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이덕구 산전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제주시 지역구분(읍면) 조천면 지역구분(마을별) 교래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면 교래리 산 137-1번지
GPS 위도 33.4084444444444, 경도 126.63975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〇 1948년 11월 20일 제주읍 봉개리가 초토화되자 주민들은 인근 야산의 궤나 동굴 등지에 피신하게 된다. 낮에는 들에서 밤에는 불타버린 집을 의지해서 움막을 짓고 살았다. 그러나 1949년 2월 4일 동부8리 대토벌을 계기로 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하고 봉개리에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주민들은 당장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더욱 깊은 산중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주민들은 은신하기 좋은 곳을 찾아 헤매다 거친오름 뒤편과 대나오름 서남쪽의 '머흘뿔', '못밧', '새머흘' 등지의 숲속에 임시 움막을 짓고 생활했다. 하지만 토벌이 강화될수록 피난주민들은 더욱 산 깊숙이 들어갔는데, '시안모루', '북받친밧', '밤남도왓'으로 불리는 이곳까지 와서 은신생활을 했었다. 

 

이 곳은 난리를 피해 숨어들어온 주민들이 집단 거주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피난 주민들이 귀순한 1949년 봄 이후에는 무장대사령부인 이덕구부대가 잠시 주둔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일대를 '이덕구산전(山田)'이라 부르기도 한다.

<출처: 제주4.3연구소, 『4.3유적 Ⅰ』>

 

 

〇 교래 ‘북받친밭’은 제주시에서 제1횡단도로(5.16도로)를 따라 서귀포로 가다가 교래입구에서 교래쪽으로 1.1km를 내려가면 검은오름으로 향하는 시멘트길이 있는데, 그 시멘트길을 따라 가서 1.8km 지점에 내창이 있다. 그 내창을 밤남도왓내라고 한다. 내창의 동쪽편으로 농업용차량이 다녔던 길이 있는데, 그 길을 따라 700여m를 올라가다보면 오른쪽으로 나무에 노란색 페인트로 표시되어 있는 것이 보이는데, 100m정도 오른쪽으로 가면 밤남도왓내의 상류가 된다. 상류는 두 개의 내 지류가 만나는 지점이다. 남쪽의 내는 ‘밧삿모루내’이며, 북쪽은 ‘안삿모루내’다. 두 개의 내는 Y자 형태를 그리며 만나는데 Y자의 가운데부분이 ‘북받친밭(속칭 이덕구산전)’이다. 

 

이 북받친밭을 중심으로 밤남도왓내의 하류쪽으로 1948년말부터 토벌대의 학살을 피해 숨어든 피난민들이 많았다. 피난민들은 봉개리, 용강리, 회천리, 도련리 등의 사람들이었으며, 마을별로 그룹을 이뤄 살았다고 증언자들은 말한다.

 

밤남도왓내의 하류쪽으로는 도련리 사람들이, 안삿모루와 밧삿모루가 만나는 지점 주변에는 봉개리 사람들이 피난처였다. 북받친밭은 용강사람들이 많았다.

 

1948년말부터 1949년 3월경까지의 겨울을 수백여명의 피난민들이 북받친밭을 중심으로 지냈다.

이 겨울동안 당시 무장대의 주력부대였던 이덕구부대가 이곳에 잠시 머무르기도 했다는 증언이 있다.

<출처: 4.3유적정비계획보고서>

 

 

 

〇 4.3 유격대 주둔지 ‘이덕구 산전’

 

4.3의 역사가 남긴 지명 - 이덕구 산전

우리는 과연 우리땅의 역사를 찾으며 살고 있는가 ? 또 그 역사의 의미란 무엇인가 ? 땅이 인간의 역사를 열어 주었듯이 인간은 땅 위에서 삶과 역사를 지으며 살아왔다. 땅은 어제의 역사를 보여주며 오늘의 삶을 드러낸다. 그래서 사람들은 유적지를 여행하고 순례하면서 그 속에서 이루어진 역사와 인간의 삶을 물으며 새김질한다. 그러나 우리 섬땅 조상들의 삶의 의미와 그들의 고뇌를 생동감 있게 느낄 수 있는 알려진 유적지와 그에 대한 지침서는 많지 않다. 단지 역사를 살아온 우리 선조들의 입을 통해, 가슴을 통해 역사의 비밀들이 간간이 열리고 있을 뿐이다. 지금 내가 찾아가고 있는 곳도 일부 사람들에 의해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전해지는 40여년 전 4.3 항쟁과 관련된 역사의 현장 - 4.3유격대 주둔지 ‘이덕구 산전’-이다. 거기서 제주 4.3항쟁의 강렬함과 수난의 처절함을 만나고자, 아니 그 역사의 참 의미를 찾고자 함이다.

