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제주농업학교 옛터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제주시 지역구분(읍면) 제주읍 지역구분(마을별) 삼도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1동 305-4번지 일대, 전농로100
GPS 위도 33.5040833333333, 경도 126.523805555556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〇 역사의 비극을 품은 토벌 사령부의 땅      

4․3 당시 제주농업학교는 도내의 인재들의 몰려들어 수학에 정진했던 유일한 교육기관이었다. 그러나 4․3이 발발하면서 이곳에는 제9연대를 시작으로 11연대(48년 5월), 2연대(48년 12월), 독립제1부대(49년 7월) 등의 사령부가 줄줄이 자리잡았던 곳이다. 군 토벌대가 이 곳에 주둔하면서 도내의 내노라하는 유지들과 지식인, 그리고 입산 자수자와 체포자 등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잡혀와 고문과 취조를 당한 후 처형되거나 육지형무소로 끌려갔던 한과 눈물의 장소이기도 했다.

 

해방직후인 1945년 9월 28일에는 일본군의 항복절차가 제주농업학교에서 진행됐고, 이어 학교 내에 미59군정 중대본부가 설치됐다. 1945년 9월 10일,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오대진) 결성식이 이곳에서 열리며 해방직후 민중자치운동의 시작을 알리기도 했다.

 

제주농업학교는 제주도 고등교육의 산실로 일제시대에는 일제에 항거한 학생운동이 본산이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미국의 점령정책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이 거세었던 곳이다. 특히   ‘양과자반대투쟁’ 등 미군정에 대항하는 운동을 주도했고, 1947년 3․1 시위에도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러한 상황은 4․3 당시 초토화 작전을 맞아 농업학교 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희생되게 만들었으며, 실제 농업학교 학생과 교사들 상당수가 토벌대의 횡포를 피해, 혹은 자진해서 입산하기도 했다. 그만큼 희생자도 많이 발생했다. 농업학교에 다니다가 4․3이 초토화로 치닫던 시기에 일본으로 밀항할 수 밖에 없었던 김진횡 할아버지는 지난 ‘4․3 60주년 고향방문의 해’에 제주를 처음으로 방문하여 자신의 경험한 그 시절을 눈물로 이야기 했다.

 

제가 제주도를 떠난 것은 48년 10월달이었습니다. 해방 후 농업학교에 다니면서, 양과자 반대운동 참가했고, 특히 47년 3월 초하루, 오현중학교에서 있었던 학생들의 3.1운동 28주년 기념 집회, 그걸 마치고 관덕정까지 데모를 한 일이 눈에 선합니다.

 

그때 무장 경관들이 총부리를 겨누고 있었을 적에 저희들은 젊은 정열에 넘쳐 있을때기 때문에 그걸 돌파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선생님들이 ‘애들아, 개죽음 말아라. 살아서 다시 보자.’ 이렇게 눈물로 저희들을 설득해 주셨습니다. 이제 그 선생님들은 가시고 그때 스크렘을 꼈던 학우들도 갔고, 저는 그때 요행히 살아남아 일본으로 도망치듯 빠진게 지금까지입니다. 제가 일본에 건너가서 몇 년동안 제일 못이겼던 것은 내 혼자 살아남은 죄, 도피자의 죄책감이었습니다.

 

그런데 화해와 상생이라 하는데 왜 평화공원 위패에는 무장대에 속했던 분들의 이름은 없습니까. 난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로 화해․상생으로 간다면, 모든 희생자들, 그 아까운 목숨을 잃은 분들의 이름을 찾아내고 공평히 명복을 빌어야 하지 않는가 이런 마음도 간절히 들었습니다. 이제 아마 저는 제주도를 다시 밟지 못 하나 봅니다. 이제 몸도 그렇고 나이도 있고...... 

 

저는 나중에 4․3자료를 읽으면서 저희들의 국어 선생님이었던 고칠종선생, 남로당 관계에 있었다고 봅니다마는, 당시에 우린 그건 몰랐습니다. 그 선생은 국어시간에 자기가 지은 시, 동시를 우리들에게 읽어 주셨는데, ‘심부름 잘 했다고 얻은 이 능금, 그냥 먹어버리긴 하도 아까워, 만지며 갖고 노니 냄새도 좋네’ 라는 시를 영원히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라며 당시의 학생과 선생들의 분위기를 증언하였다. 농업학교에는 9연대 본부가 주둔하면서 명실상부한 토벌의 중심부가 됐고, 여러 가지 사건을 겪었다. 또 천막수용소를 만들어 많은 도민들을 구금했고, 고문취조도 그치지 않았다. 제주지역 유지들이 1948년 11월 이후 많이 끌려왔었고 일부는 즉결 처형되기도 했다. 1949년 봄 귀순공작에 따라 귀순한 주민들을 구금, 취조하던 곳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1948년 6월 18일 새벽, 국방경비대 9연대에 이어 제주도 주둔의 임무를 밭았던 제11연대 박진경 연대장이 농업학교 숙소에서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박진경은 일제시대 일본군 소대장으로 제주도에 근무했던 적이 있었다. 따라서 미군정은제주도의 일본군 요새를 잘 아는 박대령으로 하여금 강력한 토벌을 전개하려고, 평화적 해결을 원했던 김익렬 연대장의 후임으로 임명된 장교였다. 

