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낙선동 4.3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제주시 지역구분(읍면) 조천면 지역구분(마을별) 선흘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2734번지 일대
GPS 위도 33.4805833333333, 경도 126.709527777778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 1948년 11월 20일 선흘리가 초토화작전으로 불타버리자 마을 주민들은 인근 선흘곶의 자연동굴이나 들판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그러나 은신했던 굴이 잇따라 발각되면서 많은 희생을 치르게 된다. 미리 해변마을로 소개 내려간 주민이나 나중에 야산에 은신했다가 붙들려 온 주민들 중에도 도피자가족 등의 갖은 이유로 희생을 당한다. 그런 세월을 딛고 살아남은 주민들이 1949년 봄이 되자 낙선동에 성을 쌓고 집단 거주했다.  

 

이러한 돌성은 당시 소개된 후 재건하는 산간마을은 물론 해변마을까지 무장대의 습격을 방비한다는 명분으로 제주도 대부분 마을에 축성을 했다. 즉 주민들과 유격대와의 연계를 차단하고 주민들을 효율적으로 감시․통제하기 위해 만들었던 전략촌의 한 유형이었다. 

 

축성작업은 주민들을 동원해 이루어졌다. 성을 쌓는 작업은 주둔소를 쌓는 작업보다 오히려 더욱 힘든 일이었다. 마을을 돌아가면서 쌓는 성의 규모는 주둔소에 비해 훨씬 컸기 때문이다. 해안 마을로 피난 갔거나 감금됐던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한 축성 작업은 1949년 봄 한달 동안 계속됐다. 선흘 본동 출신으로 현재 낙선동에 살고 있는 고학봉(남, 03년 71세) 씨는 '낮엔 경찰의 감시 하에 성을 쌓았다. 그리고 어두워지면 함덕으로 내려가 자고, 다시 아침이면 낙선동에 성을 쌓으러 오는 생활을 한 달 정도 했다.'고 말했다. 성을 쌓는데는 피난 내려간 선흘리민만 하는게 아니라 조천면 관내의 타 지역 주민들과 부녀자는 물론 국민학생들도 동원됐다. 당시 성을 쌓았던 주민들은 하나같이 '등짐을 져서 돌을 날랐기 때문에 어깨나 등이 다 벗겨질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성의 규모는 대략 가로 150m, 세로 100m, 높이 3m, 폭 1m로 총 500여m의 직사각형 모형이었다. 고학봉 씨는 '성밖으로 너비 2m, 깊이 2m 정도의 도랑을 파서 가시덤불을 놓아 폭도의 침입을 막으려했다.'고 증언했다. 

 

1949년 4월 성이 완공되자 선흘리 주민들은 겨우 들어가 잠만 잘 수 있는 함바집을 짓고 집단적으로 살았다. 일종의 수용소나 마찬가지였다. 성밖 출입도 통행증을 받아야 가능했고 밤에는 통행금지였다. 이 당시 마을 주민 중 젊은 남자들은 무장대 동조세력이나 도피자가족으로 몰려 이미 많은 희생을 치른 상태였다. 그나마 살아남은 청년들은 1950년 발발한 6․25 때 대부분 자원입대 했기 때문에 성을 지키는 보초는 16살 이상의 여성과 노약자의 몫이었다. 그들은 낮엔 밭에서 일하고 밤엔 성을 지키는 고단한 생활을 이어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경찰파견소 주둔 경찰의 먹을거리를 마련하느라 고초를 겪었다. 또 노인들이 보초를 잘못섰다고 파견소 경찰한테 폭행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성을 쌓아 보초를 섰지만 1950년 가을까지 산사람들이 가끔 성 위로 나타나서 연설을 하고 새벽닭이 울 때가 되면 사라지곤 하다가 더러는 토벌대의 수류탄에 맞아 숨지기도 했다. 

