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산지항 옛터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제주시 지역구분(읍면) 제주읍 지역구분(마을별) 건입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 940-3번지 일대
GPS 위도 33.5168888888889, 경도 126.534694444444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〇 수장 학살이란 

4․3 때 군경 토벌대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 가운데 하나가 수장(水葬)이었다. 배를 타고 나가 살아있는 사람의 몸에 돌을 달아매 물 속에 빠뜨리거나 배 위에서 총을 쏘아 바다로 던진 것이었다. 이렇게 죽은 희생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1948년 11월부터 진압이 무자비해지면서 수장에 의한 희생이 컸다. 특히 6․25 발발 직후 ‘예비검속’의 바람이 거세게 일 때에는 하루에도 수백 명씩 수장되는 비극도 있었다.

 

비밀리에 진행된 이때의 수장에는 몇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무더기로 수장된 희생자들은 정식재판에 회부된 바 없이 불법적으로 임의처분됐다는 점이다. 둘째, 이 때문에 희생자들이 왜 죽었는지 그 이유를 밝히는 사건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셋째, 바다에 던져졌기 때문에 시신이 없다는 점이다. 이로인해 겪는 유족들의 아픔과 한은 더없이 크고 깊다. 그런데도 사건 발생 반세기 가까이 되는 오늘날까지도 그때 왜 수장의 방법을 택했는지 떳떳하게 이유를 설명하는 기관이나 개인은 없다. 다만 무더기로 학살하면서 나중에 후환이 있을까봐 청소하듯 시신의 자국까지 없앤 것으로 유추해석될 뿐이다. 

<출처: 제민일보, 《4.3은말한다》 제4권>

 

〇 대마도 관련

  제주지역에서는 195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일본국 대마도에 한국인 시신이 많이 표류했다는 대마도 현지 언론 보도를 접한 후 대마도에 표류한 한국인 시신이 1948~1950년 전후시기에 제주지역에서 수장 희생된 사람들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관련 유족회 및 4․3연구소 등은 제주도를 지나는 해류 중 대마난류가 대마도 방향으로 지속적으로 흘러간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2001년 8월 7일부터 9일까지 대마도 현지 조사를 실시하고, 제1회 ‘4․3 수장 희생자 위령제’를 개최했다. 관련 단체들은 2002년에는 별도의 조사단을 꾸려 대마도 전역을 대상으로 조사활동을 벌였으나, 대마도 표착 사체가 제주도민 임을 입증할 수 있는 근거는 찾을 수 없었다. 한편, 제주북부예비검속희생자유족회는 수장 희생자들의 시신이 일본 대마도로 표착되었을 개연성이 제기됨에 따라 6․25예비검속희생자삼면유족회와 함께 2007년 대마도 현지 조사를 실시하고 ‘예비검속 수장 희생자 원혼 합동 위령제’를 봉행하기도 했다. 

 

 

〇 대표적인 수장 사건 

1. 1948년 11월 5일 수장사건

민간인들에 대한 첫 수장은 1948년 11월 5일(음력 10월 5일)에 이뤄졌다. 국방경비대 제9연대는 소위 사상범으로 분류된 경찰 및 직장인 20여명을 경찰로부터 인계받은 뒤, 어떠한 재판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이들을 제주 앞바다에 불법적으로 수장시켰다. 당시 군 당국에 의해 은밀히 추진된 이 수장 학살은 사건 발생 18일 만에 한 시신이 떠오르면서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됐다. 죽은 모습으로 수장의 실상을 밝힌 사람은 신한공사 제주농장 직원 김기유(26)였다. 다음은 그의 누나 김기순의 증언이다. 

  

