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목시물굴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제주시 지역구분(읍면) 조천면 지역구분(마을별) 선흘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산26번지 일대
GPS 위도 33.51025, 경도 126.722333333333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〇 선흘리 초토화 이후 선흘리민들이 은신했다가 희생당한 곳이다.

 

1948년 11월 21일 선흘리 일대가 토벌대에 의해 불탄 이후 선흘리민들은 선흘곶 일대의 곶자왈과 동굴을 은신처로 삼았다. 하지만 굴이 발각되면서 많은 희생을 치렀다.

 

1948년 11월 25일 목시물굴에서 1㎞ 남짓 동쪽에 이웃에 있던 도툴굴이 발각되면서 많은 주민들이 현장에서 총살당했다. 또 일부는 함덕 대대본부로 끌려갔다. 그들은 마을주민들이 숨어 있는 곳을 대라며 밤새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다. 고문에 못 이겨 한두 사람이 목시물굴의 존재를 토해냈다. 

 

11월 26일 아침, 함덕 주둔 9연대 토벌대는 길잡이를 앞세우고 선흘곶을 향했다. 전 날 도툴굴에서의 희생소식을 이 날 아침에야 감지한 주민들이 시체를 수습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더러는 식사준비를 하던 중에 토벌대가 들이닥친 것이었다. 토벌대는 선흘곶을 향해 박격포를 쏘며 묵시물굴로 향했다. 주민들은 대부분 목시물굴로 들어갔다. 일부는 인근 숲속으로 뛰었다. 김형조 씨는 "아내와 형님 등 가족이 목시물굴에 숨어있었다. 집에 있으면 죽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임시 먹을 것을 들고 주민들이 목시물굴에 숨었다. 토벌대가 총을 쏘면서 들어오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시 목시물굴로 숨어 들어갔다. 형님이 나한테 빨리 들어가자고 했지만, 나는 이왕 죽을거 다른 데로 뛰자고 생각해서 동쪽 숲으로 뛰었다. 결국 그 때문에 살아났다."고 증언했다. 

 

목시물굴은 도툴굴보다 작은 굴이지만 200여명 이상 대부분의 선흘주민들이 은신해 있는 굴이었다. 토벌대는 굴속에 수류탄을 투척하며 주민들에게 나올 것을 종용했다. 나가면 죽음이 뻔한 것을 안 주민들은 버텼다. 목시물굴에 숨었던 고춘석 씨는 "군인들과 굴 안에 있던 청년이 말을 주고받으며 몇 시간씩 대치했다. 결국 아이들이라도 살려야 된다는 굴 내부의 의견이 모여지면서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거의 마지막으로 나왔는데 벌써 굴 밖에는 총살당한 시신들이 뒹굴고 있었다. 태어난지 100일도 안된 어린아이도 죽었고 50세 넘은 노인도 쓰러져 있었다."고 말했다. 군인들은 전날 고문을 받고 목시물굴을 안내한 한아무개도 현장에서 총살됐다. 김형조 씨는 󰡒목시물굴에 들어가지 않은 네명이 덕천리 지경의 높은오름에 앉아 정황을 살피노라니까, 낮 시간이 되니 막 연기가 나고 총 쏘는 소리, 사람 죽어가는 소리가 엄청 들렸다󰡓고 증언했다. 조명옥(여, 03년 82세) 씨는 "채 돌도 안 지난 여자아이는 자꾸 우니까 울음소리 때문에 들킬 것을 염려한 아이 아빠가 입을 틀어막았는데 숨이 막혀 죽어버렸다."고 했다. 

 

이 날 목시물굴에서 총살된 희생자는 고경환, 고달옥, 고영백, 고일생, 고임형, 고태휴, 김기환, 김병규, 김삼준, 김성천, 김성홍, 임원준, 김정봉, 김태진, 김홍인, 김봉수, 부사인, 부원화, 부좌룡, 부희룡, 부춘하, 안도훈, 안두용, 안창성, 안창윤, 안태규, 안태인, 양중근, 윤구성, 윤한생, 정창호, 조영순, 조홍배, 한정선, 한재준, 한재준의 딸, 부서남, 고백선, 안창하 등 40여명이다.

