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너븐숭이 4.3기념관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제주시 지역구분(읍면) 조천면 지역구분(마을별) 북촌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면 북촌리 1179-2번지
GPS 위도 33.546, 경도 126.63975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〇 북촌리는 조천면의 동쪽 끝에 자리 잡은 해변마을이다. 국민학교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됐지만 서우봉과 접해 '해동'이라는 마을이 서쪽에, 또 산간 선흘리 방향으로 '억수동'이란 마을이 흩어져 있기도 했었다. 북촌리는 일제시대에는 항일운동가가 많았고 해방 후에는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자치조직이 활성화 됐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1947년 8월 경찰관에 대한 폭행사건과 1948년 6월 우도지서장 살해와 납치사건이 북촌리 청년들에 의해 벌어지면서부터 늘 토벌대의 주목을 받았고, 4․3의 와중에는 많은 청년들이 토벌대의 횡포를 피해 피신하면서 엄청난 희생자를 냈다.

 

대부분의 청년들이 자의반타의반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1948년 12월 16일에 첫 번째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민보단을 조직해 마을을 지키고 토벌대에 협조하던 24명의 주민들이 느닷없이 군인들에 끌려가 동복리 지경 '난시빌레'에서 집단총살 당한 것이다. <구좌면-동복리-희생터-난시빌레 참조>

 

이 엄청난 충격에서 채 벗어나지도 못한 1949년 1월 17일, 세계사적으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 민간인학살이 북촌리에서 자행됐다. 4․3 당시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인명희생을 가져온 북촌리학살 사건이 북촌국민학교를 중심으로 한 동서쪽 들과 밭에서 자행된 것이다. 이 날 북촌리의 마을에 있었던 불가항력의 남녀노소 400명 이상이 한 날 한 시에 희생되었다. 

 

명절처럼 제사를 한날 한시에 지내는 북촌리에는 너분숭이 애기무덤 등 당시의 상황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많은 흔적들이 있다.

 

 

〇 너분숭이 4․3 기념공원

 

마을 앞 바다에 평화롭게 떠있는 다려도가 눈 부시게 아름답다. 그러나 북촌리는 4․3의 과정을 겪는 동안 330여호, 1500여명의 마을 인구 중 500여명이 토벌대의 보복학살로 희생됨으로써 리 단위로는 최대의 피해 마을로 기록되고 있다.

 

북촌리는 4․3당시 조천면의 동쪽 끝에 자리 잡은 해변마을이다. 본동 서쪽에 있는 ‘해동’과 선흘리와 경계지점에 위치한󰡐억수동’이란 자연 마을을 품고 있다. 이 마을은 일제시대 당시 항일운동을 한 선각자들이 많았고 해방 후에는 건준,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자치조직이 활성화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1947년 8월 경찰에 대한 폭행사건과 1948년 6월 마을 포구에서 발생한 우도지서장 살해와 납치사건이 북촌리 청년들에 의해 벌어지면서 부터 늘 군경토벌대의 주목을 받았고, 4․3의 와중에는 많은 청년들이 토벌대의 횡포를 피해 피신하면서 엄청난 희생을 불러왔다.

  

1948년 12월 29일 기존의 제9연대를 대체한 제2연대가 제주도에 도착했다. 정부가 발간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연대 교체의 의미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제주 주둔군을 제9연대에서 제2연대로 교체하고 ‘과격한 반공주의자’인 서청단원들을 토벌대에 합류시킨 것은 제9연대 보다 더욱 강경한 작전을 통해 조속히 사태를 끝내기 위한 조치이며, 이는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와도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한편 1948년 11월 17일에 선포된 대통령령 31호의 제주도에 한정된 계엄령은 해제되었으나, 아이러니 하게도 군경의 토벌은 점점 무차별 학살로 변해 갔다. 이에 따른 도민들의 희생은 엄청났으며 제주도는 ‘죽음의 섬’ 으로 가엾게 존재할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9년 1월 17일, 세계사적으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 민간인학살이 북촌리에서 자행됐다. 4․3 당시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인명희생을 가져온 북촌리학살 사건이 북촌국민학교를 중심으로 한 들과 밭에서 자행된 것이다. 이 날 북촌리의 마을에 있었던 불가항력의 남녀노소 400명 이상이 한 날 한 시에 희생된 것이다. 동시에 마을의 집들도 다섯 채만 남기고 모두 불탔다.

