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빌레못굴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제주시 지역구분(읍면) 애월면 지역구분(마을별) 어음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어음2리 706번지
GPS 위도 33.4045, 경도 126.34975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〇 봉성리 구몰동이 무장대에 습격 당한 뒷날인 1949년 1월 16일, 토벌대와 민보단이 합동으로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벌여 빌레못굴을 발견했다. 토벌대는 굴속에 숨어 있던 강규남의 가족(어머니, 아내, 아들, 딸, 누이), 송제영, 강성수, 양신하, 양승진, 양세옥 등 29명을 굴 입구 근처에서 학살했다. 이 때 희생자는 주로 어음, 납읍, 장전 사람들로 시신처리는 강규남이 산에 피해 있다가 임시로 흙을 덮어주고, 다음 해에 본격적으로 수습했다. 

 

빌레못굴 학살에 대해서는 슬픈 얘기가 남아 있다. 토벌대는 이 날 아주 예쁜 남자아이를 발을 잡고 휘둘러 돌에 메쳐 죽였다고 하며, 이 애 어머니와 젖먹이 여동생은 동굴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해서 굶어죽었다고 한다.

 

한편 납읍 출신 희생자로는 현용승, 현용승의 처, 현병구의 처, 현병구의 자, 진관행, 양기원, 진승희, 김정현, 현원학, 현원학의 처, 현규칠, 현규칠의 처, 안인무 등이 알려지고 있다.  

 

빌레못굴은 총 길이 11,749m로 세계 최장의 용암동굴이다. 천연기념물 342호로 지정되어 있다. 빌레못굴에는 주로 납읍 사람 29명이 숨어 있었다. 굴 입구는 좁아 찾기가 쉽지 않은데 토벌대는 당시 겨울이어서 굴 내부에서 김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찾았다고 한다. 현재 굴 입구는 철문을 달아 잠가 놓았다. 빌레못굴 안내 표석이 새롭게 단장되어 세워져 있다.  

 

어음2리 마을 표석이 세워진 곳에서 1.4km 정도 남쪽으로 난 아스팔트길을 따라 가면 길 오른쪽으로 큰 팽나무가 보인다. 왼쪽으로는 시멘트로 만들어진 높다란 지하수 관정 저수지가 서 있고 잃어버린 마을 '새동네'터가 있는 갈림길이 있다. 이 갈림길을 따라 500m 들어가면 축사가 있는 갈림길이 다시 나온다. 이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200m 또 들어가면 또 하나의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200m 들어가면 소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는 들판이 보이고 왼쪽으로 널따란 비포장도로가 왼쪽으로 뻗어 있다. 이 길을 150m 가량 가면 빌레못굴이 나온다.

 

<출처: 제주4.3연구소, 『4.3유적 Ⅰ』>

 

 

 

○ 어음리는 한라산 서북쪽 '어림비' 평원에 위치한 넓고 기름진 중산간마을이다. 현재 1리, 2리로 나뉘어진 것과는 달리 4․3 당시에는 어음리라는 하나의 행정단위였고 그 안에 비매니(夫面洞), 닭우영(鷄園洞), 너산밧, 큰동네, 섯동네, 고지우영, 송아물, 사낭굴 등 자연마을들이 모여 있었다. 

 

이 마을에도 소개령이 내려졌다. 1948년 11월 20부터 22일까지 3일 안에 소개하라는 것이었다. 초토화작전은 소개가 끝나는 마지막 날 밤인 22일 밤에 벌어져 온 마을이 폐허가 되었다. 주민들은 봉성과 곽지, 납읍 등으로 내려가 생활 터전을 구해야 했다. 

 

어음리의 첫 희생자는 김용하(남, 29세)였다. 1948년 8월 1일 마을을 덮친 토벌대가 청년을 발견하자 즉결 총살한 것이다. 소개 전날인 19일에도 토벌대는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명단'을 불렀다. 이때 불려나온 청년 7명은 한림으로 끌려가서 다음 날 한림 묵은장터에서 총살당했다. 

 

1949년 1월 16일, 토벌대와 민보단이 합동으로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벌였으며, 토벌대는 빌레못굴을 발견했다. 

 

토벌대는 굴속에 숨어 있던 강규남의 가족(어머니, 아내, 아들, 딸, 누이), 송제영, 강성수, 양신하, 양승진, 양세옥 등 29명을 굴 입구 근처에서 학살했다. 이 때 희생자는 주로 어음, 납읍, 장전 사람들로 시신처리는 강규남이 산에 피해 있다가 임시로 흙을 덮어주고, 다음 해에 본격적으로 수습했다. 

 

빌레못굴 학살에 대해서는 슬픈 얘기가 남아 있다. 토벌대는 이 날 아주 예쁜 남자아이를 발을 잡고 휘둘러 돌에 메쳐 죽였다고 하며, 이 애 어머니와 젖먹이 여동생은 동굴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해서 굶어죽었다고 한다.

굴 속에서 나오지 못해 굶어죽은 시신들은 빌레못굴 탐사반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시신들은 유족들에게 인도되었다. 

 

강규남의 여동생의 증언에 따르면, 시신은 제주의료원에서 수습을 했으며, 당시 유골과 고무신이 유족들에게 인계되었다고 한다.

 

빌레못굴은 총 길이 11,749m로 세계 최장의 용암동굴이다. 천연기념물 342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굴 입구는 철문을 달아 잠가 놓았다. 철문 앞으로 나무문을 덧달아 놓았었는데, 나무문은 부서져 철문만 남아있다. 빌레못굴 입구에는 안내 표석이 새롭게 단장되어 세워져 있다. 빌레못굴 입구 안내표석의 100여m동남쪽 소나무 뒤로 굴 속에 숨어있다 끌려나온 사람들이 집단학살되었던 학살터가 있다. 빌레못굴 근처 300여m인근까지 농로가 포장되어 있으며, 300m부근부터는 비포장도로와 초지로 되어있다.

 

찾아가는 길은 어음2리 마을 표석이 세워진 곳에서 1.4km 정도 남쪽으로 난 아스팔트길을 따라 가면 길 오른쪽으로 큰 팽나무가 보인다. 왼쪽으로는 시멘트로 만들어진 높다란 지하수 관정 저수지가 서 있고 잃어버린 마을 '새동네'터가 있는 갈림길이 있다. 이 갈림길을 따라 500m 들어가면 축사가 있는 갈림길이 다시 나온다. 이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200m 또 들어가면 또 하나의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200m 들어가면 소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는 들판이 보이고 왼쪽으로 널따란 비포장도로가 왼쪽으로 뻗어 있다. 이 길을 300m 가량 가면 빌레못굴이 나온다.

