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관덕정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제주시 지역구분(읍면) 제주읍 지역구분(마을별) 삼도동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2동 1051-1번지 일대
GPS 위도 33.5133333333333, 경도 126.521527777778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제주도 역사의 앞마당, 관덕정 광장

 

 

관덕정 광장은 제주 역사의 산 증인이다. 조선시대인 1448년 세워진 이래 제주 역사의 굴곡을 말없이 지켜보며 침묵으로 증언해주는 곳이 관덕정이요, 이 광장이다.

관덕정은 제주목 관아의 부속 건물로 세종 30(1448) 신숙청(辛淑晴) 목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관덕(觀德)이란 사자소이관성덕야(射者所以觀盛德也)’ ,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보는 것이다라는 예기의 글귀에서 유래했다. 이름 그대로 이곳에선 군사들의 활쏘기 장소로 또는 과거시험, 각종 진상을 위한 봉진행사 등이 이루어졌으며, 매년 입춘에는 춘경이 치러져 문화축제의 장이 되기도 했다.

 

지금은 도시발전으로 제주시가 크게 확장돼 각종 행정, 사법기관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졌지만, 관덕정과 그 주변은 조선시대 때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주요 행정관청이 모여 있어 제주의 정치, 행정,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제주에서 큰 행사와 각종 기념식, 집회와 역사적인 사건 모두 이곳, 관덕정 광장에서 일어났다.

 

제주에서 최초로 5일장이 열린 곳도 이곳이고, 조선말의 빈번했던 민란의 최종 종착지도 이곳이어서 이재수의 난 당시에는 300여인의 교인척살이 이루어진 피의 현장이기도 하다. 특히 4.3발발의 도화선이라는 19473.1집회 역시 북국민학교에서 시작되어 이곳에서 사건화된다. 4.3의 와중에서는 무장대사령관 이덕구의 시신이 전시되는 등 격동의 공간이었다. 4·3 이후 제주지역의 시민과 학생들이 끊임없이 전개한 민주화운동과 4·3진상규명 운동도 관덕정 광장에서 시작됐고, 단절되었던 춘경의 보구언도 80년만에 이곳에서 복원되어 탐라입춘굿으로 매년 치러지고 있다. 무슨 큰일이 일어나면 제주민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자연스럽게 관덕정으로 모여들었다. 제주 역사의 중심지, 제주의 심장 같은 공간. 하지만 번영의 역사보다는 오히려 세찬 바닷바람에 상처 입은 섬 사람들의 삶의 역사를 더 많이 보아온 곳. 바로 이 곳, 관덕정 광장이다.

    

 

1947년 제28주년 3·1절 기념식, 피로 물든 관덕정 광장

 

1945815. 제주 섬사람들에게 해방은 진정한 의미의 해방이 아니었다. 제주의 해방 3년은 흉년, 역병, 흉년의 악순환이었다. 왜정 때의 그 악명 높던 곡식 공출이 여전히 존속되어 부족한 식량을 수탈해가는데 어찌 해방이며, 이민족들이 나라를 두 동강 내고 점령하고 있는데 어찌 해방이라고 할 수 있으랴! 194731, 관덕정 광장에 3만여 군중이 모여든 대시위는 이렇게 극한 상황에 몰린 민생의 피맺힌 절규였다.

 

194731일 오전 1128주년 31 기념 제주도대회가 열리던 제주북국민학교 주변에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날의 군중 수는 대략 253만 명으로 추산됐다. 이날 10개 면에서도 별도의 기념식이 열렸는데 각 지방마다 수천 명씩 모였다. 경찰은 원래의 제주경찰 330명과 응원경찰 100명 등 430명으로 보강하고 이 가운데 150명을 제주 읍내에 배치, 시골에서 올라오는 군중을 막아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행사장 주변에는 제주읍뿐만 아니라 애월면조천면 등 주변 주민들이 모여들었으며, 학생들도 대거 참여했다. 학생들은 이미 이날 오전 9시께 오현중학교에 집결, 한 차례 행사를 치른 다음이었다.

이 기념식에서 대회장인 안세훈은 “31 혁명 정신을 계승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조국의 자주통일 민주국가를 세우자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이어 각계의 대표들이 나와 연설을 했는데, 주로 31 정신을 계승 자주독립을 전취하자는 내용이었다. 또 삼상회의 절대지지, 소 공동위원회 속개를 촉구하는 구호도 나왔다.

 

이날 오후 2시께 기념행사가 끝난 후 가두시위가 시작되었다. 제주북국민학교를 나온 시위행렬은 두 갈래로 나뉘어 한 대열은 미군정청과 경찰서가 있는 관덕정 광장을 거쳐 서문통으로, 다른 한 대열은 감찰청이 있는 북신작로를 거쳐 동문통으로 이어졌다. 제주 읍내를 중심으로 서쪽 지역 주민은 서쪽 대열에, 동쪽 지역 주민들은 동쪽 대열에 합류하여 마을로 돌아가면서 시가행진을 하며 위세를 부린 것이었다.

