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도령모루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제주시 지역구분(읍면) 제주읍 지역구분(마을별) 용담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2동 1805번지 일대
GPS 위도 33.4963611111111, 경도 126.493833333333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〇 도령마루에 대해서 

도령마루는 제주시 7호 광장 일대를 일컫는다. 옛 지명인 ‘도령마루’라는 이름 보다는 70년대 초 유명 제과회사에서 세운 해태탑이 들어서면서 ‘해태동산’으로 일반에게 알려진 곳이다. 더욱이 이곳이 용담지역(구체적으로는 용담2동 1805번지 일대)이라는 것도 잘 몰라 연동이니, 도두 다호마을 혹은 노형에 속할 것이라는 추측을 할 정도였다.

 

지금은 제주공항에서 신제주를 오가는 도로가 뚫려 관광객들이 제주에 입도하면서 처음 맞는 관문 역할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라로터리와 노형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개설되고 넓혀지면서 지형 자체도 많이 변모됐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석가탄신일, 크리스마스 시기이면 점등탑이 세워지는 등 화려함으로 치장된다. 반면 이 일대는 인도도 없고 건널목도 없어 일반인이 접근하기에 쉽지 않은 고립지대로 남아 있다.

 

4.3당시 도령마루에서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특히 현기영의 소설 ‘도령마루의 까마귀’에서 도령마루의 4.3학살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어서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희생규모 등 실체적 진실에 다가서기 위한 노력은 너무도 소홀했다. 숫자가 무슨 문제겠는가 마는 20여 명 정도 희생된 학살터 정도로 인식했던 게 사실이다. 

 

현재까지 4·3위원회에 신고된 도령마루 희생자는 약 70여명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정밀한 조사가 더 필요하고 이 숫자보다는 더 많을 것이라는 전제가 따른다. 그 이유는 신고자에 따라 장소를 ‘도령마루’로 하기도 하지만 ‘해태동산’ ‘비행장 옆’, ‘소나무밭’ ‘서비행장’ 등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현 시점의 이런 점들을 감안하고 각종 증언들을 통해 드러나는 도령마루 4.3희생에 대해 엿볼 수 있는 몇 가지를 정리해 보면 첫째, 14개 마을의 주민들이 끌려와 희생되었다.

 

우선 노형과 연동지역의 주민들의 희생자 수가 눈에 띈다. 당시 도령마루는 마을이 있었던 곳이 아니다. 소나무가 있는 덤불 숲 정도로 알려지고 있다. 물론 지금 형태는 아니라, 잔디밭이었다는 증언도 있다. 예전 비행장 인근에는 다호마을과는 다른 ‘묵은터’라는 마을에 15호 정도 살았었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도령마루와는 거리가 있었다. 다만 주목할 것은 노형마을 일대를 중심으로 한 희생이 컸음을 알 수 있다. 노형 14명, 연동 14명, 외도 1명, 이호 4명, 해안 2명 등 총 35명에 이른다. 특히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소길이나 어도, 화북주민들도 희생자에 포함되어 있다. 그 경위 역시 밝혀져야 할 것이다. 

 

둘째, 도남과 연동주민이 희생된 날이 다르다.

 

4.3당시 도남지역에는 오등이나 죽성, 고다시 등 지금의 아라동 일대의 주민들이 도남으로 소개되어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확한 주민연행 경위는 조사가 필요하지만 경찰이 주민들을 트럭에 싣고 가 도령마루에서 총살했다는 것이다.

 

도남에는 당시 오등, 고다시, 죽성 주민들이 소개와 있었다. 1948년 음력 12월 2일 도남이 소개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잡혀갔다. 이 사람들은 동척회사에 수감되었다가 음력 12월 9일 도남 주민 9명, 오등, 고다시, 죽성 주민 29명 등이 도령마루로 끌려가 총살됐다. 그 당시 도령마루는 잔디밭이었다. 

증언 : 김○○(남, 도남동, 03년 67세) 

오등리 주민들이 광양에 소개 내려가 있었다. 광양운동장(현 시청 마당)에 소개민들 모두 집합하라고 해서 나갔더니 9명을 뽑아 갔다. 이유는 양민증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 사람들은 1948년 음력 12월 11일, 도령마루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증언 : 김○○(여, 오등동 고다시, 03년 81세)

 

이러한 정황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도남일대 주민 20여명이 1948년 12월 말 혹은 1949년 1월 초 사람들을 집합시킨 후 양민증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경찰에 의해 끌려 간 후 동척회사(주정공장)에 감금시켰다가 1월 8일 도령마루에서 학살했다는 기본적인 정황은 드러난 셈이다. 연동마을은 도령마을과 인접해 있었다. 그런 탓인지는 몰라도 연동마을 주민에 대한 학살은 일찍 이뤄진다. 소개령과 계엄령이 내려지기도 전인 11월 3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새벽녘에 연동마을에 들어온 군인들은 주민들 10여 명을 연행해 간 후 도령마루에서 소나무에 결박하고 총살했다는 것이다. 