 

이들은 굴에서 나오자마자 총을 쏘고 기름을 붓고 태기 때문에 나중에 시신의 얼굴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고 김형조 씨는 증언했다. 아무튼 도툴굴과 목시물굴에서 총살된 희생자들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임시 매장을 했다. 토벌대는 지리를 잘 몰랐기 때문에 주민을 길잡이로 해서 다닐 수 밖에 없었다.

 

전 날 도툴굴에서 잡힌 사람을 고문해서 목시물굴을 안내받아 주민들을 학살하면서 길을 안내한 사람도 총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뿐만 아니라 목시물굴에 은신했던 주민들 중 살아남은 사람들을 󰡐반못󰡑까지 끌고 오면서 건장한 남자들에겐 목시물굴에서 먹던 식량을 지고 오라고 했는데, 장정들이 식량을 지고 와서 GMC 차량에 싣자 그들을 반못 바로 옆 󰡐궤우물󰡑 인근에서 총살해버렸다. 그렇게 희생된 사람은 고백선, 고달홍, 안창학, 고순규 등이다. 또 고태근은 무겁게 식량을 지고 와서 힘들어서 비틀거리니까 새동네 쪽으로 끌고가 총살시켜버렸다. 

 

군인들은 총살에서 제외된 주민들을 GMC 차량에 태우고 함덕 대대본부로 향했다. 이들 중 일부는 고문을 받고 주민들이 피신해 있는 인근 대섭이굴과 벤뱅듸굴 등을 안내한 후 총살당하는 운명을 맞이하고 억물에서도 15명 이상이 집단학살 당하는 비운을 맞는다.

 

목시물굴은 입구가 두 개로 길이는 약 100m 정도 된다. 한쪽 입구는 한 사람이 누워서 들어갈 정도로 좁고 한 쪽은 비교적 크다. 안에는 넓은 공간도 있으나 용암이 흐르다 굳어버린 암석이 바닥을 형성해 울퉁불퉁하고 낮은 형상이다.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머물기는 부적절한 구조다. 지금은 선흘리민 한씨의 벌꿀농장이 있으며 주변에는 󰡐트󰡑(주:아지트의 줄임말. 4․3 당시 무장대나 피난주민들이 움막을 지어 생활하던 곳)의 흔적이 산재해 있다. 

 

4․3 역사기행을 할 때 자주 찾아가고 있으며 굴속 체험도 잦은 편이다. 이곳은 각별히 보존해서 역사교육현장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출처: 제주4.3연구소, 『4.3유적 Ⅰ』> 

 

 

 

〇 선흘리 초토화 이후 선흘리민들이 은신했다가 희생당한 곳이다. 1948년 11월 21일 선흘리 일대가 토벌대에 의해 불탄 이후 선흘 주민들은 선흘곶 일대의 곶자왈과 동굴을 은신처로 삼았다. 하지만 굴이 발각되면서 많은 희생을 치렀다.

 

1948년 11월 25일 목시물굴에서 1㎞ 남짓 서쪽에 이웃에 있던 도툴굴(반못굴)이 발각되면서 많은 주민들이 현장에서 총살당했다. 또 일부는 함덕 대대본부로 끌려갔다. 그들은 마을주민들이 숨어 있는 곳을 대라며 밤새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다. 고문에 못 이겨 한두 사람이 목시물굴의 존재를 토해냈다. 

 

11월 26일 아침, 함덕 주둔 9연대 토벌대는 길잡이를 앞세우고 선흘곶을 향했다. 전 날 도툴굴에서의 희생소식을 이 날 아침에야 감지한 주민들이 시체를 수습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더러는 식사준비를 하던 중에 토벌대가 들이닥친 것이었다. 토벌대는 선흘곶을 향해 박격포를 쏘며 묵시물굴로 향했다. 주민들은 대부분 목시물굴로 들어갔다. 일부는 인근 숲속으로 뛰었다.

