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다랑쉬마을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제주시 지역구분(읍면) 구좌면 지역구분(마을별) 세화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2668번지 일대
GPS 위도 33.4648333333333, 경도 126.813416666667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〇 다랑쉬 마을. 다랑쉬오름을 등지고 따뜻한 남쪽 햇빛을 받아 안으며 자리하고 있던 이 마을은 해안의 세화리에서 약 6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해발 170미터의 중산간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라져 버려 사람도 집도 없이 황량함만 감도는 잃어버린 마을이다. 

 

제주의 어느 마을과 마찬가지로 중심에는 폭낭(팽나무)이 있다. 그리고 언 듯 폐촌임을 알려주는 대숲이 10여 군데에 있어 바람과 함께 서로가 몸을 비비며 을씨년스런 소리만을 낸다. 말라버린 쇠물먹이 못(증언자들은 ‘ᄌᆞᆫ못’이라 불렀다), 식수로 쓰기 위해 빗물을 받아 두던 식수터 4곳, 그리고 곳곳에 깨어진 사기 그릇 파편만이 여기가 한때는 사람이 살던 마을이었음을 애써 이야기해줄 뿐이다. 

 

이 마을의 처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만날 수 없었다. 이곳에 한때 거주했던 사람들 중 하도리 오만종(1934년생)씨는 기껏해야 왜정시대가 아니겠냐고 한다. 변변한 농사 하나 제대로 지을 수 없는 곳에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반면 세화리 오태윤(1939년생)씨는 약 2백년 전쯤으로 올려잡는다. 마을 팽나무의 모습에서 추측한 것이다. 그러나 제주도의 중산간지역은 목장지대로서의 역할이 강조되었기 때문에 1840~50년경까지는 개간이 금지되었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아무리 올려 잡아도 지금으로부터 150년을 넘어설 것 같지는 않다. 주민 구성의 면에 있어서도 대부분이 뜨내기였던 점도 같이 고려해본다면 설촌의 시점이 대략 19세기 후반기가 아닐까 추측해 볼 뿐이다. 

 

증언자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해방을 전후한 1940년대에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백씨(백원봉, 그의 아들 백용문, 백용수), 부씨(부응석, 부봉국·부원국·부정국 형제), 강씨(강성석), 오씨(오태식, 오태윤, 오태문, 오만종), 김씨(김창식, 김창순), 홍씨(홍태춘, 홍두경) 가족 등으로 대략 9~12가구에 40여명 정도의 인구로 추정된다. 

 

그나마 살림이 조금 넉넉했던 백씨 집안(백조방장의 아들과 손자)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뜨내기 삶이었다. 이들은 송당 장기동 출신(오만종, 오태윤, 홍태춘, 홍두경), 상도리 출신(부응석씨 집안은 상도, 장기동, 다랑쉬, 상도 순으로 계속 이주했다), 세화 출신(부정국), 교래리 출신(김창식)으로 실제 이 마을에 거주한 햇수가 길어야 10년 정도일 뿐이다. 그리고 이후에도 송당으로, 세화로, 하도로 여러 차례 옮겨다녔다. 왜 그랬냐는 질문에는 한결같이 “아! 그야 그만큼 못살았으니까 그렇지”라는 대답이 공통적이었다. 

 

이들은 농사지을 땅을 소유하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이 방치되다시피 했던 중산간 이 지역으로 옮겨 와 집도 짓고 피, 산디, 메밀, 조 등을 일구어 먹었다. 그러다가 토지 주인이 나타나면 그제서야 사정 이야기를 하고 약간의 지대를 지불하였다. 일부는 남의 소나 말을 맡아 관리해주는 댓가로 일정한 소득을 확보하는 테우리들도 있었다. 폐촌되기 전 1940년대 다랑쉬 마을 주민들의 생활모습은 그러했다. 