 

이덕구 산전(山田), ‘속칭: 북밭친 밭’ - 4.3당시 유격대 대장이었던 이덕구 부대가 주둔했었고 그가 최후를 마친 곳이라는 산속의 밭,- 그래서 지금까지 그 역사는 지명으로 남아 우리 가슴속에 숨쉬게 한다. 이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의 이름은 역사와 같이 탄생하기도 한다. 고려시대 몽고항쟁 당시 항쟁자의 피로 물들여 져서 흙의 붉다는 ‘흙붉은 오름’, 1901년  이제수 중심의 농민봉기를 일으켰을 때 봉기군을 위협하기 위해 불란서 배가 쏜 함포의 포탄에 맞았다는 ‘불마진 동산’, 일제시대 3.1만세운동을 벌였다는 ‘만세동산’등이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다.

 

조릿대의 운명과 이덕구의 운명

이덕구 산전을 답사하기 위해 지도와 필기도구를 챙기고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서귀포행의 제 1횡단도로 버스에 올랐다. 이덕구 산전은 교래리 마을에서  4~5KM 정도 떨어진 한라산 중턱에 있다. 과거 소를 방목하던 때에는 교래리를 통해 이곳을 찾아다녔다고 하나 지금은 제 1횡단도로 중턱에서 내려 걸어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버스는 어느덧 산천단을 지나 방송국 안테나가 서있는 개월이 오름(견월악)에 이르고 있었다. 가방을 들고 일어섯다. 내려야 할곳이 가까왔기 때문이다. 교래리로 향하는 세갈레 길을 지나 물장오리 입구에서 내렸다. 이곳에서 제 1횡단도로를 따라 5분쯤 걷자 동쪽으로 작은 소로 길이 나있었다. 길가 전봇대에는 빨간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다. 마을 주민들로 부터 빨간색 페인트만 1시간 정도 따라가면 큰 무덤이 하나 있는데 그 뒷쪽이 이덕구 산전이 있다는 말은 익히 들은 바 있던 터였다.

 

동쪽의 가느다란 숲길로 들어섯다. 마치 40년 전 이덕구 부대원의 움직임을 추적하듯 숲 사잇길을 걸었다. 한라산 중턱이라 그런지 채 녹지 않은 눈이 군데군데 쌓여 있었다. 그런 눈사이로 노랗고 작은 꽃이 초롱초롱하다. 복수초 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피는 꽂이다. 복수초는 추운 겨울과 싸우면서 하얀 눈위에서 꽃망울을 떠뜨린다. 복수초에는 척박한 땅을 일구며 살아온 제주인과 같은 힘겨운 자연과 싸워야 하는 삶이 있다. 잡목이 우거진 밀림속에서 자생하는 복수초는 겨우내 잎을 떨군 사이에 앙상한 가지 사이로 햇빛을 받고 꽃을 피운 뒤 녹음의 지는 여름에는 긴 수면 시간을 갖는다. 복수초가 갖는 특이한 생태계는 오랜 자연과의 싸움속에서 얻은 역사적 산물이리라.

 

숲길을 따라 10여 분 쯤 걷자 냇가가 나왔다. 냇가 옆으로 소로 길은 곧장 뻗어 있었다. 그 길가 주변에는 서나무, 윤노리 나무, 보리수 나무, 잡목들이 우거져 있다. 그 나무들 밑둥엔 산죽(山竹)무더기가 나부죽이 엎드려 있었다. 옛날 기록에 보면 섬사람들이 「고대」라고 부르는 이 키작은 제주조릿대 무리는 백년(? 또는 천년)마다 한번 열매를 맺는다는데 유독 흉년에만 열매를 맺어 구황(救荒)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단 한 번 열매를 맺은 다음에는 에누리 없이 다 죽어버린다고 한다.

 

굶주린 섬사람들을 위해 몸으로 보시하는 고대의 운명은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란의 장두가 효수돼  내걸리던 관덕정 마당에 전시되어 장두의 운명을 따라간 이덕구의 운명을 되새겨 보게 한다. 이덕구는 반쪽만의 정부수립을 반대하고 제주도민을 억압하는 세력들에 대항하여 싸웠던 4.3항쟁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당시 어린이들 사이에선 ‘몸이 날래 지붕을 휙휙 넘어 다니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전설적인 인물로 묘사되기도 하고, 4.3항쟁의 유격대에 불리한 상황에서도 끈질긴 저항을 하다 죽어간 ‘비극적 영웅’으로 동정을 받기도 한다. 또한 일부에서는 비극을 초래한 장본인으로 비난하기도 한다.

