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관음사 군 주둔지 옛터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제주시 지역구분(읍면) 제주읍 지역구분(마을별) 아라동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라1동 387번지
GPS 위도 33.4238333333333, 경도 126.558166666667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 제주 한라산의 고(古)절을 거론 한다면  누구나  관음사 를 꼽을 것이다. 또한 제주 근대 불교의 중흥을 일으켰던 사찰을 말하라면 관음사를 이야기 할것이다.이러한 연유로 많은 사람들이 관음사를 드라이브 코스로 택하거나 순례지로 선정한다. 그러나 정작 관음사를 둘러본 사람들이라면 절보다는 오히려 한라산 기슭의 맑은 공기에만 찬사를 보내고 돌아올것이다. 제주 절의 특색을 살피기 위한 순례자들이라면 더욱 실망이 클것이다.

 

실제로 관음사는 볼거리가 거의 없으며, 제주 사찰의 특색도 사라져 버린 절이다. 근대 제주 불교의 본산이라는 요란한 명칭만 붙어 있는 것이지 고절이 유물이나 유적은 거이 남아 있는 것이 없다. 4.3항쟁에 군 토벌대에 의해 관음사는 깡그리 불타버렸고 1964년에 와서야 복원되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보고 있는 절은 20세기 후반기 대수롭지 않은 안목으로 치장하고 복원해 놓은 절집이다.

 

그러나 이 관음사에는 제주현대사의 아픈 상처를 갖고 있다. 한때 재산무장대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으며, 군 주둔지가 되기도 했다. 또한 관음사는 4.3항쟁의 말기 유격대(재산무장대)와 군 토벌대와의 치열한 접전을 벌인 격전지이기도 하다.

 

파도와도 같이 일렁이는 억새풀의 물결과 소나무의 짙은 솔내음이 내몸을 감싸고 돌면서 44년전 치열한 역사의 현장인 관음사로 인도한다. 사천왕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자 은은한 목탁소리와 노승의 불경 외는 소리가 들려 온다. 불타기 이전 절집이 추춧돌이었을 잘 다듬어 놓은 돌들이 경내에 흩어져 있다. 그 추춧돌에 앉아  나는 불타기 전 관음사의 옛 모습과 제주불교의 성지가 무엇 때문에 잿더미로 변해야만 했는가를 되새겨 본다. 아울러  4.3항쟁 당시 유격대와, 토벌대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 관음사 창건

관음사는 비구니  봉녀관 스님에 의해 1908년에 세워졌다. 절의 역사로 보면 그리 오래지 않다. 이러한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관음사는 근대 제주불교 본원지로 일컬어 진다.

 

고려시대 제주불교는  절도 오백 당도 오백 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융성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불교는 관에 의해 박해를 받게된다. 제주에서는 도민들에게 뿌리 깊었던 민간신앙인 당과 불교 사찰은 이형상 목사에 의해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이후 제주불교는  약 200년동안 공백기로 지내게된다. 이러한 공백기 이후 제주에서는 처음로 관음사가 설립되게 된것이다. 비구니 봉여관이 여기에 관음사를 세우게 된 내력은 장연종스님이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다.

 

봉여관 스님이 전라남도 해남에 있는 대흥사에서 삭발을 하여, 관음보살을 모시고 제주로 낙산 하였다. 제주로 내려온 봉여관 스님은 대흥사에서 조성되어 300여년이 된 목불을 해안가에 있는 자기 집에 모시고 예를 올리고 참배를 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만 하더라도 불교를 금지하였으므로 마을 유지와 청년들은  요귀 를 모신다하여 배척하였다. 일부청년들은 사당을 부수고 장작불로 목불상을 태워 버리려고 불을 질렀는데 신기하게 목불이 불에 붙지 않았다. 봉여관 스님은 그날로 불상을 짊어지고 한라산(지금의 관음사 입구)으로 도망나와  나무밑 작은 굴에서 불상을 모셨다. 이후 봉여관 스님은 불전을 짓기위해 고심하던 차에 꿈에 관음보살이 나타나  근처 냇가에 가면 기왓장을로 쓸만한 돌들이 있으니 그것을 가져다가 불전을 짓도록 하여라 하는 계시를 받고 일러준 곳으로 가보니 실제로 기왓장 같이 넓적한 돌들이 쌓여 있어 그것으로 기와를 올리고  새(띠)를 베어다가 지붕을 이어 불전을 지었다. 이것이 관음사의 시초였다.