 

<출처: 4.3유적정비보고서>

 

 

 

〇 ‘빌레못굴’ 희생 사례

제주4‧3사건 때 마을의 운명은 대개 그 마을의 위치에 따라 좌우됐다. 군‧경 주둔지인 해변마을 주민이라면 군‧경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한동안 무장대가 장악하고 있던 중산간마을에서는 무장대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애월면 중산간지대에 자리잡은 어음리 역시 그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주민들은 무장대의 요구에 따라 ‘왓샤시위’를 했고 식량을 거둬 올려 보냈다. 청년들 중에는 본격 입산해 무장대원이 되는 사람도 있었다. 낮에 진압군이 올라왔으나 청년들을 찾지 못한 채 애꿎은 주민들만 구타하다 돌아갔다. 흔히 이야기되는 것처럼 ‘낮에는 토벌대 세상, 밤엔 무장대 세상’이었다. 이즈음 경찰의 구타는 너무도 가혹해 주민 양축생(梁丑生, 여, 59)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양축생의 아들인 강태호는 어머니가 희생되던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부모님은 8남 1녀를 뒀으나 병으로 줄줄이 죽어 당시엔 우리 형제만 남았을 때입니다. 아버지는 내가 다섯 살 때 돌아가셨지요. 어머니는 “너희들만이라도 목숨을 보존해야 하지 않느냐”며 우리 형제에게 어서 숨으라고 재촉했습니다. 나는 돌담 밑을 파서 그 곳에 숨었습니다. 그때는 너나 할 것없이 그런 식으로 은신했지요. 그런데 하루는 토벌대가 들이닥쳤어요. 토벌대는 어머니에게 “남편과 자식이 숨은 곳을 대라”고 다그쳤습니다. 어머니가 “나는 홀로 사는 여자이다”라며 버티자 곧 무자비한 구타가 가해졌습니다. 내가 숨었던 데는 집과 가까운 곳이라 어머니의 비명소리가 귀를 찢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나가지 못했습니다. 토벌대가 물러간 후 급히 가보니 어머니는 실신 상태였는데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습니다. 자식된 도리로서 어머니가 이 지경이 되는데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아무 일도 못했다는 걸 생각하니 기가 막히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제대로 먹지도 말하지도 못하며 반년동안 고생하시다 돌아가셨습니다.

1948년 10월경부터 어음리에 경찰이 주둔하기 시작했다. 철도경찰 20여 명이 옛 서당 자리에 진을 치고 진압작전에 나선 것이다. 이때부터 마을에서 무장대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철도경찰은 청년이 보이기만 하면 즉각 총격을 가했다. 

 

1948년 11월 15일경 진압군은 어음리에 소개령을 내렸다. 그러자 집안이나 인근에 숨어 있던 청년들이 하나 둘씩 나타났다. 진압군이 마구잡이로 구타하고 총격을 가하는 상황 속에서 오도가도 못한 채 숨어 전전긍긍하던 청년들에게 ‘해변마을로 이주하라’는 소개명령은 목숨을 부지할 방도를 알려주는 지침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진압군은 주민들이 집결하자 자신들이 가져온 ‘명단’ 속의 청년 10여 명을 불러내 초주검이 되도록 구타를 하다 한림국민학교로 끌고가 닷새 후인 11월 20일 총살했다.

 

소개는 11월 15일경부터 약 3일간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한 주민은 그 즈음 집안의 제삿날을 토대로 11월 18일 소개가 마무리된 것으로 기억했다. 진압군은 주민들에게 직접 자기 집을 불붙이게 하는 등 온 마을을 깡그리 불태우며 소개작전을 진행했다. 

 

몇몇 청년들은 소개령을 계기로 숨었던 곳에서 나와 해변마을로 내려왔지만 많은 사람들이 기회를 놓쳤다. 특히 가족 중에 도피자가 있는 집안은 내려오지 못했다. 이들은 곧 닥쳐온 겨울 동안 여기저기에 숨어 생존에 몸부림치다 죽어 갔다. 또한 해변마을로 소개한 사람들도 걸핏하면 ‘도피자가족’에 대한 총살을 했기 때문에 남편이나 자식이 소개하지 않은 집안의 사람들은 다시 마을로 도망쳤다가 붙잡혀 희생됐다. 

 

이와 관련, ‘빌레못굴’에서 벌어진 총살극은 그 처참함으로 어음리 뿐 아니라 인근마을 주민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진 사건이다. 가족 중 청년이 입산한 소위 ‘도피자가족’이거나, 토벌대의 주목을 받게 된 사람들이 숨어지내다 굴이 발각되는 바람에 집단총살된 것이다. 노인과 부녀자 등 주로 노약자들인 이들은 정감록과 구전돼 오던 말에 따라 빌레못굴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진다. 즉 ‘난리 때는 산불근 해불근(山不近 海不近) 하라’든가, ‘30여 명이 능히 숨어살 수 있는 곳이 있다’는 말이 마을에 퍼져 있었다.  

 

빌레못굴은 총 길이 11,749m로 단일계통의 용암굴로는 세계 최장이라 하여 천연기념물 342호로 지정돼 있다. 어음리 지경에 있는 빌레못굴은 주민들이 자주 드나들던 목초지와 경작지 부근에 있었으나 4‧3 때까지만 해도 몇몇 사람을 제외하면 그 존재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겨우 한사람이 들어갈 만큼의 좁은 입구를 바위가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굴의 온기 때문에 겨울철이면 김이 연기처럼 피어오르지만, 주민들은 인근에 산재해 있는 작은 ‘궤’ 정도로 알았지 그처럼 큰 굴이 있는 줄은 몰랐다. 

 

아무튼 1949년 1월 16일 굴이 발각됐고 진압군은 그 속에 숨어 있는 사람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총살했다. 특히 이 때 경찰이 서너살 난 어린이들의 다리를 잡아 머리를 바위에 메쳐 죽였다는 이야기는 당시 진압작전에 동원됐던 민보단원들의 입을 통해 전해져 지금도 처절함의 상징으로 인근에 회자되고 있었다. 그런데 입구가 좁아 잘 눈에 띄지 않는 빌레못굴이 어떻게 발각됐으며, 굴 안으로 깊이 도망쳤다면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모두가 잡혀 죽었을까. 그 때 빌레못굴에 숨었다가 유일하게 생존한 양태병은 이렇게 증언했다.

