고통스럽게 죽어간 고인들만큼이나 유족들은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제주도 어딘가에선 가급적이면 고인 생전에 대한 이야기를 피하면서 언제 어디서 죽은지도 모르는 조상들의 제사를 대개 고인의 생일에 맞춰 지낼 것이다.

 

이 죽음은 4‧3의 상징이다. 처절했던 죽음이 그렇고 아직도 굴속에 갇힌 고인들처럼 은폐된 진상이 그렇다. 그리고 이 죽음은 제주의 비극과 한국현대사의 모순을 상징한다. 4‧3의 소용돌이 속에서 제대로 눈도 감지 못한 채 처참하게 죽어간 우리의 조상님들, 영혼조차 바람길 구름길따라 허공을 헤매야 하는가.

 

돌아오는 길. 4‧3의 진상을 올바로 규명하고 또 유골들은 어서 저 음습하고 차디찬 굴속에서 봄볕이 따사로운 양지바른 곳에 안장시켜 영혼을 진혼하는 것은 우리 시대 모두의 절대과제란 생각이 머리 속에 가득했다. ('제민일보' 1992년 4월 2일)

 

 

3. <사 설> 다랑쉬 굴 유해의 증언

그 해의 4월 3일이 있고 어언 44년이 지났건만, 4‧3은 ‘과거지사’가 되기를 완강히 거부하면서 제주도민의 가슴 속에 아직도 ‘피흐르는 상처’로 남아있다. 구좌읍 중산간 ‘다랑쉬 오름’ 동굴 속에서 찾아낸 11구의 4‧3희생자 유해들은 왜 4‧3이 역사의 책갈피 속으로 접혀 들어가 고이 잠들 수 없는가를 고함쳐 증언해 주고 있다.

 

반세기에 가까운 44년 동안 그들은 비좁고 음습한 동굴 바닥 위에 누워 해방되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인가를 헤아리는 것이 4‧3치유를 위해 우리 산자들이 내 디딜 수 있는 첫걸음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어두운 동굴에서 해방되는 날을 고대해 왔을 것이다. 이들의 떼죽음은 40여년이 지나도록 동굴밖 햇빛을 보지 못해 왔었다. 이 죽음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은폐되어 온 것처럼 4‧3의 진상 또한 지난 40여년간 은폐되어 왔다. 이제 비로소 이들의 죽음은 동굴의 어둠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게 됐지만, 4‧3진상의 대부분은 아직도 은폐와 망각의 어둠 가운데 방치되어 있다. 이 진상의 전모를 덮어둔 채 4‧3의 치유는 가능치 않을 것이다.

 

억울한 죽음들의 진혼을 위해서도 진상이 밝혀져야 한다. 물론 진혼을 위해 예를 갖추어 祭를 지내고 위령탑을 세우는 등 마땅한 절차와 형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죽음의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서는 이같은 진혼의 형식도 문자 그대로 형식적인 것이 되고 만다. 이 점은 민간전승의 해원(解寃) 형태에서도 엿볼 수가 있는 바, 빙의(憑依)가 그것이다. 빙의 현상을 제주의 민간에서는 ‘들렸다’고 한다. 죽은 사람의 혼이 산 사람의 몸에 달라붙어 그의 입을 통해 한풀이 하소연을 털어 놓는데, 대개는 자기가 억울하게 죽은 사연이 사설의 내용을 이룬다. 즉 죽음의 진상을 밝히는 것이 빙의의 주된 기능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한이 풀리지 않는다. 빙의와 같은 현상은 미신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진상규명이 정신적 외상의 치료를 위해 필수적이라는 것은 지극히 ‘과학적인’ 이야기이다.

 

현학 취미로 보일 수도 있어 다소 겸연쩍게 느껴지긴 하지만, 프로이드의 다음과 같은 구분을 소개하는 것이 4‧3 치유법의 한 암시가 될 것 같다. 그는 정신적 증상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최면술과 정신분석 요법을 비교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 최면술은 증상을 일으킨 원인은 덮어둔 채 증상자체만 완화시키려는 요법인 반면에 분석요법은 병의 근원을 들춰내고 제거한다는 것이다. 최면요법이 분장술이라면 분석요법은 외과수술에 비유된다. 4‧3의 진상은 덮어둔 채 ‘위령’ 운운 하는 것은 증상만 완화시키고 병의 부리는 그대로 놔두는 최면술에 지나지 않는다 할 것이다.