 

관음사 입구에서 경내로 들어가다 보면 길 서쪽 나무밑에 자그마한 굴이 있다. 여기가 곧 봉여관 스님이 수도를 하였다는 그 굴이다. 관음 보살이 꿈에 나타나 불전을 지을 돌이 있다는 곳을 알려 주었다는 부분은 허황된 이야기 일수도 있지만 4.3당시 불에 타 지금은 없어진 그당시 절집은 실지로 기와를 대신해 돌로 지붕을 덮었었다. 경내 중간 중간에 보도불럭 대용으로 쓰는 돌들이 그 물증이다. 지금도 그 불전이 그대로 남아 있더라면 자연을 이용한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벌써 문화재로 지정 되었을지도 모른다.

 

 

○ 유격대의 은신처 관음사

이러한 설립 역사를 가진 관음사는 4.3발발이후 유격대의 은신처였다. 1949년 초 까지만 하더라도 산천단에서 관음사 주변지역은 일종이 해방구 였다. 도민의 호응이 높고 전투사기가 높을때는 감히 토벌대는 접근을 할 수없는 곳이었다. 당시 조천면당에서 할동했던 이모씨는 48년 겨울에 도당이 관음사에 있었으며 유격대가 주변에 주둔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1948년 겨울에 관음사에는 도당이 있었지. 나는 조천면당에서 연락병을 했었어. 면당에서는 하루에 연락을 세번 보내. 눈이 많이 왔을때는 이틀에 한번씩 다니고. 연락은 두명씩 관음사로 가는거라. 면당에서는 집접 도당에는 못 들어가지. 중간에 연락받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는 거기까지만 가는거지 

관음사에 도당이 위치해 있었던 1949년초, 미군비밀문서에는 한라산과 그주변에 숨어 있는 유격대는 1개의 도당사령부가  있고 하부에 각 면별로 12개이 면당사령부가 있으며 4개의 무장부대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당사령부는 50여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극소수의 인원만이 무장을 갖추고 있으며, 무장부대는 약 250여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1948년 말, 토벌이 심해 지면서 유격대는 한라산 밀림을 근거지로 하여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치고 빠지는  전법과 병력을 분산시켜 지구전을 펼치는 전법을 구사 하는 유격전을 펼치게 된다. 당시 유격대는 제주도를 동,서,남,북 지구로 분할하여 유격전를 구사하였는데 관음사는 동쪽 지구에 속한다. 동쪽 지역은 신촌 - 동복 - 와흘 - 당오름 - 샘이오름 - 관음사 - 한라산에 이르는 길을 담당하였다 한다.

 

관음사 추춧돌에 걸터 앉은 나의 머리속에는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몸을 이산중에 바쳐 힘차게 살아간 그들이 모습이 스쳐지나 간다.

 

4.3유격대의 아지트 였다는 관음사. 지금은 그 어디에도 그 흔적이 없다.사천왕문에서 대웅전, 선방, 영산전, 해월각,종각,서향각, 삼성전 등을 다 둘러 보았지만 불타기전 유격대가 주둔했던 흔적은 없다.