 

4.3사건 당시 제주도 중산간 마을의 대개가 그렇듯이 다랑쉬마을에도 1948년 11월경, 소개령이 내려진다. 다행히도 이 마을 사람들은 소개령 직후에 곧바로 해안 마을로 내려온 까닭에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런 생계대책도 없이 이루어진 이 조치는 하루 아침에 그들의 삶의 기반을 파괴해 버렸다. 어느날 아침 지서에서 우마차를 끌고와서 간단한 생활도구만을 싣게 하고는 곧바로 가옥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물론 인명피해가 없는 것만으로도 다행일 순 있었으나 생명 이외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셈이었다. 

 

소개 당시에는 모두 다 지서가 있는 세화리로 내려가야 했다. 그러다가 1년이 지나면서 각기 연고가 있는 다른 지역으로도 이동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몰린 세화보다는 그 주변의 하도나 평대가 집을 구하기 쉬웠다.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져 나름대로 삶을 영위했다. 

 

평소에도 해변마을 사람들은 중산간 마을 사람들을 ‘웃드르 맨주기’라고 천대하곤 했었다. 테우리의 경우는 더욱 무시당했다. 게다가 1948년 12월 3일(음력 1948년 11월 3일) 무장대에 의해 세화리가 습격 당하고 난 이후에는 세화나 하도 등 해안마을 사람들은 중산간 주민들을 더욱 냉대하게 되었다. 

 

1949년 봄부터 중산간 마을로의 복귀가 조금씩 허용되었다. 하지만 다랑쉬 마을의 경우에는 1950년대 중반기가 되어서야 하나둘 사람들이 마을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1954년 9월, 한라산금족령이 해제된 이후에도 대부분의 원주민들은 이미 피난지에 정착하고 있어서 다랑쉬 마을로 돌아오는 이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전에 이 마을에 살지 않았던 또 다른 뜨내기들이 다랑쉬 마을로 찾아들면서, 한 때 가구수가 10호 가량 형성되었다. 1962년에는 4.3이재민 2차 복귀 사업이 추진되어, 다랑쉬 마을에도 도당집(양철지붕 집)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다시금 하나 둘 떠나,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다랑쉬 마을이 주목을 받는 까닭은 이 마을 자체의 특성이나 인상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주변 다랑쉬 오름의 유명세에 기인했거나, 아니 그보다는 1992년 온 섬을 떠들썩하게 흔들었던 ‘다랑쉬굴 4.3 희생자 유해발굴’ 사건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굴의 희생자들은 해안 마을인 하도와 종달 사람들로서 다랑쉬 마을에서 살던 사람들과는 직접적 연관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랑쉬굴과 인접한 마을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4.3당시에 폐촌되었다는 이유로 현재까지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출처: 제주4.3 제50주년 학술.문화산업추진위원회, 제주4.3유적지 기행 잃어버린 마을을 찾아서, 학민사(1998)>

 

 

〇 다랑쉬 마을이 소개되고 해안 마을에 성벽이 쌓여진 이후에도 계속해서 다랑쉬 마을에 출입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테우리들이었다. 위험한 일이었으나 생계의 절박함과 ‘죄가 없는데 무슨 일이야 있겠나’ 하는 순박함이 이들을 폐허 속의 다랑쉬 마을로 향하게 만들었다. 그 곳에는 쇠먹이는 물이 좋았기 때문이다. 마을 중심 폭낭 아래가 바로 그 물이다. 이곳 사람들은 ‘ᄌᆞᆫᄆᆞᆺ’이라 불렀다.

 

여기에 모이는 테우리들 중에 힘 좋고 말 모는 솜씨 으뜸이던 난장이 아저씨가 있었다. 원래 남제주군 ᄑᆞᆯ개동산(태흥리) 출신으로, 이름은 홍무경인데 당시에는 세화리 김병익의 집에 고용된 테우리였다. 그가 다랑쉬 오름에서 우마를 불러 모으는 휘파람을 불어대면 세화 조금 못 미친 곳까지 들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난장이 아저씨에게 일이 터졌다.

