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북촌국민학교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제주시 지역구분(읍면) 조천면 지역구분(마을별) 북촌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면 북촌리 1212번지
GPS 위도 33.5479722222222, 경도 126.691555555556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 북촌국민학교는 4․3 당시 최대의 피해마을인 북촌리 학살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1949년 1월 17일 아침, 2연대 3대대 일부 병력이 월정주둔 11중대를 시찰하고 대대본부가 있던 함덕으로 가던 도중에 북촌국민학교 서쪽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2명의 군인이 숨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마을 원로들은 숙의 끝에 군인 시신을 들것에 실어 함덕 대대본부로 운반했다. 그러나 함덕 주둔 3대대 군인들은 스스로 찾아간 10명의 연로한 주민 가운데 경찰가족 1명(이군찬)을 제외하고는 모두 총살해버렸다. 그리고 2개 소대쯤의 병력이 북촌마을을 덮쳤다. 군인들은 아침부터 주민들이 숨어있을 만한 곳을 샅샅이 뒤지면서 집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으며 주민 모두에게 학교로 집결할 것을 명령했다. 북촌마을은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해갔으며 넋을 잃고 학교에 운집한 마을 사람들은 사색이 된채 공포에 떨었다.

 

학교 주변엔 이미 많은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으며 학교운동장을 에워싼 군인들은 기관총을 3각으로 장전하여 주민들의 도주를 차단하고 있었다. 군 지휘관이 민보단장을 불렀다. 민보단장은 함덕에 간 상태였다. 머뭇거리던 부단장 장윤관이 나오자 '민보단 운영을 이따위로 하니까 폭도를 양산시켰다.'며 운동장을 돌라고 했다. 몇바퀴 도는데 갑자기 권총으로 사살했다. 집결했던 주민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어 학교 울타리에 설치됐던 기관총이 불을 뿜더니 주민 7~8명이 쓰러졌다. 학교 운동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널브러진 시체를 한쪽으로 옮기는 사람들이 있었고, 연고가 없는 부인의 시체는 군인들에 의해 서쪽 울타리 밖으로 던져졌다. 지휘관은 주민 몇몇 사람을 호출하여 군경가족과 민보단가족을 구분하라고 했다. 주민들은 직감적으로 군경가족 대열에 들어가면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어떻게든 그 대열에 합류하려고 했다. 용케 들어간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군인들의 제지로 합류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한경림씨가 군인의 총에 사살된다. 그녀의 아기는 죽은 어미의 젖무덤에 올라 젖을 빨려고 발버둥쳤다. 이렇게 우왕좌왕 하면서 시간은 흘렀다. 

 

월정주둔 11중대를 시찰하고 돌아오던 3대대장은 앞서가던 차량이 기습당했다는 연락을 받고 부대를 출동시켰다. 그리고 마을이 불타고 주민들이 집결한 북촌국민학교에 왔다. 하급 지휘관으로부터 보고를 들은 대대장과 휘하 장교들은 대대장이 임시로 타고온 앰블런스 안에서 즉석 회의를 했다. 집결시킨 주민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의논이었다. 당시 제주경찰서 차량계 소속 경찰로써 그 날 임시로 대대장이 승차한 차량을 운전했던 김병석(남, 03년 74세) 씨는 '앰블런스 안에서 대대장을 포함한 지휘관들이 의논을 하는데, 기관총을 걸고 집중사격을 가하자는 등 여러 가지 방안이 나왔다. 그런데 한 장교가, 우리 사병들은 적을 사살해 본 경험이 없는 군인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적을 사살하는 경험도 쌓을겸 몇 명 단위로 데려가서 총살시키자는 제안을 했는데 그게 채택이 됐다.'고 증언했다. 그때부터 군인들은 주민들을 학교 동쪽 당팟과 서쪽 너분숭이 일대 등으로 끌고가 총살하기 시작했다. 또 당시 운동장에 있었던 김석보(남, 03년 68세) 씨는 '어머니와 나는 용케 군경가족 대열에 끼게 되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치맛자락만 잡고 이리 저리 쏠리던 10살 미만의 동생 셋은 끝내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놓쳐 죽음의 길로 들어갔다.'고 회고했다. 

