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박성내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제주시 지역구분(읍면) 제주읍 지역구분(마을별) 아라동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라1동
GPS 위도 33.4859444444444, 경도 126.5435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〇 ‘자수사건’이란 과거 자신의 죄를 자백한 사람들을 총살하는 것이다. 진압군은 주민들을 모아놓고 “과거 조금이라도 잘못한 사람은 자수하라. 자수하면 살려주지만 나중에 발각되면 총살을 면하지 못한다. 이미 ‘관련자 명단’을 가지고 있다”고 협박했다. 자수를 권했다는 사실은 ‘관련자 명단’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었지만, 겁에 질린 많은 주민들이 자수했다. 이들은 주로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에서의 활동, 1947년 경찰관의 3‧1절 발포사건에 항의해 시위를 한 사실, 무장대가 마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을 때 이들의 요구에 따라 시위에 참여하거나 식량 등을 준 사실 등을 자수했다. 그러나 진압군은 약속과 달리 자수자들을 집단 총살했다. ‘자수사건’의 대표적 사례로는 소위 ‘박성내 사건’이 손꼽힌다. 조천면 관내에서 자수한 200명을 수용하고 있다가 1948년 12월 21일 “토벌에 따라갈 사람은 차에 타라”고 속여 150명을 제주읍 ‘박성내’라는 하천 변에서 집단 총살한 것이다.

<출처: 4.3진상조사보고서>

 

○ 초토화 대상이었던 중산간마을은 단기간에 주민 집단희생이 이루어진 반면, 제2대대 본부가 주둔했던 함덕리와 조천지서가 있었던 조천리 등지에서는 이 기간 동안 주민 총살이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한편 제9연대는 조천면 전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계획적인 ‘자수공작’을 펼쳤다. 이 작전으로 군부대나 경찰에 자수 형식으로 출두한 청년들은 함덕리 부대본부인 국민학교의 교실이나 운동장 천막에 수감되었다가 두 번에 걸쳐 집단 총살되었다. 12월 16일 북촌리 청년 24명이 ‘내수빌레’에서 희생되었다. 12월 21일에는 신촌리・와흘리를 비롯한 조천면 대부분 마을의 주민 150여 명이 제주읍 농업학교로 이송되었다가 100여 명은 아라리 ‘박성내’에서 총살당하고 40여 명은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다음은 박성내 총살현장에서 살아돌아온 북촌리 이만식(李萬植, 남, 1915년생)의 증언이다. 

 

 낮에는 마당에 있는 눌에 숨어 있다가 밤에는 나오고 하면서 숨어 지내고 있던 중 당시 함덕국민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9연대 대대본부에 10여명과 함께 죄가 없어도 자수를 하러 갔다. 1948년 12월 21일 무장대들을 토벌하러 돌아오면 양민증을 발급해 준다는 말에 나를 비롯한 주민들이 트럭 2~3대에 태워졌다. 당시 농업학교로 오후 3시쯤 이송되고 그 후 1시간 후 불러내어 주민 5명씩 전화선을 포승을 채우고 속칭 ‘박성내’로 끌고 갔다. 그곳에서 집단 학살이 이루어졌다. 군인들이 주민 5명씩 불러내어 내창 위 낭떠러지에서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시신들은 낭떠러지 밑 내창으로 떨어졌다. 나는 거의 마지막 즈음에 세워졌고, 우측어깨와 가슴 사이에 총을 맞고 또 쓰러지면서 떨어지는 충격에 눈까지 다쳤다. 그래도 많은 시신들 위에 떨어져 살아날 수 있었다. 그대로 죽은 척하고 있을 때, 군인들이 웅성거리며 하는 말이 총소리가 나서 무장대들이 올지 모르니 빨리 기름을 뿌려서 불을 지른 후 철수하자고 하는 말이 들렸다. 그 순간 살금살금 시신들로부터 도망쳐 나왔고, 손에 묶인 포승줄은 돌멩이로 끊었다. 군인들이 떠나고 그곳을 도망쳐 나온 후 초승날을 기준으로 동쪽을 찾아 개울을 따라 걸어 가다보니 산속에 있던 주민들을 만나 아까징끼(머큐롬액) 정도로 대충 치료를 받았다. 도망쳐 나왔지만 북촌으로 돌아와 보니 마을은 소개되어 집도 불타 없었고, 2~3년간 먹고 지내기도 힘들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다.

 

○ 1948년 12월 21일, 조천면 관내 청년 100여 명이 집단학살 당한 곳이다. 

 

희생당하기 일주일전쯤 함덕 주둔 군인들은 와흘리 등 조천면 산간지역에서 피난 온 주민은 물론, 함덕, 신흥, 조천, 신촌리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 "산에 좁쌀 한 되라도 올린 사람은 자수하라! 그러면 양민증을 발급할 것이고, 나중에 발각되면 총살할 것이다!"고 선전했다. 이에 너도 나도 자수대열에 합류했다. 조천면 일대는 무장대의 세력이 비교적 강하여, 자의든 타의든 조금의 협조를 안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함덕 대대본부로 자수자들이 집결하자, "토벌을 3일 정도 갔다오면 양민으로 살 수 있게 하겠다."며 자수자들을 트럭 3대에 분승시켜 제주농업학교로 향했다. 그 트럭에 올라타지 못한 사람들 몇은, 트럭 짐칸이 꽉 차 더 이상 차에 오르지 못하자 군인들의 발길질에 떨어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농업학교에 실려간 자수자들은 일주일 정도 감금되었다가, 1948년 12월 21일 박성내로 끌려가 학살당했다. 