 

목시물굴은 도툴굴보다 작은 굴이지만 200여 명 이상 대부분의 선흘 주민들이 은신해 있는 굴이었다. 토벌대는 굴속에 수류탄을 투척하며 주민들에게 나올 것을 종용했다. 주민들은 굴 밖으로 나와서 군인들에게 포위되었는데, 그 가운데 20대 이상의 남자들을 한 곳에 모이게 하고는 여자들과 어린애들은 차량이 드나들 수 있는 반못굴 인근까지 끌고가서 차에 태우고 함덕으로 끌고 갔다. 따로 세워놓은 남자들은 굴 남쪽 50m 지점에서 한꺼번에 학살됐다.  군인들은 40여 명의 죽은 시신에 이불이나 담요 같은 것을 덮고, 그 위에 기름을 뿌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하는 만행도 저질렀다.

 

목시물굴은 입구가 두 개로 길이는 약 100m 정도 된다. 목시물굴의 동쪽 입구로 들어가면 좌측으로 넓어지며, 서쪽으로 높이도 높아져서 수십여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들어올 수 있다. 굴 내부 가장 넓은 곳에는 바위를 짜맞추고 바닥을 평평하게 만든 곳이 있는데, 이곳이 4․3 당시 주민들이 피난생활을 하며 이부자리를 깔고 생활했던 곳의 일부다. 생활터의 서쪽으로는 굴이 다시 좁아져 낮은 포복을 하고 드나들어야 하며, 이곳을 지나면 굴의 서쪽 입구가 나온다. 생활터의 동쪽으로는 넓지만 높이가 1m가 안 되는 높이의 굴이 수백 미터 계속된다. 굴의 동쪽 끝은 알 수 없다.

 

굴 외부의 서쪽 입구는 동굴학회에서 바위를 뚫어 스테인레이스망으로 입구를 막았다. 서쪽 입구 앞으로 주민들이 생활했던 움막터의 주춧돌이 원형으로 남아있다. 서쪽 굴 입구의 근처 20m 반경으로 주민들이 생활했던 움막터 30여 개가 산재해 있다. 동쪽 굴 입구는 사람 하나 드나들 정도이며 지상에서 대각선으로 지하로 이이지고 있다. 주민들 40여 명을 학살하고 휘발유를 뿌려 시신을 유기했던 장소는 굴에서 남쪽으로 20m 떨어진 곳에 있으며, 빌레(암반)지대이다. 학살터와 굴 사이에는 한씨 양봉장 벌통들이 있다. 

 

<출처: 제주4.3연구소, 「4.3역사의길 조성 기본계획수립 결과보고서」, 2015>

 

 

〇 북제주군 조천읍 선흘리는 함덕에서 한라산쪽으로 6-7km가량 올라가야 되는 중산간 마을이다. 선흘리는 알선흘(낙선동)과 선흘본동, 백해동, 그리고 선흘2구로 불리던 선인동 등으로 이뤄져 있으며, 가호수 400-500여 가구에 인구는 2,000여명에 이르는 큰 마을이었다. 선흘리 주변은 곶으로 이뤄져 있고, 이 선흘곶은 최근 들어 유원지로 개발하느라 여러가지 식생 등의 조사가 이뤄지고 있지만 일제시대와 4․3을 거치면서는 선흘주민들의 분쟁과 한이 함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선흘곶 사이로 선흘리 본동과 덕천을 잇는 중산간 도로가 생기면서 곶 한가운데를 자동차로도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해방이 되면서 이 선흘리 선흘국교에는 경비대(군인)가 주둔해 있었다. 이 군인들은 1948년 9월까지 선흘리에 있었는데, 마을 주민의 말에 따르면 그들과 주민들과는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문제는 서청과 경찰이었다. 일제 때 행정기관은 부아무개에게 선흘곶 동백동산 벌채허가를 주었다. 부씨는 벌채허가를 5년 받았는데, 3년만에 해방이 되면서 말썽이 생기기 시작했다. 부씨는 정당하게 허가 받았고 아직도 벌채허가기간이 2년이나  남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에 반해 마을주민들은 ‘무슨 말이냐. 일제시대때 받았던 허가는 해방이 되었으니 이젠 소용없다’는 대립속에 알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서  부씨는 마을 주민을 제지해 달라면서 서청과 경찰을 끌어들이면서 불신의 골은 점점 더 깊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민들의 증언을 당시의 언론보도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제주신보 1947년 7월 2일자(제217호)에는 ‘학교림에 까지 뻐치는 모리배의 마수’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다. 

