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육시우영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제주시 지역구분(읍면) 애월면 지역구분(마을별) 하가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하가리
GPS 위도 33.4578888888889, 경도 126.352083333333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〇 '육시우영'은 1948년 11월 13일 새벽, 원동마을로 향하던 제9연대 군인들(중대장: 전순기 중위)이 하가리를 지나다 제사집에 있던 사람들과 그 근처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을 강제로 끌어내어 27명을 공개적으로 집단학살한 장소이다. 하가리 마을 회관 서쪽 100미터 지점에 '육시우영'​이라 불리는 밭이 있다. 이곳이 희생터이다. 

 

11월 13일은 정순아 씨 댁 제사였다. 이 날 제사집에 사람들이 모여 있자 군인들은 정순아 씨 댁을 중심으로 근처의 집들을 불지르면서 주민들을 끌어냈다. 그리고는 정순아 씨 댁 앞밭, 속칭 '육시우영'에서 27명을 공개 총살했다. 이날 정순아 씨는 가족 중에서 5명이 희생당했다. 주택 피해도 심해 정순아 씨 주변 주택 16채가 전소되었다.

 

군인들은 아이들과 여자들을 꿇어 앉혀놓고 총살 장면을 구경하게 했다. 군인들은 총을 난사한 후에 목숨이 붙어 있는 주민들은 대검으로 재차 학살하는 잔인함을 보였다. 이 자리에서는 자신의 남편이 총살당하는 것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지켜봐야 했던 사람도 있었다 한다. 

 

이날 총살 현장에서 고원룡과 오창기 씨는 기적적으로 살아 나왔다. 그러나 고원룡 씨는 이틀만에 죽고 말았다. 오창기 씨는 한국전쟁 때 해병 3기로 참전해서 살다가 10여 년 전에 돌아가셨다.

 

희생자는 김두천, 정기봉, 이정화, 양공명, 장순호, 임군선, 임영언, 윤창국, 장언순, 정순아, 임치완, 고태식, 송유생, 임인원, 장기휴, 박청량, 고원룡, 박군화, 정신아, 강기환, 양공언, 임화봉, 고두철, 고순화, 정도아 등이다. 

<출처: 제주4.3연구소, 『4.3유적 Ⅰ』>

 

〇 아름다운 더럭마을
하가리는 이웃마을 상가리와 더불어 '더럭'이라는 아름다운 지명으로 옛부터 불려졌다. 4·3 이후 하더럭, 상더럭의 지명의 전통은 '더럭초등학교'라는 교명으로 돌아왔다. 해방 직후 하가국민학교로 개교했지만 4·3 당시 무장대의 습격으로 불타고 말았다.
1954년 학교를 새로 짓고 교명을 결정할 당시 상가리와 하가리를 다 포함할 수 있는 '더럭'이라는 옛 마을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하가리는 4·3 당시 '연화못'을 중심으로 동동네, 섯동네, 알동네로 이루어진 200여호 규모의 아담한 마을이었다.


1948년 11월 13일 원동으로 향하던 토벌대가 하가리를 지나다 주민 30여명을 총살했다. 이 사건을 '육시우영사건'이라 한다.


이날 새벽 외도지서 주둔 9연대 군인들이 원동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 지역의 지리를 잘모르는 군인들은 해변 마을인 구엄리 주민 한 사람을 길 안내자로 대동하고 하가리 마을에 이르게 된 시간은 새벽 1시쯤이다. 주민들이 대부분 잠자리에 든 시간에 도착한 1개 중대 가량 되는 병력은 집에 불을 지르고 마을 안에 있는 밭인 속칭 '육시우영'으로 아무런 영문도 모르는 주민들을 끌어 넣어 죽임의 '광란'을 벌이게 된다.


원동마을로 향하던 제9연대(연대장 송요찬 중령) 7중대(중대장 전순기 중위) 군인들이 하가리에 도착할 당시, 동동네 문씨 집안에서는 제사를 끝낸 후 음복을 하고 있었고, 중동네 정기봉씨 집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모여 돗추렴한 돼지고기를 안주로 음주를 하고 있었다.


토벌대는 우선 환히 불이 켜진 채 사람들이 모여 있는 정기봉의 집을 덮쳤다. 또한 이웃집에도 들이닥쳐 잠자던 주민들을 닥치는대로 끌어냈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정기봉씨 집 등 이웃 16채의 가옥에 불을 지르면서 사람들을 '육시우영' 밭으로 몰고 간 것이다.


군인들은 아이들과 여자들을 꿇여 앉혀놓고 총살 장면을 구경하게 했다. 군인들은 총을 난사한 후에 목숨이 붙어 있는 주민들은 대검으로 재차 학살하는 잔인함을 보였다. 이 자리에서는 자신의 남편이 총살당하는 것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지켜봐야 했던 주민도 있었다.


하가리 출신의 고두헌씨는 말한다.

 

군인들이 육시우영으로 사람들을 한곳에 모이게 하고는 나머지 사람들은 길 맞은편에서 그 모습을 보게 했어요. 나랑 우리 아버지 그리고 여자들 여럿이 있어서 그 모습을 봤지요. 어림잡아도 군인들에게 포위되어서 끌려온 사람이 30여명은 됐는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데도 무조건 죽였습니다.