 

이 사건은 같은 날, 미군정 딘 소장이 직접 제주도에 내려와 조속히 범인을 검거하라고 지시하며 수사를 지휘하다, 박대령의 유해를 직접 서울로 옮기는 등 미군정에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군 수사대는 1948년 7월 12일 문상길 중위와 8명의 장병을 서울로 압송해 박대령 암살범으로 지목 기소하게 된다. 8월 8일 첫 재판 이후 8월 14일 문상길 등 4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 사건은 미군정하에서 일어난 한국군 최초의 하극상에 의한 고급장교의 암살 사건이기도 했으며, 사건의 범인으로 확인된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등의 총살처형은 최초의 군법재판을 거친 사형언도이기도 했다. 또한 이 사건은 미군정이 제주도 사태를 강경 진압하는 하나의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1948년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사령관 송요찬 대령)가 새로 설치된 후 대통령령 31호로 제주도에 한정된 계엄령이 선포되어, 군경의 토벌은 점점 무차별 학살로 변해 갔다. 특히 9연대와 2연대의 교체시기 였던 1948년 12월 말 경의 잔인한 토벌에 따른 도민들의 희생은 엄청났으며, 이 기간의 학살과 방화는 제주도민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이 시기에도 농업학교에 9연대가 주둔하면서 이 곳은 토벌의 중심기지가 된다. 9연대는 토벌작전시 체포한 주민들을 이 곳 천막수용소에 감금했다. 1948년 5월에서 9월까지 비교적 소강국면일 적에는 9연대의 작전중 잡아온 주민들을 일시 감금했다가 대부분 풀어줬지만, 10월 이후 강경진압과 계엄령 국면에서는 이곳에 잡혀온 주민들이 즉결처형에 처해지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1948년 11월, 12월에는 많은 제주지역 유지들이 끌려갔고 이들 중 이관석 제주중학교장, 갑자원 이상희 사장 등이 처형당했다. 

 

이 때 끌려온 사람들은 법조계의 판․검사, 교육계, 언론계, 도청공무원, 재산관리처와 신한공사의 주요 간부, 독립운동가, 주요단체장 등 도내의 쟁쟁한 인물들이였다. 이들은 거의 희생되었다.

 

또 이 천막수용소에서는 2연대 주둔 시절인 1949년 3월 이후에 피난입산했던 주민들이 토벌대에 귀순하면서 그들을 수용, 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주민들은 혹독한 고문취조에 의한 자백을 바탕으로 군법회의에 회부돼 육지 형무소로 이송되어 6․25 발발 직후 집단 처형되기도 했다. 

 

제주농업학교는 1901년에 '사립의신학교'라는 교명으로 오현단에서 출발했는데, 1910년이 되자 이 학교를 모태로 제주농립학교가 설립됐다. 그 후 교명이 다시 제주공립농업학교로 변경되었으며, 1940년에는 5년제로 승격돼 삼도리 6만여 평의 대단위 부지로 이설됐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는 학교 병영화 정책에 따라 군사교육을 중심으로 교육이 이루어 지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제주농업학교 부지에는 다시 한국보육원이 들어섰고, 특무대가 7000평을 할애해 갔다. 게다가 제주일중(1951년), 제주초급대학(1952년), 제주일고(1955년), 제주중앙여중(1966년), 제주중앙중(1967년), 교육감사관, 농촌진흥원, 학생회관 등이 세워지면서 제주농업고등학교의 교정은 점점 좁아져만 갔다.

 

이 곳에 세워졌던 제주일중, 제주초급대학, 제주일고, 제주중앙중 등 대부분의 기관들은 다른 곳으로 이전했으나, 그 자리 일부에 삼성초등학교만이 남아있다. 

 

1976년 3월에 학교가 노형동에 있는 새로운 부지로 이전할 때까지 제주농고 옛터는 한국 현대사의 외파와 질곡을 온몸으로 경험했다. 

 

현재 제주농업학교는 제주고등학교로 개명되었으며 학교부지는 노형동에 있다.

 

4․3당시 학교건물이 있던 자리에는 ‘한국토지공사 제주지사’가 들어섰고, 운동장이 있었던 부지는 모두 주택가로 개발되어 당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전에 농업학교가 있었던 곳'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전농로의 벚나무 만이 그 비극의 역사를 묵묵히 전할 뿐이다.

 

<출처 : 제주4.3연구소 소식지; 한라일보(2008.12.23.)>

 

 

 

 

 

 현장사진

 

 

 

 

 

 

 

 

 

 

 

 사료(문서, 사진, 증언)

  

 

농업학교 운동장에서 귀순자 가운데 무장대 협력자를 가려내는 심문반(1949년 4월)

 

 

제주농업학교 천막수용소

 

 

제주농업학교에 설치된 미59군정중대 본부. 성조기가 휘날리고 있다(1948년 5월)

 

 

 

 

 

<사진출처: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제주4.3유적Ⅰ>

상처받은 영혼을 향한 희망이 불어오는 곳
평화·상생·해원 바람의 진원지

제주4·3평화재단

4·3유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