 

북촌국민학교는 4․3 당시 최대의 피해마을인 북촌리 학살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1949년 1월 17일 아침, 2연대(연대장 대령 함병선) 3대대(대대장 소령 정준철) 일부 병력이 월정주둔 11중대를 시찰하고 대대본부가 있던 함덕으로 가던 도중에 북촌국민학교 서쪽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2명의 군인이 숨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마을 원로들은 숙의 끝에 군인 시신을 들것에 실어 함덕 대대본부로 운반했다. 그러나 함덕 주둔 3대대 군인들은 스스로 찾아간 10명의 연로한 주민 가운데 경찰가족 1명(이군찬)을 제외하고는 모두 총살해버렸다. 그리고 2개 소대쯤의 병력이 북촌마을을 덮쳤다. 군인들은 아침부터 주민들이 숨어있을 만한 곳을 샅샅이 뒤지면서 집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으며 주민 모두에게 학교로 집결할 것을 명령했다. 북촌마을은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해갔으며 넋을 잃고 학교에 운집한 마을 사람들은 사색이 된채 공포에 떨었다.

 

학교운동장을 에워싼 군인들은 기관총을 3각으로 장전하여 주민들의 도주를 차단하고 있었다. 군 지휘관은 우선 민보단 부단장인 장윤관을 불러내 운동장을 돌라고 한 후 갑자기 권총으로 사살했다. 이어 학교 울타리에 설치됐던 기관총이 불을 뿜더니 주민 7명 가량이 쓰러졌다. 학교 운동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지휘관은 다시 북촌 주민들을 군경가족과 민보단가족으로 구분하여 군경가족을 제외한 주민들을 학살할 준비를 한다. 마침 도착한 대대장과 휘하 장교들은 임시로 타고온 앰블런스 안에서 즉석 회의를 했다. 집결시킨 주민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의논이었다.

 

당시 제주경찰서 차량계 소속 경찰로써 그 날 임시로 대대장이 승차한 차량을 운전했던 김병석(78세) 씨는 “앰블런스 안에서 대대장을 포함한 지휘관들이 의논을 하는데, 기관총을 걸고 집중사격을 가하자는 등 여러 가지 방안이 나왔다. 그런데 한 장교가, 우리 사병들은 적을 사살해 본 경험이 없는 군인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적을 사살하는 경험도 쌓을겸 몇 명 단위로 데려가서 총살시키자는 제안을 했는데 그게 채택이 됐다."고 증언했다. 그때부터 군인들은 주민들을 학교 동쪽 당팟과 서쪽 너분숭이 일대 등으로 끌고가 총살하기 시작했다. 또 당시 운동장에 있었던 김석보(72세) 씨는 "어머니와 나는 용케 군경가족 대열에 끼게 되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치맛자락만 잡고 이리 저리 쏠리던 10살 미만의 동생 셋은 끝내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놓쳐 죽음의 길로 들어갔다."고 슬프게 말했다.

 

그때까지 넋을 잃고 총소리를 듣던 김병석씨가 대대장에게 호소했다.

 

“대대장님 저기 있는 사람들중에는 우리 친척도 있고 동창도 있습니다. 함덕은 큰 마을입니다. 친척들도 있을 것이고 살릴 수 있습니다.” 이 호소가 받아 들여진 것이다.

 

대대장이 사격 중지 명령을 내리자 총살은 우선 멈출 수 있었다. 하지만 벌써 300여명 이상의 주민이 학교 주변 이곳 저곳에서 참혹하게 쓰러진 뒤였다. 

 

죽은 자의 수가 워낙 많아서 시체는 살아남은 아녀자들에 의해 주변에 가매장했다가 사태가 진정된 후에 안장하였고, 온 가족이 몰살당했거나 연고가 없는 시체들은 눈이 덮인 채 오래도록 방치되었다가 나중에야 야산에 묻혔다. 당시 엄마 품에서 함께 죽어간 어린아이들은 너분숭이 일대에 임시 가매장한 채로 지금도 조그마한 애기무덤으로 남아 있다.

 

북촌대학살이 있은지 5년 후인 1954년 1월 23일 세칭 '아이고 사건'으로 북촌 주민들은다시 한번 4․3의 아픔을 되새겨야 했다. 이 날 전몰장병인 북촌 출신 김석태의 고별식을 끝내고 4․3 당시 애무하게 죽어간 주민들의 혼을 달래려고 술 한 잔 올리고 통곡한 것도 죄가 되어 신승빈은 이장직을 놓게 된다. 참으로 야속한 세월이었다.