 

소개령이 내려지자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이웃마을 납읍리로 갔습니다. 거기서는 매일 밤 보초를 세웠는데 내게는 보초서라는 명령이 없는 겁니다. 이상해 물어 보니 “너는 민애청에 가입한 놈이니 보초 설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불안해 하던 중 일주일만에 납읍리에도 소개령이 내려지자 다시 애월리로 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내게는 보초서라는 말이 없어요. 그리고 민애청 가입자는 곧 총살될 거라는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난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둘이서 어렵게 살았기 때문에 이런저런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 민애청 가입자라고 하니 놀랐습니다. 누가 일방적으로 작성한 명단인 모양인데 그런 식이면 안 걸릴 청년이 없었지요. 아무튼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순 없었기에 도망쳤습니다. 그 무렵 알게 된 빌레못굴로 숨어들었는데 그곳에는 납읍리 주민 28명이 있었고, 우리마을 사람으로는 강규남의 가족 5명(어머니, 아내, 아들, 딸, 누이), 송시영과 그의 처자, 양신하 등이 있었습니다. 입구가 좁고 은밀한 곳이라 모두들 안심했지만 난 긴장을 늦추지 않고 여차하면 숨을 만한 곳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요. 결국 굴이 발각됐습니다. 아마도 굴밖에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김 때문인 것 같습니다. 군‧경 토벌대와 민보단원들이 굴 안으로 들어오자 급히 숨었지요. 그러나 토벌대가 “살려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유혹하는 바람에 모두들 나왔습니다. 굴속의 인원을 파악한 토벌대는 붙잡은 사람을 통해 알아낸 내 이름을 부르며 나오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난 숨죽이고 있었지요. 토벌대는 사람들을 끌고 나가자마자 굴 입구에서 바로 학살했습니다. 강규남의 아들이나 송시영의 아들은 불과 서너살난 아이들이었는데 동네에서 소문날 정도로 예쁘고 잘난 아까운 아이들이었지요. 토벌대는 그 아이들의 다리를 잡아 바위에 메쳐 죽였습니다. 인간으로서 차마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분명히 학살자들은 그 죄로 곱게 죽지 못했을 겁니다. 한편 강규남의 아내는 두어살 난 딸을 업은 채 도망쳤는데 나처럼 인근에 숨지 않고 더 깊숙이 들어갔다가 길을 잃어 빠져나오지 못한 채 굶어 죽었습니다. 굴은 너무도 크고 복잡해 잘못 들어가면 길을 잃게 됩니다. 이들의 시신은 후에 굴 탐사팀에 의해 발굴된 것으로 기억됩니다.

 

굴 속에는 어음리 주민 뿐 아니라 납읍리, 장전리, 상귀리 등 인근 주민들도 다수 끼어 있었다. 납읍리 사람으로는 현병구의 가족인 현용승(75) 현용승의 아내(75) 변용옥(여, 28, 현병구의 아내) 현병구의 아들(1) 등 일가족이 몰살했고, 양기원(여, 67) 진승희(54) 김정현(53) 현원학(51) 현원학의 아내(50대) 현규칠(33) 현규칠의 아내(30대) 안인무(29), 그리고 상귀리 사람인 진관행(80대), 장전리에서 온 변정옥(여, 29)과 변정옥의 어린 자식 두 명(5살, 3살) 등이 함께 붙잡혀 희생됐다. 대부분 노약자들로서 난리를 피해 숨었던 주민들이었지만, 진압군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살해했다.

 

<출처: 4.3진상조사보고서>

  

 

〇 이 무렵 ‘빌레못굴’에서 벌어진 학살극은 주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건이다. 가족 중 청년이 입산한 소위 ‘도피자 가족’이거나, 토벌대의 주목을 받게 된 사람들이 숨어 지내다 굴이 발각되는 바람에 집단학살된 것이다.

 

빌레못굴은 총 길이 11,749m로 단일 계통의 용암굴로는 세계 최장이라 하여 천연기념물 342호로 지정돼 있다. 어음리 지경에 있는 빌레못굴은 주민들이 자주 드나들던 목초지와 경작지 부근에 있었으나 4·3 때까지만 해도 그 존재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겨우 한사람이 들어갈 만큼의 좁은 입구를 바위가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로부터 ‘강아지를 빌레못굴 속에 넣었더니 해변마을로 나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고 굴의 온기 때문에 겨울철이면 김이 연기처럼 피어오르지만, 주민들은 인근에 산재해 있는 작은 ‘궤’ 정도로 알았지 그처럼 큰 굴이 있는 줄은 몰랐다.

 

아무튼 1949년 1월 16일 굴이 발각됐고 토벌대는 그 속에 숨어 있는 사람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학살했다. 이때 토벌대가 서너살난 어린이들의 다리를 잡아 머리를 바위에 메쳐 죽였다는 이야기는 당시 토벌에 동원됐던 민보단원들의 입을 통해 전해져 지금도 처절함의 상징으로 인근에 회자되고 있었다.

 

이무렵 토벌작전의 특징은 무차별 학살극이라는 점이다. 토벌대는 중산간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전개해 사람이 눈에 띄기만 하면 즉결 총살했다. 학살극을 피해 소개하지 않고 중산간에 숨어있던 한림면 청수리와 명월리 주민들도 빌레못굴 학살이 벌어졌던 바로 그날 곳곳에서 붙잡혀 희생됐다. 이튿날인 1949년 1월 17일은 조천면 북촌리에서 대학살극이 벌어진 날이다.

 

그런데 입구가 좁아 잘 눈에 띄지 않는 빌레못굴이 어떻게 발각됐으며, 안으로 깊이 도망쳤다면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모두가 잡혀 죽었을까. 취재반은 그때 빌레못굴에 숨었다가 유일하게 생존한 양태병 씨를 만났다.

 

소개령이 내려지자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이웃마을 납읍리로 갔습니다. 거기서는 매일 밤 보초를 세웠는데 내게는 보초서라는 명령이 없는 겁니다. 이상해 물어 보니 ‘너는 민애청에 가입한 놈이니 보초 설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불안해하던 중 일주일 만에 납읍리에도 소개령이 내려지자 다시 애월리로 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내게는 보초 서라는 말이 없어요. 그리고 민애청 가입자는 곧 총살될 거라는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난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둘이서 어렵게 살았기 때문에 이런저런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 민애청 가입자라고 하니 놀랐습니다. 누가 일방적으로 작성한 명단인 모양인데 그런 식이면 안 걸릴 청년이 없었지요. 아무튼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순 없었기에 도망쳤습니다. 그 무렵 알게 된 빌레못굴로 숨어들었는데 그곳에는 납읍리 주민 28명이 있었고, 우리 마을 사람으로는 강규남의 가족 5명(어머니, 아내, 아들, 딸, 누이), 송시영과 그의 처자, 양신하 등이 있었습니다. 입구가 좁고 은밀한 곳이라 모두들 안심했지만 난 긴장을 늦추지 않고 여차하면 숨을 만한 곳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요. 결국 굴이 발각됐습니다. 아마도 굴밖에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김 때문인 것 같습니다. 군·경 토벌대와 민보단원들이 굴 안으로 들어오자 급히 숨었지요. 그러나 토벌대가 ‘살려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유혹하는 바람에 모두들 나왔습니다. 굴속의 인원을 파악한 토벌대는 붙잡은 사람을 통해 내 이름을 부르며 나오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난 숨죽이고 있었지요. 토벌대는 사람들을 끌고 나가자마자 굴 입구에서 바로 학살했습니다. 강규남의 아들이나 송시영의 아들은 불과 서너살난 아이들이었는데 동네에서 소문날 정도로 예쁘고 잘난 아까운 아이들이었지요. 토벌대는 그 아이들의 다리를 잡아 바위에 메쳐 죽였습니다. 인간으로서 차마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분명히 학살자들은 그 죄로 곱게 죽지 못했을 겁니다. 한편 강규남의 아내는 두어살난 딸을 업은 채 도망쳤는데 나처럼 인근에 숨지 않고 더 깊숙이 들어갔다가 길을 잃어 빠져나오지 못한 채 굶어 죽었습니다. 굴은 너무도 크고 복잡해 잘못 들어가면 길을 잃게 됩니다. 이들의 시신은 후에 굴 탐사팀에 의해 발굴된 것으로 기억됩니다.