나는 당시 화북에 살고 있었는데, 친정집으로부터 동생 기유가 바다에 던져진 것 같으니 사라봉에서 삼양 해안까지 찾아 보라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따져 물었더니 며칠전에 경찰에 잡혀 갔었는데 수장된 것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동생은 트럭에 실려 동부두쪽으로 끌려가면서 이젠 마지막이라고 느꼈던지 신발을 벗어 도로변에 사는 친구집에 던졌답니다. 그 전갈을 받고 우리집은 발칵 뒤집혀지게 되었습니다. 친정아버님은 당시 산지목욕탕도 경영했고 축산조합장으로 근무한 지역유지였습니다. 자식 가운데도 기유가 총명하다고 기대가 컸습니다. 아버님은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끝내 사람들을 싣고갔던 배의 선원을 조용히 만나 수장사실을 확인하게 됐답니다. 그 선원의 이야기로는 산지부두와 관탈섬 사이 바다에 33명이 던져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산지에서 외도에 이르는 바닷가를 매일 미친 듯이 돌아 다녔습니다. 나도 화북과 삼양 바닷가를 누벼 다녔습니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어머니는 처절하게 울면서 ‘아들 얼굴만이라도 보여달라’며 매일 두손모아 빌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동생 기유의 시신은 어머니의 기원대로 꼭 18일만에 사라봉 밑 해안가에 떠올랐습니다. 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달려갔습니다. 얼굴의 형체로는 누군지 알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왼쪽 팔뚝에 문신으로 새긴 이름 때문에 찾게 됐습니다.

<출처: 제민일보, 《4.3은말한다》 제4권>

 

그 외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양문필(29), 문규월(30, 여), 이성지(22), 이창우(26), 이기두(26), 전기원(25) 등이다.  

 

 

2. 1950년 예비검속 집단학살 사건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제주지역 경찰서는 주민 중 일부를 예비검속하여 관할 경찰서・지서별로 집단수용하고 심사와 등급분류를 실시했다. 예비검속자들을 D, C, B, A 4개 등급으로 분류되었고, 이들 중 D, C 등급 대부분이 제주주둔 계엄사령부, 즉 해병대사령부에 의해 총살 암매장 되거나 수장 학살되었다. 특히, 제주경찰서에 연행되어 경찰서 유치장 및 제주읍 주정공장 창고 등에 구금되었던 제주읍・애월면・조천면 관내 예비검속자 중 D, C 등급으로 분류된 예비검속자들은 7월 16일 ~ 8월 20일 사이에 제주읍 정뜨르비행장에서 총살당했으며, 나머지 일부는 제주읍 산지항에서 배에 실려 나가 바다 한가운데서 수장당했다. 제주경찰서 관내 예비검속자의 전체 숫자 및 수장 희생자 수는 전혀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그 실상을 파악하기 힘들다. 또한 희생자의 시신을 수습한 유가족이 단 한 명도 없는 실정이다. 다만 희생 당일 상황을 직접 간접적으로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상황을 추정할 뿐이다. 당시 국민방위군으로 제주항 부두 파견 헌병대에서 경비 근무를 했던 장시용의 증언에 의하면, 밤 9시경에 50명씩 태운 차 10대가 부두에 도착하여 알몸 차림의 500여 명의 사람들을 배에 태우고 바다로 나갔다가 두 시간 정도 지나서 빈배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당시 해병대 군무관으로 근무하던 박춘택과 제주항에서 화물선박을 출항시키던 김인평도 주정공장에 수감되어 있던 상당한 수의 예비검속자를 해군 경비정에 태우고 가서 수장시켰다고 증언하였다. 다음은 4·3연구소에서 발간한 《4ㆍ3과 역사》 제23호에 실려있는 장시용의 증언이다. 

 

그날 밤에 부두파견 헌병대에 배치가 되었습니다. 저녁 8시경이 되니까 그곳이 한쪽은 사무실이었고 맞은편 한쪽은 창고였습니다. 사무실이나 창고는 작았어요. 3-4평쯤된 창고 안에 들어가서 보니까 밖을 볼 수 있게 유리창이 30-40cm 정도로 박아진 것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아홉시 반이 조금 넘는 시간이었습니다. 배는 부두에 정박해 있고 왜정때 고기잡던 배인데 배는 100톤이 조금 넘을 듯한 배입니다. 그 배가 있는 쪽으로 차가 옵디다. 그 때 차가 들어오는데 보니까 꼭 열 대였습니다. 바로 내 앞에서 하는 일이니까 숫자를 셀 수 있었습니다. 바로 연병장 부두앞에서 벌어진 일이지요. 여자고 남자고 옷을 입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전부 옷을 벗은 알몸이었습니다. 작은 줄로 사람을 뒤로 포승 채우듯 채우고 큰 줄로 사람들을 엮어서 차에 태워 배로 가는 것입니다. 차 한대에 50명씩 태웠으니까 차 열 대로 꼭 5백명이었습니다. 유리창을 통해서 바로 눈앞에서 셀 수 있는 사람이 틀림없는 5백명, 더도 덜도 아닙니다. 그 사람들을 싣고 나가버리니까 나는 창고 안에서 나왔습니다. 그곳이 옛날 수상파출소 조금 넘어간 곳이지요.