 

그때까지 넋을 잃고 총소리를 듣던 김병석씨가 대대장에게 호소했다. '대대장님 저기 있는 사람들중에는 우리 친척도 있고 동창도 있습니다.', '저 사람들을 살리면 어디 가서 살게하느냐?', '함덕은 큰 마을입니다. 친척들도 있을 것이고 살릴 수 있습니다.', '좋다 그럼 가서 아는 사람을 선별하라!' 이렇게 해서야 계속되는 총살은 우선 멈출 수 있었다. 하지만 벌써 400여명 이상의 주민이 학교 주변 이곳 저곳에서 참혹하게 쓰러진 뒤였다. 또 국민학교 서쪽 너분숭이까지 끌려갔다가 어떤 지휘관의 사격중지 명령에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죽은 자의 수가 워낙 많아서 시체는 살아남은 아녀자들에 의해 주변에 가매장했다가 사태가 진정된 후에 안장하였고, 온 가족이 몰살당했거나 연고가 없는 시체들은 눈이 덮인 채 오래도록 방치되었다가 나중에야 야산에 묻혔다. 당시 죽은 어린아이들은 너분숭이 일대에 임시 가매장한 채로 지금도 조그마한 애기무덤으로 있다.

 

북촌국민학교 운동장은 또 하나의 역사적 장소이다. 북촌대학살이 있은지 5년 후인 1954년 1월 23일 세칭 '아이고 사건'으로 다시 한번 4․3의 아픔을 되새기게 한 것이다. 이 날 전몰장병인 북촌 출신 김석태의 고별식을 끝내고 제주의 전통풍습인 '꽃놀이'를 통하여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영혼을 학교 운동장에서 추도키로 했다. 당시 마을 이장이던 신승빈은 '이왕에 꽃놀이를 하는 바에는 4․3사태 때 죽어간 북촌리 주민들의 영혼을 함께 달래자'고 제안했다. 이에 주민들은 술을 올리고 망자의 이름을 부르며 '아이고, 이이고'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황급히 달려온 지서 경찰에 의해 제지됐지만 그 후유증은 컸다. 

 

제주경찰서는 '4․3 당시 형살자를 추모했다.'는 죄로 신승빈 이장 등 마을주민들을 조사하여 반성문을 쓰게 하는 등 4․3의 한을 더욱 덧칠하여 북촌주민들을 옥죄었다. 애무하게 죽어간 주민들의 혼을 달래려고 술 한 잔 올리고 통곡한 것도 죄가 되어 신승빈은 이장직을 놓게 된다. 

 

당시 북촌국민학교는 단층 기와였으나 마을이 소각된 후 국민학교 건물은 해체되어 함덕리 한청단장 한재원의 창고를 지어 한청 사무실로 쓰이게 된다. 현재 학교의 부지가 당시와 별 차이가 없으나 건물의 형태는 현대식으로 탈바꿈했다.

 

북촌리 대학살은 제주4․3의 가장 크고 비극적인 사건이며, 이 사건이 이루어진 장소가 학교 교정과 그 주변이기 때문에 북촌국민학교 교정에 역사적 사실과 교훈을 담아내는 안내판을 세우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출처: 제주4.3연구소, 『4.3유적Ⅰ』>

 

 

 

○ 1월 17일에는 해안마을인 조천면 북촌리에서 가장 비극적인 세칭 ‘북촌사건’이 일어났다. 이날 아침에 세화 주둔 제2연대 3대대의 중대 일부 병력이 대대본부가 있던 함덕으로 가던 도중에 북촌마을 어귀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2명의 군인이 숨졌다. 당황한 마을 원로들은 숙의 끝에 군인 시신을 들것에 담아 대대 본부로 찾아갔다. 흥분한 군인들은 본부에 찾아간 10명의 연로자 가운데 경찰가족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살해 버렸다. 그리고 장교의 인솔 아래 2개 소대 쯤 되는 병력이 북촌마을을 덮쳤다. 