 

이곳은 선흘리 본 마을과는 떨어진 곳이었다. 알선흘로 불리며 인근에 봉냉이동산, 돛바령 등의 작은 마을이 있었다. 축성을 한 이곳에도 원래 마을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해변과 가까운 곳에 우선 재건성을 쌓은 것이었다. 선흘리 주민들은 1956년 통행 제한이 풀리면서 비로소 원래 마을이 있었던 자리에 집을 지어 살았고, 일부는 그냥 성안에 정착해 오늘날의 낙선동을 이루고 있다. 

 

성을 쌓는데 필요한 돌은 대부분 인근 밭담이나 산담을 이용했으나 돌이 모자란 탓인지 심지어 돌절구나 주춧돌 등도 성을 쌓는데 이용된 것을 볼 수 있다. 지금 이 성터를 돌다보면 성벽 중간에 안과 밖이 보이는 조그만 창을 볼 수 있다. 바로 밖으로 총구를 겨누었던 총구이다. 이 성터 위에 올라가면 마을 먼 곳까지 조망할 수 있다. 

 

낙선동성은 4․3 당시 축조된 성 가운데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유적 가운데 하나이다. 일부는 허물어지고, 일부는 과수원의 경계표시를 위해 옮겨서 쌓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원형을 복원하는데는 무리가 없다고 판단, 2007년 제주도에 의해 복원되어 관리중에 있다. 

<출처: 제주4.3연구소, 『4.3유적 Ⅰ』>

 

 

 ○ 제주의 돌담은 역사를 쌓아둔다.

제주는 돌의 섬이다. 태초부터 돌과 더불어 살아 왔고, 돌과 더불어 역사를 형성해 왔다. 밭 사이사이에 흩어진 돌담(밭담)은 농부의 민요가락을, 무덤의 돌담(산담)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옛성의 돌담(성담)은 역사의 영욕을 쌓았다. 제주돌담은 역사를 쌓아 두는가 보다.

 

제주의 현대사에서 최대의 사건이라 할 수 있는  4 3항쟁 도 돌담이 남긴 역사가 있다. 돌담은 4 3당시 산사람(유격대,빨치산)의 은신처가 되기도 하였으며, 피난민을 보호해주는 움집을 짓는데 사용되기도 했다. 토벌대의 작전수행시에는 진지와 방호벽을 구축하는데 사용되었다.

 

지금 내가 찿아가는 조천읍 선흘리 낙선동(속칭: 알선흘) 석성도 돌담으로 쌓은 역사의 현장이다. 4 3당시 산사람들과 마을사람들의 연계를 차단하고 분리시키기 위해 토벌대의 작전계획에 따라 쌓은 석성이다. 4 3당시에 쌓은 성터는 몇몇 마을을 제외하고는 어느 마을을 가더라도 찿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이 허물어져 그형체를 알아보기란 쉽지않다. 내가 지금껏 본 바로는 유독 낙선동의 석성만큼은 거의 원형에 가깝게 남아있었다.  4 3당시 성터를 보고자 하는 순례자가 있으면 알선흘 성터를 권한다.

 

이번 유적지 순례기에는 경기도에서 유적지 순례차 내려온 사람들과 동행하였다. 낙선동 성터를 찿아가기 위해서 버스를 달려 함덕리로 간다.

 

아스팔트 위에는 몇천 관(貫)이나 되는 것 같은 직사광선의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길가 협죽도(유도화)가 칠팔월 불더위에 붉은 꽃을 피운 모습이 인상적이다. 혹자는 4 3의 흘린 피가 붉은 꽃으로 피어나고 제주의 한은 나무의 독으로 상징된다고 이야기 한다.

 

함덕리 해수욕장 앞 평사동에  도착했다. 언제나 우리를 반겨주는 것은 검푸른 파도와 낯익은 바람 결이다. 해수욕장이 하얀 모래밭과 너무 아름다운 바다빛이 여행객의 마음을 흔든다. 해수욕장 동쪽끝 서모봉의 둥그런 모습사이를 오가는 바다빛은 햊빛에 반사되어 더욱 매혹적이다.  과거 학살터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던 비극의 흔적은 말끔히 감추어 버렸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해수욕장 모래를 파다보면 뼈가 튀어나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는 말은 이제 잊혀져 버리고 있다.