오후 245분께 관덕정 앞 광장에서 기마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채어 소란이 일어난 무렵에는 시위행렬이 관덕정 광장을 벗어난 시점이었다. 현장 목격자들의 증언과 언론의 심층 보도내용을 종합하면 당시 관덕정 광장에는 ‘S’자 형태의 행진으로 위세를 부리던 시위군중이 지나간 다음이어서 건물 옆쪽에 듬성듬성 100200명의 관람군중이 있었다고 한다. 사건은 한 기마경관이 관덕정 옆에 자리잡았던 제1구경찰서로 가기 위해 커브를 도는 순간 갑자기 튀어나온 6세 가량의 어린이가 말굽에 채이면서 시작됐다. 기마경관이 어린이가 채인 사실을 몰랐던지 그대로 가려고 하자 주변에 있던 관람군중들이 야유를 하며 몰려들기 시작했다. 일부 군중들은 저 놈 잡아라!”고 소리치며 돌멩이를 던지며 쫓아갔다. 당황한 기마경관은 군중들에 쫓기며 동료들이 있던 경찰서 쪽으로 말을 몰았고, 그 순간 총성이 울렸다.

 

이날 관덕정 광장에서 한 기마경관(임영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채어 소란이 일어난 것은 오후 250분쯤의 일이었다. 이 기마경관은 북신로에 있던 감찰청(옛 제주신문사 거리)쪽에서 관덕정 옆에 자리잡았던 제1구 경찰서로 보고하기 위해 가던 도중 한 어린이에게 상처를 입혔다. 그런데 그 기마경관은 말굽에 어린이가 챈 사실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경찰서 쪽으로 그대로 가려고 했다. 이에 주변에 있던 관람군중들이 야유를 하면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요란한 총성이 울리던 오후 250분쯤, 사건 현장인 관덕정 광장 주변에 있었던 목격자들은 한결같이 시위대가 없었고, 100150명의 관람군중들만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어린아이가 기마경찰의 발굽에 치이는 소동에 이어진 발포는 위협사격의 수준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희생자 가운데 광장 복판에 쓰러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희생자는 경찰서와 상당히 떨어진 식산은행 앞 노상이나, 도립병원으로 들어가는 골목 모퉁이, 그리고 관덕정 남쪽 지점의 경찰관사 앞 노상에 쓰러졌다. 도립병원의 검안 결과 희생자들의 대부분이 등 뒤에 총탄을 맞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 이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숨지고, 8명이 중상을 입었다.(4명이 그 자리에서 절명했으며, 2명은 도립병원으로 후송됐으나 끝내 숨졌다. 나중에 도립병원 앞에서 또 발포사건이 생겨 중상자가 늘어난다) 희생자 가운데는 국민학생과 젖먹이를 안고 있던 20대 여인 등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사망자의 신원은 허두용(許斗鎔15), 박재옥(朴才玉21), 오문수(吳文壽34), 김태진(金泰珍38), 양무봉(梁戊鳳49), 송덕수(宋德洙49)로 밝혀졌다.

이 날의 발포는 위협 수준을 벗어난 것이었다. 희생자 가운데 광장 복판에 쓰러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희생자는 경찰서와 상당히 떨어진 식산은행 앞 노상이나, 도립병원으로 가는 골목 모퉁이에 쓰러져 있었다. 도립병원의 검안 결과 희생자 중 1명을 빼놓고 나머지 모두 등 뒤에 총탄이 맞은 것으로 판명됐다.

 

 ○ 날 도립병원 앞에서 두 번째 발포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도립병원에는 그 전날 교통사고를 당한 한 응원경찰관이 입원해 있었는데 동료 2명이 경호 차 병원에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관덕정 쪽에서 총성이 나고, 피투성이 된 부상자들이 업혀 들어오자 그들 중 한명인 이문규(李文奎충남 공주경찰서 소속) 순경이 공포감을 느껴 소총을 난사, 장제우(張濟雨) 등 행인 2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관덕정 광장은 검붉은 피로 물들었다. 이날의 발포 사건은 해방 후 미군정과 제주민의 갈등이 폭발하는 시발점이 되었고 다음해 4·3의 도화선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사건에 대한 항의로 1947310일부터 제주도에서 한국에서는 유례가 없었던 민관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관공서뿐만 아니라, 통신기관, 운송업체, 공장 근로자, 각급 학교, 심지어는 미군정청 통역단 등 공무원과 회사원, 노동자, 교사, 학생까지 참여하는 대규모 파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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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사진

 

  

  

  

  

 

 

 

 사료(문서, 사진, 증언)

  

 

상처받은 영혼을 향한 희망이 불어오는 곳
평화·상생·해원 바람의 진원지

제주4·3평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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