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곤흘동(곤을동) 마을터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제주시 지역구분(읍면) 제주시 지역구분(마을별) 화북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화북 1동 4438
GPS 위도 33.521985, 경도 126.557389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병사의 세치 혀에 날벼락 맞은 곤흘동

4.3의 전 기간을 통틀어 ‘광풍’이라고 불릴 정도의 민간인 대학살이 집중적으로 벌어진 것은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이 “해안선으로부터 5km이상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모두 폭도배로 간주한다”는 포고문이 발표되면서 부터다. 이 포고령은 곧 소개령으로 이어져 중산간마을 주민들은 해촌으로 강제 이주 당했다. 11월 17일에는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이른바 “태워 없애고, 굶겨 없애고, 죽여 없애는” ‘삼진작전(三盡作戰)’이 전개된다. 소위 ‘초토화작전’이 본격화된 것이다. 이 기간 중산간마을의 가옥은 95%가 전소되었는데, 약 3만 여 채가 불에 태워졌다. 생활터전을 상실한 주민 2만 여 명은 결국 살기 위해 한라산으로 대대적인 도피를 시작한다. 이듬해인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선무를 병행한 작전으로 토벌작전이 바뀌고, 신임 유재홍 사령관이 “한라산에 피신한 주민들은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방침이 발표될 때까지 근 4개월에 걸친 기간 동안 섬의 곳곳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의 만행은 말로 다 할 수없는 참상이었다. 그 4개월간은 4.3특별법에서 규정한 4.3의 공식전개기간인 1947.31.~1954. 9월 21일 한라산금족령이 개방되면서 7년 7개월의 기간 동안 가장 집중적으로 제주섬 주민들에게 지울 수없는 트라우마를 남긴 기간이기도 했다. 곤흘동 마을의 불에 태워지고 주민들이 무차별 학살을 당한 시기도 이 기간이었다. 

 

곤흘동이 불에 타 폐동이 된 것은 1949년 1월 5일과 6일 양일간이었다. 1949년 1월 5일(음 1948.12.6) 오후 3∼4시쯤 군인 1개 소대 40여 명의 군인들이 곤흘동을 포위하고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로 들어선 군인들은 곤흘동 집들을 수색하고 돌아다녔다. 영문도 모른 채 눈만 껌벅이는 마을 사람들을 전부 모이게 하고는 나이가 젊은 사람들 10여 명 골라내어 곤흘동 바닷가로 데리고 가서 죽였다. 마을 주민들은 화북국민학교에 가두었다. 이어 곤흘동도 불태웠다. 1월 5일에 불탄 곤흘동의 집들은 안곤흘 22채, 샛곤흘 17채였다. 

 

학살은 1월 6일에도 이어졌다. 화북국민학교에 가뒀던 주민들 중에 젊은이들 12명을 모아 화북동 동쪽 바닷가인 연디 밑 속칭 ‘모살불’에서 학살했다. 이들은 주민들의 학살에 그치지 않고 곤흘동의 남아 있는 집들도 1월 6일에 불태웠다. 이날 밧곤흘의 28세대의 가옥도 모두 불태워져 곤흘동의 자취는 사라져버렸다. 67호의 적지 않던 마을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이다. 곤흘동에서 살아남은 주민들은 주변마을로 옮겨졌다. 

 

전혀 죄 없는 사람들을 다 죽여 놨지. 자기 이름도 못 쓰는 사람들을 다 죽였어. 군인들이 와서 집에 있는 사람들 잡아놓고 물가에 세워 놓고 죽였주. 죽인 날부터 불붙이기 시작헌거라. 석유병을 집안 기둥에 항상 걸어놨었어. 석유병 꺼내서 촐[꼴] 한 묶음이나 조짚, 보릿대에 불을 붙여 집을 태웠어. 돼지도 다 불타서 죽고, 소도 불타서 죽고, 초가집이니까 쉽게 불이 붙었주. 화북에서 제일 피해가 커. 곤을은 따로 떨어진 곳이니까 불을 붙여 버렸지. 사람을 못살게 해버린 거지. 원원! 시뻘겋게 집 하나도 없어. 하늘이 시뻘겋게 됐었지. 사람도 죽고 집도 불붙고 그러니까 그곳에 사람이 없어져 버린 거라. (안명호, 남, 증언 당시 67세)