 

그러나 협죽도의 붉은 꽃은 뭔가 다시한번 생각하라 하지 않는가. 생은 길게 살아 백년이라지만 한은 천년까지도 서린다는 옛사람의 말이 생각난다.

 

 

함덕 해수욕장 앞에서 한시간에 한번 있는 중산간 버스를 기다림에 지쳐있던 우리 일행은 요행히  지나가던 경운기를 얻어 탈 수 있었다.

 

아저씨! 선흘리 낙선동 유래가 어떻게 됩니까?  일행중의 경운기 운전하는 아저씨에게 물었다.  선흘리에서 떨어진 마을이라는 데서 낙선동이라 하지. 밑에 있는 선흘이라는 데서는 알선흘이라고도 하지. 

 

선흘은 지금부터 약 400여년 전에 설촌된 부락으로 이 일대 중산간 부락에서 가장 먼저 부락이 설촌되었다는 데서 처음에는 먼저선(先)자를 써서 선흘리라 불리우던 것이 후세에 와서 착할선(善)자로 바꾸어 선흘리(善屹里)라 불리웠다. 흘(屹)자는 그 지세가 평탄하지않고 우뚝우뚝한 돌동산과 바위가 많다는 데서 유래된다. 이는 와흘(臥屹), 대흘(大屹)과도 통하는 이름이다. 선흘리는 8.15직후에 300호가 넘었던 큰 마을로 지금도 웃선흘, 알선흘을 합치면 약 250호가 된다.

 

억수동을 지나 낙선동에 이르러 성터를 찾는다. 긴  올래 (도로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길)를 지나면 집이 한 채 서있다. 집 뒷의 우영밭(집 옆에 있는 밭)에 들어서면 동으로 길게 뻗은 높은 성이 돌담으로 쌓은 성이 나타난다.

 

거대한 성벽은 높이가 3-4m에 이르고 성 밑 폭은 2m나 되었다. 덧자란 넝쿨이 돌성담을 조금씩은 뒤덮여 감추기도하고 이끼가 끼어 돌빛이 바래 45년의 세월이 깊이를 말해준다. 높고 길게 휘두른 돌담 사이사이에 민중의 아팠던 숨소리가 흐르는 듯하다. 역사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돌담 양옆에 심어진 귤나무들이 푸른 잎사귀는 그 지난 세월을 이기려는 듯 싱싱하기만하다. 성벽 중간에는 군데군데 총구가 만들어져 있다. 성담을 쌓기위해 이 많은 돌덩이들을 어디서 운반했을까? 아마 이 부근의 밭담이나 산담은 거의 성을 쌓는데 사용했을 것이다. 성담에 쌓여진 돌덩이들에는 돌절구, 추춧돌 등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뭉클하게 한다.

 

성벽을 따라 100m정도 걸어 모서리 근처에 가보니 석성 망루가 있었던 것 같은 흔적이 있다. 성벽을 기어 올랐다. 시야가 탁트였다. 이곳은 지형상 언덕받이 같이 툭 튀어나온 곳이어서 감시하기에는 좋은 위치임을 직감할 수 있다. 멀리 바다가 출렁이고 함덕해수욕장이 내려다 보인다. 동쪽으로는 해안까지 길게 뻗은 선흘곶(고지:숲 또는 밀림) 곳이 있다. 아마 선흘곶에서 출현하는 산사람들을 감시 하였을 것이다.

 

성은 직사각형 모향으로 둘러져 있다. 긴 성벽은 150m, 짦은 성벽은 100m 총 둘레가 500여 미터 정도 되었다.

