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자리왓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제주시 지역구분(읍면) 애월면 지역구분(마을별) 어도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봉성리 1410번지 일대
GPS 위도 33.4046388888889, 경도 126.328055555556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〇 제주시 애월읍 봉성리의 자리왓 중앙에는 좌우상하 균형이 잘 잡힌 폭낭(팽나무)이 4·3 당시의 비극과 폐허가 된 대지의 무상함을 전해주듯 건장하게 서 있다. 봉성리의 옛 이름은 '도노미'이다. 조선시대 고종 이후 어도리로 불려지다 1950년 봉성리로 개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는 4·3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당시 어도2구는 자리왓(35가호), 열류왓(15가호), 멀팟(15가호), 고들리왓(15가호), 지름기(15가호), 상시머름(10가호), 솔도 등 7개 자연마을을 품고 있었다. 자리왓을 비롯한 어도2구 주민들은 소개령에 따라 어도1구로 내려와 살다가 현재의 신명동에 재건마을을 형성한 후 1구와 2구가 합병하게 되면서 봉성리로 마을명을 개칭하게 된다. 당시 마을개명추진위원회에서는 마을 앞에 있는 어도봉(도내봉)이 봉황새의 형상을 하고 있어서 봉성리로 마을명을 결정하였다.
어도 2구의 중심마을이었던 자리왓은 1948년 5월 10일, 단독선거 반대를 위해 전 주민이 새별오름 앞에 있는 '자굴왓 굴'로 피신했다가 다음날 마을로 돌아오며 4·3의 수렁으로 들어 가게 된다. 토벌대의 작전이 시작되면서 자리왓에도 1948년 11월 23~25일 3일 간 소개명령이 내려졌다. 그리고 곧 이어 벌어진 토벌대의 초토화작전으로 마을은 폐허로 변했다. 주민들이 후에 마을에 와보니, 잿더미가된 자리왓의 대지는 벌겋게 달구어진 붉은 땅이었다고 한다. 

1948년 10월 26일 새벽, 토벌대는 자리왓 등 어도 2구에 들어와 가가호호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이 때 젊은이나 도망갈 기미를 보인 사람 중 5명을 체포했다. 군인들은 곧 이들을 자리왓 입구의 금성천 상류에 위치한 불미집으로 데려가 총살했다. 이 중 양중화, 강이검, 양오문, 강희전 등 4명은 현장에서 희생됐으나 강원선은 총을 맞고도 살아 남았다.  

소개 이후에도 토벌대에 의해 자리왓 주민들의 죽음은 계속되었다. 멀팟 굴에 숨었다가 홍창훈(21)이 희생되었으며, 지름기 근처에 숨어 있었던 강병용(22), 문병휴(23)도 경찰에 잡혀 총살되었다. 한림국민학교에 주둔했던 2연대에 잡혀가 오태유(25), 안국천(21) 등 4명도 희생되었다. 

 

자리왓 마을 입구에 자리잡았던 신명서당은 일제시대 초기에 세워져 구학문을 가르쳤으나 1940년대 부터는 학년제를 도입하여 신학문을 교육했다. 4·3당시에는 4학년까지 두고 있었으며, 충실한 교육과정과 열의있는 선생으로 인하여, 어도2구 학생은 물론 1구와 어음리 학생들 까지도 유학올 정도로 명성이 자자 했다.
당시 선생님은 일본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강몽규 선생이었는데, 학생들과 고구마를 쪄서 함께 먹고 있던 중 1948년 9월쯤 애월지서 경찰들에 의해 피살되고 만다.
이때 서당에 함께 있었던 구서기 강창염은 뒷담을 넘어 도망치던 중 경찰의 총에 맞아 발에 총상을 입었으나 죽기살기로 뛰어 열류왓 친족집에 숨어 살아 난 후 70년대에는 애월면장 까지 지냈다고 한다.

"저는 신명서당 1학년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강몽규 선생은 교양과 민족의식이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5·10선거 때는 학생들에게 마을 안길 행진을 시켰으며 들판에서 야외수업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강규방 씨의 증언이다. 강 씨는 선생님의 이러한 모습이 경찰의 주목을 받게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당시 자리왓의 호주는 강경춘, 김인생, 문철연, 문말연, 김유만, 강창호, 문갑주, 문석윤, 고평연, 문군하, 문예천, 문인하, 강군선, 문일생, 문수휴, 문달휴, 강창염, 문계표, 문을표, 문술송, 문평만, 강술생, 강몽규 등이다.
현재 자리왓 일대에는 4·3 당시 마을의 중심지였던 왕돌거리에 큰 팽나무가 남아 있고, 곳곳에 제주도 특유의 좁고 구불구불한 울레터와 집터 흔적임을 말해주는 대밭들이 남아 옛 정취를 전하고 있다. 팽나무 옆에는 지난 2002년 제주도에 의해 세워진 '잃어버린 마을' 표석이 있어 마을의 비극적 역사를 전해주고 있다.