 

물론 증상의 근원을 들춰내는 것이 유쾌한 일일 순 없다. 최면요법과 달리 분석은 의사에게나 환자에게 모두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진상이 드러나는 것이 혹 두렵고 혹은 부끄러워 환자가 완강히 저항하기도 한다. 4‧3의 진상규명에도 똑같은 저항과 방해가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목격한다. 그러나 이 거부반응을 극복하지 못해 진상에 도달하는 것을 중도에 포기한다면 환자는 치유될 수 없다고 분석요법은 경고한다.

 

최면술로는 갈등이 잠시 해소되는 것 같이 보이지만 결국 병이 재발되고 만다는 것을 의학은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어언 44년이 지났음에도 4‧3이 과거지사가 되지 않고 아픔이 되살아나고 또 되살아나는 이유일 것이다. 40여년 동안 진상이 침묵을 강요당함으로써 4‧3의 제주도는 겉으로만 정상이었을 뿐, 늘 내출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4‧3의 치유를 모색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 아물은 해묵은 상처를 왜 들춰내 덧나게 하느냐”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덮어두면 상처는 낫는다고 믿는 최면술사와 같다.

 

4‧3이 일방적인 희생자만 낳았던 것은 물론 아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면서 쌍방에서 희생자가 났다. 그 점에서 4‧3은 좌‧우 할 것없이 제주도민이 한 덩어리로 당한 비극이었다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양비(兩非)의 논리라는 최면술로 다시 진상을 흐려 놓으려 해서는 안된다. 누가 더 완강하게 4‧3의 규명에 저항하는가를 살피는 것도 그 진상을 밝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40여년간 4‧3은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가 되어 왔다. 그리고 누가 왜 침묵을 강요해 왔는가는 누구나 알고 있다. 이것이 또한 진상의 소재를 암시해 준다.

 

4‧3을 보는 시각은 희생자에 따라 차이가 날 수 있다. 마을에 따라 달리 나타나기도 한다. 이 점이 4‧3이 쉽게 풀리지 않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렇게 각자가 각자의 입장에 사로잡혀 있는 한 4‧3은 해명될 수도, 해소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혹은 총체적으로 4‧3을 접근할 수 있고, 이 경우에만 그 실체에 도달할 수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부분에 집착하는 한 4‧3은 네탓, 내탓 하는 다람쥐 쳇바퀴 시비를 되풀이할 뿐일 것이다. 4‧3의 진상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총체적 접근, 다시 말해 이 사건을 해방공간의 한국사 가운데 놓고 그 역사적 성격을 규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다음 사건의 윤리적 성격을 따지기 위해 ‘애매한 죽음’의 책임소재를 질문해 보아야 한다. 여기에는 책임의 질과 양, 즉 누가 대부분의 희생자를 냈는가, 그것은 우발적인가 조직적인가, 불가피했는가 자의적이었는가 하는 등의 질문이 포함되어 던져져야 할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와같이 근원을 들춰내는 일은 고통이 없을 수 없다. 부끄러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치유를 위해 이런 고통은 함께 치르고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제민일보] 1993년 4월 3일)

 

 

4. 드러난 참살 전모

‘4‧3’ 44주년을 맞아 북제주군 구좌읍 ‘다랑쉬 굴’에서 발굴, 전국적인 이목을 모았던 11구의 유해는 1948년 12월 18일(음력 11월 18일) 9연대의 대토벌에 의해 몰사된 입산자들의 시신으로 밝혀졌다. 특히 희생자들의 신원은 구좌읍 종달‧하도리의 주민들로서 그 중엔 여자 3명과 9살난 어린이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4월 2일 유해발굴 첫 기사가 나간 후 쇄도한 증언제보를 토대로 제민일보 4‧3취재반이 인근마을들을 대상으로 집중취재한 결과 밝혀졌다.

 

4‧3취재반은 당시 토벌작전에 동행했던 구좌읍 민보단 간부와 토벌대가 철수한 직후 직접 굴속에 들어가 시신을 수습했다는 생환자, 그리고 생존해 있는 유족들을 추적, 당시의 참상 전모를 밝혀냈다.