 

그 때 시간은 오전 11시 전후. 무장 군인들이 마을을 포위하고 집집마다 들이닥쳐 총부리를 겨누며 남녀노소, 병약자 할 것 없이 사람이란 사람은 전부 학교운동장으로 내몰고는 온 마을을 불태웠다. 4백여 채의 가옥들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했다. 북촌국교 운동장에 모인 1,000명 가량의 마을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교단에 오른 현장지휘자는 먼저 민보단 책임자(장운관)를 나오도록 해서 ‘마을보초 잘못 섰다’는 이유로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즉결처분했다. 

 

군인들은 다시 군경가족을 나오도록 해서 운동장 서쪽 편으로 따로 분리시켜 갔다. 어린 학생 등을 일으켜 세워 ‘빨갱이 가족’을 찾아내라고 들볶던 군인들은 이 일이 여의치 않자 주민 몇십명씩 끌고 나가 학교 인근 밭에서 사살하기 시작했다. 이 주민학살극은 오후 5시께 대대장의 중지명령이 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마을주민들은 이 날 희생된 주민들이 대략 300명에 이른다고 증언한다. 

 

한편 사살중지를 명령한 대대장은 주민들에게 다음 날 함덕으로 오도록 전하고 병력을 철수시켰다. 살아 남은 주민들 가운데는 다음날 산으로 피신한 사람, 함덕으로 간 사람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런데 대대장의 말대로 함덕으로 갔던 주민들 가운데 100명 가까이가 ‘빨갱이 가족 색출작전’에 휘말려 다시 희생된다. 이 사건으로 북촌마을에는 대가 끊어진 집안이 적지 않다.

 

그런데 이 사건과 관련 김병석은 놀랄만한 증언을 했다. 김병석의 어머니는 아들 중에 경찰이 있다는 이유로 1948년 5월 13일 무장대에게 희생됐다. 그러자 경찰에서는 희생자의 다른 아들들에게 경찰이 될 것을 권유했고, 이 때 김병석도 경찰에 특채됐다. 이로써 8형제 중 4형제가 경찰이 되었다. 김병석은 “아버지께서 ‘너희가 복수하면 그들의 자녀들이 또다시 너희에게 복수할 것이니 악연을 끊을 수 없다. 악연은 당대에서 끊어라’라고 말씀하셔서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혔고 오히려 억울한 죽음을 많이 막았다”고 말했다. 김병석은 자신이 경찰에 투신한 후 직접 경험했던 북촌사건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난 운전면허증이 있는 덕에 경찰에 들어간 후 차량계에 배속됐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2연대 3대대 선임하사가 와서 “대대장 차가 고장났으니 자동차 하나 빌려달라”고 하더군요. 이에 차량계장은 “3대대 주둔지가 함덕인데 네 고향이 함덕이니 오랜만에 고향에도 갈 겸 며칠간 다녀오라”며 날 보냈습니다. 본래 GMC를 몰았는데 그 땐 앰뷸런스 형식으로 된 차로 함덕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대대장을 모시고 월정리에 있는 11중대를 둘러본 후 대대본부로 돌아가던 길에 우리보다 앞서가던 군 차량이 북촌국민학교 앞에서 기습을 당했어요. 그래서 대대 출동명령이 내려졌고 나는 대대장을 태운 채 북촌국민학교로 갔습니다. 그 때 군인들은 북촌리를 다 불태우면서 주민들을 전부 학교 운동장에 집합시켰습니다. 대대장은 우선 “군인‧경찰관 가족을 뽑아내라”고 한 후 차 안에서 참모회의를 열었어요. 앰뷸런스 형식의 차니까 중앙은 비고 양쪽으로 긴 의자가 있었는데 그곳에 약 7~8명의 장교가 모였습니다. 그 때 “돌담 위에서 박격포를 쏘아 몰살시켜 버리자”는 등 여러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런데 한 장교가 “군에 들어온 후에도 적을 살상해보지 못한 군인들이 있으니까 1개 부대에서 몇 명씩 끌고나가 총살을 해서 처리하는게 좋겠다”고 제안해 결국 그게 채택됐습니다. 그러자 나는 거의 혼이 나갈 지경이 되었습니다. 북촌리는 고향 함덕리와 가까워 우리 일가친척도 있고 동창도 있는 마을이기 때문입니다. 대대장에게 급히 사정했더니 그들을 빼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혼이 나갔는지 아무리 부르려 해도 친척과 동창들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나와 같이 운전수였던 장윤석이란 사람만 생각나 그와 그의 가족 7~8명을 우선 빼내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대대장에게 “우리 집안은 무장대에게 어머니를 잃었고 9남매 중 4형제가 경찰로 있는 반공가족입니다. 그런데 저기 끌려나가는 노인‧부녀자‧어린아이들이 무슨 사상이 있습니까. 저들을 살려주십시오”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대대장은 “나도 살려주고 싶지만 그러면 어떻게 저들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처럼 대대장도 본래는 주민들을 죽일 생각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에 나는 “걱정 마십시오. 함덕리에만 가면 다 저들의 친척이 있는데 함덕리는 큰 마을이니까 다 해결이 됩니다”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계속 사정하니까 대대장은 “그러면 네가 책임져라”면서 사격을 중지시켰습니다. 그러나 이미 수백명이 끌려나가 총살된 상태였습니다.