 

곰보 선생 이덕구

이덕구는 1920년 북제주군 조천면 신촌리에서 삼형제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일본과 제주를 오가며 장사를 하며, 항일운동을 했던 둘째형 이좌구의 도움으로 일찌기 일본에서 학교를 나왔다. 일본 미오끼모리국민학교와 일신상업고등학교를 거쳐 입명관 대학 경제학과에 들어갔다. 이같은 성장기를 거치며 그는 둘째형으로 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일본 입명관 대학 4학년 때에는 학병으로 육군에 입대하여 8.15와 함께 고향에 돌아왔다. 귀향 후 그는 조천중학원에서 역사와 지리교사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몇 안남은 제자들에게는 아직까지 소탈하고 열성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제자였던 허아무게씨는 “덕구선생은 어릴 때 마마자국 탓인지 얼굴이 좀 곰보였어. 일본에서 오래 살다보니 그런지 한국말은 좀 더듬기도 했어. 그분이 강의 할 때는 온몸을 움직이며 큰 목소리로 강의를 했는데 아주 재미있게 가르쳤어. 열심히 가르칠 때는 침이 튀겨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지. 그때 강의는 지금 대학수준 이상이었어. 지금도 단군신화를 유물사관에 입각해 해석하던 역사강의가 기억나.”

 

그는 유머가 풍부해서 수업시간을 재미있게 이끌어 갔을 뿐만 아니라 화내는 적이 없어 누구나 그를 좋아 했다고 한다. 학생들은 인기가 높은 선생에게 그렇듯 이덕구를 두고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박박얽은 그 얼굴

 덕구 덕구 이덕구

장래대장 가슴(감)

장교 출신인 그가 ‘장래 진정한 해방을 이루고 군대가 만들어 지면 대장이 될 인물’이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예언이 들어맞기나 한 듯 그는 4.3항쟁이 발발하면서 학생들에게는 ‘오랜시간 못 볼지 모른다며’ 한라산으로 입산해 버렸다. 한라산으로 입산한 그는 조천면 유격대 대장이 되어 5.10 단독선거를 저지투쟁을 벌여 나갔다. 1948년 8월 이후에는 인민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이 해주인민대표자 대회에 참석 때문에 제주도를 떠나게 되자, 이덕구는 그의 뒤를 이어 인민유격대 총사령관이 되었다. 유격대는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을 한라산의 지형지물을 교묘히 이용하며 끈질긴 저항을 해나갔다. 그러나 이덕구는 토벌대의 집요한 추적으로 1949년 6월 6일 이덕구 산전(북받친 밭)에서 자살 혹은 사살되었다.

 