 

특히 이날의 토벌작전은 함덕 주둔의 제9연대 제2대대의 지휘아래 군경민 합동으로 감행됐으며, 대전의 2연대와 교대키로 된 9연대가 제주를 떠나기 앞서 ‘훌륭한 토벌업적을 세우려는 욕망’(G-2보고서의 표현)에 의해 과잉진압 성격의 군사작전이었다는 사실이 미국자료들을 통해 밝혀졌다.

 

이날 합동작전에 참여했었다는 구좌읍 민보단 간부출신 오지봉씨(75‧구좌읍 종달리)는 “그날 작전은 함덕에 주둔했던 대대본부가 지휘한 군경민 합동작전이었다”고 밝히고 “다랑쉬 굴을 발견, 군경은 처음에 수류탄을 던졌으나 그래도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입구에서 짚에다 불을 지펴 질식사시킨 것으로 알고있다”고 말했다.

 

또한 다랑쉬 굴에 있다가 다른 굴로 피신하는 바람에 참변을 모면했던 채모씨(67‧구좌읍 종달리)는 사건발생 다음날 굴속에 들어가 흩어진 시신들을 나란히 눕혔다면서 “굴입구에 불피웠던 재들이 남아 있었다”고 증언했다.

 

채씨는 “굴 안에는 그때까지도 연기가 가득차 있었으며 희생자들은 고통을 참지 못한듯 돌틈이나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죽어 있었고 코나 귀로 피가 나 있는 등 참혹한 모습이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피해자들의 유족들은 민보단원들로부터 가족들의 희생소식을 전해 들었으나 당시의 상황은 사체를 수습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고 세월이 흐르다보니 굴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일부 유족들은 음력 11월 18일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 전날인 음력 11월 17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한편 미 24군단 정보보고서는 9연대가 제주를 떠나기 앞서 업적을 세우기 위한 욕망으로 대토벌을 전개하고 있다고 밝히는 동시에 다랑쉬 굴이 토벌되던 날 상황을 소개, “제주를 떠나버린 제9연대 제2대대는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군사작전에서 민간인과 경찰의 도움을 받아 12월 18일 130명을 죽이고 50명을 체포했으며 소총 1정, 칼 40자루, 창 32자루를 노획했다”(48년 12월 24일자)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이 자료는 함덕주둔 9연대 2대대가 18일 하루 동안에 이른바 ‘폭도’ 130명을 사살시키면서 노획한 총기는 1정 뿐임을 밝혀 많은 것을 시사케 해주고 있다.

특히 이 시기는 4‧3의 전개과정에서 가장 인명피해가 심했던 시기로 군경은 물론 주민들까지도 총동원, 중산간 지대를 초토화시키는 이른바 ‘빗질 작전’을 전개했었는데, 다랑쉬 굴의 유해들도 바로 이 시기에 희생된 것이다.

지금은 미국무성에 근무하는 존 메릴은 1975년에 논문 「제주도 반란」을 통해 단 1주일 동안에 630여명이 살해당했다고 밝히면서 9연대가 저지른 12월 중순의 과잉진압 작전을 신랄하게 비난한 바 있다.   ([제민일보] 1992년 4월 4일)

 

 

5. 다랑쉬 굴 참상 증언

다랑쉬 동굴 11명의 죽음은 토벌대가 굴입구에 화입(火入), 질식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희생자 가운데는 아홉살난 어린이도 포함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더해주고 있다.

 

사망자 11명의 신원은 구좌읍 종달리 출신의 강태룡‧박봉관‧고순환‧고순경‧고태원‧고두만‧함명입, 하도리 출신인 김진생‧부성만‧이석란‧이석란의 아들 이재수 등 남자 8명, 여자 3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민보단 간부로서 이 토벌작전에 따라나섰던 오지봉씨는 “굴의 입구는 양쪽에 있었는데 토벌대가 처음엔 입구로 수류탄을 던졌고 그래도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검불’로 불을 피운 후 구멍을 막아 질식사시켰다”면서 숨진 사람들은 종달‧하도리 사람들로서 여자들도 있었다고 덧붙여 ‘참상의 진상’ 실마리를 풀게했다.

 

4‧3취재반은 또한 48년 11월께 산사람들에게 납치됐다가 다랑쉬 굴에서 이틀간 기거한 적도 있다는 채모씨를 찾아내 그로부터 “시신을 직접 정리했다”는 충격적인 증언을 들었다. 