(양태병<98년 71세, 애월읍 어음리> 증언)

<출처 :  「제민일보」(1998.10.16.)>

 

 

 

 

 

 현장사진

 

 

 

 

 

 

 

 

 

 

 

 

 사료(문서, 사진, 증언)

  

 

 

〇 빌레못굴의 유일한 생존자 증언

● 선생님께서는 빌레못동굴 학살에서 유일하게 생존하셨는데, 우선 어떻게 해서 그곳까지 가시게 되었는지요?

 제가 28연생이니까 지금이 예순 하나, 제가 19세 되나마나 해 가지고 소개를 당하기 시작해수다. 일본놈 시절에 제가 살아온 거시기는 어렵게 살아서, 너무나도 비참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일일이 다 말하려면 시간이 엄청나게 걸려마씸. 그때는 누구나 다 곤란한 시절이라노니까, 저는 뭐, 부모도......

 일본 가버려서 아버지 얼굴을 모릅니다. 그때 아버지가 어머니를 여라이(여럿) 거느려 살아버리니까, 그때 일본도 딴 어머니랑 해연(얻어서) 가버렸고 저는 아버지 있다는 말은 셔도(있어도) 얼굴을 모릅주. 저를 낳은 지 6개월 만인가에 딴 어머니 해서(얻어서) 일본 가버렸다고, 어머니가 그런 말을 하니까. 그래 가지고 어머니가 참, 집도 없고 밭도 없고 하니까, 남의 집을 빌어살면서 제가 큰 거죠. 그루후로(그후로)부터는 이제 뭐, 살아볼 길은 없고 하니까, 지금 같으면 어디 남의 일을 해도 돈은 주니까 하지만, 그때는 남의 일을 했지, 20세 그러니까 18세 전까지는 남의 일을 했지, 20세 그러니까 18세 전까지는 일당을 안줘수다. 얻어먹고 일만 헌겁주. 17세 이상 되면은 어른 취급을 해서 일을 해도 ‘찬녹’을 줘신디. 찬녹이라하면는, 지금 같으면 5천원짜리 녹(삯)을 말하는 겁주. 17세 미만은 일당을 못 받고 그럭저럭 삼시(세끼니) 먹어지면 그걸로 고만마씸.

 

 ● 이 마을에도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습니까?

 리인민위원회는 책임자만 각 리에 됐고, 이 마을에서도 김문하씨라고 한 분이 총책임을 하다가 4․3사태때 사살 당했수다. 그 외에도 활동하던 사람들은 그때 다 죽어불고. 김문하씨는 동네에서 제일 유지급이고 잘난 사람이고, 당시에 한문서당한 분인데, 나이는 그때 서른 정도죠.

 

 ● 사태나기 전에는 마을이 뒤숭숭했습니까?

 뒤숭숭은 무슨...... 아무 일도 없다가 사태가 나니까, 그것이 우알이(위, 아래) 판가름하기가 각각 책임자가 된 사람이 한 두 시름 있어서 그쪽 저쪽에서 엄포놓고 하니까, 자기 나름대로 이녘(자기) 생각대로 쏠린 것이 폭도로 쏠린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경찰로 쏠린 사람도 있고 하니까, 사태나기 전엔 경찰도 마을에 올라오곤 해십주.

맨 처음 시작이 해방되니까, 단체를 조직해야 한다고 해서 나선 사람들이 머리를 쓰고 연구해서 시작이 되게 인민위원회 여신디. 해방이 되니까 조직이 많이 생겼수다. 해방후에 인민위원회엔 하면 처음은 민주 거시기로 하다 보니까, 4․3사건이 터져 뭐 하니까, 그게 전부 공산당으로 되어부렁. 공산당이 아닌데, 공산당으로 만들어 부러십주. 이제는 인민위원회 든 사람은 무조건 심어다가 주동헌 사람은 총살을 시켜블고, 그 밑의 사람은 취조를 하다가 이건 뭐, 필요어신 것이라 해서 집으로 돌려보내기도 하고.

 이 마을에서 처음은 법에서 시키는 대로 민보단이니 허는 조직을 허다가, 말째는(나중에는) 이제 그렇게 해 가니까, 이젠 책임자가 뭐, 민보단장이여, 위원장이여 헌 사람을 심어다가 답도리(추궁) 해 가니까, 밑에 사람들은 공포에 떨어 가지고 아, 이건 큰일이다, 살아보젠 그럭저럭 하다가 거저(그냥) 심어다가 죽여부니까, 사람이 산더레(산으로) 올라가게 된 거마씸.

 또 그때 신탁통치 반대도 하고 시위도 하고 경헙디다. 그때 인민위원회가 주동했는지 순경,  경찰에 댕기는 질덜에 강(가서) 막(마구) 시위를 해부러마씸(해버립니다). 거니까(그러니까) 그게 거시기, 인민군 쪽이라 해서 지적받게 되부러 십주(되버렸지요).

 

 ● 그때의 경찰이라면 왜정 때도 경찰하던 사람들 아닙니까?

 예, 그때부터 들어가서 경찰직을 하던 사람들인디, 해방이 되어서도 일제시대에 경찰하던 사람들이 위세부리곡, 그대로 해가니까, 이건 신탁통치 반대라고 해서 그런 사람들 집에 가서 첨 “와싸와싸” 했주. 그 당시에 경(그렇게) 하니까, 말째에는 그런 사람중에 첨, 잘못했고렌 허는 사람도 있었고, 또 그대로 이제 뻔뻔하게 구는 사람도 있었고.

