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송령이골 (속냉이골, 속넹잇골)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서귀포시 지역구분(읍면) 남원면 지역구분(마을별) 의귀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1974-3번지 일대
GPS 위도 33.3178055555556, 경도 126.704777777778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 의귀리는 1935년까지 남원면 소재지였을 정도로 마을의 역사가 깊고, 남원면 일대의 문화․산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마을 사람들이 일본 유학을 많이 다녀와 개화사상 및 평등의식과 민족의식을 갖추어 의식 수준이 높은 마을이었다.

 

4․3 발발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의귀리는 평온했다. 몇몇 청년들이 5․10선거를 거부해 산으로 피신했지만 군경이 호위했기 때문인지 큰 충돌 없이 선거를 마쳤다. 다만 이 즈음에 좌익 단체활동을 하던 김OO의 부친이 경찰에 끌려가 총살당했다. 이후 가끔 토벌대가 마을을 수색했지만 마을 중심부에 있는 넉시오름 정상에 소위 ‘빗개’를 세워 경찰과 토벌대 병력의 이동을 알렸기 때문에 이렇다 할 희생도 없었다. 하지만 1948년 11월 이후 불어닥친 광풍은 중산간 마을인 의귀리를 통째로 삼키며 수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몰고 왔다. 

 

서귀포시 무장대 습격이 있던 1948년 11월 7일, 토벌대의 보복인지 아무런 예고 없이 의귀리에 들이닥친 토벌대는 무조건 방화와 학살로 의귀리 주민들을 내몰았다. 이렇게 초토화 작전을 방불케 하는 토벌대의 마을 방화와 학살은 4․3기간을 통틀어 의귀리가 맨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당장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주민들은 일부 해변마을로 연고를 찾아 떠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불타버린 집을 의지해 움막을 짓거나 숲 속의 동굴 혹은 냇가의 궤를 임시 피난처로 삼아 가족 단위로 피신생활을 해야만 했다. 노약자나 불구자들은 타다 남은 집에 있다가 수색 나온 군인들에 발각되어 현장에서 희생당하기 일쑤였다. 이 때부터 대부분의 의귀리 주민들은 토벌대에 쫓겨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산야를 헤매는 시련을 겪었다. 은신 중 토벌대에 발각되면 현장에서 총살당했고, 이 때의 희생엔 남녀노소 구분이 없었다.

 

한편 1948년 12월 26일 의귀국민학교에 군인이 주둔하면서 마을 사람들의 희생은 크게 늘어났다. 당시 초등학교에 주둔한 병력은 국군 제2연대 1대대 2중대였는데, 중대장은 설재련이었다.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전개되면서 군인들은 수색 중에 발견되는 사람들을 마구 죽이는가 하면 일부는 학교 안에 임시로 수용했다. 그들은 수용된 주민들을 대상으로 무차별 고문을 가하더니, 급기야 1949년 1월 10일과 11일에는 약 20여명을 학살하기에 이르렀다. 수망리 출신 김명원 씨는 이때 어머니를 잃고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됐다.

 

토벌대가 마을을 불태우자 온가족이 인근 야산에 숨어 지냈습니다. 그러다 1949년 1월 9일 군인들에게 발각됐습니다. 군인들은 아버지(김병하, 34)를 현장에서 총살하고 어머니와 우리 5남매를 학교에 가뒀습니다. 학교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의귀국교 4학년 동급생인 김일석도 있었습니다. 그는 ‘어제 들어왔다’고 하더군요. 군인들은 수감자들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한 원칙도 없이 20세부터 50세에 이르는 사람들을 지목하며 ‘너 나와!’하며 끌어냈습니다. 1월 11일에는 어머니가 지목됐습니다. 어머니(강매전, 35)는 피신 중 딸을 낳아 보름도 지나지 않았을 때입니다. 어머니를 포함해 10여명이 함께 끌려 나갔는데 곧 총성이 울렸습니다.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 마저 돌아가시니 우린 졸지에 고아가 됐습니다. 장남인 나에게 12살, 9살, 3살, 그리고 생후 보름된 갓난 동생들이 남겨졌습니다. 젖을 못 먹어 울어대는 아기를 달래고 있는데 아버지와 알고 지내던 현 면장님이 나타났습니다. 현 면장님은 군인들에게 부탁해 우리를 남원리에서 올라온 급수차에 태웠습니다. 우리 외에도 7~8명의 아이들이 급수차에 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내려온 다음날 새벽 폭도들이 군인들을 습격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노인과 어린아이까지 모두 총살했습니다. 국민학교 동급생인 김일석도 그 때 죽었습니다.(김명원 증언, 대정읍 하모리)

 

이에 무장대는 학교에 수용된 주민들의 안위를 도모함과 동시에 토벌대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1949년 1월 12일(음력 1948년 12월 14일) 새벽 의귀초등학교를 습격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미리 간파한 2중대의 화력에 밀린 무장대는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채 퇴각했다.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학교에 수용 중이던 주민 60여명은 습격 당일 학교 동쪽 약 200m 지점(의귀리 1506-6번지)의 밭으로 끌려가 학살당했다. 무장대와 내통했다는 구실로 군인들이 양민들을 보복 살해한 것이다. 