한밤중에 일어난 토벌대 학살극의 원인은 애매한 무고 때문이었다. 아래 마을의 누군가가 마을에서 벌인 잔치를 동네 사람들이 모여 무장대를 위해 돼지를 잡고 술을 대접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는 바람에 군인들이 이 마을을 적성마을로 간주하고 마을에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고씨의 증언은 계속 이어졌다.

 

그날 누님 한분도 돌아가셨어요. 우리집이 잔치를 벌였던 집 바로 옆집이었는데 밤중에 자다가 갑자기 군인들이 들이닥치니까 일어나기는 했는데 누님이 옷을 입으면서 일어나 나오는 것을 군인들이 육시우영으로 끌고 갔습니다. 아무죄가 없다고 말하는데도 데려다가 무조건 죽이더군요.

이 학살사건은 한밤중에 초가집들을 불태워 대낮처럼 밝힌 가운데 기관총을 걸어놓고 사살한 다음 대검으로 확인과정을 거치는 잔혹성을 보였다. 이 사건으로 정유아씨 가족 다섯 사람이 희생돼 대가 끊기고 말았다.죄가 없다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주민들의 호소도 총소리로 묻어버렸다. 학살을 피하여 목숨을 건진 사람들은 마을근처에 숨어서 떨고 있었다.마을을 불태우는 불빛에 애월면사무소에서도 확인하러 올 정도였다. 

 

당시 나는 애월면사무소 재직중이어서 면사무소에서 살았습니다. 육시우영사건이 나던 그날에 나하고 윤성우가 하가리에 확인을 나갔습니다. 철장 등을 갖고 가서 보니 사람들이 없었어요. 늙은이하고 몇 사람만 있었지요. 부친도 피난을 가버렸고 찾아보니까 어머니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육시우영 안을 보니까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육시우영 속에는 세 사람의 목숨이 붙어있었습니다. 박창효 고원룡, 오창기라는 사람들이었는데 오창기라는 사람은 애월에 있는 황의원에게로 데려가서 탄알이 박혀있는 것을 빼내고 살았습니다. 고원룡과 박창효는 치료를 받다가 얼마 없어서 죽었지요. 나중에 오씨는 해병대 3기생으로 입대해 육지서 토벌작전에도 참여했다고 합니다. 

임병모씨의 증언이다. 육시우영 학살사건으로 희생된 하가리 주민은 김두천, 정기봉, 이정화, 양공명, 장순호, 임군선, 임영언, 윤창국, 장언순, 정순아, 임치완, 고태식, 송유생, 임인원, 장기휴, 박청량, 고원룡, 박군화, 정신아, 강기환, 양공언, 임화봉, 고두철, 고순화, 정도아 등 30여명이다.


4·3 당시 전도적으로 소개령이 내려진 것은 1948년 11월 15일이다. 이승만정부의 제주도에 대한 계엄령이 11월 17일에야 선포되었다는 점에 비춰보면 이보다 나흘전인 11월 13일의 학살사건은 무모한 토벌이 아닐 수 없다. 


이날은 북제주군 조천읍 교래리 마을 전체가 군인 토벌대에 의해 불에 탔으며, 와흘리 수기동, 서귀포시 토평동, 북제주군 애월읍 하가리에 이어 소길리 원동마을 학살 등 도내 곳곳에서 학살사건이 벌어진다. 이는 이틀 뒤부터 시작된 대대적인 소개령과 학살극의 서막을 알리는 불안한 사건이었다.

<출처: 한라일보(2009.11.29.)>

 

 

〇 애월면 하가리 사례

애월면 하가리는 약 160호 가량의 작고 평범한 마을이었다. 해변마을은 아니지만 해변을 따라 조성된 일주도로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어서 ‘중산간마을’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마을이다. 이 때문에 하가리에는 소개령이 내려지지도 않았다. 4월 3일 무장봉기가 발발한 후에도 전혀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주민들은 별 걱정없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1948년 11월 13일 새벽 1시께, 제주읍 외도리에 주둔하고 있던 9연대 군인들이 마을에 들이닥쳤다. 그 시각 동동네의 한 집안에서는 제사를 끝낸 후 음복을 하고 있었고, 중동네 정기봉의 집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모여 돼지고기를 안주로 술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진압군은 우선 환히 불이 켜진 채 사람들이 모여 있는 정기봉의 집을 덮쳤다. 또한 이웃집들에도 들이닥쳐 잠자던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끌어냈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정기봉의 집 등 이웃 14채의 가옥에 불을 지르면서 사람들을 속칭 ‘육시우영’이라 불리는 인근 밭으로 끌고 갔다. 곧 총성과 비명이 뒤섞이는 아비규환의 처절한 장면이 벌어졌다. 이날의 희생자는 김두천(71) 정기봉(67) 이정화(여, 59) 양공명(48) 장순호(45) 임군선(42) 임영언(42) 윤창국(41) 장언순(39) 정순아(39) 임치완(38) 고태식(37) 송유생(33) 임인원(31) 장기휴(30) 박청량(여, 30대) 고원룡(29) 박군화(여, 27) 정신아(27) 강기환(26) 양공언(26) 임화봉(26) 고두철(24) 고순화(여, 18) 정도아(18) 등이다. 희생자 중 고순화는 만삭의 임산부였다. 고원룡은 목숨이 남아 있어 애월리의 병원으로 옮겼으나 이틀 후 결국 숨졌다. 이날 총에 맞고도 구사일생한 오창기(당시 20대)의 경우는 ‘삶과 죽음’, ‘총살당한 자와 군인’이 종이 한 장 차이임을 보여준다. 오창기는 총알이 몸에 박혀 있는 상태로 사태를 견디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해병대 3기’로 지원 입대해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다.