 

 ● 그 즈음에 서북청년단이란 말도 들어보셨습니까?

 서북청년단, 그거는 저, 이승만 대통령 거시기로 해서 바로 저, 내무부 소관인지 해서 조직허영 그 사람들은 무장하고, 각리에도 조직은 허젠(하려고)했었습니다. 서북청년단한테 우리가 추적토벌을 오죽 받았수과게(받았습니까)? 그 사람들은 내무부 소관으로 되부니까게(되버려서). “산에 가서 어떤 지령을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허멍 무조건 심어당 패닥허고(매다치고) 문초를 했습니다. 서북청년단이 상당히 권위가 세었수다.

 

 ● 그러다가 4․3사태가 났을 때, 여기서는 어떠했습니까?

 4․3사태가 남 시작하니까(나기 시작하니까), 우(위) 알(아래)이 갈라짐(갈라지기) 시작해부나네(시작해 버려서), 첨 거, 확실한 내용은 자세히 모르쿠다. 

마을에서는 그전에 좀 뭐한 사람은 이미 다 올라가블고(올라가 버리고) 자꾸 밤 때는 내려와, 이제 자기네 말 들으렌 권유허고. 마을에서 젊고 괜찮은 사람은 다 올라가부렀주마는(올라가 버렸지만) 경(그렇게) 하지는(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때는 공부한 사람은 책을 봐 가지고 거기로 올라가곡, 경 안헨(않은) 우리같은 사람은 그런 경우 생각도 안하고. 말짜라가니까 (나중돼니까) 이제 막 성해 가니까, 그때 뭐  이덕구라는 사람이 총책임으로 와서, 제주도가 이제 첨 육지로 이제 거저(거의) 통일이 된다 허난, 제주도도 막 그 참에는 산군(주; ‘48. 8월이후 군사지도부가 개편될 때 당시 대중들의 분위기를 말해 주고 있다) 제주도는 인민위원회 활동이 제일 강허댄 해났주, 그때는.

 이제 말째는 철경대(주; 철도경찰대의 준말)라고 그분네 오란에(와서) 치안 시작하고, 그후 그분네 떠나니까, 2연대가 들어와 가지고 첨, 진입하니까, 그때부턴 산군들이 몰아짐(몰리기) 시작했주. 그전에는 산군이 무기는 없어도 더 성해났수다. 순경들은 그런사람 심어지민 막 문초허고 장작이나 아무 것이라도 보이면 그걸로 무조건 때리니가, 그런 데서 더러 죽음도 하고, 취조받다가 죽기도 하고......

 

 ● 선생님도 그때 나이가 18-19세면 그냥 있기가 어려웠겠네요?

 저도 그런 경우가 있었수다. 그때는 이거 첨, 난 기억자도 모릅주게(모르지요). 이제야 군대가서 조금씩 배우니까, 조금 이녘 거시기는 알아집니다마는, 그전에는 가갸거겨가 어떤 건지도 전혀 몰랐수다. 그때는 제가 신체도 막 약허고 그러니까, 전투경찰(주;여기서 증언자는 철경대를 이야기하고 있다) 온 때는 제가 부락에서 지적받아 심바람(심부름)을 했습니다. 한달 반 하다가 그 사람들이 가버리니까, 이제는 우이서(산에서) 와서 밤에 갑자기 나오렌 허지 안허여마씸(나오라고 하질 않습니까)? 아, 이젠 저 야산으로 오렌 헨(오라고 해서) 가보니까, 그 첨, 인민군에 속헌 사람들, 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우리부락 사람이영 타부락 사람이영 다 얼굴봐난 사람입디다. 가니까 뭐, 모가지 골길듯이(갈길듯이) 칼 빼어놓고, 첨 죽이겠다고 하면서 헌(한) 대로 말을 허라고.

 그 사람들이 와서 어떵어떵헌(어떠어떠한) 행동을 한 것을 다 골으렌(말하라고) 허영(하여서) 연락한 것 다 그대로 말했주 마씸(말했지요). 보급 같으거, 이제 동네 돌아다니면서, 부식이나 고추나 장이나 부락에서 그 사람들 오란(와서) 살리젠허니까(살리려니까), 쏠(쌀) 말이라도 부족하다고 더 가져오랜 허민(오라고 하면) 부락에 돌아댕기멍(돌아다니며) 허당(하다가), 최봉학씨라고 그이는 이제 살아시믄 67세 난 분인디, 그 분이 책임자로허고 난 또 그 밑에 그 사람 시키는 대로 했었습니다. 그 사람네(여기서 철경대를 말하고 있다) 가 계속 마을에 있었으면 우리도 괜찮을 건데, 그 사람네가 우리를 내버리고 가버리니까, 아 이제 산군들은 자기네 거시기를 뭐했다고 해서 밤이면 심어다가(잡아다가) 죽이켄허연(죽이겠다고 했어). 그때 어음 2리에서 2km 올라간 디서 껄려난(붙잡혔었지) 호마(하마트면) 첨, 죽어지는가 했더니, 그때 어음 2리 고향 친척되는 사람이 산군들하고 그디 같이 왔다가 “기왕(이왕) 잘못한 것은 너가 알고 있느냐?” 하니까, “그 일을 범하지 말아시믄 헐 껀디(말았으면 좋았을텐데) 살아보젠 다시는 그런 폐단이 없겠습니까.” 하니까 용서해줍니다. 밤에 그 사름들이 통신연락이라는게 이서(있어), 보고하라고 해서 불(봉화를 말함)을 들른다(든) 하면은, 서로 연락해서 그 시각이 딱되면, 제주도 일대에 불이 다 보여마씨(보여요). 이쪽에 싼(켠) 불이 보이면, 서로 보곡허연(보고하며) 제주도적으로 봉화를 올리면 통신이 됐다고 합니다. 저도 살젠허니까(살려하니) 그런 역할을 했주마씨(했지요). 게다가(그러니까) 차츰 진압이 되자, 그때는 다시 소개(疏開)를 내려가랜(내려가라고) 허지 안 헙니까?(않겠습니까)

 

 ● 경찰이 올 때가 소개 전입니까?

 예, 소개 전에.

 빌레못 굴에서 나온 후 다른 굴(이 굴은 증언자가 일제말리 강제노역에 동원되어 바리매(발이오름)에 판 굴로 빌레못 동굴에서 나온 뒤 여기로 피신해 있었다)에 강(가서) 살암시니까(살고 있자니) 제라허게(진짜로) 폭도 역할허는 사람이 찾아와십디다. (찾아왔어요). 동갑 사람인디(동갑나긴데) 어떵(어떻게) 알았는지, “같이 활동도 안허고 영헌디(활동도 안하고 이런 곳에) 숨엉(숨어) 앉아도 되느냐?” 허길래(하기에), 하, 너마저 날 그렇게 하겠느냐고, “

넌 게도(그래도) 그때 시절에 간이학교 나오고 공부허니까 하지, 난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곡(모르고) 헌 놈이 첨. 산군 역할을 어떻게 허느냐“고 뭐, 날 살려도랜(살려 달라고) 막 사정을 한겁주(한 거지요).