 

이미 집들을 다 불태워 버린 상태에서 그들을 수용할 대책이 없어 죽였으며, 군인 개개인에게 총살의 경험을 주기 위해 박격포 대신 총을 사용했다는 증언이었다.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피해를 당했음에도 북촌리 주민들은 이후 이 사건에 대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특히 희생자들을 위령하며 통곡했다는 이유만으로 줄줄이 경찰에 잡혀가 곤욕을 치렀던 일은 주민들을 더욱 움츠리게 했다. 

 

마을에서 속칭 ‘아이고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1954년 1월 23일 벌어졌다. 한국전쟁 전몰장병인 김석태(金錫泰)의 고별식이 열린 날이었다. 이 날 주민들은 국민학교 교정에서 전사자의 고별식과 속칭 ‘꽃놀이’를 하던 중 “오늘은 6년전 마을이 소각된 날이며 여기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지 6주년 기념일이니 당시 희생된 영혼을 위해 묵념을 올리자”는 한 주민의 제안에 따라 묵념을 하게 됐다. 그 때 설움에 북받친 주민들이 대성통곡을 한 것이 경찰에 알려져 곤욕을 치른 것이었다. 

 

1960년 4‧19 후 국회 차원의 양민학살 진상규명 사업이 벌어지자 북촌리 집단살상 피해를 취재 보도한 한 언론은 ‘끔찍한 악몽, 과부(寡婦)의 마을…해마다 이맘땐 집단제사’라는 제목 아래 “남녀 유권자 비율을 따져보면 거의 3대 1에 가까울 만큼 남자들이 희소한 곳”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곧 5‧16이 발생해 진상은 다시 묻히고 말았다. 심지어 경찰은 1990년 '제주경찰사'를 펴내며 다음과 같이 북촌사건을 왜곡했다.

 

이 마을을 습격한 공비들은 어린이와 노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마을 남자들을 무참히 학살하거나 납치해 갔다. 토벌대가 공격해 가자 공비들은 일부는 산으로 도망가고 일부는 마을로 숨어들어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장시간 소탕전이 벌어지고 북촌리는 황폐한 마을이 되어 버렸다.