 

채씨는 “사건이 나던 날은 12월 18일로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면서 “사건 발생 이튿날 산사람들이 주변을 확인하라며 하도리 출신 오치악과 고완규 등과 함께 보내 그 굴의 참상을 목격했었다”고 증언했다.

 

채씨는 이어 “굴안은 그 때까지도 연기로 가득했는데 시신은 고통을 참지못해 돌틈이나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죽어 있었고 코와 귀로 피가 나 있었다”면서 “여자들과 어린아이를 보니 가련한 생각에 여기저기 흩어진 시신들을 나란히 누이고 나왔다”고 말했다.

 

채씨는 또 ‘희생자들이 왜 그 굴속에 있었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종달리는 47년 6‧6사건의 여파 때문인지 그 후 4‧3사건이 나자 더욱 군경과 서청의 주목을 받아 일부 젊은이들이 산으로 피신하게 됐다”고 밝히고 굴 안에 총기류는 없었고 희생자들이 무장대도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한편 유가족으로는 현재 고순경‧고순환 형제의 동생이 서울에, 고두만씨의 아들이 울산에 살고 있고 나머지 유가족들은 모두 종달‧하도리 등지에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유가족들은 토벌대에 따라 나섰던 민보단원 등의 입을 통해 사망장소‧사망일자를 알고 있었고 따라서 제사도 음력 11월 17일 저녁에 지내는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유족들은 당시 시신을 수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다 세월이 흐르면서 다랑쉬 굴을 찾을 수 없어 그대로 지내고 있다고 밝혔다.

 

사망자들은 대개 후대가 끊겨 함명입씨는 동생 함명의씨(종달리)가 제사를 지내고 있고, 이석란씨의 제사는 오정순씨(하도‧이석순씨 남편의 누나)가 지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사망자의 신원이 밝혀짐에 따라 유골의 수습과 안장 등 진혼문제가 시급히 대두되고 있는데 굴 속에서 발견된 유품은 유골들의 식별에 단서가 될 것으로 보여 관심을 모으고 있다.

 

현재 발견된 특이한 유품으로는 니켈 이빨, 비녀, 둥근 플라스틱테 안경, 여자용 버클 등이 있는데, 이와 관련 4‧3취재반과 동행했던 외과 전문의 전신권씨도 “유골들 중에는 종아리뼈 하나가 심하게 부러졌던 것이 있다”고 밝힌 바 있어 이 역시 유골구별에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 다랑쉬 굴 희생자 명단

  ([제민일보] 1992년 4월 4일)

 

 

6. “헛묘 만들어 제사 지냈다”

‘4‧3’의 희생자중 상당수가 시신을 찾거나 확인할 길이 없어 헛묘(虛墓)를 만들거나 합장해온 것으로 나타나 4‧3의 아픔을 더해주고 있다.

 

이번에 발견된 구좌읍 세화리 ‘다랑쉬 굴’ 희생자들의 경우 확인결과 고태원‧이석란‧부성만씨 등의 헛묘가 발견돼 최소한 절반이 시신도 없이 묘가 만들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유족들은 목격자들을 통해 가족이 사망한 사실을 알면서도 시신을 찾지 못해 뒤늦게 혼만 불러 헛묘를 세우고 해마다 벌초까지 해왔다는 것이다.

 

4‧3 희생자가 많이 난 도내 마을들에는 대부분 이와 같은 헛묘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당시 생존자들에 다르면 이들 모두 어디서 죽었는지 모르거나 수장당한 경우, 또 사망장소를 안다 할지라도 ‘입산자’들의 경우 가족들까지 몰살당하던 당시 분위기 때문에 찾아나서지 못했다가 뒤늦게 묘만 세워 원혼을 달래왔다는 것이다.