 

이날 함덕주둔 2연대 3대대 군인들에 의해 북촌국민학교 운동장에 집결한 북촌리민들은 50여명 단위로 끌려나갔다. 먼저 학교 동쪽 ‘당팟’ 쪽에서 총소리가 났다. 그리고 서쪽 너분숭이 일대로 주민들을 끌고온 군인들은 탯질, 개수왓 등지에서 주민들을 집단총살했다. 그 일대는 마치 무를 뽑아 널어놓은 것 같이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날 학살터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김석보씨는 "어머니와 내가 그날 저녁 함덕으로 가기전에 세 동생의 시신을 너분숭이에서 발견했다. 어머니는 뒷날 이곳에 와서 동생들의 시신을 너분숭이 구석에 임시 매장했다. 지금도 그때 묻은 자리에 그대로 동생들은 묻혀있다."고 말했다. 

 

북촌 주민들이 밭일을 하다가 돌아올 때 쉬어가던 넓은 팡이 있어서 '너분숭이'라 불리는 이곳에는 애기무덤 20여기가 군락을 형성해 있어 4․3 당시 참혹했던 북촌대학살을 증언하고 있다.

 

제2연대가 제주에 주둔한 지 달포만에 벌어진 북촌리 학살사건은 엄마품에 안긴 어린아이들과 노인들 까지 무차별 학살함으로써 4․3의 제노사이드의 비극임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북촌리 주민들은 이 통탄한 사건을 해결하려고 1960년 ‘국회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특별위원회’에 대규모로 신고한 바 있으며, 지난 2000년도에는 제주도경찰국의 발간한 ‘제주경찰사’의 사실왜곡에 정면으로 항의하여 배포금지의 약속을 얻어 내기도 했다.

 

너분숭이의 애기무덤은 당시 상태로 잘 보존되어 있다. 또한 잔디나 변변한 장식도 없이 초라하게 자리하고 있어서 당시의 참혹하고 무모한 학살을 알려주기에는 더없이 소중한 공간이다. 현재 이곳에는 4․3유적지 정비사업에 따라 북촌학살의 비극을 알리는 소규모 기념관과 북촌 사건을 통해 4․3을 전국에 알린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 문학비가 들어서 있다. 

 

 

 

〇 당팟

1949년 1월 17일, 북촌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인 주민들은 일단의 군인들에 의해 이 곳 당팟으로 끌려왔다. 이미 학교에서 일부 주민이 총살되어서 이곳으로 끌려오는 주민들은 공포에 떨고 있었다. 군인들은 주민들을 끌고 오자마자 바로 총살했다. 북촌대학살의 1차 집단학살지가 된 것이다.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대학살이 북촌국민학교 동서로 나뉘어 이루어졌지만 동쪽지역의 당팟에서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했다. 이곳에서 어머니를 잃은 밭 주인 김진국(남, 02년 74세) 노인회장의 증언에 따르면 '몇년 전에도 밭을 일구다 탄피가 발견되기도 했다. 우리 밭에서 어머니를 잃었기 때문에 사태가 안정된 후에도 밭을 10여 년 이상 남에게 빌려줬었다.'고 아픈 기억을 털어놨다. 

 

 

 

〇 너분숭이 애기무덤 

1949년 1월 17일 함덕주둔 2연대 3대대 군인들에 의해 북촌국민학교 운동장에 집결한 북촌리민들은 50~100여명 단위로 끌려나갔다. 먼저 학교 동쪽 당팟쪽에서 총소리가 났다. 그리고 서쪽 너분숭이 일대로 주민들을 끌고온 군인들은 탯질, 개수왓 등지에서 주민들을 집단총살했다. 그 일대는 마치 무를 뽑아 널어놓은 것 같이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부녀자 등 일부 주민들이 시신을 수습하기에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어른들의 시신은 임시매장했다가 사태가 안정된 후 안장되기도 했으나 당시 어린아이와 무연고자 등은 임시 매장한 상태로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그곳이 지금의 너분숭이 소공원이다. 

 

그날 학살터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김석보씨는 '어머니와 내가 그날 저녁 함덕으로 가기전에 세 동생의 시신을 너분숭이에서 발견했다. 어머니는 뒷날 이곳에 와서 동생들의 시신을 너분숭이 구석에 임시 매장했다. 지금도 그때 묻은 자리에 그대로 동생들은 묻혀있다.'고 말했다. 또 1948년 6월 22일 북촌포구 경관 피습사건 용의자로 체포되어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었던 강서수(남, 03년 77세) 씨는 '이듬해 3월경에 석방되어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보니 너분숭이 어느 밭에 그대로 방치된 채 들짐승, 까마귀 등이 시신을 뜯어먹어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고 증언했다. 그의 3형제 모두가 형무소로 끌려갔을 뿐 아니라 할아버지가 외지에서 북촌에 들어온 관계로 친척도 없었기 때문이다.