신명동은 봉성리 서남쪽에 위치해 있는 4·3 이후의 재건마을로 자리왓을 비롯한 어도2구 주민들이 모여 살고 있는 마을이다. 어도2구 주민들은 소개 후 1구와 귀덕 등지에 흩어져 살았다. 1구에 소개했던 2구 주민들은 약 2년 후 고향 마을로 돌아가기 어려워지자 회의를 열어 1구에 정착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곧 문수휴, 강정춘 등을 중심으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어도리 3147번지 일대 강모 씨의 땅을 외상으로 구입하여 각자 터를 잡아 움막을 지었다. 이런 움직임에 그 동안 남의 집에 살거나 귀덕 등지에 흩어졌던 주민들이 합류하면서 신명동이라는 큰 동네가 탄생하게 되었다. 1962년 마을 재건 정책에 따라 10여호 정도가 건축자재를 지원 받아 자리왓에 정착했으나 몇 년 후에 다시 내려오고 말았다. 건축자재를 뜯고와 지은 재건주택이 지금도 신명동에 3채 남아 있다.

어도2구 주민들이 고향 마을을 복구하지 않은 이유는 밭농사 위주의 생활이어서 신명동에 살면서도 농사짓기가 가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마을 중심에 팔각정을 세워 마을 유래사를 보관하고 있다. 마을 중심에 있는 애월읍 농협 봉성지점에서 남쪽(한라산 방향) 신명동 쪽 대로로 들어서서 700m 정도 가면 마을 끝 지점에 첫 갈림길이 나온다. 남서쪽 방향의 시멘트 도로를 따라 2km 정도 올라가면 오른쪽 소로길에 큰 팽나무가 있는 곳이 당시 마을의 중심지였던 왕돌거리이고, 잃어버린 마을 표석도 세워져있다. 표석 내용의 일부분이다.

 “주민들은 봉성리 입구 신명동에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한 이후 자리왓 등으로 전혀 돌아오지 않았으니 이 곳을 지나는 길손들이여,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라. 저 바람에 스석대는 대숲이 있던 집터와 밭담 사이로 자그맣게 남아있는 올레, 그리고 마을의 역사와 더불어 살아온 저 팽나무를. 서러운 옛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가.”

<출처: 한라일보(2007.6.12.)>

 

〇 어도2구의 자연마을인 자리왓에는 1948년 11월 23일 ~ 25일 3일 간 소개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리고 곧 이어 벌어진 토벌대의 초토화작전으로 마을은 폐허로 변했다. 그 후 주민들은 마을이 재건된 후에도 1구에 대다수가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해 자리왓은 현재 잃어버린 마을로 남아 있다.

자리왓은 30여 호로 호주는 강경춘, 김인생, 문철연, 문말연, 김유만, 강창호, 문갑길, 문석주, 문석윤, 고평연, 문군하, 문예천, 문인하, 강군선, 문일생, 문수휴, 문달휴, 강창영, 문계표, 문을표, 문술송, 문평만, 강술생, 강몽규 등이다.

4․3 당시 마을의 중심지였던 왕돌거리에는 큰 팽나무가 남아 있고, 곳곳에 제주도 특유의 좁고 구불구불한 올레터와 집터 흔적임을 말해주는 대밭들이 남아 옛 정취를 북돋운다. 팽나무 옆에는 제주도의 '잃어버린 마을' 표석 세우기 사업의 일환으로 2002년에 세워진 표석이 있어 마을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고 있다. 마을 중심에 있는 애월농협 봉성지점에서 남쪽(한라산 방향) 신명동쪽 대로로 들어서서 700m 정도 가면 마을 끝 지점에 첫 갈림길이 나온다. 남서쪽 방향의 시멘트 도로를 따라 2km 정도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소로길에 이어진 큰 팽나무가 보인다. 팽나무가 있는 곳이 당시 마을의 중심지였던 왕돌거리이고, 잃어버린 마을 표석도 세워져 있다.  

<출처: 제주4.3연구소, 『4.3유적Ⅰ』>

 

 〇 4․3을 거치면서 잃어버린 마을들이 있다. 또한 리명이 바뀐 곳도 있다. 하귀 학원동의 경우도 4․3을 거치면서 리명이 바뀐다. 학원동의 경우 원래 개물이었으나 산으로 올라간 사람들이 많아서 빨갱이 마을이라 하여 4․3 이후에 이름이 바뀐 경우이다. 

 어도리의 경우도 4.3 때 사람도 워낙 많이 희생되는 등 안좋은 일이 자주 일어나자 마을 이름이 좋지 않은 탓이라 하여 이름을 봉성리로 바꾸게 되었다.