 

 ● 그 사람 이름은 어떻게 됩니까?

 양0현이라고, 저광(저하고) 8촌 되는 분이 우다(분입니다). 몇 번 와 가지고, 고발허켄(고발하겠다) 하길래, 사정을 한거라 마씸(사정을 한 거지요). “제발, 날 살려도라(살려달라)”고, “게므로(아무러면) 너가 날 하나 감춰주질 못하느냐”고 사정하고, 또시(또) 와시믄(왔으면) 밥허영(해서) 주고.

 

 ● 양0현이란 분은 그 굴을 알았군요?

 양0현인 어도초등학교 되기 전에 간이학교라고 2년제 셔 났수다(있었읍니다). 거기 댕견(다녀서) 졸업하고, 참 머리가 똑똑헌 사람이우다(사람입니다). 게나 저나 그 사람은 올라 간(가서) 산군 역할하고, 저는 그 사람이 말을 해부러시믄(해버렸으면), 저도 어차피 산군 역할을 허게 된 겁주게(된 거였지요). 그 사람이 고맙게도 2월달 나니까(되니까) 찾아와서 하는 말이 해변에 내려간 사람들이 죄가 중헌 사람은 총살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살려주엄젠 헙디다(살려 주고 있다고 합디다). 이거 첨 숨어 사는 것도 한 두달이 좋지. 그 좋은 낮에는 나왕(나와서) 자왈(넝쿨) 속이니까, 바깥디 배려집니까게(볼 수가 있읍니까)? 이건 누게(누구)이야기 할 사람이 시카(있나),첨, 이건 궁금해마씨(궁금해요).

그 사람이 와서 그런 말을 하기에 아, 이젠 살아졌다 해십주(살게됐구나 했읍죠). 그 굴은 양0현이 하고 나하고만 안 굴입주. 겡(그래서) 첨간(처음 가서), 2연대가 주둔해서 토벌할 때라 마씸(때 입니다). 군인한테 자수허영(해서) 내가 나간 거주 마씸(나간 거지요). 그루 후로(그 뒤로) 구타도 받지 않허고, 자수허영(자수해서) 동척회사에 들어가니까, 거기는 죄수들 잡아당으네(잡아다가) 문초허는 딥디다. 저 부두 동산에, 거고라(그걸 일러) 고산동이옌 헙디다. 옛날 술창고 해난(했던)창고. 창고 두 채에 죄수들 전부 심어다가(잡아다가) 중한 죄는 중한 죄대로 가두고, 약한 죄는 죄대로 가두엉(가둬서), 저는 죄가 별로 어신 걸로(없는 걸로) 간주해신고라(생각했던지) 죄수들 취사 당번을 한달포 하다가, 석방허연(하고) 나가랜허영(나가라고 해서) 나온 것이 오늘날까지 살아진 겁주(살게 된 거지요).

 

 ● 그 굴이 꽤 깊다는 이야기네요?

 예, 입구는 적고, 안은 넓고, 일본사람이 직사포 쏠 걸로 허영이네(해서), 저보고 파랜(파라고) 허영이네 그때 팔 때는 여러 사람 판 거주마씨(판 거지요).

 

 ● 양0현이란 분은 어떻게 그 굴을 알았습니까?

 저가 그 전에 그 사람을 데령 가 나서마씨(데리고 갔었지요). ‘여기 영 정한(이렇고 저런) 굴이 있다’고, 것도 그 사람한테 고르치지 안 헐 걸(않을 걸) 고르쳐나십디다(가리겼었지요). 말젠 보난(나중에 보니) 그 사람이 빌레못동굴에서 나는 안 죽었다고 하니까, 나가 혹시 여기 오지 안 해시카(알았을까) 허영(해서) 여기 온 거라마씨(온 거지요).

 

 ● 빌레못동굴 안에서의 생활을 기억나시는대로 말씀 해 주시겠습니까?

 동굴 안에서는 별다르게 특별한 게 엇수다(없읍니다). 그자(그저) 대화할 상대가 없고, 암흑한 영창살이나 비슷헙주. 누구 말 할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납읍(애월면 납읍리) 영감네도, 그저 납읍영감인가 했지. 아마, 뭐 얼굴이 익숙하지 않으니까...... 저가 그때 또 어리니까, 아침 자다가 깨어나서는, 먹고 싶으면 조금 먹고, 그대로 또 자고, 그자(그저) 활동은 전혀 못하니깐.

 

 ● 땔감은 어떻게 했습니까?

 지들커(땔감)는 그때 여기 나오면은 됩주(되지요). 그때 뭐 그렇게 많이 안해 먹으니까, 쌀 같은 건, 찰리(부대)라 해서, 거기 조금씩 담아서 들인 거주.

 

 ● 그땐 일할 분이 거의 없었겠네요?

 예, 전부 노약자고, 얼아이(어린아이) 뿐이라서 또 일허젠 해도(일하려 해도) 헐 게(할 일이) 어서마씨(없어요).

 

 ● 식량도 얼마 안 됐는데, 30여명이서 어떻게 지냈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자기네 소개하는 날 저녁에 식량을 가져왔으니까. 그 영감네는 식량을 가지레 댕기지 않았수다. 나만은 식량을 안가젼 와십주. 몸댕이만(몸만) 나오니까, 게난 게(그러니까), 납은 가서 잣(돌무더기) 구석에, 잣을 밀어서 묻엉내분(묻어 내버려둔) 식량항아리에서, 그걸 파다 먹고 산거주(살았지요). 밤에 몰래 질(길)로도 못댕겨마씨(못 다니지요). 밭으로만 다녀십주(다녔지요). 걸리면 죽으니까. 여기는 뭐, 혼 서너시간이면 납읍을 가 오는데(갔다오는데), 저,“바리매(지명)굴”간 때는 초저녁이(초저녁에) 어두면 나사서(출발하여) 강 오라가민(갔다 오면) 거저 날이 밝습니다. 질도 못걸어부니까(길로 걷지 않으니까). 밭으로만 넘어 댕기젠허니까 (넘어 다니려니까). 이거 쥐새끼라도 최고 ‘고랑쥐’ 역할을 헌겁주(한 거지요). 고랑쥐 압니까? 아주 적은 쥐를 말하는데.