 

1월 12일 무장대가 2연대를 습격한 사건은 토벌대와 무장대, 그리고 주민들에게 큰 변화를 가져왔다. 미군비밀보고서는 무장대의 습격 사건을 이렇게 기록했다.

 

1월 12일 새벽 6시30분께 약 2백여 명의 유격대가 제주도 의귀리에 있는 2연대 2중대를 습격했다가 패퇴했다. 2시간에 걸친 접전 끝에 유격대는 51명의 사망자를 내고 퇴각했다. 반면 한국군은 2명이 사망했고 10명이 부상했다. 유격대로부터 M-1소총 4정, 99식총 10정, 카빈총 3정을 노획했다.(주한미군사령부, 「G-2 일일보고서」 1949. 1. 14.)

 

1월 10일부터 12일까지 3일 동안 희생된 80여구의 시신들은 원만한 수습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일부는 유족이 거두어간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의 시신들은 흙만 대충 덮은채로 방치되고 있었다. 썩어가던 시신들은 그해 봄 의귀, 수망, 한남리 주민들이 의귀리 중심지에 성을 쌓게 되면서 ‘개턴물’ 동쪽(의귀리 765-7번지)으로 옮겨졌다. 수개월 후 마을로 복귀한 유족들은 구덩이에 방치된 시신들을 구별할 수 없었다. 김신생 할머니는 남편의 시신을 찾으려 애썼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남편(안순길)은 이빨이 특이해 그것으로 찾으려 했지만 워낙 시신이 많아 구별할 수가 없었습니다. 입은 옷으로 볼 때 한 시신이 꼭 남편 같았지만 확신할 수 없어 따로 수습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듬해에는 남편이 꿈에 나타나 ‘자네가 만지던 시신이 바로 나야’라고 하더군요.(김신생 증언, 남원면 신흥리)

 

결국 시신은 구별되지 못한 채 큰 구덩이 세 개에 나뉘어 이장됐다. 유족들은 1983년 묘 앞에 ‘현의합장묘(顯義合葬墓)’라는 비석을 세웠다. 이곳이 바로 ‘현의합장묘(顯義合葬墓)’ 구(舊)묘역이다. 현의합장묘는 유족회(회장 양봉천)에 의해 2003년 9월 20일 수망리 ‘신산ᄆᆞ루’지경(893번지)으로 이장되었다.

 

이날 토벌대를 습격했다가 사살된 무장대 시신은 몇 개월 동안 학교 뒤편에 버려졌다가 마을 서쪽의 ‘송령이골(속넹잇골)’(의귀리 1974-3번지)로 옮겨졌다. 방치되었던 무장대 무덤은 2004년 5월 생명평화 탁발순례를 하던 도법 스님 일행이 벌초를 하고 안내판을 세우면서 다소간에 정비되었다. 거기에는 “희생된 십수 명의 무장대들은 근처 밭에 버려져 썩어가다가 몇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곳에 묻혔지만 내내 돌보는 사람 하나 없이 덤불 속에 방치돼 왔다. 우리 생명평화탁발순례단은 우익과 좌익 모두를 이념대립의 희생자로 규정한다. 학살된 민간인 뿐만 아니라 군인 경찰과 무장대 등 그 모두는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때 희생된 내 형제 내 부모였다. ‘평화의 섬’을 꿈구는 제주도, 바로 이곳에서부터 대립과 갈등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우리 순례단은 생명평화의 통일시대를 간절히 염원하며, 모성의 산인 지리산과 한라산의 이름으로 방치된 묘역을 다듬고 천도재를 올리며 이 푯말을 세운다”고 적혀있다. 