 

북촌 주민들이 밭일을 하다가 돌아올 때 쉬어가던 넓은 팡이 있어서 '너분숭이'라 불리는 이곳에는 애기무덤 20여기가 군락을 형성해 있어 4․3 당시 참혹했던 북촌대학살을 증언하고 있다.

 

이곳은 4․3 이전부터도 어린아기가 병에 걸려 죽으면 묻던 곳이라 한다. 지금까지  소나무와 가시덤불이 무성하여 무덤이 드러나지 않았다가 2001년 북제주군 소공원 조성사업으로 부지가 정리되면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지금 현재 이곳에는 20여기의 애기무덤이 모여있고 그 옆 밭과 길 건너에도 몇 기의 애기무덤이 있다. 그중 적어도 3기 이상은 북촌대학살 당시 희생된 어린아이의 무덤이다. 

 

이 곳의 모든 무덤들이 4․3 희생자의 무덤은 아니지만 당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또한 잔디나 변변한 장식도 없이 초라하게 자리하고 있어서 당시의 참혹하고 무모한 학살을 알려주기에는 더 없이 소중한 공간이다. 따라서 어설프게 무덤을 치장하거나 양지로 이장하는 성역화보다는 지금 현재의 상태로 과거의 아픈 역사를 반추하는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방도를 찾아야 할 것이다.

 

<출처: 제주4.3연구소, 『4.3유적Ⅰ』>

 

 

 

 

 

 현장사진

 

 

 

 

 

 

 

 

 

 

 

 

 

 

 

 

 

 사료(문서, 사진, 증언)

  

〇 증언: 고완순(77세, 여, 조천 북촌)

 

그 날(1949년 1월 17일, 음력 1948년 12월 19일)은 군인들이 집을 불태우며 학교로 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2동에 살았습니다. 우리가 살던 골목에는 집이 7채가 있었습니다. 우리 집은 우측에서 세 번째였는데, 밖에서부터 불을 질러서 군인들이 안으로 들어오려 해도 연기가 꽉 차고 열기 때문에 못들어 온 것 같애요. 그래서 우리도 나갈까 말까 주저주저하는데 애기 울음소리가 나버렸어요. 밖거리에 애기가 있었어요. 그 애기가 우는 바람에 (군인들이) 들어 와서 끌려 나갔습니다. 나와보니 집들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학교 울타리에 기관총이 2개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울타리는 그대로입니다. 학교 동쪽 울타리에 기관총을 걸어놔 있었고, 운동장에 가보니까 사람들이 꽉 찼어요. 우리는 정문하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데 앉아 있었습니다. 남자(군인)가 교단에 있었는데 운동장에 있던 남자 8명 정도가 나가 서 있었습니다. 뭐라 하는지 말은 잘 안 들리고. 하여튼 “마을에서 군인 차를 쏘아서 군인이 죽었다”고, “마을을 잘 못 지켰다”고 해서 앞에서 ‘타타타’ 쏘아서 죽였습니다. 민보단장인가 민보단원들입니다.

 

우리 마을에 조ㅇㅇ(50)과 임신 8~9개월 정도 된 부인(38)이 있었는데, 그 사람 부부도 죽여서 운동장 서쪽으로 내던지는 것을 봤습니다. 그 다음부턴 사람들이 안 죽으려고 뒤로 밀려나려 하자, 기관총이 난사되었습니다. 우린 안 맞을려고 돼지처럼 딱 엎드려 기었습니다. 기면서 보니까 김ㅇㅇ(여, 41) 한 분이 죽었는데, 아기(남, 당시 3)가 배 위에서 젖 먹으려고 하는 걸 어떨 결에 내가 손으로 탁 짚었습니다. 시체에 걸린 겁니다. 뒤로 물러나다 보니. 그게 북촌기념관에 걸린 그림(강요배 작, ‘젖먹이’)입니다. 

 

기관총 소리가 멎고, 다음엔 군인들이 참나무 긴 몽둥이들 들고 이제 “시에 갈 사람은 따라오면 살려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막 몰려가니까 딱 잘랐습니다. 동서로 분단이 되듯이. 따라가려고 하면 몽둥이로 막 두들겨 팼습니다. 대나무 긴 것을 가운데 묶어서 자르니까 38선 자르듯이 갈라졌습니다. 그러면서도 서쪽으로도 가고, 동쪽으로 가고 그때는 어느 쪽이 사는지를 몰랐습니다. 저는 가족하고 안 떨어지려고 언니 손만 꽉 잡았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남동생을 업고 있었고. 남동생은 무서워서 울다가 군인이 휘두른 참나무 몽둥이에 머리통을 맞았는데, 그 후유증인지 4·3이 끝나서 2년 정도 있다가 죽었습니다. 