 

유족들은 보도내용에 슬픔과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어서 빨리 유해를 인도받아 양지바른 곳에 안장하고 싶다”면서 “당국의 조치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또한 서로 연락을 취하면서 향후 대책을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들은 주로 “지금 와서 유골을 구별키는 어려우므로 합장하거나 희생자 수만큼 봉분을 만들고 연명으로 비석을 세우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런데 희생자 중 후대가 남은 곳은 3명 뿐이며 나머지는 동생이나 친척 등이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희생자 고두만씨의 아들 고종환씨(45‧울산 거주)는 5일 제민일보 4‧3취재반과의 전화인터뷰를 통해 “오늘이 내 생일이라 마침 부모님 생각을 하던 중인데 이런 소식을 들으니 가슴이 떨리고 숨이 막혀온다”고 심정을 밝혔다. 고씨는 “아버지보다 보름 앞선 12월 4일 어머니도 토벌대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생후 7개월인 상태에서 할머니와 큰어머니 손에서 군대가기 전까지 자랐다”면서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고태원씨의 부인 최장삼씨(71‧종달리)는 “전남 완도군 소안도에서 해녀생활을 할 때인데 고향에 사태가 나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하도 기가 막혀 한라산을 바라보며 한없이 울었다”며 “그 때는 따라 죽어야 될 건지 살아야 될 건지 막막했는데 살다보니 살아지더라”고 말했다. 최씨는 이어 “당시 2살짜리 아들 하나를 데리고 살다보니 벌써 44년이 흘렀다”면서 “비록 시신은 없지만 섭섭한 마음에 종달리 신산마루에 헛묘를 만들어 벌초도 한다”고 말했다.

 

희생자중 이석란‧부성만씨의 헛묘도 하도리에 있는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석란씨의 제사를 지내고 있는 오정순씨(72‧이석란여인 남편의 누나)는 “당시엔 도저히 현장에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헛묘를 만들었었는데 이제나마 유골이 발견돼 흙 속에 묻히게 된 것은 다행”이라고 말했다. 오씨는 또 “40여년 전의 시신을 이제와 구분할 수는 없고 유골들도 그동안 이웃해 있었으니 공동으로 합묘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한편 도민들 사이에서는 다랑쉬 굴의 유골들은 4‧3의 소용돌이 속에서 처참하게 희생된 상징으로서 떠도는 넋을 달래고 제주인의 한과 아픔을 치유키 위해서는 진혼차원의 대책이 시급히 모색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이와 관련 제주도의회 장정언 의장은 “예의를 갖춰 영혼들을 안장시킬 수 있는 진혼의 절차를 밟아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회의원 당선자인 양정규씨(북제주)는 “40여년간 토굴 속에 갇혀진 유골들을 양지바른 곳에 안장할 수 있도록 도민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보였다.([제민일보] 1992년 4월 6일)

 

 

 

7. <사 설>  유해처리와 금(禁)줄

‘다랑쉬 굴’ 11구의 4‧3희생자 유골이 발견된지 한 달여만에 유족들에게 인도된다고 한다. 그리고 유족들은 넘겨받는 즉시 유골들을 화장해 재를 바다에 뿌리는 것으로 안장을 대신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4‧3당시 시신을 못찾는 바람에 헛묘를 써 모시고 있기 때문에 새로 묘를 만들기 딱하고, 설사 묘를 쓴다고 해도 어느 것이 누구의 유골인지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 유족들의 설명이다.

 

하기는 화장도 엄연히 장례법의 한가지일 뿐아니라 묘지로 인한 국토잠식을 걱정해 권장하는 장례법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불교의 장례는 전통적으로 화장이다. 이렇게 본다면 4‧3유골을 화장하는 것도 합당한 예를 갖춰 엄수한다면 시비거리가 안된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으로 스스로를 달래고 유족들의 결정을 일면 이해하면서도 암만해도 섭섭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지워지지 않는다. 장례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아직까지도 화장보다는 매장이 애도와 정성이 깃든 것으로 여긴다. 심지어 불교도 중에는 아직까지는 화장보다 매장을 선호하는 신도가 많다. 그만큼 관습은 쉽게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이같은 우리의 전통적 정서는 4‧3유골들을 화장처리한다는 방식에 거부감을 느끼게 한다.

 

그 뿐 아니다. ‘다랑쉬 굴’ 어둠 속에서 44년간 갇혀 누워 있던 희생자들의 유골이 햇빛을 보자마자 불길에 태워져 한 줌의 재로 사라진다면 이들의 운명이 기구해도 너무 기구하다.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이념이나 편가름 이전에 인간에 대한 원초적 동정심에 기인하는 것이다.

 

언필칭 4‧3희생자는 좌든 우든 모두 같은 제주도 사람이요, 다 같은 피해자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 마음으로 이쪽 저쪽의 희생자를 모두 감싸 진혼하는 것이 4‧3으로 인한 갈등을 해소하고, 제주도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있는 역사의 상처를 아물리는 길이라고들 해오지 않았는가.