 

그곳에서 보니까 5백명을 태운 배가 나가는데, 멀리도 안 나갔습니다. 사라봉 앞으로 등불을 베롱허게(희미하게) 싸가지고(켜고) 가는데 약 두시간 반에서 세시간쯤 작업을 했습니다. 마일 수로는 3마일 정도 되었는가. 그 때는 전기불은 없었고 등불이었을 때인데 그 배가 들어오는 시간이 두시 반에서 세시 경은 되었을 것입니다. 그 나이에도 참 처량해 보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죄가 있어서 죽었는가....   그 날짜가 양력으로는 잘 모르겠는데 음력으로는 대략 20일이나 22일 경쯤 되었을 것입니다. 그 배가 들어오는데 사라봉 위로 달이 떠 올라왔습니다. 보름이 지난 것은 확실하고. 그 일이 하도 어마어마한 일이어서 엊그제 본 것 같아 뵙니다. 배가 들어오는 시간에 사라봉 위로 달이 떠오르는 것만큼은 기억이 씽씽합니다. 그것을 나와 내 또래의 건입동 사람이 같이 봤어요. 그 아이는 나중에 6사단 2연대로 군인가서 평양 순천 부근서 죽어버렸습니다.

 

아까 왜정때 고기잡던 배는 그일이 있기 5일전부터 탑동 매립한 곳, 그곳에 먹돌이 좋았는데 그 먹돌을 가져다 싣고 있었고, 그 먹돌에 손가락 굵기의 줄을 메달아 놓은 것도 근무 중에 보았습니다. 수상파출소 앞에서 3일전부터 구경을 했어요.

 

그렇게 그날 밤을 지내고 국민방위군으로 통행해제가 되어서 이튿날 근무를 나가는데 왜정때는 병원이었는데 원정로에 특무대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거기 근무를 갔는데 그 곳에 전기취조랑 매타작으로 취조 조사를 받는 사람, 표선면장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름은 모르겠는데 그곳에서 쑤군쑤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세월이 하수상하여 얘기를 못하다가 이제는 세상이 좀 좋아지니까 하는 얘긴데 내 눈앞에서 5백명이 알몸으로 수장하러 가는 것은 어제일처럼 또렷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을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계속해서 《월간 제주인》(1989.8월호)에 실려있는 박춘택의 인터뷰 기사이다. 

      

가끔 부두에 가보면 지금의 양조장 자리에 16~17살의 처녀를 비롯해서 도처에서 잡아온 사람으로 가득했었지. 그리고 부두에는 항상 해군함정이 대기해 있었고. 어떤 이유에서인가 알아봤더니 양조장에 가두어놓은 사람 중에 골라서 한번에 40, 50명씩 배로다 바다에서 총살한 후 수장하기 위해서라고 말해주더군.

 

 실제로 박씨는 ‘끈과 돌멩이’들이 배에 실려 있는 걸 봤다고 한다. 몇 명 정도나 그런 방법으로 수장시켰느냐고 묻자 정확한 숫자는 모르고 그 당시 측근을 통해서 들었는데 ‘300명 이상’이라고만 했다고 한다.     

희생자의 유가족 역시, 사건 당시 희생자들의 행방을 수소문 하는 과정에서 여러 경로를 통해 희생자들의 수장 학살에 대한 정황들을 확인하기도 했다. 조천리 김이선 할머니는 당시 조천리에서 예비검속되어 제주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던 오빠 김임배가 1950년 7월 16일(음력 6월 2일) 바다에서 수장당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다음은 김이선 할머니의 증언이다.  