 

1948. 11. 3. 오전 9시경 연동리 귀아랑 마을에 군인 약 20-30여 명이 마을을 수색해 주민 10여 명을 연행해 감. 그 후 옛 도령모루 동산에서 주민 10여 명을 소나무에 결박하여 총격을 가함. 당일 오후 가족들이 현장을 찾아감. 희생자는 중상인 상태로 살아 있어, 가족들이 들것을 가지고 가서 자택으로 옮겼으나, 다음날 사망함. 

증언 : 박○○(남, 삼도1동) 

1948. 11 .3 아침, 토벌대가 자택으로 들어와 강제로 연행해 감. 이후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림. 잠시 뒤 토벌대가 집으로 돌아와서는 "박00를 죽였으니 와서 보라"고 함. 가족들이 도령모루에 가보니, 희생자는 소나무에 양손 및 두 다리가 묶인 채 대검으로 찔러죽이다가 총살당한 채 시신으로 발견됨. 이후 김00이 아들이 죽은 것이 원통해서 울자, 토벌대가 김00을 향해 총을 쏨. 다리를 관통당한 채 집으로 돌아왔으나, 며칠 후 자택에서 사망함. 

증언 : 이○○(여, 용담2동)

 

이렇듯 어느 날에 어느 지역 주민들이 집중적으로 희생되었는지 정리해 볼 수 있지만 노형지역주민들은 여러 날에 걸쳐 끌려와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셋째, 시신수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담가를 들고 일부러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밭담으로 향한다. 밭담 밑에 담가를 잠시 놓고 다시 주위를 살핀다. 까마귀 오는 여전히 등을 돌리고 앉은 채 이번엔 모자를 벗고 속을 들려다보고 있는 모양이다. 귀리집이 눈짓한다. 둘은 힘껏 담가를 쳐올려 시체를 담 밖으로 내던진다.

 

현기영의 소설 「도령마루의 까마귀」마지막 대목이다. 도령마루에 성담 쌓는 울력에 동원되어 갔다가 남편의 시신을 찾아내고 여편네 들이서 담가에 시체를 담아 성담 밖으로 내던지는 모습을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다. 소설 속의 이 장면은 역사적 사실과 어떻게 만나는가? 증언을 통해 살펴보자.

 

며칠 후 노형동에 살던 이웃노인의 전갈에 따라 도령마루 가보니 사체로 발견되었고, 구덩이를 파서 그 속에 처박고 위에 덤불을 씌워 있어서 사체를 건져내고 다른 장소로 옮겨 장사지냄.

증언 : 고○○(여, 용담2동, 1939년생)

그쪽에 5명의 시신이 있었다. 우리 부친은 밭을 갈기 위해서 시신을 묻었다. 그 와중에도 서너 명은 유족들이 파 가고, 나머지 두어 명은 못 파갔을 것이다.  그런 것이 부지기수였다. 

증언 : 이○○(남, 광령1리, 1942년생) 

연동 사는 분이 자기 아들을 찾으려고 도령마루에 가보니 우리 사촌 형님이 있더라고 알려줘서 가보았다. 형님은 일제 신사복을 입고 있었고, 주머니에 도장이 있어 알 수 있었다. 돌아가시고 3~4년 후의 일이다. 

증언 : 김○○(이호2동, 1933년생)

 

이와 같은 정황으로 미루어 대부분의 유족들이 소문을 듣고 시신을 수습한 경위를 밝히고 있지만 몇 년이 지난 후라든지, 여전히 수습하거나 정확한 희생날짜를 알지 못하고 있다. 