 

이 날 학살현장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신촌리 출신의 故김태준 씨는 생전에 "군인들이 트럭에서 소지품을 다 꺼내라 하더니 값나가는 것은 다 가졌다. 그리고 담배 하나를 주며 '이제 죽을 것이다. 곱게 죽어달라'고 했다. 난 어깨에 총을 맞았지만 숨이 떨어지지 않았다. 군인들이 철사줄로 사람들을 엮어서 끌고 갔다. 총살을 집행한 후 휘발유를 뿌려 사체를 불질렀다. 난 어둠속에서 철사줄을 풀고 불붙이기 전 그 곳을 빠져나와, 며칠간 걸어서 고향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렇듯 학살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위 김태준씨와 동향인 이만식 노인이 있다. 그도 총에 맞았지만, 그 현장을 빠져나와 선흘리 지경에서 만난 주민의 도움으로 살아돌아 올 수 있었다고 했다. 그 역시도 등에 총탄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다. 다음은 故김태준 씨의 증언이다. 

 

 

신촌리민과 신촌으로 소개를 내려온 와흘, 교래 사람들을 합쳐서 신촌에서만 1백여명이 함덕 연대본부로 자수하러 갔습니다. 나도 산에 돈 15원을 올린 적이 있어 ‘자수하면 죄를 묻지 않은다’는 바람에 별 걱정 없이 갔지요. 가면 금방 올 것으로 생각을 했는데 한 1주일을 함덕초등학교에서 보냈습니다. 이름을 불러서 조사를 하고 나면 몇 사람씩을 백사장이 있는 바다쪽으로 데리고 가서 총살을 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가 없으니까 별 걱정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박성내에서 사람들이 죽는 그날은 군인들이 '토벌을 간다'면서 사람들을 불러모아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마 그것이 오후 두시경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날은 점심시간이 지나자 군인들이 토벌 갔다 오면 통행증도 주고 집에 갈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곳에 있다가는 어제 죽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서로들 먼저 트럭에 타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트럭 3대가 가득했습니다. 차 한 대당 50명 정도는 탔을 겁니다.

 

차는 함덕대대본부에서 출발했습니다. 트럭이 농업학교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가 다 된 시간이었습니다. 

 

농업학교에 도착하니까 군인들이 손을 뒤로 묶었습니다. 10명씩을 굴비 엮듯이 묶어 트럭에 태우기 시작했는데 사람이 많다 보니 철사가 모자라 새끼줄로 묶은 사람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30~40분 정도 그 작업을 한 것 같습니다. 취조를 하거나 다른 말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요. 마치 계획이나 했다는 듯이 손을 묶는 것을 마치고는 바로 박성내로 향했던 것입니다. 박성내에 도착하자 지휘관이 ‘여러분이 곱게 죽어주면 가족들에게 알려 시신이라도 찾아가게 해 주겠다’는 연설을 했습니다.

 

군인들은 총살에 앞서 우리들의 주머니를 뒤져 돈과 귀중품 등을 챙겼습니다. 맨 처음 트럭에 실린 사람들은 차례로 끌어내려져 냇가 옆에 있는 밭담에 줄지어 세우고는 기관총을 난사했습니다. 나는 두 번째 차 두 번째 조에 있었습니다. 두 번째 차의 주민들은 냇가 바위 위까지 끌고 가서 총을 쏘아 냇가 밑으로 굴러 떨어지게 했습니다.

 

나는 왼쪽 어깨에 두발, 오른쪽 팔에 한발 등 세발의 총알을 맞았습니다. 나 다음 순서로도 그런 식으로 사람들이 총에 맞아 내창으로 떨어졌는데 나는 정신을 잃지 않고 있다가 다음 주민들을 데리러 간 틈에 묶은 철사를 이빨로 끊었습니다. 그리곤 바위 옆으로 숨어서 그 자리를 피하면 일단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그곳으로 피했습니다. 사람들은 총살을 당하면서도 소리를 지르거나 살려달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모두들 공포에 질리고 죽음을 직감하여선지 땅바닥만 바라보았던 것 같습니다. 나처럼 살 수 잇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지만 꿈틀거리는 사람들을 군인들이 발견하고는 휘발유를 뿌리고 태우기 시작하였습니다.

 

박성내 인근 '간드락'주민들도 한결같이 이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증언했다. 제주여고 입구에서 아라중 방향으로 들어서는 하천에 '오등교'라는 다리가 설치되어 있다. 그 하천에서 북쪽으로 20m 정도 내려가면 그 일대가 희생터이다. 하천은 더러 정비되었고 당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현장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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