 

경찰서에 가서 오빠 김임배가 갈아입을 옷을 가져왔으니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안에 있는 형사 한 명이 “제가 조천 김OO한테 장가를 들어서, 조천이 처가입니다. 처가가 조천인데, 이런 걸 거짓말 할 수가 없습니다. 음식은 누구 다른 사람이라도 먹고 있겠지만, 옷은 주인이 없는데 도저히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 옷을 입을 사람이 없으니까 그냥 가져가십시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 경찰이 지금은 죽고 없어서 더 물어볼 수도 없습니다만, 그 경찰관이 하는 말이 경찰서 유치장에 있던 사람들을 음력 6월 2일(양력 7월 16일)에 데리고 나가서, 배에 태워서 한 3시간 정도 배질을 해서 바다에 나간 뒤에 배에서 사람들을 총 쏘아 죽이고, 돌을 매달아 바다에 빠뜨렸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그 배에 타서 같이 갔다 왔다고 했습니다. 경찰서에 수감됐던 사람들을 트럭에 태울 때, 수감자들은 자신들이 석방되는 줄 알고, 너도나도 앞 다퉈 나와서 트럭에 올라탔다고 했습니다. 그 얘기를 해준 경찰이 참 순하고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그 얘기를 하면서, 본인도 막 숨에 차서, 기가 막혀서 했습니다. 나는 그 경찰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 경찰이 사실대로 얘기해 줘서, 나는 우리 오빠 제사도 음력 6월 1일 지내고 있습니다.(김이선 증언, 2009.7.7.)

애월리 이순정 할머니는 예비검속사건으로 오빠 이한익과 작은아버지 이시형을 모두 잃었다. 

 

작은 아버지가 연행되고 한 열흘 정도 지나서, 장OO씨 부인이 우리 집에 찾아와서, 우리 어머니한테 오빠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해줬습니다. 장OO씨 부인은 제주경찰서로 남편을 면회하러 갔다가, 집안의 경찰을 통해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됐던 애월리 사람들이 오늘(음력 6월 2일) 트럭에 실려 제주읍 산지항  부근 바다에 수장됐다는 얘기를 듣게 됐습니다. 장OO씨 부인이 우리 집에 와서 그 얘기를 전하니까, 우리 어머니가 “큰 아들을 대들보로 믿고 살았는데, 대들보가 부러져버렸구나! 우리 집은 망했구나!” 하면서 대성통곡을 했었습니다. 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장OO씨 부인이 울면서 애월리 사람들 누구 누구도 그렇게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하니까, 이제 마을 사람들이 막 몰려왔습니다. 사람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나니까, 이젠 애월지서 경찰이 집으로 찾아와서는 장OO씨 부인을 잡아갔습니다. 결국 장OO씨 부인은 하귀까지 잡혀가서 전기취조 등 고문을 당했습니다. 팔에 전깃줄을 묶어서 고문을 해놔서, 팔 신경이 다 끊어질 지경이었다고 들었습니다.(이순정 증언, 2009.3.9)

 

제주읍 주정공장 창고에 구금되었던 서귀면장 강성모 역시 수장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음은 아들 강완철의 증언이다. 

 

아버지는 서귀면장으로 근무 하시던 중 면사무소에서 연행이 됐습니다. 당시 면사무소 서기로 근무하던 송OO씨에 의하면, 군인들이 짚차를 타고 면사무소로 찾아와서 면장실에 계시던 아버지를 연행해 갔다고 합니다. 연행 후 처음에는 서구포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다가, 나중에 제주읍 주정공장 창고로 이송됐습니다. 주정공장 구금 당시, 어머니가서너번  면회를 갔다왔습니다. 면회 당시 아버님은 어머니께 “걱정말라, 내가 무슨죄가 있나? 이제 금방 나갈테니까 아무 걱정 말아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님이 감출려고 해도, 온 몸이 퍼렇게 멍들어가지고, 매 맞은 자국, 고문당한 흔적이 역력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면회를 갔다 온 다음날 다시 면회를 가보니, 주정공장 창고가 비어있어서, 그날 돌아가신 걸로 생각하고 제사를 지냅니다. 그 날이 양력 7월 16(음력 6월 2일) 입니다. 당시 소문에 의하면, 예비검속자들을 광주로 압송한다면서 배에 싣고 출항하였는데, 약 2시간 후쯤 선박만 돌아왔다고 합니다. 총알이 아깝다고 배 위에서 무거운 돌을 매달아 그냥 수장시켰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아버님이 왜 잡혀갔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아버지가 군인들한테 괴씸죄로 걸려서 희생된 것을 알게 됐습니다. 1950년 6․25 발발 당시 서귀면 법호촌과 중문면 회수리에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계엄군이었던 해병대의 민폐가 얼마나 심했냐고 하면, 하루 3식을 지역주민들이 직접 주·부식을 만들어 제공토록 하면서 곡물은 물론 농사용 농우, 가축인 돼지, 닭 또는 제물로 쓰려고 준비해뒀던 고사리 등을 그들의 주·부식용으로 강제로 납부토록 했습니다. 군인들의 민폐에 주민의 원성이 많아지자 아버님은 군에 민폐를 줄여줄 것을 건의했다고 합니다. 시찰차 면장실에 들른 군부대 상급자들에게 주민들의 피해를 줄여달라고 요청한 바로 다음날, 아버님은 면장실에서 군인들에게 연행되었습니다. 당시 예비검속된 분들은 대부분 경찰에 연행이 됐는데, 우리 아버지만 군에 연행된 것으로 봐서, 군인들의 민폐를 지적했던 것 때문에 희생된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면장으로서 주민들을 돌보기 위해 했던 행동이 예비검속 이유가 된거죠. 이런 연유로 우리 아버지가 ‘고사리면장’으로 불리게 됐습니다. 