 

이 날 남편을 잃은 강응무(姜應武)는 “군인 세 명이 집으로 들어와 잠자던 남편을 끌어냈다. 군인들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기관총으로 쏘았다. 총알이 몸 여기저기에 박혔는데 빨리 안 죽으니까 그랬는지 칼로 목을 잘라 버려 피가 낭자했다. 난 그들을 군인이 아니라 인간 백정으로 본다”고 말했다.(姜應武(여, 83세, 애월읍 하가리, 2002. 6. 1 채록) 증언)

 

그런데 군인들이 왜 그때 하가리에 왔으며, 주민들을 무차별 총살했을까. 이에 관해 해변마을의 우익단체원과 천대받던 하가리 용인의 아들이 모략을 했다는 설이 회자되고 있었다. 또는 진압군이 산간마을인 원동에 무장대가 집결해 있다는 정보를 듣고 출동하던 중 그 중간지점인 하가리에 다다랐을 때 주민들이 모여 있자 ‘폭도 모의를 하는 것’이라며 오해를 해 총살극을 벌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군인들이 하가리에서 총살극을 벌인 후 곧바로 원동마을로 가서 그곳 주민들도 총살한 점을 생각하면 ‘오해를 했다’는 후자의 추정이 더 설득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희생자들이 노인과 부녀자를 포함한 평범한 주민들이기에 그 어떤 것도 총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사건 발생 날짜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하가리사건이 벌어진 1948년 11월 13일에는 애월면 소길리의 원동마을, 조천면 교래리, 조천면 와흘리2구, 조천면 신흥리, 안덕면 상천리, 안덕면 상창리, 안덕면 창천리 등 각처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 총살과 방화사건이 벌어졌다. 이처럼 이러한 유형의 총살과 방화사건은 제주도 다른 지역에서도 광범위하게 벌어졌다.

 

<출처: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

 

 

 

 

 현장사진

 

 

  

 

 

 사료(문서, 사진, 증언)

  

※ 「영상채록 4·3증언」86회-하가리편  

  고행자(여, 1941년생, 고원룡의 딸)

“전 8살 때 할아버지네 집에 그날 제사니까 아빠 손잡고 둘이서만 제사 지내러 갔다 오는데 그 방앗간에 어떤 남자가 숨어서 나오더니 아버지를 끌고 갔습니다. 뒷날 우리는 할머니네 집에 울면서 갔는데 아침에 친척 분이 와서 지금 ‘육시우영’에 하가 청년 다 죽었다고 말해줬습니다. 그래서 가보니까 칼로 양쪽 팔굽, 발을 칼로 다 돌라불고 가슴에 총에 맞은 구멍이 있었는데 목숨은 살아 있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무서워서 길에 못 다닌다고 하니까 우리 80살이 넘은 할아버지, 이웃집 할아버지, 나이 많은 우리 이모님하고 세 명이 ‘달채’라고 옛날 리어카 식으로 된 걸로 아버지를 태워서 애월에 있는 임시 조치하는 병원에 갔는데 하룻밤 거기에 살다가 돌아가수다. 할아버지가 말하는 것을 나중에 들었는데 그때 아버지는 방 벽을 막 주먹으로 때리면서 다 튿었덴마씨. 나는 아무 죄도 없는데 죽는 것이 너무 억울하다고. 내가 죽어버리면 우리 80살 넘은 아버지, 어머니를 누가 묻어 줄거냐며 어머니한테 미안하다 잘 부탁한다며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임신한 어머니는 애기를 낳는데 유복자는 아들을 낳는다고 했는데 딸을 낳아서 마시. 우리가 3형제가 되언. 우리는 집안이 다 몰수가 되어서 어머니는 밤낮을 울다가 병으로 돌아가고, 양자 오빠를 삼았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호적에도 못 넣고예. 게난 너무나 억울행 청와대고 대통령이고 어디든지 간다고 하면 앞장서서 가서 고소하고 싶어마씨. 너무 억울해서. 우리 아버지는 너무나 어릴 때고 외아들이고 해서 일찍 결혼해서 우리 3형제만 놔두고 그렇게 되니까 어머니는 그 한에 병이 들어 돌아가고예.”

 

 

상처받은 영혼을 향한 희망이 불어오는 곳
평화·상생·해원 바람의 진원지

제주4·3평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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