절벽위의 천해의 요새

40여 분쯤 페인트 표시를 따라 나있는 소로길을 따라가자 길은 깊은 계곡으로 향했다. 계곡을 건너 5분쯤 따라가자 높은 절벽이 나타났다. 이제 다 왔구나 하고 느껴졌다. 이덕구 산전은 깎아지른 절벽안의 요새여서 들어가는 입구를 제대로 찾지 않고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떠올라서 였다. 가파른 절벽을 기어 올라갔다. 절벽을 막 기어 올랐을 때 눈앞에 믿믿한 분지가 펼쳐졌다. 과연 천해의 요새였다. 분지를 양쪽으로는 Y자형으로 냇가의 절벽을 끼고 있어 성 역할을 하고 그 가운데는 밭모양의 분지가 펼쳐져 있었다. 그 분지 뒤로는 작은 언덕이 있어 사방을 둘러 볼 수 있는 지형 이었다. 여기에서 있으면 분지 밖에서는 전혀 볼 수 없으나 안쪽에서는 밖을 훤히 내다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분지에는 당시에 나무가 별로 없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억새풀과 청미레덩굴, 잡목들이 마구 얽혀 있었다. 잡목 숲을 헤쳐나가다 보니 지난 가을에 벌초했음이 분명한 산담둘린 무덤 하나가 앉아 있었다. 그럼 그 빨간 페인트는....  이 무덤 후손들이 벌초할 때 무덤을 찾기 위해서 표시해 놓은 것이 틀림 없었다. 무덤을 돌아 분지 사방을 살펴 보았다. ‘만약 이곳이 이덕구 산전이라면 틀림없이 어떤 흔적이 있을텐데’ 혼자말로 중얼 거리며 분지속을 헤메였다. 원래 초원이었던 분지에 생태계의 변의로 잡목들이 우거져 버려 쉽게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한 30여 분을 헤메였을 때 2-3평 넓이의 둥그렇게 쌓아논 보초막이 눈 앞에 뚝하니 나타났다. 가슴이 뛰고 흥분이 되었다. 이덕구 산전에서의 삶의 역사와 첫 대면이라 더욱 그런지 모른다. 조금은 허물어 졌지만 사람의 손에 의해 쌓아진 틀림없는 보초막 이었다. 보초막은 1M 남짓 높이로 돌이 쌓여 있고 그 속에는 당시에 사용했을 것 같은 사기그릇 조각 하나가 버려져 있었다. 부근 어디엔가는 대단위 아지트가 있을법 했다. 아니나 다를까 보초막에서 100여 m 떨어진 곳에 아지트가 하나 있었다. 4-5평은 넘을 듯 했다. 땅을 0.5 - 1m 정도 파고 주변은 돌로 쌓은 직사각형의 움집터였다. 유격대원들은 둘레에 돌을 쌓고 그 위에 나무를 언저 놓아 막사를 만들었으리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보다 흔적이 뚜렸이 남아 있는 막사가 있었다. 막사 부근에는 녹슨 무쇠솥과 사기조각이 뒹굴고 있었다. 혹한의 한라산을 견뎌내는 당시 유격대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여 깊은 아픔과 숙연함을 자아내게 했다. 저 녹슨 무쇠 솥에서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소개작전으로 페허가 된 마을에서 갖고온 좁쌀과 산나물, 풀뿌리를 섞어서 만든 죽이 끓고 있었는지 모른다. 당시 유격대의 땔감은 연기가 안나고 불이 잘붙는 ‘멩게낭’(청미래덩굴)이나 솔피나무 껍질을 사용했다고 한다. 약 한시간 정도 이덕구 산전이라는 분지를 둘러본 결과, 거기에는 수십개의 막사 흔적들이 널려져 있었다. 직사각 형의 막사 터가 있는가 하면, 삼각형, 원형의 막사가 흩어져 있었다. 그 넓이도 다양해서 3-4평이 정도의 작은 막사 흔적이 있는가 하면 20-30평이 넘을 듯한 대형 막사 흔적도 남아 있었다. 이런 흔적으로 미루어 보아 여기에는 대단위 부대가 주둔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이곳이 유격대 주둔지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왜냐하면 유격대의 주둔지는 상황에 따라 수시로 옮겨지 때문이었다. - 이에 대한 의문은 답사를 다녀온 뒷 유격대에서 활동을 했다는 어느 할아버지를 만나고 나서야 풀수 있었다. “이덕구 산전은 이덕구 부대가 주둔했었다는 말은 사실이야. 그런데 이덕구 부대는 주력부대로 한곳에 오래 주둔하지 않아. 구성원은  한라산 중간 중간에 막사를 지어놓고 식량도 땅속에 숨겨 놓았었어. 그러다가 막사부근을 지나게 되면 그곳에서 머무르게 되지. 그런데 이덕구 산전에는 하나의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어. 이덕구부대 말고 용강, 봉개, 회천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피신을 해서 숨어 살았지. 거기에는 자위대라고 해서 그곳을 지키는 병력이 따로 있었어.”- 분지의 막사 흔적들 중간 중간에는 과거 초원지대였음을 보여주듯 억새풀과 가시덤불이 우거져 있다. 아마 이곳에서 이덕구 부대원들은 훈련을 받고 각종 집회를 열었을 지도 모른다. 이곳에 잠시 드른 적이 있다는 용강마을 고 아무개씨는 “내가 이덕구 산전에 갔을 때는 그곳에 막사가 여러개 있었어요. 아마 1948년 가을 낙엽이 떨어질 무렵이었죠. 그곳에는 우리 동네 어른들도 여럿이 미리 올라가 있어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오더니만 집합하고 외쳐요. 그 사람은 당꼬바지에 목이 긴 군화를 신었어요.  훈시를 할 때 보니까 얼굴이 살작 곰보인 이덕구였습니다. 이덕구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두고봐라. 우리가 이긴다. 모두가 잘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싸우는 .....’이런 훈시를 합디다. 이덕구 부대는 도내 각 마을별로 가장 용감하고 날쌘 청년 2-3명씩 뽑아서 구성되어졌는데 이덕구가 직접 훈련을 시키기도 했어요.”