 

반면, 당시 의귀초등학교 전투에서는 4명의 군인이 전사했다. 이날 희생된 군인은 ‘일등상사 문석춘(文錫春), 일등중사 이범팔(李範八), 이등중사 안성혁(安星赫), 임찬수(林燦洙)’였다. 수망리의 남원읍 충혼묘지에 안장된 비석은 바로 그해 7월에 그들을 추모해 학교 안에 세웠던 것을 나중에 옮긴 것이다. 보병 제2연대 1대대 장병 이름으로 새겨진 비문에는 육군 일등상사 문석춘 등 4명의 군인들을 ‘열사’로 지칭하면서 활약상과 전사 경위를 밝히고 있다. ‘1월 12일 의귀리에서 적습을 받아 용감히도 장병 혼연일체 하여 불리한 지형임에도 불구하고 잠복한 적진에 결사 돌입하여 혁혁한 전과를 거뒀으나 불행히도 흉탄에 명중되어 명예의 전사’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출처: 의귀리, 『말과 귤의 고장 의귀』(2016);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5(1998)>

 

 

 ○ 1949년 1월 12일 벌어진 ‘의귀리 전투’는 무장대의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약 200여 명의 폭도가 1월 12일 새벽 6시 30분에 제주도 의귀리에 주둔하고 있는 2연대 2중대를 습격했다가 패배했다. 2시간의 접전 끝에 폭도는 51명의 사망자를 내고 퇴각했다. 반면 한국군은 2명 사망, 10명이 부상했다. 폭도로부터 M-1소총 4정, 99식총 10정, 카빈총 3정이 노획됐다.(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1037, January 14, 1949.)

 

군인 희생자는 두 명이 더 늘어 모두 4명이 희생된 것으로 밝혀졌다. 남원읍 충혼묘지 비석을 보니, 이날 희생된 군인은 ‘일등상사 문석춘(文錫春), 일등중사 이범팔(李範八), 이등중사 안성혁(安星赫), 임찬수(林燦洙)’였다. 기습을 받아 4명의 희생자를 낸 제2연대의 충격도 컸겠지만, 이날 전투는 무장대에게 더욱 큰 타격을 주었다. 

 

무장대원 200명이란 숫자는 여러 정황을 볼 때, 당시 무장대 세력이 거의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무장대는 이 기습공격에 전력을 쏟은 셈인데 이 중 51명의 사망자를 내고 패퇴함으로써 그 세력이 급속히 약화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이날 사건 이후 1월 중에 무장대가 마을을 습격해 경찰을 공격하거나 주민들을 살해한 사건은 있었지만, 군대를 직접 공격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에 대해 1949년 2월초 미군 보고서는 “제주도의 추가 보고에 따르면 폭도들의 활동은 여전하지만 과거와 같은 대규모의 활동은 없다”고 기록했다.(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1055, February 4, 1949.)

 

한편 무장대의 공격은 곧 민간인에 대한 진압부대의 보복 총살로 이어지는 등 악순환을 초래했다. ‘의귀리 전투’ 때에도 군 주둔지인 의귀국민학교에는 중산간을 헤매다 잡혀온 주민 8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제2연대 군인들은 사건 직후 이들을 학교 뒷밭으로 옮겨 모두 사살하였다. 이 때 희생된 80여  구의 시신은 나중에 마을 주민들에 의해 합장되었으며 현재 의귀리에 소재한 합장 묘역에는 ‘현의합장묘(顯義合葬墓)’라는 큰 비석이 세워져 있다.(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⑤, 전예원, 1998, 141~142쪽.)

 

<출처: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2003)>

 

 

 ○ 해방 후 의귀리는 4․3사건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제주의 여러 마을 중에서도 특히 그 피해를 많이 입은 마을로 손꼽히고 있다. 4․3 사건 후 7개월 동안은 마을에 단 한사람도 살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의 의귀리는 4․3사건 후 재건된 마을의 형태로 그 이전의 모습은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4․3 사건 때 모든 건물이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의귀리는 한동안 면 소재지였기 때문에 이 지역 문화, 산업의 중심지였다. 또한 마을 사람들이 일본 유학을 많이 다녀와 개화사상 및 평등의식과 민족의식을 갖추어 의식수준이 진보적이었다. 당시 유학생들을 포함한 상당수의 지식인들이 4 ․3사건 당시 좌익에 동조하였다고 한다. 해방 후 인민위원회의 활동이 이 마을에도 있었는데 야간모임을 가지면서 조직적으로 활동했다.

 

마을 중심부에 있는 넉시오름 정상에 마을 사람들이 대나무 깃발을 만들어서 세우고 내림으로서 경찰과 토벌대 병력이 이동하는 방향을 표시하곤 했다.

 

1948년 5월 10일, 의귀국민학교에서는 군인 12명과 남원지서장이 직접 감시하는 가운데 5 ․10선거가 치뤄졌는데 마을 청년 7명이 투표를 거부하고 산으로 올라갔다. 이들은 후에 지서습격의 주범으로 몰린다.