 

 ● 밤길을 걸을 때, 제일 힘들었던 게 뭐입니까?

 조름에(뒤꽁무니) 사람 따라 오는 것 같은 느낌이 제일 무서 웁니다. 저가 댕겨보니까, 이녁 발자국 소리가 꼭 뒤에 따라 오는 것 같아 아마씨(같지요). 힘들어십주(힘들었지요). 담이 일정한 담이 아니고 어떤 디는 뭐 거창하게 높고, 어떤 디는 이런 자왈밭(가시넝쿨밭)도 걸리고 허며는, 밤길이니까, 상당히 애먹주(애를 먹지). 또 담을 넘을 때나, 나뭇가리라든지 넘을 때는 ‘와상와상(와삭와삭)’ 소리가 날 거 아니우꽈(아닙니까)? 그런 소리 낭은(나서는) 껄립주게(들키지요). 그자 고랑쥐 역할이니까, 소리나게 걸으믄 안됩주. 정 행(그래서) 한 달포는 충분히 살아십주. 하루 혼 끼니 아니믄 잘 먹는 날은 두 끼니 찾아먹곡. 그렇지 않으면 혼 끼니 걸르곡. 그때는 식량있어도 난리가 나고 하니까, 가져댕김도(가져 다니기도) 그러고, 또 껄리면(들키면) 가는 거니까, 혼 자국이라도 다니지 말자고 해서 죽지 않을 정도, 뭐, 미움 같은 것도 쌀 한줌 놔 가지고, 죽을 쒀서 혼줌 놓으면 큰 냄비로 하나 정도는 되니까, 그러면 충분히 배도 안 고프고, 활동해야 배가 고프지 활동 않고 가만히 있으니까, 동해야 배가 고프지 활동 않고 가만히 있으니까, 소화가 또 그렇게 잘 안됩니다. 우리가 이굴(빌레못굴)을 처음 발견해서 동네 청년과 같이 탐험해 보니까, 굴속에 도자기 깨진 것도 있고, 뭐 뼈다귀 같은 것도 있고. 옛날 나이든 할아버지들의 전설에 의하면, 여기가 마적단이라고 해서 도적놈들이 살았는데, 마을 사람들을 못살게 구니까, 마을 사람들이 큰 왕석 해가지고 굴 입구를 막아버렸다 허여마씨(합니다). 그래 가지고 이 굴이 어떻게 막아졌다고 합니다.

 

 ● 그 굴에 고구마가 많이 쌓여 있었다고 하던데, 그것도 가지고 들어간 겁니까?

 갖고 들어간 겁주(거지요). 살려고 하니까. 소개핸(해서) 내려 갈 때도 고구마는 다 가지고 가질 못하니까, 밭에 파서 묻었수다(묻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내버린 사람들이 많주마씨(많지요). 식량은 다 가지고 내려갔는데, 고구마 정도야...

 

 ● 그런데, 굴에서는 노약자들하고 납읍에서 피난오신 분들하고, 따로 따로 생활하셨습니까?

 예, 원채(워낙) 너르니까, 어느 쪽에 사람 이신지도(있는지도) 모릅니다. 굴안 주위가. 바닥은 이렇게 돌밭이지만, 천장은 웨 질(외 길)난 디라. 납읍 분네는 납읍분대로 한 군데, 어음분네는 어음분대로 한 군데 허고.

 

 ● 겨울철에는 김이 납니까? 

 예. 눈 올 때는 지금도 여전헙니다. 불을 때서 짐이(김이) 나는 것이 아니고 양(예). 다른 사람들은 겪어보지 않으난(않으니까) 모르는 디 양(예), 지열이라고 예? 안 추울 때는 모르는데, 밖의 온도가 0°C이하로 내려서 원체(워낙) 냉하게 되믄(되면), 그 열이 밖에 풍기게 되고, 밖에서 볼 때는 연기로 보이게 됩니다. 김이 올라가면 그것이 연기로 보입니다. 여름 때는 전혀 모릅니다. 모두가 0°C아래로 내려가 때나, 마침 눈이 안 묻은 때는, 지나가다 보면 연기가 나는 디는 ‘아, 여기가 큰 동굴이 있는 부근이구나’ 하면 틀림없습니다. 그러고 적은 궤(굴)엔 온도 차이가 없으니까, 전혀 그런 연기가 없고 마씸(없구요). 원체 동굴이 커도 입구가 널러불며는(넓어버리면) 그 지열이 나오는 현상을 못 보는데, 동굴이 크고 입구가 적으면 지열 나가는 것이 파란 연기처럼 보입니다.

 밥해 먹고, 고구마 구워 먹고 하는 연기가 아니었습니까? 

 아니, 아무리 풍겨도 원체 동굴이 크니까 그걸로는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사람이 있다는 것도 사람이 말 안하면 모릅주게(모르지요). 아무리 소리를 밖으로 내보내젠(내보내려고) 했자(해도), 경 행(그래서는) 나가지도 안 헐거고 그러니까......

 

 ● 토벌대가 들어와 가니까, 두 사람이 같이 굴속 아주 깊이 들어가서 나오질 못했다고 하는데, 이분들은 누굽니까?

 그분들은 제가 보든 안해도(보지는 않았지만), 나오지 못한 분은 어멍(어머니)하고 딸인디, 그분들은 속에서 그대로 죽었는지, 동굴조사반이 온 때, 그저 탐험 댕길 때 그렇게 시체가 죽어 있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찾아내서 장래도 지내고, 뭐, 그래십주(그랬지요). 그전에도 여기 탐험을 왔어도 그렇게 깊이 들어가질 못해신디(못했는데) 조사반이 두 번짼가 왔을 때, 한 분이 깊이 들어가니까 발견한 거라마씸(발견했던 거지요.) 굴에 가면 세 갈래가 된 디가 이서 마씸(있어요). 어느 가달(갈래)에 가면 어디 가질 줄을 모릅주, 질(길) 같으면 네거리 닮은 디가 이서 부니까(있어버리니까). 잘못 들어갔다간 나오지 못해마씨(못해요). 방향을 모르니까. 그 할머닌 그런 식으로 허영(해서) 나오지 못한 겁주(못했던 거지요). 들어가면 불도 없으니까, 그늠행(가늠해서) 놔두지 않으면, 그거 뭐, 어딘지 알 수 이서마씸(있어요)? 탐험가들은 전부 나일론 실을 가져와십디가(가져왔습니다). 그렇제 않은 분은 백묵 해 가지고 죽 죽 그으면서 댕기는 이도 싯고(있고), 경 안행은(그렇게 안 해서는) 도저히 찾지 못해마씨(못해요).