 

1960년에 큰 형님(강인철)이 아버지 사건과 관련해서 당시 군 책임자를 당국에 고소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고소장을 접수한 후에 5․16이 터지면서, 조사가 되지 않고 흐지부지 됐습니다.(강완철 증언, 2012.9.21.)

<출처: 제주민예총, 「2014 수장해원상생굿 자료집」, 2014>

 

 〇 수장 학살 (水葬 虐殺)

1950년 예비검속은 제주도의 많은 인명을 앗아갔다. 경찰기관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로도 당시 2천여명 가량이 예비검속으로 경찰에 연행되었다고 한다.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백조일손’ 학살사건도 예비검속에 의한 것이었으며 갯거리오름 ‘만뱅듸 공동장지’에 묻혀 있는 63명의 한림지역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들 195명만이 예비검속으로 학살되었던 사람들 중에 이름이나마 밝혀진 사람들이고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생사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대정지역의 경우 예비검속으로 3구서(모슬포경찰서)에 수감된 사람은 대략 4백여명이 될 것이라고 얘기한다.

 

고구마 저장창고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3백-4백여명 가량은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이름을 불러서 나가면 제주시 등지로 보내지고, 또 그만큼 들어왔으니까 평균적으로 그 수용소 창고 안에는 3백-4백명 가량이 있었던 것이지요.

 

이 사람들중에 132명은 섯알오름에서 학살되고 나머지는 생사를 확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엄청난 사람들이 어느 곳으로 갔기에 지금까지도 그 내막을 모르는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정뜨르 비행장에서 학살됐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육지로 실어날랐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유족들은 수장당하였다고 얘기를 한다. 

바다에 돌을 매달고 빠뜨려 학살했다는 이야기다. 6․25 이전 4.3당시에도 이미 수장에 대한 이야기들은 있었다. 「제민일보」 ‘4.3은 말한다’ (302회, 96년 2월 2일자)는 유지학살사건을 다루며 수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민간인들에 대한 첫 수장은 48년 11월 5일에 이뤄졌다. … 중략 … 재판도 거치지 않은 채 이들을 제주 앞바다에 수장했다. 그 희생자 숫자에 대해 경찰관계자는 20명으로 밝혔으나, 한 민간인은 33명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당시 군당국에 의해 은밀히 추진된 이 수장작전은 한 시신이 떠올라 유족의 손에 안겨지면서 그 실체가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죽은 모습으로 수장의 실상을 밝힌 사람은 김기유(당시 26세)다.

 

수장을 하면서 흔적을 없애려고 수십명씩 알몸으로 학살하였다는 상황까지 설명한 이 글은 4.3당시의 학살이 얼마나 잔혹하였는가 하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비검속으로 경찰관서에 감금되었던 사람들은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수장되었는가. 여기에 대한 유족들의 몇가지 증언들이 있다.

 