 

만일 ‘다랑쉬 굴’의 그들이 군경의 유해였다고 해도 그렇게 꺼내자마자 재를 만들어 파도에 흩어지게 했을 것인가. 국화꽃과 태극기로 장식한 제단을 만들고 주악대가 구슬픈 진혼곡을 연주하는 가운데 고급공무원과 유지들이 줄지어 분향하고 그 향내가 장내 가득 번지는 장엄한 장례식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입만 열면 가해자는 없고(있더라도 잊어 버리고), 진혼해야 할 피해자가 있을 뿐이라고 해온 저 ‘화해의 논리’는 어디로 증발했다는 말인가.

 

이 점에서 직접적으로는 북제주군, 거슬러 올라가 제주도와 지방의회들이 “유골처리는 유족 소관”이라는 편리한 구실을 내세워 발을 빼 비켜서 버린 것은 무책임한 소치가 아닐 수 없다. ‘다랑쉬 굴’의 유골들은 위정자와 사회 지도층에게 “그대들이 입으로 떠드는 화해의 논리대로 우리를 엄숙히 장례지냄으로써 4‧3의 상처를 아물게 하라”는 말을 하기 위해 44년의 어둠을 털고 우리 눈 앞에 모습을 나타냈던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당국은 눈치만 보다가 모든 것을 유족에게 떠넘기고는 슬그머니 도망쳐 버린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어느 쪽인가를 가리지 않고 모두를 4‧3피해자로 여겨 진혼해야 한다던 자신의 공언을 스스로 저버렸다. 더구나 ‘다랑쉬 굴’의 희생자들은 소위 ‘무장폭도’들도 아니었다. 이와같이 당국은 이들의 장례식을 계기로 실천으로 보여줄 수 있었을 자기들의 주장을 공허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4‧3의 상처를 아물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쳐 버렸다.

 

화장이냐 매장이냐 하는 것은 이와같이 단순히 장례법에 관한 시시비비를 넘어선 문제인 것이다. 유족들에게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4‧3은 희생자들의 가족사이자 역사적 사건이다. 유족들로서는 화장도 예를 갖춘 장례일 수 있으나, 그 주검들이 갖는 역사적 실체성이 한줌 재가 되어 사라지는 것은 제주도 공동체의 공론을 거쳐 결정해야 할 문제이다. 사사롭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같은 귀결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4‧3에 억울하게 희생된 많은 양민들이 변변한 장례식을 지내지 못하고 반듯한 묘비 하나 세울 수 없었던 사건 당시의 상황이 아직까지도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입가진 사람은 한마디씩 4‧3에 대해 논하고 치유처방이 백출하는 요즘이지만, 4‧3에 처진 눈에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禁줄을 우리는 ‘다랑쉬 굴’의 전말에서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금줄을 완전히 걷어내려면 앞으로도 더 많은 시간을 기다리고 더 많은 고뇌를 우리 모두 해야 할 것같다.

 

끝으로 당부한다. 유골처리에 무책임했던 당국은 유물‧유품만이라도 책임지고 보존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비극적인 사건이고, 그래서 잊어버리고 싶은 일일지라도, 역사유물을 후대에 전하는 것이 우리들 산者의 책임이다. ([제민일보] 1992년 5월 8일)

 

 

8. 한줌의 재로 변한 유해

4‧3의 회오리 속에서 몰사당한 그대로의 모습으로 발견돼 전국적으로 충격을 줬던 구좌읍 ‘다랑쉬 굴’ 11구의 희생자 유해는 발견 45일만인 4월 15일 한줌의 재로 변해 바다에 뿌려졌다.

이날 새벽 다랑쉬 굴 현장에서는 구좌읍(읍장 이윤식)과 유족들의 주관아래 유해인도와 조촐한 장례식이 거행됐다.

촉촉히 내리는 빗속에 진행된 이날 장례식에는 읍장과 구좌읍 이장단, 유족 등 80여명이 참석했는데 장례식은 권명환 주지스님(청강사)의 독경 속에 불교식으로 엄수됐다

이날 새벽 포크레인을 동원, 그동안 콘크리트로 밀봉돼 있던 굴입구를 파헤치면서 시작된 유해 인도작업은 삽시간에 진행됐다. 유족들이 현장에 도착한 새벽 6시께는 이미 굴 속의 유해들이 수습되어 있었다.

