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제주시 충혼묘지 4·3추모비(박진경 추도비)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제주시 지역구분(읍면) 제주읍 지역구분(마을별) 건입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노형동 산19-2
GPS 위도 33.4126111111111, 경도 126.496527777778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아흔아홉골의 '제주시 충혼묘지'에는 4․3과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희생된 군 전사자와 경찰 전사자들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원래 이 유해는 사라봉 자락의 '사라봉 충혼묘지'에 안장돼 있다 1985년 10월 26일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것이다. 충혼묘지 안의 좌측은 경찰묘역, 우측은 군인묘역으로 1990년 현재 총 639기(군인 494기, 경찰 145기)가 안장돼 있다. 

충혼묘지 입구에는 1957년 제주도공비완멸위원회에서 건립한 <충혼비 - 한라산공비 완멸기념충혼비라 칭함>와 제주도 군경원호회에서 건립한 <박진경대령 추모비>가 서 있다. 

 

① 忠魂碑 비문

 

<전면> 

忠魂碑

 

<후면>

我國의 運訖에 强盜 倭漢이  擅政하야 恣意虐民이 無所不至라 三十六年間 虐政이 貫盈터니 檀紀 4278年에 聯合軍 進擊으로 日本이 降伏함에 따라 國權이 恢復되었으니 當此時하여 國民은 燦然한 民族精氣를 發揮하야 一意建國에 邁進할 것임에도 不拘하고 도로혀 相分左右하고 國分南北하야 一部 不良輩는 傀儡使嗾에 殺人, 防火를 恣行하는中 4281年 五十選擧를 機會로 共匪가 蜂起하야 本道 治安을 攪亂하고 良民의 生命, 財産을 鳥有에 歸케하니 於是乎 軍警民이 必死的 忠心으로 近於 7年間 獻身的 討伐한 結果 今年 4月 2日 至하야 完全殲滅하였으니 嗚呼라 國家民族을 爲하야여 貴重한 生0命을 貢獻한 軍警民 英靈이 無慮數百株에 達하니 豈不通裁아 玆에 忠魂을 慰安하며 功勳을 世傳키 위하야 立石함.

 

檀君紀元 四千二百九十年 十一月 日

濟州道共匪完滅紀念行事委員會

委員長 朴致順  建立

 

② 故陸軍大領朴珍景追慕碑  

박진경 중령은 1948년 5월 초, 9연대가 11연대로 바뀌면서 초대 11연대장으로 제주도에 부임했다. 박진경은 부임 초기부터 김익렬 연대장과는 달리 강경진압으로 치달으며 많은 인명 희생을 초래했다. 박진경은 부임 한 달여만인 6월 18일 대령 진급 축하연이 끝나고 숙소에 돌아와 잠을 자다 부하들에서 암살됐다.

 

〇 비문

 

<전면> 

故陸軍大領朴珍景追慕碑

 

<우측면>

이 碑는 當初에 세운 碑의 碑銘磨耗로 內容識別이 어려워 西紀 一九八五年  六月  日 다시 세웠으며 原碑는 碑 앞에 묻었음

 

<후면>

公은 密陽 朴氏 密城大君의 後裔로서 生地는 慶南 南海君 南面 虹峴里 三十六  番地에서 檀紀 二五三年 一月二十二日 出生하셨다 婦人은 南海郡守를 歷任  한 晉陽正公 任煥氏의 따님이다 公이 殉職하신 後 養子로서 그 伯兄인 珍鎔氏의 아들 翊?君을 入養하였다 公은 晉州高普를 卒業하고 이어 日本 大阪 外國語大學校 英語科를 卒業한 後 우리나라 光復과 더불어 國軍 創設의 主役으로 一翼을 擔當하여 獻身하고 國防警備隊 總司令部 人事局長을 歷任한 後 十一聯 隊長으로 就任과 同時에 陸軍 大領으로 昇進하여 濟州道 共匪掃蕩에 不撤晝夜守道爲民의 忠情으로 先頭에서 指揮하다가 不幸히도 檀紀 四二八一年 六月十八日 壯烈하게 散華하시다 이에 우리 三十萬 道民과 軍警援護會가 合同하여 그 功績을 기리기 위하여 短碣을 세우고 追慕의 뜻을 千秋에 기리 傳한다

 

檀紀 四二八五年 十一月 七日

濟州道民 及 軍警援護會 一同    

 

 

 

③ 忠魂碑

이 비석은 원래 관덕정 경찰국 청사 내에 있던 것을 현재의 충혼묘지로 옮겨 놓은 것이다.