 

토벌이 본격화되면서 1948년 12월 26일부터 1949년 1월 20일 까지 지금의 의귀국민학교에는 당시 제2연대 1대대 2중대가 주둔했다. 당시 2중대원이었던 이윤의 「진중일기」에 의하면 2중대는 학교주변에 4개의 초소를 세우고 옥상에는 기관포를 설치했으며 주위에는 모래가마니로 바리케이트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들은 매일 '폭도를 소탕하러 간다'고 나가서 오후 6~7시에 출발하였는데, 어느 날 토벌대는 거짓정보를 흘려 유격대를 유인했다. 군인들이 토벌을 위해 학교를 나간다고 거짓정보를 흘리자, 그 정보를 접한 유격대들은 학교를 습격했다. 이날 토벌대 6~8명이 전사한 반면 유격대는 훨씬 더 큰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유격대의 피해정도는 80여명정도로 알려지고 있으나, 그 부상자와 사망자가 동료들에 의해 산으로 이송된 경우가 많아 정확한 피해 상황을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유격대가 후퇴한 후 군인들은 유격대에게 자신들의 토벌작전 정보를 제공해줬다는 혐의로 마을 사람들 100여명을 총살하였다.

 

시신은 한 곳에 가매장했었는데 수 개월이 지난 후에야 가족들이 찾아보게 되었다. 그러나 시신은 누구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되어 있었다. 몸에 신표가 있는 시신들은 가족들이 찾아갔으나 나머지 10여구의 시신들은 개턴물에서 동쪽으로 100미터 쯤 떨어진 곳에 합장을 했다. 

 

이 의귀리의 4 ․3사건의 이야기는 문학작품에서도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현길언의 「깊은 적막의 끝(1989)」과 고시홍의 「유령들의 친목회(1989)」는 그 배경 자체가 의귀리이며, 한림화의 「한라산의 노을(1991)」에도 의귀리에서의 4 ․3 참상이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었을 정도로 이 마을의 4 ․3 피해는 대단히 컸던 것이다.

 

1949년 1월 10일(음력 1948년 12월 12일) 새벽 무장대와 의귀국민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2연대 1대대 2중대간의 전투로 많은 사상자가 생겨났다. 하지만 이들은 제대로 묻히지도 못하고 의귀리 속칭 ‘송령이골’에서 오랜 세월을 그냥 방치된 채로 잊혀져야 했다. 

 

이 전투에 대해서는 당시 2중대원이었던 이윤이 쓴 「진중일기」에 자세한 내용이 나와 있어 이를 잠시 인용해본다.

 

중대 주둔지를 중심으로 직경 6㎞ 지점까지 지형정찰을 실시하였고 수색 전에서 반도 앞잡이 두 놈을 생포하였다. 놈들을 문초한 결과 1월 13일에 놈들이 우리 중대를 습격할 목적으로 매일 밤 중대 주둔지 근처에 잠입하여 병력상황을조사하여 놈들 본부에 연락했다고 한다. 놈들의 정보를 바탕으로 우리가 놈들을 먼저 소탕하기 위하여 출동준비를 완료한 시간이 새벽 3시 반이었다. (중략) 출동 시간이 임박한 5시경에 전초진지에서 돌연 기습을 알리는 신호탄과 함께 4면에서 반도들의 고함소리와 총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오더니 내무반으로 총탄이 마구 쏟아졌다. (중략) 오늘 이 전투에서 우리 중대는 안 중사 이하 4명의 전사했고 5명이 부상하는 피해를 본 반면 반도들은 사살 96명, 생포 14명, 소총 60정과 도검류 다수와 놈들의 기밀문서 등을 노획하였다.

 

이 진중일기에서 밝힌, 사살된 반도 96명이 의귀국민학교에 수용되었던 주민들과 무장대를 합친 숫자인지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어 자세한 희생자 숫자는 모르겠지만 이 전투로 무장대 측 피해가 컸음을 알 수 있다.

 

주한미군육군사령부 일일정보보고서에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 1949년 1월 13일~1949년 1월 14일(No. 1037, 1949. 1. 14 보고)

     의귀리 교전 / 폭도 51명 사살

 

 1. 한국군, 폭도를 격퇴하다

 약 200명으로 추산되는 폭도들이 1월 12일 오전 6시 30분 의귀리에 주둔하고 있는 제2연대 2중대를 습격했으나 완전히 격퇴되었다. 2시간 동안의 교전 후 폭도들이 퇴각했을 때 경비대원 2명이 피살되고 10명이 부상 당한데 반해 폭도들은 51명이 사살되었다. 또한 경비대는 폭도들로부터 M-1 소총 4정, 99식 소총 10정과 카빈 소총 3정을 빼앗았다. (한국군 보고)

이들 시신들은 의귀국민학교에 방치되었다가 이곳 송령이골로 집단 매장되었다. 그렇지만 그 후로 돌보는 사람이 없어 현재까지 방치된 상태이며, 2004년 5월 14일 ‘생명평화탁발순례단’이 4․3연구소와 현의합장유족회와 더불어 이곳을 벌초하고 표지판을 세우고 천도제를 치뤘다. 