 해방 후 어도리는 3백여 가호에 1,500여명의 인구였다. 어도2구의 경우 자리왓이 30여 가호에 150여 명이었고, 그밖에 상수모를, 열류왓, 말밭, 지름끼, 고도리왓 등을 합치면 대략 40여 가호에 2백여 명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마을인구의 70%가 강씨 성을 갖고 있을 만큼 강씨 집성촌이었다. 

  8․15를 맞으면서 일본으로 나갔던 사람들과 이북 등지로 나갔던 사람들이 속속 들어왔다. 물론 8․15 이전에 돌아온 사람들도 만만치 않았다. 동아통항조합에 관여하여 민족항일투사로 마을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는 강순병씨, 일본에서 고등학교르 졸업한 강창하씨, 양군보씨 등이 해방된 조국의 마을 안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또한 이 마을에 살지는 않았지만 강천문씨 같은 사람은 이따금 고향에 내려올 떄마다 연설을 하고 청년들과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강천문 씨는 대판의 관서대학 상대를 수석으로 졸업하였으며, 해방이 되어서는 서울대학교 상대 교수로 있으면서 사외주의 활동을 하고, 6․25 이후에는 인민재판관을 했다는 이야기가 여러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 그가 마을에 돌아와서는 연설 중에 “우리가 살 때가 이제야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1947년 3․1대회와 총파업을 거치면서 인민위원회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이 거세어진다. 이러한 탄압이 시작되면서 어도 인민위원회에 몸담고 있던 양군보 등 일부 청년들이 검거되고, 강창하 등 일부는 지하로 숨어들게 된다. 하지만 이런 속에서도 파업에 대한 홍보와 저항은 거세어지기 시작하였다. 곳곳에 파업을 지지하는 삐라가 나돌고 밤에 연설회 등을 가지면서 힘을 모아 나간다. 1947년 당시 13세의 나이로 어두2구 자리왓 마을 신명서당에 다니던 강모씨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신명서당에 학생들이 3~40여 명이 되었었는데, 그때는 공부보다도 ‘왓싸왓싸’하면서 다녔습니다. 마을 청년들과 상수모를로 해서 지름길로 애월까지 가면서 ‘파쇼경관 처단하자!’, ‘ 신탁통치 찬성한다’ 라고 하면서 다녔습니다. 그때 선생이 강몽규라고, 그 선생은 사상이 있었어요. 한번은 글을 가르치는데 순경이 와가니까 뒷담으로 해서 뛰어서 달아나다가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또 1948년 8월경에는 경찰들이 어도1구 주민 3명을 연행해서 자리왓 불미당에서 총살하기도 했다. 어도2구 주민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시범적으로 총살을 집행했다고 한다. 그 이후 마을의 젊은이들은 산으로 숨어들었다가 잡혀서 5명이 경찰들에게 총살되었다.

  어도리는 중산간마을이면서도 소개되지 않은 마을 중의 하나이다. 인근 납읍이 소개되어 곽지 등으로 내려간 반면, 이 마을이 갖고 있는 전략적 가치가 이 마을을 소개하지 않은 듯 싶다. 이 마을의 전략적 가치는 뭐니뭐니 해도 어도오름일 것이다. 이 마을을 소개하고 어도오름을 유격대에게 넘겼을 때, 군경들은 산간으로 통하는 인근의 통로를 거의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또한 어도의 경우 애월과 한림의 관문 역할을 하므로 어도를 소개하면 그 관문이 유격대로 넘어가는 것이 문제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여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도2는 1948년 11월 중순경 소개 명령이 내린다. 군인들이 당시 구장 집으로 가서 5일 이내에 소개하라고 했다. 집을 다 뜯어서 가라고 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모두 불지르겠다고 했다. 주민들이 어도리 본동이나 인척이 있는 귀덕리 등으로 소개를 갔다. 그후에 군인들이 자리왓 등 어도2구의 자연부락을 집단방화를 하였다.

 이 마을이 장성을 축성한 것은 어음리가 소개되어 들어오고, 인근 마을들이 소개되어 내려가는 1948년 11월 말경이다. 축성 후에 일기 시작한 학살은 기축년(1949년) 봄까지 사람들을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학살은 마을 안에서만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음력으로 12월 보름 전에서부터 사람들이 죽기 시작했어. 어디서 죽었는고 하니, 사라봉에 실어다가 죽여불고, 도두 어디에도 가서 죽여불고, 경허난 그 시체들을 찾아오기는 하였지. 애월지서에도 간 죽여불고, 학교 운동장에서는 성을 지키던 사람들을 군인들이 총으로 쏘안 죽여분 것이 있어. 한림에서는 어음 사람들 데령가단 짓두드려서 쏘아버린 것. 그때 어도에서만 억울하게 경찰 군인덜에게 죽은 사람이 꼭 71명이라. 산에서 내려와서 구몰동 불지르면서 죽은 사람들을 합하면 어도에서 죽은 사람이 100여 명은 될 걸. 그리고 산에 올라가서 죽은 사람들이 10여 명이 넘을 것이니까 그 사람들을 합하면 얼마나 되나......