 

어느 때처럼 그 소리 좋던 난장이 아저씨가 먼저 이 폭낭곁 ‘ᄌᆞᆫᄆᆞᆺ’에 도착했고, 그의 우마는 물을 먹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나무에 붙어있는 종이 조각을 본다. 교육이라고는 받아본 적이 없는 그는, 이 종이를 쳐다보다 이내 무관심해진다. 그리고는 다시 그 자리에 퍼질러 앉아 담배를 만다. 종이에 침을 바르고 조심조심 굴리며……. 담배를 피워 물고 무심히 나무 아래로 시선을 옮겼더니, 저건 또 무엇인가? 폭낭에 붙어있는 것과 비슷한 것들이 뭉텅이로 놓여있질 않은가?

 

‘그래, 오늘은 운이 참 좋구나. 요즘 같아선 담배말이 종이도 구하기 어려운데, 이게 웬 횡재인가’ 그는 가슴 앞 단추를 풀어 제끼고 여기 저기 ‘삐라’ 뭉치들을 쑤셔넣기 시작한다. 

 

곧 이어 들이닥친 토벌대는 중산간에서 얼쩡거리는 ‘폭도 용의자’를 체포한다. 몸을 수색한 결과 다량의 삐라가 발견된다. 이젠 영락없이 ‘산폭도’로 확증되어 버린다. 개머리판이 날아간다. 가슴팍에도. 얼굴에도…… 코와 입으로 시뻘건 피가 부각부각거린다. 그리고서 머리통이 터지더니 허연 물체가 흐른다. 폭낭 아래서…(문은철 증언)

 

<출처: 제주4.3 제50주년 학술.문화산업추진위원회, 제주4.3유적지 기행 잃어버린 마을을 찾아서, 학민사(1998)>

 

 현장사진

 

 

 

 

 

 

 

 

 

 

 

 사료(문서, 사진, 증언)

 

 

 

<출처: 제주4.3 제50주년 학술.문화산업추진위원회, 제주4.3유적지 기행 잃어버린 마을을 찾아서, 학민사(1998)> 

 

  

<출처: 제주4.3 제50주년 학술.문화산업추진위원회, 제주4.3유적지 기행 잃어버린 마을을 찾아서, 학민사(1998)>

 

 

 〇 잃어버린 마을 표석

 

잃어버린 마을 다랑쉬


여기는 1948년 11월 경 4․3사건으로 마을이 전소되어 잃어버린 북제주군 구좌읍 다랑쉬마을 터이다.

해발 170m의 중산간지역에 위치한 다랑쉬마을은 대략 100여 년 전에 설촌되었다 한다. 다랑쉬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마을의 북사면을 차지하고 앉아 하늬바람을 막아주는 다랑쉬오름(月郞峰, 높이: 382m)의 분화구가 마치 달처럼 둥글게 보인다'하여 다랑쉬라 붙여졌다는 설이 가장 정겹다.

주민들은 산디(밭벼), 피, 메밀, 조 등을 일구거나 우마를 키우며 살았다. 소개되어 폐촌될 무렵 이곳에는 10여 가호 40여 명의 주민이 살았다. 다행히 4․3사건으로 인한 인명 피해는 없었다. 지금도 팽나무를 중심으로 못 터가 여러 군데 남아 있고, 집터 주변에는 대나무들이 무더기져 자라 당시 인가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한편 이 마을은 1992년 4월 팽나무에서 동남쪽으로 약 300m 지점에 위치한 다랑쉬굴에서 11구의 시신이 발굴되면서 도민들에게 4․3의 아픔을 다시 한 번 새겨주었다. 당시 시신 중에는 아이 1명과 여성 3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증언에 의하면 이들은 4․3의 참화를 피해 숨어다니던 부근 해안마을인 세화리와 종달리 출신들로 1948년 11월 18일 희생되었다 한다. 지금도 그들이 사용했던 솥, 항아리, 사발 등 생활도구들은 굴 속에 그대로 남아있다. 

다시는 이 땅에 4․3사건과 같은 비극이 재발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 비를 세운다.

 

2001년 4월 3일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실무위원회 위원장

제주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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