 

4 3항쟁의 대토벌기인 1948년 10월 중순부터 토벌대는 효율적 토벌이라는 명목하에 새로운 작전을 실시하였다.

 

1948년 10월 17일 제주도 토벌대 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발표 하였다.

 

  ......매국적 극렬 분자를 소탕하기위해 10월 20일 이후 행동종료기간중 전도 해안선으로 부터 5Km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임...... (동아일보, 조선일보 1948년 10월 20일)

 

이후 토벌대는 산사람과 주민을 분리시키고, 유격대의 근거지를 빼앗아 효과적으로 진압하기 위하여 마을 전체를 불살라 버리고 집단부락 전략촌을 건설하여 주민들을 집단 이주시키는 소진(燒盡)전략, 소개(疎開)전략을 채택하였다. 이는 한 만국경에서 중국 및 조선의 항일 독립투쟁시 일본군들이 유격대를 토벌할 때 사용하던 전략이었다.

 

 이러한 포고문과 작전계획에 따라 도내 160개 리(里)에서 130개리가 토벌대에 의해 불태워졌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도민들이 학살되었고, 식량, 의료, 가구, 농기구, 축우 등 일체가 소실되었다. 중산간지역 소개민들은 살기위하여 산으로 오르거나 해안부락을 찾아 떠났다. 해안부락과 수용소는 소개민으로 넘쳤다.

 

토벌대는 넘치는 소개민에 대한 통제와 수용, 토벌작전을 효율적으로 수행한다는 명목하에 11월부터는 제주도 전역에 축성 부락을 건설하였다.

 

 선흘리도 이러한 작전에 따라 1948년 12월 20일 부락 전체가 전소되었다.  부락민중 일부는 산으로 피난하였으며 일부는 해안부락으로 소개되었다. 이중  마을사람들과 함께 산으로 갔다는 안모씨는  마을이 소개되자 마을 사람 300여명과 함께 마을 남쪽  너상굴 동산 에 있는 굴로 피신하였어. 거기에는 웃굴과 알굴이 있는데 웃굴에는 젊은 사람들이 피신하였고 알굴에는 어린이와 노약자들이 있었지. 나중에 군에게 발각되어 젊은이들은 대부분 총살되었고 나와 나머지 주민들은 함덕국민학교에 감금되었지. 팔을 돌려 결박당했기 때문에 주먹밥을 개처럼 엎드려서 먹었어.... 

 

1949년 초, 감금되었던 주민들이 석방되자 소개되었던 주민들과 함께 경찰의 동원에 의해 성을 쌓기 시작했다.

 

낙선동성의 역사를 자세히 알기 위해 주민들을 만나보았다.

 

성은 기축년(봄)에 한달동안이나 쌓았어. 함덕에 소개되어 살면서 아침이면 올라와 경찰이 총을 들고 감시하는 속에서 성을 쌓다가 날이 저물면 해안마을로 내려가곤 했어요. 북촌, 함덕사람들도 다 동원 되었지. 성을 쌓을 때는 아녀자, 할망할 것 없이 동원되었고 국민학교 3, 4학년인 우리들도 동원 되었어. 밭담이나 산담을 허물어 지게나 둑지(등)에 돌을지고 날랐는데 둑지가죽이 다 벗겨지고..... 

 

1949년 4월 쯤에는 성이 완성되어 성내에 배당된 연립식 움막(일명  함바집 )을 짓고 살았다. 성안 생활은 그야말로 짐승우리와 같았다. 성밖 출입시에도 반드시 통행증을 발급 받아야만 출입을 할 수 있었고 저녁에는 모든 통행이 금지되었다.