  구몰동 소각사건은 1948년 12월 17일(음) 구몰동에 군인복장, 보통복장의 유격대 100여 명이 내려와서 구몰동의 민가 60여 가호를 불태우고 주민 30여 명이 사살을 당한다. 

 이 구몰동 소각 사건 이후로 군․경 합동토벌대의 대병력이 구몰동을 거쳐 대토벌을 시작한다. 이때 동원된 것은 귀덕, 한림에 주둔했던 군인, 애월, 곽지, 금성에 주둔하고 있던 기동대, 그리고 어도의 민보단 등이다. 이 합동 토벌대는 민보단원 9명의 안내를 받으면서 어름비(어음) 지경의 빌레못굴 등을 토벌한다.

 

  그 구몰동에 불지르고 사람 죽인 다음날인가? 빌레못굴에 토벌을 하러 갔어. 빌레못굴에 가서 보니까 그 안에는 어도 사람은 없고 납읍 사람들이 있었어. 그 안에는 미싱도 있고, 여러 가지 살림들이 있더구먼. 그때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을 몬짝 심어단 태왁밭(잔디밭)에 와서 죽이는데, 그 철경대라는 놈들 사람도 아니데. 거기에는 어린아기들과 노인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어린아기를 잡앙 빙빙 돌리당 바위레 ‘착!’허게 내부찐(내동댕이질 쳔). 아이들을 돌더레 착착 내부찌는데, 그것을 볼 수가 없어. 그 어린 아기들이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는 것이라. 그 아기들이 무신 죄가 있다고....... 젊은 사람 한사람이 도망을 가단에 총으로 쏘아부난 죽어신디, 그 사람은 편허게 죽은 것이주. 나머지는 사람의 얼굴 들고서는 볼 수 없도록 해서 죽였어.

 

 자리왓 등 어도2구의 마을들은 어도 입구(현재의 신명동)에 터전을 잡아 생활한 이후로 자리왓 등으로의 복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원 고향으로 재건이 어려운 상황에서 주민들은 회의를 열어 추진위를 구성하고 어도리 3147번지 일대 강모씨의 땅을 외상으로 구입해 각자 살아갈 움막을 지어 살기 시작했다. 그동안 남의 집에 세들어 살던 주민들은 자기 집을 가지게 되었고 그후로 다른 곳으로 소개내려 갔던 주민들도 돌아와 합류하면서 큰 동네가 새로 생기게 된 것이었다. 

 

 

 

 

 현장사진

 

 

 

 

 

 

 

 

 

 

 

 

 

 

 

 

 사료(문서, 사진, 증언)

  

 

〇 잃어버린 마을 표석

 

자리왓 

이곳은 4․3의 와중에서 마을이 전소되어 잃어버린 북제주군 애월읍 어도 2구 자리왓 마을터이다. 

 250여 년 전 남평 문씨 일가가 집성촌을 이루어 살기 시작한 이래 30여 가호에 150여 주민들이 밭농사를 지으며 살던 전형적인 중산간 마을이었다. 마을 가운데 신명서당이 있어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뛰어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주위의 작은 규모의 자연 마을인 지름기, 열류왓, 상수모를, 말밧, 고도리왓 등의 촌장들이 자리왓 팽나무 아래 모여서 대소사를 의논하며 정겹게 살던 마을이었다. 

그러나 4․3의 광풍은 이 마을들을 여지없이 세차게 뒤흔들어 놓았으니 1948년 11월 중순 경 소개령이 내려지고 주민들이 아랫마을로 이주한 후 마을은 전소되어 잿더미가 되었고, 이 와중에 5명이 희생되었다.

주민들은 봉성리 입구 신명동에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한 이후 자리왓 등으로 전혀 돌아오지 않았으니 이곳을 지나는 길손들이여,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 보라. 저 바람에 스석대는 대숲이 있던 집터와 밭담 사이로 자그맣게 남아있는 올레, 그리고 마을의 역사와 더불어 살아온 저 팽나무를. 서러운 옛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가.

다시는 이 땅에 4․3과 같은 서러운 역사가 재발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이 표석을 세운다.

 

2002년 4월 3일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실무위원회 위원장

 제주도지사

 

 

 

 

상처받은 영혼을 향한 희망이 불어오는 곳
평화·상생·해원 바람의 진원지

제주4·3평화재단

4·3유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