 

북촌리민을 살해한 가해집단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것이다. 이 때에도 북촌리 주민들은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후 ‘4‧3’ 진상규명 운동이 일어 북촌사건의 진상이 널리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10년 후인 2000년에 새로 '제주경찰사'를 펴낼 때에도 위의 내용을 그대로 실었다. 그러나 10년 전과 달리 북촌리민을 포함해 많은 제주도민들은 책의 내용에 대해 분노했다. 범도민적인 저항에 부딪힌 제주도경찰국은 결국 '제주경찰사'를 모두 회수했고, ‘4‧3관련 부분’을 도려낸 후 다시 배포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출처: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현장사진

 

 

 

 

 

 

 

 

 

 

 

 

 사료(문서, 사진, 증언)

  

〇 증언: 고완순(77세, 여, 조천 북촌)

 

그 날(1949년 1월 17일, 음력 1948년 12월 19일)은 군인들이 집을 불태우며 학교로 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2동에 살았습니다. 우리가 살던 골목에는 집이 7채가 있었습니다. 우리 집은 우측에서 세 번째였는데, 밖에서부터 불을 질러서 군인들이 안으로 들어오려 해도 연기가 꽉 차고 열기 때문에 못들어 온 것 같애요. 그래서 우리도 나갈까 말까 주저주저하는데 애기 울음소리가 나버렸어요. 밖거리에 애기가 있었어요. 그 애기가 우는 바람에 (군인들이) 들어 와서 끌려 나갔습니다. 나와보니 집들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학교 울타리에 기관총이 2개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울타리는 그대로입니다. 학교 동쪽 울타리에 기관총을 걸어놔 있었고, 운동장에 가보니까 사람들이 꽉 찼어요. 우리는 정문하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데 앉아 있었습니다. 남자(군인)가 교단에 있었는데 운동장에 있던 남자 8명 정도가 나가 서 있었습니다. 뭐라 하는지 말은 잘 안 들리고. 하여튼 “마을에서 군인 차를 쏘아서 군인이 죽었다”고, “마을을 잘 못 지켰다”고 해서 앞에서 ‘타타타’ 쏘아서 죽였습니다. 민보단장인가 민보단원들입니다.

우리 마을에 조ㅇㅇ(50)과 임신 8~9개월 정도 된 부인(38)이 있었는데, 그 사람 부부도 죽여서 운동장 서쪽으로 내던지는 것을 봤습니다. 그 다음부턴 사람들이 안 죽으려고 뒤로 밀려나려 하자, 기관총이 난사되었습니다. 우린 안 맞을려고 돼지처럼 딱 엎드려 기었습니다. 기면서 보니까 김ㅇㅇ(여, 41) 한 분이 죽었는데, 아기(남, 당시 3)가 배 위에서 젖 먹으려고 하는 걸 어떨 결에 내가 손으로 탁 짚었습니다. 시체에 걸린 겁니다. 뒤로 물러나다 보니. 그게 북촌기념관에 걸린 그림(강요배 작, ‘젖먹이’)입니다. 

기관총 소리가 멎고, 다음엔 군인들이 참나무 긴 몽둥이들 들고 이제 “시에 갈 사람은 따라오면 살려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막 몰려가니까 딱 잘랐습니다. 동서로 분단이 되듯이. 따라가려고 하면 몽둥이로 막 두들겨 팼습니다. 대나무 긴 것을 가운데 묶어서 자르니까 38선 자르듯이 갈라졌습니다. 그러면서도 서쪽으로도 가고, 동쪽으로 가고 그때는 어느 쪽이 사는지를 몰랐습니다. 저는 가족하고 안 떨어지려고 언니 손만 꽉 잡았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남동생을 업고 있었고. 남동생은 무서워서 울다가 군인이 휘두른 참나무 몽둥이에 머리통을 맞았는데, 그 후유증인지 4·3이 끝나서 2년 정도 있다가 죽었습니다. 