 

<출처: 제주도 4.3사업소, 「의귀리 4.3피해실태 전수조사 보고서(제목확인 필요)」(2003)>

 

 

○ 1949년 1월 12일 의귀국민학교 전투에서 사망한 무장대의 시신이 집단매장된 곳이다.

 

이 날 의귀국민학교에 주둔한 2연대 1대대 2중대(중대장 설재련) 본부를 상대로 한 무장대의 기습은 3시간이 넘는 치열한 전투로 회자되고 있다. 이 날 군인 4명이 전사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무장대가 교전 중 사망했다. 

이윤의 『진중일기』에는 󰡐오늘, 이 전투에서 우리 중대는 안중사 이하 4명이 전사했고 5명이 부상하는 피해를 본 반면, 반도들은 사살 96명, 생포 14명, 소총 60정과 도검류 다수와 놈들의 기밀문서 등을 노획했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밝히고 있는 사살 숫자가 의귀국민학교에 수용했다가 총살한 일반주민과 무장대 사망자를 합친 숫자인지는 불명확하지만, 많은 수의 무장대가 사망한 것은 분명했다.

 

이들 무장대의 시신은 몇 개월 동안 학교 뒤편에 버려졌다가 이곳 송령이골에 집단 매장됐다. 이후 돌보는 사람도 없이 방치되고 있던 무장대 무덤은 2004년 5뤌 생명평화 탁발 순례를 하던 도법 스님 일행이 벌초하여 안내판을 세우고 천도재를 올리면서 다소간에 정비되었다. 또한, ‘2013 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역사 기행단’이 2014년 3월에 백일홍을 심고 ‘파사현정 제폭구민(破邪顯正 除暴救民)’이란 빗돌을 세웠다.   

 

 <출처: 제주도·제주4·3연구소, 『제주4·3유적 Ⅰ』(2003)>

 

 

 

 

  현장사진​ 

 
 

 

 

 

 

 

 

 

 

 

 

 

 사료 (문서, 사진, 증언)

 

 

 속냉이골 의귀사건 희생자 유골방치 터

 

모든 생명은 존엄한 것이다.

옛말에 '적의 무덤 앞을 지나더라도 큰 절부터 올리고 가라'고 했다.

바로 이곳은 제주현대사의 최대비극인 '4.3사건'의 와중에 토벌대에 희생된 영령들의 유골이 방치된 곳이다

당시 국군 제2연대 제1대대 2중대는 남원읍 중산간 마을 일대의 수많은 주민들을 용공분자로 몰아 의귀국민학교에 수용하고 있었다.

1949년 1월 12일(음력 48.12.14) 새벽 무장대들이 내습, 주민피해를 막아보려 했지만 주둔군의 막강한 화력에 밀려 희생되고 말았다.

이때 희생된 십수명의 무장대들은 근처 밭에 버려져 썩어가다가 몇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곳에 묻혔지만 내내 돌보는 사람 하나 없이 덤불 속에 방치돼 왔다.

우리 생명평화탁발순례단은 우익과 좌익 모두를 이념대립의 희생자로 규정한다.

학살된 민간인뿐만 아니리 군인 경찰과 무장대 등 그 모두는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때 희생된 내 형제 내 부모였다.

'평화의 섬'을 꿈꾸는 제주도, 바로 이곳에서부터 대립과 갈등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우리 순례단은 생명평화의 통일시대를 간절히 염원하며, 모성의 산인 지리산과 한라산의 이름으로 방치된 묘역을 다듬고 천도재를 올리며 이 푯말을 세운다.

 

 2004. 5. 13

 생명평화탁발순례단 일동

 

(이 푯말을 세운 지 몇 년이 지나자 비바람에 많이 훼손되어 2009년 8월 15일 다시 세우면서, 무장대의 기습 날짜 등 몇 군데 수정하였음을 밝힙니다.)  

 

 

상처받은 영혼을 향한 희망이 불어오는 곳
평화·상생·해원 바람의 진원지

제주4·3평화재단

4·3유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