 

관음사 주변은 밤나무로 에워싸고 있다. 그 밤나무 숲에는 나이많은 보살과 어린 비구승이 밤을 줍고 있다. 토종밤이라 그런지 알맹이가 작다. 밤아름을 주워 으깨물며 혹시나 그때의 흔적을 남아 있지나 하는 기대에 관음사 주변의 뒷뜰 밀림으로 뒤졌다. 한시간여 밀림속을 뒤져 드디어 산사람들이 산에서 살때 돌로쌓아 살았던 움집모양의 아지트로 추정되는 흔적을 두어개 찾아 냈다. 이때의 희열, 아니 감격이라 표현해야 정확할지 모른다. 어쩌면 나는 이러한 감격 때문에 4.3유적지를 찾아다니는 지도 모른다. 하나는 거의 무너져 흔적을 알아보기 힘들고 다른 것은 그나마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최근 누군가 그때의 조작물을 그대로 이용해 나무걸치고 비닐을 덮었던  흔적도 있다. 어쩌면 유격대가 살았던 흔적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이후 이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나 다녔는가. 그러나 나는 어떠한 근거도 없지만 아지트의 흔적으로 추정한다.

 

아지트  정확히 말하면 아지테이션 포인트(agitation point)로 선동지령본부나 지하운동자의 비밀본부를 뜻한다. 그러나 필자는 4.3항쟁에 관한 증언조사시 주민들이 유격대의 은신처나  주둔지를 일컬러  아지트 로 표현하므로 이 뜻에 준하여 사용하고 있다. 일부 증언자들은 아지트를 줄여  트 라고 하기도 한다. 이와같이 4.3증언 조사를 다니다보면 말을 줄이거나 어휘변천이 되어 제주도식 영어가 뚝뚝 튀어 나오기도 한다. 예를 들면  빗개   올코  캐동무  아집 등이 그것이다. 처음에는 이러한 용어들을 들으면서 무슨 암호명으로 생각하여  빗개 라는 암호명을 아느냐 는  우스운 질문을 던졌던 적도 있다.

 

 빗개  또는  피께  : 피켓(picket-경계병,감시원)의 변형어.

 올코  또는  월고  : 오오거나이져(organizer-조직자))의 준말 오르그의 변형어.

 캐트  또는  캐동무  : 캡틴(captan-수령, 장(長))의 변형어 또는  K동무 의 변형어.

 아집  또는  애책  : 아지테이터(agitater-선동자)의 준말 아지,  A책 의 변형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웃어넘기는 하나의 용어들이지만, 당시를 살던 유격대들은 그들의 삶을 억압하고 민족을 둘로 나누려던 무리들과 싸우기 위해 조직적이고 대단히 분쇄적이지 안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이들도 미국의 신식무기로 무기로 무장한 토벌대의  힘의 논리 하나로 비인도적적인 살육, 무제한적인 초토화 작전에는 견딜수 없었다. 어쩌면 막강한 물리력에 대항하여 이길수 없는 싸움인 줄 알면서도 앉아서 죽는니 차라시 실어서 싸우자는 항쟁의 길을 택했을 지도 모른다.

 

1948년 12월 토벌대 9연대가 2연대로 교체되면서 육해군 합동작전과 섬의 횡단하듯 선을 형성하여 산을 쓸어낸다는  빗질작전 으로 유격대는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전투가  관음사 전투였다.

 

 

 

○ 불타는 관음사

1949년 1월 4일되면서 토벌대 대장 함병선과 미고문단들은 육 해 공 통합작전을 실시 했다. 해군은 37mm포 소란사격을 가하고 공군은 L-5연락기로 폭탄을 투하하는 등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전개했다. 이러한 작전으로 한라산 주변은 거이가 폐허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작전으로 중산간 지대는 완전 초토화 되었고 한라산 주변의 민가와 불교사찰은 모두 불에 타버렸다.

 

1949년 음력 1월 15일(양력 2월 12) 토벌대는 결국 제주불교의 증흥을 일으켰던 관음사에도 불을 질러 버렸다. 토벌대는 미리 준비한 휘발유를 뿌리고 관음사 대웅전과 해월각등 부속건물에 불을 질렀다. 당시 불타던 관음사의 상황은 40여년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 노스님과 노보살들 사이에서는 신성화 되어 전해 내려온다.