 

<출처 : 2016 4.3제68주년 역사맞이 ‘4.3문학의 현장을 찾아서’, 제주작가회의> 

 

 

 

 

 현장사진

 

  

  

  

  

  

 

 사료(문서, 사진, 증언)

  

 

〇 도령마루 희생 관련 증언들

 

∙ 이○○ 남, 광령1리, 1942년 생

 도령마루에서 죽은 사람들 옷을 누군가가 벗겨갔다. 죽은 사람 옷이고 뭐고 간에 옷을 빼앗기 위해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쪽 에 우리 부친이 밭을 갈아먹고 있었는데 5명의 시신이 있었다. 우리 부친은 밭을 갈기 위해서 시신을 묻었다. 그 와중에도 서너 명은 유족들이 파 가고, 나머지 두어 명은 못 파갔을 것이다.  그런 것이 부지기수였다. 개가 사람들이 많이 죽으니까 시체를 먹어 미친개가 되었다. 개들이 광견병에 걸려서 난리였다. 옛날에는 도깨비불이 돌아다닌다고 해서 그 곳을 아주 무서워했다. 명주주택 자리하고, 지금 동산인 곳하고, 소나무 밭쪽이다. 

 

∙ 김○○(이호2동, 1933년 생)

일제 때 군대 생활하다가 해방 후 경찰 1기생으로 근무했다. 수산봉 지경에서 무장대의 차량습격을 받고 차에서 떨어져 머리를 다쳤다. 당시 형님은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고 그 후유증으로 경찰에 사표를 낸 상태였다. 1948년 12월 9일, 경찰에 붙잡혀 가서 희생되었다.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연동 사는 분이 자기 아들을 찾으려고 도령마루에 가보니 우리 사촌 형님이 있더라고 알려줘서 가보았다. 형님은 일제 신사복을 입고 있었고, 주머니에 도장이 있어 알 수 있었다. 돌아가시고 3~4년 후의 일이다. 제사는 그 당시 아는 경찰 분이 아무 날 싣고 갔다고 알려줘서 그 날 하고 있다. 

 

∙ 고○○(남, 도남동, 1931년 생)

 도남은 다른 마을과 달리 2연대가 태웠다. 9연대가 2연대로 바뀌면서 얼마 안 됐을 때이다. 음력으로 1948년 섣달이니 양력으로는 1949년 1월이다. 그때 마을에서 죽은 사람은 없었다. 경찰이 차로 끌고 갔다. 초나흗날 끌고 갔는데 제사 하는 거 보면 9일에 한다. 지금은 공항으로도 가고 신제주로도 가는 도령마루에 실어다가 죽여 버렸다. 옛날엔 거기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그 날 도남 사람만 10여 명 희생됐다.

 

∙ 문○○(남, 도남동, 1933 생)

 형은 나보다 두 살 위로 농업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글씨를 잘 쓰고 영리했다. 민보단원으로 활동했고, 동네에서 신망이 좋아 동장님을 도와 마을 사무도 봤다. 1948년 음력 12월 19일 낮 12시쯤 사무를 보던 형님을 대동학생단 소속의 이00(당시 제주중학원, 형보다 1살 위)이 ‘경찰에서 조사할 게 있다’며 데려갔다. 나도 바로 옆에 있었다. 형은 외투를 벗어 내게 주며 ‘어머니 갖다 드려라. 경찰서에 갔다오마’ 하고 나갔다. 난 곧바로 부모님께 알렸고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당시에는 경찰에 잡혀가면 그 후 소식을 알기가 어려웠다. 경찰에 친척이 있어서 알려고 해도 알 수 없었다. 한 달이 넘을 때까지도 소식을 몰랐다.

 그러던 중 오라3동 중댕이골(도령마루) 소나무밭에서 10여 명이 같이 총살당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거기에 형님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혹시나 하고 가족들이 찾으러 갔다. 4개월 정도가 지난 후라 시신을 구분할 수 없었다. 우린, 작은누나가 매형이 입던 양복을 사줬는데 그 양복을 보고 시신을 찾았다. 시신을 수습해 마을공터에 눕혔는데 몸 여러 군데가 총알자국으로 구멍이 뚫려있었다. 마을사람들의 애도 속에 장례를 치렀다. 만약 형이 좌익운동을 했으면 그렇게 공개적으로 장례를 치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형은 잘못이 없다. 아버님이 형의 제삿날(잡혀간 날)이 가까워지면 동쪽을 향해 ‘이00이 이놈! 우리 아들 잡아먹은 놈!’ 하면서 외치곤 했다.