 

자기 개인의 사복을 채우기 위하여는 사회도 국가도 생각치 않는 악독한 모래배의 躍動은 容怒할 수 없는 것인데 본도 조천면 선흘리에 이러한 不祥 사실이 있어 일반으로 하여곰 분개를 사고 있다. 선흘리는 不過 4, 5백호에 지나지 못하는 산간부락으로써 同 里 국민학교 운영상 선흘 밀림 512정보를 학교 후원회에서 기증바더 관리하여 왓든 것이다. 이 밀림은 세인이 아는 바와 갓이 동백나무이 5할 이상으로써 椿油遂出이 귀중한 천연자원이고 여기서 생산하는 年産額은 약 50 만원에 달하는데 同 里에서는 학교 운영난으로 , 1944년 4월에 同 里에 본적을 두고 제주읍에 거주하는 木炭업자 夫 某에게 該 학교림 立木 중 동백나무를 제외한 잡목을 2만 5천원에 매도하였든 것이다. 그런대 夫 某는 계약을 위반하고 본도의 귀중한 자원인 동백나무를 모조리 도벌할 뿐더러 벌채기일이 경과 한 지 오렌 오날에 이르려서도 난벌을 계속하고 있어 그 謀利額은 무려 5백만원에 달하리라는데 이러한 악질행위에 리민은 분개하여 불법행위를 추궁함과 동시에 도벌을 중지시키자 전기 부는 교활하게도 가 山林課員을 대동하여 리민들을 공갈 협박 등의 가증할 행위를 취하여 사복을 채우려고 악덕한 행위를 계속함으로 리민들은 경찰당국에 이를 고소, 방금 검찰청에서 취조하고 있다는데 이와 갓지 자기 이익만을 위하여서는 자기 마을도 자기자식의 교육도 돌보지 않는 비양심적 악질 모리자에게는 당연히 鐵槌를 내리라는 목소리가 높다.

  

이러한 갈등은 4․3당시까지 이어지는데 특히 선흘곶 벌채와 관련한 보복으로 부씨 2인 등 3명이 산사람에 의해 희생당하는 사건이 생기면서 마을은 흉흉해지기 시작한다. 선흘리는 변변한 사상가나 토벌대의 주목을 받는 무장대의 주모자급 인물이 한 명도 없는 마을이었다. 하지만 선흘곶 벌채와 관련한 마을의 알력은 많은 젊은 청년들을 마을에 남아 있을 수 없는 상황으로 만들었다. 