조촐한 장례식이 끝난 뒤 새벽 7시 현장을 떠난 유해는 제주시 화장장으로 옮겨져 화장된 후 다시 희생자들의 고향인 종달리 앞바다 등지에 뿌려졌다.

다랑쉬 굴은 유해들이 밖으로 나온 뒤 굴 속에 유물들을 그대로 남긴 채 다시 밀봉됐다.

이날 장례식에는 종달리와 하도리 그리고 육지에서 살고 있는 유족들이 참석했는데 유해인도와 장례식 광경을 일본 요미우리 신문 기무라 고조(木村晃三) 편집위원과 내신기자들이 취재했다.

당초 구좌읍사무소에서 작성한 유해인도 계획에 따르면 유해의 현장 출발시간을 오전 8시로 잡았으나 예정보다 한시간 앞당긴 오전 7시께 서둘러 현장을 떠나는 바람에 제주도의회 장정언 의장과 이재현‧이영길 의원, 현장을 처음 발견한 제주4‧3연구소(소장 고창훈) 관계자들이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으며, 일부 취재기자들이 영구차가 떠난 뒤 현장에 도착,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다.(󰡔제민일보󰡕 1992년 5월 15일)

 

 

9. <취재수첩>  결국 바다에 수장

‘4‧3’의 소용돌이 속에서 군경토벌대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한 구좌읍 ‘다랑쉬 굴’ 11구의 유해는 결국 불에 태워져 바다에 수장됐다.

“언제 어디서 돌아가신 줄도 모르다가 44년만에 기적적으로 찾게 된 조상의 유골인데 이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니 기가 막힐 뿐입니다. 외부의 압력이 없었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15일 오후 2시 김녕리 앞바다, 한줌 재로 남은 뼛가루를 바다에 뿌리던 후손들은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면서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이는 “매장을 권유함에도 불구하고 유족들이 한사코 화장을 주장했다”는 행정당국의 발표와는 너무도 거리감이 있는 말이었다.

한 유족은 “화장이 불가피하다면 뼛가루의 11분의 1을 달라며 심한 다툼을 벌였으나 결국 분위기에 밀려 승복했다”고 밝혔다. 장례식에 있어서 행정당국의 소홀함에 불만을 떠뜨리던 또다른 유족은 “지금껏 억눌러 참아왔는데 매장할 경우 누가 똥‧오줌 싸고 돌맹이를 던질까봐 화장에 동의했다”며 다랑쉬 굴과 관련된 왜곡된 여론과 유족들의 피해의식을 표출했다.

이날 장례식은 구슬피 비가 내리는 가운데 뭔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쫒기는 분위기 속에서 서둘러 진행됐다. 새벽 6시 유족들이 다랑쉬 굴에 도착했을 때 유골은 이미 수습돼 있었고, 예정보다 1시간 앞당겨 진행되는 바람에 장례식에 참석키 위해 나선 도의원들은 발길을 돌려야 했다. 취재기자 역시 화장된 유골을 바다에 산포하는 과정을 취재하기 위해 배에 승선하는 과정에서 앞을 가로막는 구좌읍장과 경찰의 취재방해로 심한 실랑이를 벌이다 유족들의 거센 항의지원으로 겨우 배에 오를 수 있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란 말이 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하라’는 옛 성현의 말씀이다. 내 조상의 일이어도 이렇게 했을까.

그러나 토벌대에 의해 죽었다는 이유 하나로 ‘나 언제 어떻게 죽었노라’는 말 한마디 못하고 저 음습한 동굴 속에서 44년을 기다려온 유골들은 뒤늦게나마 후손의 손길과 맞닿았으니 억울한 넋을 조금이라도 달랠 수 있었으리라.

돌아오는 길, 제주바다는 매우 거셌다. 그래서 모두들 몸을 낮춰 배 언저리를 꼭 잡았다.

(김종민, [제민일보] 1992년 5월 16일)

<출처: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②] (1994)>

 

 

 

 

 

 

 

 

상처받은 영혼을 향한 희망이 불어오는 곳
평화·상생·해원 바람의 진원지

제주4·3평화재단

4·3유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