그때 30명씩 끊어서 제주시로 간다니까 다 나갔지만, 처음에는 죽이는 줄을 몰랐습니다. 첫 번에는 ‘당팟’으로 끌고 갔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타다닥’, ‘타다닥’ 소리가 났습니다. 한 세 번쯤 끌려 나갔는데. 우리 언니가 “어머니, 암만 해도 시에 데려가는 게 아니고 죽염수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끌려간 것이 옴팡밭. 우리 식구 다 갔습니다. 30명씩 잘라서 갔죠. 그때는 정신없으니까 누가 같이 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상황에 닥치니까 아무생각이 안 났습니다. 옴팡밭에 가서 보니 사람들이 죽어 있었습니다. 한 무더기씩 데려가서 죽였으니까요. 우리가 마지막으로 간 것 같애요. 피도 흥건하고, 흙이 피로 시커멓게 변해 있었습니다. 쭈욱 앉혀서 있는데 뒤에서 철거덕 철거덕 총 소리가 나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어요. 너무 무서워서 떨고 있는데, 뒤에서 군인이 “사격중지!”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죽이지 말라고 했나봐요. 군인이 “이 간나새끼들, 파리 목숨보다 더 질기네”라고 했나, 하여간 쌍스런 말을 하는 걸 들었어요. 전라도인지? 이북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는 “가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은 내버려두고, 거기에 앉았던 사람들은 운동장으로 돌아왔어요. 운동장에 오니까 산 사람은 다 모여 앉아 있었습니다. 마을은 뜨거운 열기로 하늘이 빨간 불바다 같았습니다. 

그날 살아나자, 외할머니가 생각이 났습니다. 외할머니네 집으로 뛰어가다 보니까 할머니 한분이 죽어 있는데 불 타는 서까레가 떨어져서 타고 있었습니다. 소 돼지도 날뛰고... 내가 남동생을 업고 언니하고 어머니는 ‘당팟’에 우리 할아버지 형제분의 시신을 찾으려고 갔습니다. 시신들을 다 뒤적이며 찾았다고 합니다. 나한테 동생을 업고 있으라고 해놓고.

  어머니는 그날 저녁에 할아버지 형제 시신을 찾아서 가마니를 구해다가 흙을 덮고 돌로 지둘려놨어요. 그날 저녁도 마을은 아비규환의 현장이었습니다. 주민들은 ‘아이고 어멍아’, ‘“아이고 누게야’ 하면서 아수라장이었습니다. 나는 우리 동생 업어서 집에 갔는데, 다행히 골목집이라 우리 집은 안탔습니다. 그 골목에 두 집만 탔고 다섯 집은 안탔습니다. 어머니는 할아버지 시신을 토롱해서 묻어두고 늦게야 왔습니다. 이튿날 아침엔 피난 간다 해서, 함덕으로 가야했습니다. 군인들이 사격을 중지한 후에 대장이 올라서서, “여러분들 집에 가면 집도 불다 타버리고 잘 데 없으면 학교에서라도 하룻밤 자고 내일은 함덕으로 와라”고 하고 갔기 때문이었습니다.  

함덕리 서우봉 가면 지금은 길이 크게 났는데, 그 전에는 리어카 하나 다닐 정도로 좁은 길이 있었습니다. 이튿날(1949년 1월 18일)은 바람이 불고, 눈비가 와서 걸어갈 수가 없는 날씨였습니다. 어머니는 개나리봇짐 닮은 거를 언니하고 나한테 지워놓고, 동생을 업고 갔습니다. 함덕으로 넘어가는 이제 해수욕장 돌아가는 입구쯤 됐나봅니다. 사람들이 쭉 앉아 있었습니다. 우리도 거기 앉아서 기다리는데 ㅇㅇㅇ이라는 사람이 그곳에 서서 ‘너, 나와!’, ‘너는 가!’ 하면서 사람을 가려내더라고. 우리는 ‘합격’이 되어 함덕에 갔습니다. 너무 춥고 떨렸습니다. 이제 같으면 경로당인데 신성회관이라는 곳에 모이라고 해서 가보니 허벅에 좁쌀로 죽을 쒀서 나눠 주고 있었습니다. 배고프고 춥고 한데 따뜻한 거 미움 같은 것을 주니 살 것 같았습니다.

 

상처받은 영혼을 향한 희망이 불어오는 곳
평화·상생·해원 바람의 진원지

제주4·3평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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