 

관음사에 불이 붙어 벌겋게 타오르자, 갑자기 하늘이 깜하게 어두워지고 맑았던 하늘에선 천둥번개 번쩍번쩍 빛났고 백주에 벼락이 쳐서 불이 일었다. 하늘에선 갑자기 장대같은 산비를 퍼부었다. 대웅전이 불이타고 이곳에 안치되어 있는 300여년된 목불에 불이 붙자 부처가 분노하였다. 목불상은 불에 타면서 분노하여 몸체가 격렬하게 떨리고 눈이 벌겋게 되어 번쩍번쩍 빛을 내더니만  펑 하면서 폭파하였다. 하늘마저 격노하여 불을 붙인 토벌대에게 천벌을 내렸다.  

 

관음사가 불타 회진 된것은 도민들과 불교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도내 유일의 불교본산이자 성보물급 문화재가 불에 타버린 것이었다.

 

당시 관음사 신도이자 도청간부직원이었던 이인구씨는 관음사가 소진되자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었다고 전한다.   관음사는 어떻게 보면 이유없는 방화입니다. 불태운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도 제대로 밝혀지고 있지 않아요. 다만 토벌대에 의해서 방화된것만이 확실하하죠. 그때에는 이것이 사회적 문제가 되니까 토벌대에서 군,경이 명예와 위신이 걸려 있는 문제이므로 내게 토벌대가 방화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못하도록 압력을 주더군요. 

 

관음사가 불타던 날을 전후로 하여 관음사에서는 유격대와 토벌대 간의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전투가 있었다. 관음사 전투시기에 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다. 관음사가 불타던 날 있었다는 설도 있고, 관음사가 불에 탄 후인 3월 초경에 벌어 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시기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제주백년사 - 강용삼,김용주공저 나  제주도 혈의 역사 - 김봉현 에는 관음사 전투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1949년 초, 토벌대에 의해 춘계대공세 가 시작되자, 유격대는 점차 궁지에 빠지게 되었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 대대적인 저항을 시작한다.

 

토벌대는 유격대의 중핵을 포착하여 섬멸하기 위해 관음사 가까이 까지 진주하였다. 이에 유격대는 토벌대의 행동을 교란하고 전의를 떨어뜨리기 위해, 사전에 귀순한다는 정보를 흘려 반포위 작전을 취했다. 토벌대와 선무공작대는 은밀한 행동으로 관음사 전방 300m 지점에 있는 소나무 밭으로 진격해 왔다. 그러나 산악전에 능란한 유격대는 이미 토벌대의 숫자까지 파악하여 미리 대기해 있었다. 유격대는 토벌대가 사정거리에 다다르자 공격을 개시하였다. 전투는 장시간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 되었다.

 

군. 경토벌대는 관음사로 올라가던 중 미쳐 당도하지 못한채 거꾸로 유격대에 포위 당하여 막심한 피해를 입고 후퇴하였다. 

 

이때 대 섬멸을 당하면서도 후퇴하던 한 토벌 대원이 넘어져서 총을 떨어뜨리고 도망 갔다가 다시 돌아 와서 그 떨어진 총을 갖고 가는  것을 본 유격대원들은  적이지만 참으로 훌륭하다. 고 칭찬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돌연 미군정찰기기 거기에로 비행하여 포케트포와 수류탄으로 집중 폭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사기를 얻은 토벌대는 다시 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미군정찰기의  폭격과 토벌대의 집중 사격에 노출된 유격대는 물리력으로 역부족 이었다. 유격대는 3명이 전사하고 후퇴하였다.

 

관음사 전투 당시 유격대 대장은 동부지역 지대의 대장인 북촌 출신 김완식이었다는 증언이 있다. 그는 전투에 앞서 대원들에게 관음사 전투가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 이번 작전이 끝나면 자수하여 후일을 기약하라. 더이상의 저항은 손실을 가져올 뿐이다.  이러한 지시를 내렸다 한다. 그는 관음사 전투이후 유격대원들을 안전지대로 이동시키고 혼자 격전지로 내려가 전사한 동지들을 둘러보곤 토벌대에 뛰어 들어 스스로의 죽음의 길을 택했다. 결국 그날이 연설이 그의 마지막 유언이 된 셈이었다.