 

∙ 현00(남, 1931년생)

도령르 위에 뒷동산이랑. 처음 시체를 본 것은 다 해변마을로 소개시키지 안해서이? 한번은 들으니까 노형에 가면은 나가 소개한 사람들이 묻어놓은 쌀덜이 있는데 그것을 가지러간다 그러니까 아, 나도 가자고 해서 우리 둘째누이 하고 셋누이 해서 갔어. 노형사람이 그렇게 시내에 많이 사는 줄 난 몰랐지. 또 기어가는데 군인이 길 남쪽으로 밭담으로 탁탁탁탁 넘으면서 밭으로 지켜 나가. 그래서 도령를 넘어서 배도리, 배도리옌 허문 모르지? 삼무공원이옌 허문 알지? 삼무공원 앞쪽 길가 밭에 가 보니까 아, 남자가 하나 이렇게 쓰려져 있어서 죽어 있던 거야. 보니까 겨울에 시체가이 그때 푸르스름하고 얼굴색이 말이여 막 부었대 붓고 말이여. 아 거 여러 사람들이 봤으니까 그대로 넘었지 나 혼자 봤으면은 좀 무서웠겠지게. 무서운 것도 별로 느끼지 못했지마는. 또 맻 발, 멫 밭 건너가면은 다가 또 그렇게 시체가 또 있더구만. 근데 지금 한라 병원 그쪽에 내가 있어. 리내라고 있는데 그 내까지 가니까니다가 아, 돌아가겐 헌거야. 그 호위해서 가던 군인들이 저기 폭도가 보인다고 말이야 그래서 막 죽기 살기로 뛰어가지고 여기 자취 허는 방엘 왔는데. 그날은 누웠는데 천정에 말이야 눈을 감앙 이렇게 누웡이서도 그놈으 시체가 말이여 자꾸 보여 가지고. 그런데 성 쌓을 때에는 저~사라봉 쪽으로 해가지고 이렇게 싸 나아가고. 위로, 이 위로 쭉~허니 이거 도두리까지 쌓았다 말이야.

 도령를 가고 보니까 동쪽으로 쌓아 나가 보니까 도두리 쪽 사람들이 서쪽으로 해서 보이더구만, 쌓아오는 것이. 근데 아버지가 찾아 와가지고 내가 처음 만났고 작은아버지가 폭도에게 죽었다는 말을 들었고 헌데, 그래서 령모르까지 오니까 서로 딱 마주친 거거든. 한 2, 3일 쌓아가니까 도령를 보니까이 시체들이 어마어마 해. 그 시체들이 말이여. 그냥 자빠져 죽은 놈, 엎어져 죽은 놈, 나뭇가지에 걸려서 죽은 놈, 어떤 신체에는 말이야. 가마귀가 눈 파가 버리면은 눈방울 없고 그기에 피가 흐르는 자국이 있는 그런 시체가 있는가 하면은 말이야. 아 뭐 시체가 많해. 그것을 들것을 만들어가지고 길가에 구덩이를 파서 한 사람은 머리 잡곡 한 사람은 발 잡곡 해서 들것에 놔서 들러가지고 가서 던졌거든. 던지면서 한 구덩이에 전부 그냥 담아 넣었어. 

아 그래서 다 파놓고, 시신을 그렇게 구댕이 속에 파 넣거든. 그러다가 보니까 한 아주머니가 “아이고 어떵 행 좋고, 어떵 행 좋고” 허면서 길가로 올르락 내리락 막 허고 있어. 끔 나이 듬직하게 든 어른인데 남자 어른이 걸 보고 서다가 “고만 이십써” 큰소리로 말이여. “그러다가 군인이 알면 어떻게 할꺼냐?”고 그러면서 보니, 뭐고 했더니 남편의 시체를 다가 그 여자가 발견헌 거여. 그러니까 그 남자가이 그 시체를 옮겨다가 남쪽 그 성 쌓은 남쪽 밭 구석 더레 따로 놓대. 그래서 거 묻었는지 말았는지 나 다른 일 시체 나르고 돌 나르고 허는 일 허단 보니까 못 봤는데, 틀림없이 따로 묻었을 거여. 근데 그 시체를 한 구덩이 속에 담아서 흙을 덮어버리고 성을 쌓았거든. 그니까 고무신, 검은 고무신짝이 그냥 막 이디 저디 널어지는 거여. 그 다음부터는 4․3사건 다 끝나서 이제 노형 출입을 하게 되가지고 노형에 가단보문이. 보리가 나는데 시체 묻은 데만 둥그렇게 보리가 이만쯤(30Cm 정도) 차이는 크게 나. 그렇게 자라 잘 자라.

<출처 : 2016 4.3제68주년 역사맞이 ‘4.3문학의 현장을 찾아서’, 제주작가회의>

 

 

상처받은 영혼을 향한 희망이 불어오는 곳
평화·상생·해원 바람의 진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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