 

제주4.3 당시 곤흘마을에서 희생된 주민들은 대략 30여 명이다. 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제주4.3 당시 곤흘마을에서 희생된 주민들은 대략 30여 명이다. 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이끌려 나가 무차별 총살당한 것이다. 세상에 이유 없는 사건은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곤흘동을 폐동시킬 정도로 이곳을 꼭 토벌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무리 찾아보아도 곤흘동 사건에 대한 명시적 근거가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사건 발생 날짜마저 증언자마다 다르고 도의회 4.3신고서나 연구소의 증언채록들도 제각각이다. 4.3 당시 학살과 방화가 이루어진 사건들에서 정확히 “왜 그랬어?”에 대한 명시적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이를 은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증거가 문서로 발견되어야만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여러 정황과 당시 체험자들의 증언들을 종합해보면 이 당시의 토벌의 배경이 드러난다. 

 

…그러나 4·3사건의 와중인 1949년 1월 4일 아침 9시경 군 작전으로 선량한 양민들이 희생되고 온 마을이 전소되는 불행을 겪었다. 이 어찌 슬프고 억울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 당시 모든 가구가 전소되었고 24명이 희생되었다. (곤을동 잃어버린 마을 표석에서) 

…왜냐하면 곤흘이 불탄 것, 왜 불탔느냐 해서 어떤 사람이 증언 한 것을 보니까, 저 햇성거리라고 해서 일주도로에서 경찰차가 지날 때, 숨어 있다가 폭도들이 차를 뒤집어엎고, 사람을 죽이고, 거기서 살아남은 사람이 가만히 보니까, 산사람 중 한사람이 곤흘마을로 뛰더란 말이야, 그래서 그걸로 해서 아마도 산사람하고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냐 해서 뒷날은 와서 불을 태웠다는 말이 이서 (김용두, 제주시 화북 곤흘동 출신, 2004년 8월 11일 인터뷰 녹취) 

1949년 1월 5일(음48년12월7일) 국군 제2연대본부 정보처(주임장교 박태원 소위)소속 수색대(주로 서청출신) 1개 소대가 출동했다가 귀대하던 도중 화북리 남측 일주도로 변 속칭 ‘횃선거리’(지금의 남문버스 정류소 부근) 커브길에서 무장폭도들의 습격을 받아 전멸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무장폭도들은 계획적으로 도로상에 돌을 쌓아놓고 매복해 있다가 수색대가 귀대 도중 상기 지점에서 석축을 발견하고 전 대원이 하차하여 철거작업을 시작하자 그 순간에  습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생존자 1명을 제외하고 전원 전사했다. 저들은 군용차량 ‘스리쿼터’ 1대를 불태우고 전사자의 군복과 군장비 등을 탈취하여 무장폭도 전원이 화북리로 잠입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다음 날 1월 6일(음 1948년12월8일) 군경에 의한 소탕작전이 화북리(곤흘동)에서 대대적으로 전개 되었다. <제주4·3사건 겪은 나의 수기>(김하영)  

이 두 증언을 종합해 보면, 이 사건이 일어나기 한 달 전쯤인 1949년 1월 4일 화북리 남측의 속칭 ‘횃선거리(현재의 남문 버스정류소 앞)’에 무장대측에서 도로상에 차량 이동을 방해하기 위한 장애석축을 쌓아 놓자, 이를 치우기 위해 제2연대본부(서청부대) 정보처 소속 군인들이 전원 하차하여 철거 중에 무장대가 매복 습격하여 병사들 중 단 1명만 남겨 놓고 궤멸을 당했는데, 이 때 살아남은 병사가 당시 무장대들이 곤흘동으로 숨어들었다고 증언한 것이다. 앞의 증언들 중 사건이 무장대의 정보처군인습격사건이 발생한 날짜를 정확히 알 수 있게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이 날 현장에서 즉사한 것으로 보이는 정성희 경감의 기록 때문인데, 현재 그의 충혼묘비와 공훈록에는 “정성희 경감은 제주읍(濟州邑) 화북리(禾北里)에 출현한 공비들을 토벌하기 위해 출동하여 교전 중 1949년 1월 4일 장렬히 전사하였다.”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니까 곤흘동 마을의 토벌대에 의한 무자비한 학살과 가옥을 전소한 사건은 1월 4일의 무장대 습격에 대한 보복으로 그 다음날부터 양일간 감행된 것이다.