 

이덕구 부대는 12군단 ?

경사진 나무들을 비집고 분지 뒤에 있는 언덕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 언덕에 오르니 서남쪽으로 한라산 정상이 보였다. 그 밑에는 유격대 훈련장이었다는 물장오리 (월간제주 92년 2월호 ‘유격대 훈련장 물장오리’ 참조)가 곧게 솓아 있었다. 동쪽으로는 잡목에 가려져 잘보이지는 않지만 큰나무에 오르면 조천읍과 구좌읍 한눈에 들어선다. 그러고 보면 이덕구산전은 물장오리에 유격대 훈련장이 위치해 있을때  군사부가 주둔해 있던 곳인듯하다. 미군비밀문서 「4.3종합보고서」 1949년 3월 27일 현재 기록에 의하면 유격대는 12군단, 8군단, 23군단, 3군단이 한라산속에 위치하고 있고 유격대의 지도자는 이덕구라고 한다. 12군단은 다른 유격대 군단에 비해 가장 월등한 화력을 소유하고 있고, 4.3 당시 ‘이덕구 부대가 유격대의 주력부대’였다는 증언으로 미루어  이덕구부대였을 가능성이 많다. 이 보고서에 나타난 좌표를 찾아본 결과 이덕구산전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유격대 12군단이 위치하고 있었다. 또 이문서에는 12군단은 일제 99식총 72정, M-1소총 10정, 카빈 15정, 자동소총 3정으로 무장하고 있고 부대원은 1백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언덕을 내려 다시 분지를 향했다. 막 언덕을 내려 오려는 찰나 분지 북쪽에 연못이 눈에 띄었다. 분명히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연못이 있었다. 주변의 땅을 파고 주변에는 돌로 둘러져 있었다. 막대기로 물의 깊이를 재어보니 낙옆이 많이 떨어져 그리 깊지는 안았으나 1m는 족히 넘을 것 같았다. 주변에 물이 흐르는 냇가가 있는데 여기에 무슨 목적으로 연못이 있었을까 ? 혹 버섯재배지 라도 주변에.... 그러나 이 부근은 과거에 초원지대여서 버섯재배에 쓰이는 나무가  많지않아 적당치 않을 것이다.혹시나 하고 사방을 둘러 보았지만은 버섯재배 흔적은 없었다. 또한 버섯재배에 쓰일 물이라면 교통이 편리해야 할터인데  이곳은 그러치 못한 곳이었다. 또 과거 방목을 할 때 소에게 먹이기 위해 이곳에 연못을 만들리는 없었다. 왜냐하면 연못이 규모가 작을 뿐만 아니라 냇가 상류는 절벽이 없어 소들이 자유로이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연못 은 4.3당시 이덕구산전에 주둔했던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고 추측할 수 밖에 없었다. 물을 뜨러 절벽을 넘나드는 불편함을 없애거나 아니면 또 다른 목적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연못을 만들 정도라면 이덕구산전에는 사람들이 오랜기간동안  주둔해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고 하겠다.

 

1949년 초 공군전투기를 포함한 육.해.공군의 합동작전이 대대적으로 전개 되면서 이덕구부대는 옥죄어 오는 포위망을 피부로 느꼈다. 대공세 이후 유격대원이 1백 여 명으로 줄어들자 이덕구는 유격대원을 소집 ‘생존’을 당부했다고 전해진다. 북촌리 이아무개씨는 그날이 당부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이제 식량, 의복, 신발 등 모든 보급이 끊겼소. 최선을 다해 살아남도록 하시오. 만일 잡히게 된다면 각자 아는 부분만 말하든가 입을 다무시오.”

한라산 곳곳을 누비며 신출귀몰하던 이덕구는 1949년 6월 6일 일부 잔존 부대원들과 같이 이곳 이덕구산전 어느 움집에서  토벌대의 포위, 습격으로 자살, 혹은 사살 되었다고 한다.

이덕구산전을 내려오는 길에도 움집 흔적이 눈에 띄었다. 어쩌면 그 움집이 이덕구가 사망한 장소인지도 모른다. 과연 죽음으로써 대항하여 싸웠던 그의 삶의 의미는 무엇었인가? 멀리서 “칵 끄르륵 끄르륵” 노루 울움소리가 들려왔다. 결코 그들의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소리이리라.

<출처: 『월간제주』(1993)> 



 

 

 

 현장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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