6.25가 터지니까 큰오빠를 데려갑디다. 여름에 목욕하고 있다가 수건을 마루에 휙 던지며 우리 보고, “저녁이 늦을 것 같으면 먼저 먹고, 아니면 돌아와서 같이 먹자.”고 해서 기다리는데 오지를 않읍디다. 내가 데리러 가십주. 지서에 가니까 회의는 안하고 제주서로 바로 실려갔다는거라. 제주서에 뒷날 가니까, “죄가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고 ‘예비검속’으로 경찰에 잠시 있을 뿐이다. 매 한 대도 안 때릴테니 돌아가 있으라”고 안심시킵디다. 거기 밥은 나쁘니까 여관에서 사서 사식을 넣고 닷새에 한번 옷을 들여놓고 했수다. 그런데 하루는 “이 옷을 어떻게 받을 지, 음식은 다른 사람 준다치고 ...”하더니, “사실은 죽은 지 열흘쯤 됐다. 이 말을 아니할 수가 없어서 한다.” 면서 사정을 얘기해 줍디다.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죽었다는 소식이라도 그 시국에 누가 그런 말이나 해줍니까? “육지 사정이 다급해져가니, 밤에 경찰서 앞에 차를 딱 세워서 ‘석방시킨다’ 하니 모두 뛰어나와 허겁지겁 쓰리쿼터에 올라탔는데, 그 사름덜 부두에 가서 2-3시간 배질허연 가더니, 돌을 매달고 빠뜨려 죽였덴 헙디다. 조천에서 5-6명이 이때 죽었습니다. 각 면에서 잡혀 왔으니 작은 숫자일리가 있수과? 이 때가 음력으로 50년 6월 21일이라. 6월 20일에 제사를 합니다. (이제사말행수다 1권, 37쪽)

 

6월 20일날 제사를 하는데 시신을 찾지도 못하여 백방으로 수소문을 하는데 당시 도라꾸 운전사가 수장을 했다면서 20일 제사를 지내라고 해서 그렇게 알고 제사를 6월 20일에 지내고 있습니다. (애월읍 장00)

 

 전도적으로 예비검속으로 학살된 사람들의 경우 시신을 찾지 못한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예비검속으로 학살된 사람들 대부분의 유족들은 음력 6월 20일경부터 24일까지 제사를 지내고 있다. 특히 6월 20일에 제사를 많이 지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제주4.3연구소에서는 예비검속에 대한 현장조사를 하다가 수장(水葬)에 대한 중요하고도 충격적인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증언자는 당시 국민방위군으로 산지항 부두파견 헌병대에서 경비를 서던 사람으로 수장 당일날의 상황을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좀 긴듯 하지만 수장에 대한 부분들은 들어본다.

 

그날 밤에 부두파견 헌병대에 배치가 되었습니다. 저녁 8시경이 되니까 그곳이 한쪽은 사무실이었고 맞은편 한쪽은 창고였습니다. 사무실이나 창고는 작았어요. 3-4평쯤된 창고 안에 들어가서 보니까 밖을 볼 수 있게 유리창이 30-40cm 정도로 박아진 것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 아홉시 반이 조금 넘는 시간이었습니다.

 

배는 부두에 정박해 있고 왜정때 고기잡던 배인데 배는 100톤이 조금 넘을 듯한 배입니다. 그 배가 있는 쪽으로 차가 옵디다. 그 때 차가 들어오는데 보니까 꼭 열 대였습니다. 바로 내 앞에서 하는 일이니까 숫자를 셀 수 있었습니다. 바로 연병장 부두앞에서 벌어진 일이지요. 여자고 남자고 옷을 입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전부 옷을 벗은 알몸이었습니다. 작은 줄로 사람을 뒤로 포승 채우듯 채우고 큰 줄로 사람들을 엮어서 차에 태워 배로 가는 것입니다. 차 한대에 50명씩 태웠으니까 차 열 대로 꼭 5백명이었습니다. 유리창을 통해서 바로 눈앞에서 셀 수 있는 사람이 틀림없는 5백명, 더도 덜도 아닙니다. 그 사람들을 싣고 나가버리니까 나는 창고 안에서 나왔습니다. 그곳이 옛날 수상파출소 조금 넘어간 곳이지요.

 

그곳에서 보니까 5백명을 태운 배가 나가는데, 멀리도 안 나갔습니다. 사라봉 앞으로 등불을 베롱허게(희미하게) 싸가지고(켜고) 가는데 약 두시간 반에서 세시간쯤 작업을 했습니다. 마일 수로는 3마일 정도 되었는가. 그 때는 전기불은 없었고 등불이었을 때인데 그 배가 들어오는 시간이 두시 반에서 세시 경은 되었을 것입니다. 그 나이에도 참 처량해 보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죄가 있어서 죽었는가.... 그 날짜가 양력으로는 잘 모르겠는데 음력으로는 대략 20일이나 22일 경쯤 되었을 것입니다. 그 배가 들어오는데 사라봉 위로 달이 떠 올라왔습니다. 보름이 지난 것은 확실하고. 그 일이 하도 어마어마한 일이어서 엊그제 본 것 같아 뵙니다. 배가 들어오는 시간에 사라봉 위로 달이 떠오르는 것만큼은 기억이 씽씽합니다. 그것을 나와 내 또래의 건입동 사람이 같이 봤어요. 그 아이는 나중에 6사단 2연대로 군인가서 평양 순천 부근서 죽어버렸습니다. 