 

그때 30명씩 끊어서 제주시로 간다니까 다 나갔지만, 처음에는 죽이는 줄을 몰랐습니다. 첫 번에는 ‘당팟’으로 끌고 갔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타다닥’, ‘타다닥’ 소리가 났습니다. 한 세 번쯤 끌려 나갔는데. 우리 언니가 “어머니, 암만 해도 시에 데려가는 게 아니고 죽염수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끌려간 것이 옴팡밭. 우리 식구 다 갔습니다. 30명씩 잘라서 갔죠. 그때는 정신없으니까 누가 같이 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상황에 닥치니까 아무생각이 안 났습니다. 옴팡밭에 가서 보니 사람들이 죽어 있었습니다. 한 무더기씩 데려가서 죽였으니까요. 우리가 마지막으로 간 것 같애요. 피도 흥건하고, 흙이 피로 시커멓게 변해 있었습니다. 쭈욱 앉혀서 있는데 뒤에서 철거덕 철거덕 총 소리가 나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어요. 너무 무서워서 떨고 있는데, 뒤에서 군인이 “사격중지!”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죽이지 말라고 했나봐요. 군인이 “이 간나새끼들, 파리 목숨보다 더 질기네”라고 했나, 하여간 쌍스런 말을 하는 걸 들었어요. 전라도인지? 이북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는 “가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은 내버려두고, 거기에 앉았던 사람들은 운동장으로 돌아왔어요. 운동장에 오니까 산 사람은 다 모여 앉아 있었습니다. 마을은 뜨거운 열기로 하늘이 빨간 불바다 같았습니다. 

 

그날 살아나자, 외할머니가 생각이 났습니다. 외할머니네 집으로 뛰어가다 보니까 할머니 한분이 죽어 있는데 불 타는 서까레가 떨어져서 타고 있었습니다. 소 돼지도 날뛰고... 내가 남동생을 업고 언니하고 어머니는 ‘당팟’에 우리 할아버지 형제분의 시신을 찾으려고 갔습니다. 시신들을 다 뒤적이며 찾았다고 합니다. 나한테 동생을 업고 있으라고 해놓고.

 

어머니는 그날 저녁에 할아버지 형제 시신을 찾아서 가마니를 구해다가 흙을 덮고 돌로 지둘려놨어요. 그날 저녁도 마을은 아비규환의 현장이었습니다. 주민들은 ‘아이고 어멍아’, ‘“아이고 누게야’ 하면서 아수라장이었습니다. 나는 우리 동생 업어서 집에 갔는데, 다행히 골목집이라 우리 집은 안탔습니다. 그 골목에 두 집만 탔고 다섯 집은 안탔습니다. 어머니는 할아버지 시신을 토롱해서 묻어두고 늦게야 왔습니다. 이튿날 아침엔 피난 간다 해서, 함덕으로 가야했습니다. 군인들이 사격을 중지한 후에 대장이 올라서서, “여러분들 집에 가면 집도 불다 타버리고 잘 데 없으면 학교에서라도 하룻밤 자고 내일은 함덕으로 와라”고 하고 갔기 때문이었습니다. 


 

함덕리 서우봉 가면 지금은 길이 크게 났는데, 그 전에는 리어카 하나 다닐 정도로 좁은 길이 있었습니다. 이튿날(1949년 1월 18일)은 바람이 불고, 눈비가 와서 걸어갈 수가 없는 날씨였습니다. 어머니는 개나리봇짐 닮은 거를 언니하고 나한테 지워놓고, 동생을 업고 갔습니다. 함덕으로 넘어가는 이제 해수욕장 돌아가는 입구쯤 됐나봅니다. 사람들이 쭉 앉아 있었습니다. 우리도 거기 앉아서 기다리는데 ㅇㅇㅇ이라는 사람이 그곳에 서서 ‘너, 나와!’, ‘너는 가!’ 하면서 사람을 가려내더라고. 우리는 ‘합격’이 되어 함덕에 갔습니다. 너무 춥고 떨렸습니다. 이제 같으면 경로당인데 신성회관이라는 곳에 모이라고 해서 가보니 허벅에 좁쌀로 죽을 쒀서 나눠 주고 있었습니다. 배고프고 춥고 한데 따뜻한 거 미움 같은 것을 주니 살 것 같았습니다.

 

상처받은 영혼을 향한 희망이 불어오는 곳
평화·상생·해원 바람의 진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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