 

다. 비문

 

<전면>

忠魂碑

故 監察官 李華暎 故 警監 康鳳現 故 警監 鄭性熙 故 警監 宋玉龍

故 警監 文翊道 故 警監 孫炳柱 故 警監 吳永鳳 故 警監 梁泰秀 故 警監 文光準 

故 警衛 鮮于仲泰 故 警衛金祿滿 故 警衛 金章河 故 警衛 任善吉 故 警衛 梁孟世 

故 警衛 高善三 故 警衛 金仁河 故 警衛 金思承 故 警衛 姜泰京 故 警衛 陳南亮

故 警衛 金昌淳 故 警衛 金秉奎 故 警衛 崔亨洛 故 警衛 李學明 故 警衛 洪斗現  

故 警衛 李光石 故 警衛 夫元廈 故 警衛 夫斗千 故 警衛 宋萬石 故 警衛 李仁金

故 警衛 康成彦 故 警衛 李元烋 故 警衛 張振奉 故 警衛 孫基錫 故 警衛 金宗錫  

故 警衛 鄭千鎬 故 警衛 李炳春 故 警衛 李喆洙 故 警衛 鄭甲壽

 

<좌측면>

檀紀 四二八三年 四月三日 立

濟州道 警察局長 警務官 沈亨澤

濟州警察署長 總警 柳根億 

警務係長 警監 趙才秀

査察係長 警監 金寶鉉

保安主任 經緯 金京鎔

搜査主任 經緯 鄭忠斌

査察主任 經緯 金熙瑞

外勤主任 經緯 金源輔 

 

<후면>

崇高한 警察精神 殉國의 一片丹心

빛나는 祖國 光復 靑史에 永世 永滅            

 

 

 

 〇 박진경 추도비

제주시 충혼묘지에는 제주도민에게 잘 알려진 박진경 대령 추도비가 세워져 있다. 그는 일제시대 일본군의 제주도 방어기지 구축에 참여한 경험으로 제주도의 지리를 잘안다는 사실 때문에 4·3발발 후 진압군 제 9연대장으로 제주도에 부임한다. 당시 그가 부임할 때는 김익렬 9연대장이 민간인에게 총을 겨누는 초토화 작전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전출 당한 직후였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미육군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강경진압작전으로 일관한다. 작전구역내 통행자는 전부 사살할 것, 중산간 부락에 대해서는 고립화, 포위작전을 전개할 것 등 박진경의 명령에 의해 폭도 색출작전 이 전개됐다. 그때부터 무고한 제주도민들은 빨갱이, 빨갱이 가족이라는 명분으로 무차별 사살되었다. 그가 부임한지 한달만에 6천명의 제주도민의 폭도로 체포되었다. 그는 무고한 제주도민을 빨갱이로 몰아 살해 하였다.

 

이와 같이 귀중한 목숨을 앗아간 그의 진압정책이 제주도민의 공분을 샀음은 물론이다. 결국 그는 대령승진 축하회가 끝난 직후 그의 부하 문상길 등에 의해 살해되었다.박대령을 암살한 장병들은 법정에서   어린아이를 쏘아죽이고 무자비한 진압명령과 동족살상을 보다 못해 민족을 위한 거사로 그를 살해했다 고 진술했다.

 

이처럼 박진경 대령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게는 충실한 군인이었을지 모르지만은 당시 제주도민들에게는 공포와 원망의 대상이었다. 지금도 그날의 아픔으로 괴로워 하는 제주도민들에게는  4·3학살 주범의 상징적 존재와도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더욱 비극적인 일은 박진경을 추모 하기위해 故 陸軍大領 密陽朴公鎭景 追掉碑 를 제주시 충혼묘지에 세웠다. 더우기 그 비문에는 제주도 공비소탕에 불철주야 수도위민의 충정으로 선두에서 지휘하다가 불행히도 장렬하게 산화 하시다. 이에 우리 30만 도민과 군경원호회가 합동하여 그 공적을 기리기위해 비를 세우고 추모의 뜻을 천추에 길이 전한다..... 라고 쓰여 있다.

 

수많은 원혼들은 아직도 폭도라는 누명을 벗지 못하고 있는데 정작 양민들을 폭도로 몰아 학살한 책임자들을  순국선열로 떠받들어 지는 현실에 심한 비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누구를 위한 비석이란 말인가? 그의 손에 죽어간 도민들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무참히 학살당한 도민들을 위해 추모기념비를 세우지 못할망정 오히려 학살책임자를 떠 받들고 있으니...

 

 

 

 

 현장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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