 

 ● 선생님은 처음에 이런 굴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제가 여기 사니까, 그 시절에 젊은 청년들 뒤따라 댕기다 보니까, 안갑주게(알았던 겁니다). 선조들이 ‘빌레못동굴’(주;지금 많이 알려진 빌레못굴 아랫쪽에 작은 굴이 있는데, 옛날엔 그 굴을 빌레못동굴이라 했다)이라고 헌 것은 요기(여기) 질래(길가)에 있수다(있습니다). 그 굴만 생각했지, 이 굴은 생각도 안했수다(않았지요). 그 굴은 전지만 있으면 노람쥐(박쥐)같은 거 심어집니다(잡을 수 있읍니다). 저 굴(지금의 빌레못굴을 말함)신 줄은(있는 줄은)생각도 못했주. 보통 사람들이 알기는 이것을 빌레못굴이라 합니다. 처음 모를 땐 여기 와서 많이 숨어나십주(숨었었지요). 굴 속에서는 겨울에 덥습니다. 이불어시도(없이도) 잘 수 이서 마씨(있어요). 여름에는 굴 속이 선선하고.

 

기록에는 빌레못굴에서 납읍청년 스물 일곱명이 죽었다고 됐는데...

 청년이 아니우다(아닙니다).전부 하르방(할아버지), 그때 한 80세쯤 된 그런 노인이 한세분허고, 또 여자 , 그 사람 며느리니까 그때 나이 35~36세 난 여자가 서너분하고, 또 그 외에는 얼아이들(어린아이들), 주로 여남은 살(여섯남짓된)난 아이들도 많이 죽고, 건데(그런데) 억울한 죽음헌거라 마씨(죽음을 당한 거지요).

 

● 그러면 그때 힘쓸만한 사람은 선생님밖에 없었겠습니다.

 아, 저 밤일하던 사람이 청년 하나 가났수다(갔었습니다.)송씨라고 어음 살던 사람인데 그이가 납읍 장가를 든 분이라마씸, 처가집에 소개 갔다가 처부(妻父)말 들언 같이 간거주마씸(간 거지요). 그러니 할아버지 세분, 아주머니 세넷허고(3~4명), 청년은 나하고 그 청년하고, 저보다 한 살 밑에 아이가 하나 들어갔고 가이는(그 나이는) 그 사람네 보다 먼저 잡현 총살 당하고, 그 송씨는 밤눈이 어두워 죽이젠허니까(죽이려 하니까) 뛰어가다가 총맞안(총에 맞안) 죽었젠 헙디다. 오히려 그게 판안했댄 헙니다. 즉사해부니까 경안헌 건(그렇지 않은 건 )막 모사(으깨지게) 때려놓고 총살했다고 허는데, 하르방덜도 그랬답디다.

빌레못동굴 말아도 이 마을에선 잡혀가서 소식없는 사람들도 있수다. 그 가족들은 행방불명된 사람이 심어간 날 (잡혀가던 날) 주로 제사를 한다고 합니다.

 

● 언제 제사가 제일 많습니까?

 윗동네는 그것이 6월인가, 건 잘 모르쿠다(모르겠읍니다.). 그때 철경대 오란(와서) 몬딱(몽땅)심어가부니까. 소개 내려가기 전에 청년들 모이라허니까. 다 모이니까. 이제 조금 요망진건 전부 모여당(모아다가) 죽여부렀수게(죽여버렸습니다.)소개헐 무렵에, 아마 10월 초순이나 9월말쯤 될 거우다. 그때 불러 강(가서) 오지 안 헌(않은) 사람이 혼 대여섯 사람은 되여마씨(됩니다.) 120호에 절반은 청년들 이섰댄 보아지는데(있었다고 보이는데) 그후루젠(그 후엔)그자 조근조근(차근차근) 심어만(잡아다)죽여불곡(죽여버리고) 허연(해서) 4·3사건 막 끝난 보곡(죽여버리고) 허연(해서) 4·3사건 막 끝난 보니까 몇사름 어십디다.(몇사람 없습니다.) 젊은 이 청장년은 다 해당됩주(되지요) . 막 몰명한(용렬한) 사람만 살곡 요망진(똑똑한) 사람은 다 죽여불곡, 우리 연거래(동년배) 갑절(동갑)이 18명돼났수가. 지금 산사람은 동갑이 네명밖에 엇수다(없습니다.). 다 죽어부런(다 죽어서) 14명이 죽은 셈입주. 소개헌 후제난(뒤니까) 스물 하나, 둘, 셋 사이 그렇게 죽은 섭주(거지요). 몇 사람은 군인 가서도 죽고, 저가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지만, 죽어지카부댄(죽을 것이라고는) 생각은 안했수다(않았습니다.).

 죽을 목은 저가 여러번 넘겼는디, 빌레못굴에서 죽을 복을 저가 여러번 넘겼는디, 빌레못굴에서 허고, 철경대 심부름했다가 산군한테 불러다가 칼로 골기잰(갈기려고) 헐 때하고, 군대 간(가서) 차에서 떨어져난 일, 도는 차에(달리는 차에)손을 들어도 안세원 주니 옆으로 잡아당(잡아다가) 차 강알(밑)에 들어간 일로 그때 차가 넘어져부러십주(넘어져버렸지요). 그래도 죽질 않허고, 56개월 군대생활 하다가 와십주(왔지요). 빨리 제대허잰(하려)해도 집에 오면, 무슨 명단(요주의 인물 명단)이나 나오카(나올까)해서, “ 조금이라도 오래 군대생활하자‘해 가지고 56개월 군대생활 헌 겁주(헌거지요)

 

● 마을에서 그 당시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합동 위령제라도 치러주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다시는 이런 일일 없어야 된다는 점에서 후손들에게 어떤 역사의 교훈도 되겠고요.

 좋은 말씀입니다만. 죽어도 한꺼번에 죽은 것도 아니도, 1년 2년 뭐 몇년에 걸쳐 일어난 일이니, 또 빌레못동굴에서 학살당헌 사람은 한 동네사람이면 추모제를 헐 수도 이실거우다(있을 겁니다.). 납읍, 어음 사람이 합동으로 죽었주마씨(죽었지요). 납읍이 거저라마씨(거의지요) 인원수가 많주마씨. 납읍이든 어음이든 이웃부락이니까, 한군데 거시기해서 기념으로 큰 비석이라도 딱 세워서, 사유를 전부 이제는 논문으로 써얍주(써야지요), 써 가지고 허여는(하면은) 자손들이라도 보고, 자손 아닌 딴 사람이라도 그때는 이런 시국이 있어 가지고 이렇게 엄청난 죽음을 당했구나 하는 것도 교훈으로 마음에 새길수가 있겠지요.

 

 

 

상처받은 영혼을 향한 희망이 불어오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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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유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