 

제주도의 대부분 중산간마을에 대한 소개령이 내려지면서 주민들은 마을을 피할 수 밖에 없게되는데 선흘의 경우 1948년 10월21일(음)경에 소개가 된다. 집들이 소각되자 주민들은 선흘리 본동에서 피할 수 밖에 없었다. 일부는 북촌, 그리고 일부는 함덕 등지로 연고를 찾아 떠났지만 선흘리인 경우 많은 주민들이 인근 선흘곶의 밀림 속으로 피난하게 된다. 그 이유는 소개를 내릴 연고가 없기도 하였지만 잠시 피신해 있으면 금방 진정되리라는 예측과 가을철에 수확한 많은 곡식들을 그냥두고 떠나기 아까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천혜의 피난 요새지역인 선흘곶이 인근에 있어서 더욱 그랬는 지 모른다. 마을 소개 당시에도 나이가 든 몇몇 주민이 희생되는데, 연로한 노인들을 어쩌랴 싶어 그대로 마을에 남아 있다가 군인토벌대에게 피살된 것이다. 이때부터 주민들은 비상식량을 짊어지고 선흘곶의 목시물굴과 대섭이굴 반못 옆의 도틀굴 등지를 피신처로 삼아 숨어들었다. 

 

이 마을 사람들에 대한 대량학살은 소개령을 내린 지 나흘째 되는 1948년 11월 25일(음력 10월 25일)부터 시작된다. 그 시작은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도틀굴(일명 반못굴이라고 하나 반못이라는 연못 옆에 있는 굴로 정확한 명칭은 도틀굴이다)이었다. 당시 도틀굴에는 젊은 청년들이 대부분 숨어있었다. 토벌대가 올라오더라도 위험을 먼저 감지하고 소식을 알려서 큰 굴에 있는 마을주민들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처였다. 그런데 마을이 전부 불태워졌다고는 하지만 일부 외진 곳에는 몇가호씩 온전한 가옥들도 있었다. 이날 함덕에 주둔했던 군인들은 마을을 샅샅이 훑으면서 사람들을 찾았으나 이미 숨어버린 마을 사람들을 찾을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런데 남아있는 집들 사이에서 한 늙은이를 발견하게 되고 마을 사람들이 숨어있는 곳을 가리키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한다. 도틀굴은 잘 알려지지 않은 굴이었지만 이 노인은 마을사람들 중에서도 몇사람 알고 있지 않은 도틀굴을 알고 있어서 살기 위하여 그 굴을 안내하게 된다.

 

우리가 있는 굴(도틀굴)을 누군가가 알려줘서인지 군인들이 찾아낸 것입니다. 누릅나무로 굴의 입구를 막고 있어서 사람이 지나가면서 찾아도 찾을 수 없을만큼 교묘한 곳이었습니다. 아는 사람이 아니면 찾을 수 없는 굴이었지요. 그런데 갑자기 굴 안으로 수류탄이 터지면서 군인들이 총을 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굴 안에는 25명 이상이 있었지요. 그런데 그 캄캄하고 조그만 굴에 수류탄이 터져놓으니까 귀청이 다 열어지고 혼비백산 하였습니다. 결국 군인들이 굴 안으로 들어왔고 우리들은 모두 체포되었습니다. 군인들은 굴 안에서 모두 숫자를 세었습니다. 당시 군인 지휘자가 ‘왜 우리동포들은 이렇게 헤매고 있느냐’ 하는 노래를 비장하게 불렀습니다. 그 틈을 이용하여 내 옆에 있던 안태봉이라는 사람이 슬쩍하니 뒤로 빠져서 숨었습니다. 나는 옆의 사람을 쿡쿡 찔러서 안태봉이가 빠진 자리를 메꾸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잡혀 죽게 되었지만 우리 중에 누군가가 살아남아 이 위험한 사실을 동쪽굴(목시물굴) 있는 주민들에게 알려서 피하게 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다시 숫자를 확인할 때에도 안태봉씨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군인들은 눈치를 채지 못하고 그냥 넘어갔어요. 군인들은 굴 안에 있던 사람들을 굴 밖으로 끌고 나와서 일부를 학살했습니다. 열다섯명 이상이 그곳에서 학살되었습니다. 나머지 열명가량은 군인들에 의해 함덕으로 연행되었습니다.  김상효(72세. 제주시 봉개동)