 

 

〇 1909년 여승 안(安)봉려관에 의해 창건된 관음사는 제주 현대사의 아픈 상처를 갖고 있다. 

관음사는 깊숙한 산중이라는 여건과 한때 무장대의 본거지였던 어승생악과 가까워 4․3 초기에는 무장대가 가끔씩 드나들기도 했다. 그러나 토벌이 강화되면서는 토벌대가 인근에 주둔했고 끝내는 토벌대에 의해 전소되는 운명에 처해진다. 흔히 '관음사 전투' 불려지는 교전은 관음사 인근에 주둔한 토벌대와 매복한 무장대간의 전투와 피난입산한 주민들을 토벌하는 것이었다. 자료 <주한미육군사령부 정보일지. G-2보고서. 1949.4.1>에 의하면 1948년 12월 15일 경비대가 관음사 인근에서 8명의 무장대를 사살했고 1949년 5월에는 5명을 사살, 20명을 생포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하지만 증언에 따르면 관음사 인근에서의 전투로 토벌대도 적지 않은 인명피해를 보았다고 전해진다. 또 아라리 등 인근 주민들의 피난입산도 많았는데 이들 중에도 토벌대에 의해 희생되는 이가 적지 않았다. 

 

9연대 출신의 한 증언자는 '토벌작전 중 관음사에 들이닥친 지휘관이 관음사 승려를 고문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또 당시 어린 나이에 관음사에 기거했던 중원스님에 따르면 '관음사가 토벌대에 의해 불타자 하늘에서 천둥벼락이 몰아치는 소리가 들렸다.'고 증언했다.

 

1949년 2월 12일 대웅전, 향적전, 종각, 해월각 등 8채로 구성된 관음사는 토벌대에 의해 전소됐고 1968년 복원하였다.  

 

관음사는 현재 많은 증개축과 확장으로 제주불교를 대표하는 사찰이 되었다. 또한 성역화 사업도 진행되고 있다. 관음사 입구엔 당시 토벌대의 초소가 있고 뒤편엔 초소 및 숙영지의 흔적이 여러 군데 남아있다. 

    

1949년 3월부터 잔여 무장대 토벌을 위한 2연대의 작전이 강화되면서 2연대 2대대(대대장 이석봉 대위) 병력이 주둔했던 곳이다. 2연대는 제주도의 곳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토벌의 근거지로 삼았는데 이곳 관음사 주둔지 외에도 서귀포 수악교 인근에 1대대를 교래리와 산굼부리 사이에 3대대를 배치하여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곳 관음사 일대는 4․3발발 당시부터 무장대의 주요 길목이었고 한 때 무장대의 본거지가 되었던 어승생 진지와 가까운 작전상 주요 지역이었기 때문에 토벌대가 이 곳에 주둔한 것으로 보인다.

 

관음사 경내 5만여 평의 밀림지대에 중대와 소대급 숙영지 27곳이 당시의 흔적을 간직한 채 남아있다. 규모가 큰 중대급 숙영지는 가로 세로 25m 규모이고 그 보다 작은 소대급 숙영지도 있고 3~4명이 잠복할 수 있는 초소도 여러군데 남아있다. 또 관음사 뒷산인 아미봉(해발 650m) 정상에도 숙영지와 초소가 비교적 훼손이 안된 상태로 남아있어, 4․3유적지로 보존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관음사 입구의 초소는 관음사 기반정비를 하면서 일부 훼손한 것을 복원한 것이다. 관음사 입구로 들어서면 오른편에 당시 초소를 복원한 것이 보인다. 또 관음사 대웅전 뒤편 숲속에 일제시대 닦은 작전도로가 있다. 그 길을 따라 100m 정도 들어가면 당시 숙영지와 초소를 볼 수 있다. 또 그 길을 따라 아미봉 정상에 이르면 작은 숙영지와 초소를 볼 수 있다.

 

<출처: 제주4.3연구소, 『4.3유적 Ⅰ』>

 

 

 

 

 현장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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