 

지금 성이 있는 곳은 원래 마을이 아니고 밭이었어. 지금은 마을이 되었는데 원래 마을은 북쪽에 있었어. 이 지형이 동산지고, 봉천수도 있고 해서 여기다 성을 쌓은거라. 처음에는 함바라고하는 긴집에  칸을 나누어 살았는데 겨우 들어가 잠만 잘수 있는 정도라. 방은 고사하고 부엌도 없어. 자다가 보면 솥단지 밑으로 머리가 들어가 있고..... 밭에 일하러 다닐때는 농장지를 가져야만 갈 수 있었고, 신분증이 없으니까  남패 라고해서 네모난 나무에 신분을 표시하여 갖고 다녔어. 

 

4 3을 떠올릴 때마다 그 어려운 시절을 어떻게 넘겼는지 모르겠다는 선흘리 부홍룡씨의 말이다.

 

이 마을은 남자들은 거의가 죽거나 입산해 버려 보초서는 일은 여자의 몫이었다. 16세 이상의 처녀들은 소위 여성대라고 하여 격일제로 보초를 섯다. 성내에는 모서리 마다. 4개의 초소가 있었고, 초소와 초소 사이에는 4개의 간이초소가 세워졌다. 여자들은 밭에 갔다가 저녁을 먹고 초소에 가서 철창이나 죽창을 들고 보초를 섰다. 보초막은 성위로 원두막과 같이 나무로 만들었다. 그 위에서 망을 보았다.

 

당시에 보초를 섰던 한 할머니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보초는 보통 2-3명씩 섰는데 피곤해서 잠을 잘까봐, 자꾸 초소끼리 전달을 했어.  1번 초소 주의전달 하면 다음 초소에서  2번 초소 주의전달 하고 외쳤어. 또 암호가 있었는데 나는 어렸기 때문에 암호를 잘 잊어 버리곤 하였지. 경찰이 왔을때 암호를 잊어버리면 큰일나기 때문에 자꾸 불피운 곳에가서 암호를 물어보고 와서는 돌에 숯으로 살짜기 써 놓았다가 잊어버리면 다시보곤 하지. 교대시간은 시계가 없으니까 달의 위치를 정해놓고 바꾸고, 달이 없는 날은 나이많은 사람이 너 어느집 닭이 울면 교대다 하고 말하면 닭이 울기만 기다리다가 그 닭이 울면 교대를 하였어. 보통 하루밤에 4-5번씩 교대를하지. 

 

그리고 성 밖은 돌아가면서는 폭 2m, 깊이 2-3m이 함정을 팠다. 그리고 그 앞에는 나무로 기둥을 세워 철조망 대신 가시덤불을 베어다 쌓았다.

 

선흘리 김창조 할아버지는  일년에 몇 번씩 마을 주민들을 출역시켜 가시나무를 짤라서 쌓지. 주로 몸에 잘 달라 붙는 범줄가시나 가시가 큰 국가시나무를 주로 베어왔어. 또 경찰들은 산사람들이 숲에서 숨어 망을 볼지 모르니 시계(視界)청소하라고 해서 성 주변의 나무는 싺 짤라버렸지. 성위에는 사람 머리 모양으로 돌을 올려 놓기도 했지. 위장한 거지. 실지로 사람들은  성담에 총구와 같은 구멍을 만들어서 그곳에서 감시를 허여  

성을 쌓고 난 후  한번 산 사람들이 습격이 있었다. 1949년 음력 5월 5일 단오날이었는데 식량과 의류를 구하러 온 것이었다. 이날 산사람들과 경찰과의 대결로 마을주민들이 몇명 부상당하고 산사람들이 군, 경의 수류탄에 맞아 숨지기도 하였다. 1950년 가을까지 산사람들은 가끔 성위로 나타나서 연설을 하고 새벽닭이 울 때가 되면 사라지곤 하였다.

 

1956년 통행제한이 풀리면서 선흘리마을 사람들은 일부는 원래마을이 있었던 자리에 집을 지어 재건하기 시작했고 일부는 성안에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출처, 제주4.3연구소, 「4.3장정」> 

 

 

 

 

 현장사진

 

 

 

 

 

 

 

 

 

 사료(문서, 사진,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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