함덕으로 끌려온 사람들은 그날 밤부터 새벽까지 혹독한 심문을 받는다. 고문을 받던 선흘리 청년들 중에는 혹독한 고문과 죽이겠다는 위협을 이기지 못해 마을사람들이 숨어 있는 곳을 말하라는 군인들에게 그 굴 위치를 말한 사람이 있게 되었고, 이튿날인 1948년 11월 26(음력10월 26일)일 새벽녘에 길안내를 할 두사람을 데리고 군인들이 다시 선흘지역 토벌에 나서게 된다. 살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서겠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군인들은 그를 제하고 한아무개씨와 김아무개씨 등 두사람을 끌고서 두대의 트럭에 군인들을 가득 싣고서 선흘곶으로 출동을 하였다. 먼저 군인들은 안내자로 안아무개씨를 지목하려 하였으나 그는 전날의 고문 때문에 온몸에 피멍이 들어서 거동조차 할 수 없게 되어서 두사람을 데리고 나선 거였다.

 

아침식사를 할 정도의 시간이 되어서 군인들은 선흘곶에 다다르게 된다. 선흘곶이 가까워지자 군인들은 먼저 박격포를 쏘았다. 그 박격포 소리에 놀라 빗개를 서던 한 사람이 혼비백산을 하여 달아났다. 이 박격포 소리는 반못에 물을 뜨러갔던 사람들과 전날 학살된 도틀굴의 시신들을 수습하러 갔던 사람들도 들었고, 이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서둘러 목시물굴로 피하였으며, 굴이 발견되었음을 알고있던 일부는 선흘곶의 위쪽으로 피하게 된다. 이미 전날에 도틀굴에서 사람들이 학살되고 일부가 끌려갈 때 살아남은 안태봉씨가 있었지만 그는 위험한 상황을 전하지 못하였고, 도틀굴에서 사람이 살아나아서 군인들에게 목시물굴의 위치를 알렸으리라 생각을 한 사람도 드물었다. 도틀굴의 학살과 목시물굴의 토벌이 이어진 사이의 시간은 밤중인 까닭도 있었다. 마을주민들이 많이 몰려 있던 목시물굴에는 혹시나 하는 마음과 달리 피할 곳이 없어서인 지 피하지 못하고 숨어 있었던 것이다. 

 

목시물굴은 입구가 두개였으며 길이가 150미터가량 되는 넓은 굴이었다. 그 굴은 입구를 들어가면 좁아졌다가 다시 넓어져 큰 공간을 만드는 제주도의 전형적인 용암동굴이다. 이 굴 안에는 수백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살 수 있었으며 특히 한쪽으로 들어가서 다른쪽으로 나갈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굴들과는 달리 도망갈 길이라도 있다는 믿음에서 목시물굴에 많은 사람들이 숨어있었던 듯 하다.

 

선흘 마을을 불붙이고 하는데, 도무지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서로 흩어져서 살아야 한사람이라도 살아남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아버지네는 다른 곳에 숨고, 나는 마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숨어 있는 목시물굴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 굴 안에는 어림잡아도 수백명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굴은 입구가 두개여서 들어오고 나가는 곳이 다른 곳입니다. 그래서 그 굴 안에서 한 며칠을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군인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했어요.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전날 다른 굴에 있던 사람들이 발견되어서 그 사람들 중에 누군가가 굴 위치를 알려준 것 같다고 합니다. 토벌대가 왔다고 하자 사람들은 군인들이 있는 입구가 아닌 반대쪽에 있는 입구쪽으로 나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굴 위치를 알려준 사람이 반대쪽 입구도 얘기를 했는 지 군인들이 있다가 맨 먼저 나가는 제 친구의 아버지를 총으로 쏘아버렸습니다. 그 분은 창자가 나오고 해서 돌아가셨는데, 너무도 끔찍하였습니다. 그곳으로 나가면 무조건 죽는 것으로 생각을 하여서 들어오는 입구로 결국은 모든 사람들이 나가게 되었습니다. 모두들 짐들까지 갖고 나오라고 하였으므로 짐을 많이 지고 나가면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짐을 많이 짊어지고 나가는 사람도 더러 있었습니다. 굴 밖으로 나가서 보니까 군인들이 수십여명이 포위를 하고 있어요. 모두들 겨눠총을 하고 있었는데 나가는 중간에 젊은 사람들을 추려내어 그 옆에서 총살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나간 사람들은 반못 근처까지 데리고 나갔다가 그 가운데에서 노인과 어린아이 여자분들은 남겨두고 젊은 사람들을 추려내어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가서 총살을 하였습니다.  백문길 ( 64세 조천읍 함덕리 ) 