 

1월 4일 살아남은 바로 생존병사의 한 마디가 그렇지 않아도 화북과는 동 떨어진 마을의 입지 때문에 평소에도 의심을 품고 있던 군인들에게 이 마을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전을 벌이게 한 것이다. 병사의 확인되지 않은 말 한마디가 오랫동안 오순도순 멜 후리면서 몇 백 년 동안 살아오던 장기지속의 마을의 운명에 종지부를 찍게 한 것이다. 

 

 

잃어버린 마을 곤흘동

4.3 당시 전소된 가옥만 3만여 채에 이르는데, 4.3이 종결된 이후에도 복구되지 못한 속칭 ‘잃어버린 마을’만도 100개소에 이른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중산간마을들이다. 해촌마을이 이처럼 완전히 전소된 경우는 매우 드문 경우라 하겠다. 왜냐하면 불태워진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소개되어 피란생활을 했던 곳이 일주도로를 빙 돌아 소재했던 해촌들이었기 때문이다. 예외적으로 전소된 북촌리의 경우도 사건이 종료된 후 다시 주민들이 집터를 고르고 서까레를 다시 세우면서 하나 둘 가옥들을 복원해 다시 마을이 이루어졌지만, 이곳 주민들은 밧곤흘 동측의 화북리에 옮겨 살아 곤흘동은 다시는 복구되지 못했다. 

 

이때 폐허로 변한 곤흘동은 이후에도 집과 집을 구분 지었던 울담(울타리 돌담)만 남은 풍경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그나마 울담만 남은 곳은 예전의 안곤흘 마을로 샛곤흘의 경우는 밭터로 변해 마을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현재의 안곤흘마을터는 당시 불타버린 집터의 울타리가 대부분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집으로 들어가는 올래 등이 그대로 남아있다. 아궁이로 사용했던 흔적도 남아있으며, 연자방아간의 방앗돌과 집터가 비교적 뚜렷이 남아있다. 안곤흘을 둘러 돌던 마을의 좁은 길은 하천 확장으로 일부가 무너져 있으며, 가옥들이 들어섰던 곳은 하나로 합쳐져 밭이 되어버린 경우도 있다. 안곤흘은 현재 농사를 짓는 밭들은 없다. 2005년 제주시에서 별도봉 산책로를 마을 안까지 연결하는 공사를 하면서 마을 원형이 일부 파괴됐고 2013년 안곤흘의 바닷가인 드렁곶에 해안침식을 막는다면서 도리어 해안산책로를 내어 다시 원형이 일부 훼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예전의 자연스런 폐허의 맛은 많이 사라지고 말았다. 폐허에도 원형이 있다. 

 

지금은 폐허가 된 샛곤흘터엔 2003년 4월에 제주도에서 ‘잃어버린 마을 표석’을 세워 이정표 구실을 하고 있다. 안곤흘 터에도 별도봉산책로와 연이어진 입구의 집터에 옛 마을 가옥들의 모습을 담은 조감도와 2004년 (사)제주민예총에서 해원상생굿을 하며 세웠던 방사탑을 옮겨와 다시 조성해놓고 있다. 제주시 중심과 인접해 있고, 해안마을이면서 초토화를 겪고 결국은 잃어버린 마을들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마을터가 되었다. 

 

 

 

 

 현장사진

 

 

 

 

 

 

 

 

 

 

 

 

 

 

 

 

 

 

 사료(문서, 사진, 증언)

  

 

굿판에 본주로 참가한 당시 주민들이 회한의 눈물을 훔치고 있다.

 

 

60년대의 곤흘동 전경. 4.3 당시 불태워진 마을의 상태가 그대로 남아 있는 전경

 

 

2004년 제주민예총에서는 이곳에서 4.3해원상생굿을 벌인다. 폐동 이후 처음 열린 위령굿이었다.

 

 

2013년 탐라사진가협회의 작가들은 이 마을의 생존자들을 모아 곤흘동 폐허의 이곳 저곳에서 증언을 듣고

그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폐허의 기억의 장소를 촬영 사진전을 개최한바 있다.

 

상처받은 영혼을 향한 희망이 불어오는 곳
평화·상생·해원 바람의 진원지

제주4·3평화재단

4·3유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