 

아까 왜정때 고기잡던 배는 그일이 있기 5일전부터 탑동 매립한 곳, 그곳에 먹돌이 좋았는데 그 먹돌을 가져다 싣고 있었고, 그 먹돌에 손가락 굵기의 줄을 메달아 놓은 것도 근무 중에 보았습니다. 수상파출소 앞에서 3일전부터 구경을 했어요.

그렇게 그날 밤을 지내고 국민방위군으로 통행해제가 되어서 이튿날 근무를 나가는데 왜정때는 병원이었는데 원정로에 특무대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거기 근무를 갔는데 그 곳에 전기취조랑 매타작으로 취조 조사를 받는 사람, 표선면장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름은 모르겠는데 그곳에서 쑤군쑤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세월이 하수상하여 얘기를 못하다가 이제는 세상이 좀 좋아지니까 하는 얘긴데 내 눈앞에서 5백명이 알몸으로 수장하러 가는 것은 어제일처럼 또렷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을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  장○○( 65세 제주시 삼양동)

 

이분의 증언을 보충하는 과정에서 당시 표선면장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김민추(金玟秋)씨로 당시 환갑의 나이였다. 그는 예비검속으로 표선에서 검속되어 제주경찰서로 넘겨져 고문으로 희생된다. 구체적인 자료를 보자.

 

1960년 조사된 국회 양민학살진상규명 신고서에 의하면 당시 표선면장 김민추(金玟秋)는 정보원이었던 박준선(朴俊善)이가 찾아와 결혼식을 올려줄 것을 요구하여 응해  주었던 사례가 있었다. 그후 그가 금품을 요구하였으나 이를 거절한 것이 빌미가 되어 모략에 의해 유치장(濟州市 中央医院蹟-1960년당시 요동반점)으로 끌려가게 된다. 이 유치장에서 1950년 7월 6일(음) 고문에 의한 사망으로 사료된다고 피해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책임자는 해군정보관 申鉉俊이라는 기록도 있다. 당시 표선면장 김민추의 시신은 친지 부영봉씨로부터 화북경 ‘고우니모루’에 가매장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나중에 찾아서 매장하였다고 한다.

 

수장은 산지항에서만 이뤄진 것이 아니고 다른지역에서도 이뤄졌다. 김인성(32, 남원 태흥 출신), 오창선 (안덕면 상창 출신), 한종규(27, 구좌읍 행원 출신) 등은 서귀포에서 수장되었다고 한다. 이를 뒷바침이라도 하듯이 보목리나 효돈지역에서는 범섬 근처에서 수장되었다는 증언이 여러곳에서 나온다.

 

또 한가지. 당시 어부로 생활했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1950년 가을경이 되면서 갈치를 낚으면 징그러울 정도로 컸는데, 그 갈치들은 수장된 시신들을 먹고서 그렇게 살찌고 컸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그 지역 사람들이 그해 갈치를 거의 먹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제주시 해안 포구가 있는 마을에서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또한 화북이나 삼양 근처 바닷가에는 물에 불은 시신이 떠올랐다는 증언들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올해로 4.3 48주년을 맞고 있다. 48년 동안 4.3의 진실이 칠흙 어둠 속의 동굴에 갇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장에 대한 이야기들은 풍문으로만 떠돌고 있을 뿐 실상을 밝힐 자료가 거의 없다. 그러나 1950년 예비검속 당시에 제주도 전역에서 2천여명 가량이 경찰과 정보기관에 의해 검속되었던 것은 거의 정설화 되고 있는데 이들의 생사에 대해서는 검증해줄만한 아무런 자료도 없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출처: 제주4.3연구소, 「연구소 소식지 제23호」>

 

 

  

 

 

 현장사진

 

 

 

 

 

 

 

 

 사료(문서, 사진, 증언)

  

상처받은 영혼을 향한 희망이 불어오는 곳
평화·상생·해원 바람의 진원지

제주4·3평화재단

4·3유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