우리 가족들은 해방이 되면서 일본에서 돌아왔습니다. 특히 제 남동생과 나는 일본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조선말을 거의 하지 못하였습니다. 제 동생은 외아들이어서 부모님네가 조혼을 하였습니다. 

소개를 내릴 즈음이 되어서 마을에서 3일정도만 한지에서 고생하면 다시 마을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은 그 말을 믿고서 선흘 인근에 있는 곶에 숨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사흘을 지내고 이제 잠잠해 지려는가 믿고 있었는데 군인과 경찰들이 올라와서 보이는대로 사람을 죽인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쯤에는 우리는 대섭이굴 안쪽에 있는 목시물굴에 숨어있을 땝니다. 수백명의 사람들이 그 안에서 생활을 했는데 군인과 경찰 토벌대가 굴 입구에 와서 모두들 나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나오자 젊은 사람들을 한쪽으로 모아놓고는 무조건 죽였습니다. 그 때 열아홉난 제 동생도 죽었어요. 우리집에는 제 동생이 죽으면 대가 끊어질 판이었는데도 말 한마디 애원조차도 할 수 없었습니다.  김보배 ( 72세 조천읍 선흘리 )

 

1948년 11월 26일(음력 10월 26일)에 목시물굴에서 희생된 사람의 숫자는 정확치 않다. 그러나 최소한 70여명은 넘었을 것이라고 당시의 현장에 있던 증언자들은 입을 모았다. 이날 학살에서 군인들은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마을 주민들을 학살하는 것을 일삼았다. 일부의 사람들을 목시물굴 입구의 빌레에서 학살하고 반못 근처로 나머지 사람들을 끌고 가서 모아놓았다. 그들은 새벽녘에 토벌을 나오느라고 아침식사를 하지 못하였으므로 마을사람들이 만들어놓고 먹어보지 못한 음식을 먹으며 여자들과 늙은이, 어린이 등을 따로이 모아놓고 젊은 사람들을 추렸다. 군인들은 그 사람들에게 총부리를 들이대고 서로 싸움을 하게 하는가 하면 서로의 귀를 물어뜯으라는 등의 장난노리개를 삼았다. 아침식사를 마친 일부 군인들은 그들을 먼저 사람들을 학살한 목시물굴 근처로 끌고가서 그곳에서 무차별 학살하기에 이른다. 또한 젖먹이 어린아기가 한명 죽었는데 증언자들의 말에 따르면 그 아기는 토벌대가 굴을 포위하고 있을 때 굴 안에서 놀라 울고 있었다. 그러자 아기의 아버지가 울음소리를 막으려고 입을 막고 있다가 숨이 막혀 죽었으며, 아기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밖으로 나와서는 망탱이(멱둥구리)에 담긴 채 조팝나무에 걸려 있었다는 얘기를 했다.

 

한편,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시물굴에서 1km가량 떨어진 반못 근처로 끌려온다. 군인들이 타고온 트럭이 거기 있었다. 군인들은 먼저 굴 안에 있던 곡식들을 젊은 사람들을 시켜 짊어지고 오게 하고는 그들을 반못 옆에서 학살한다. 나중에 시신을 수습하였던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4명 가량이 그 옆에서 앉은듯이 학살되어 있었다고 했다. 학살을 마친 군인들은 살아남은 사람들을 타고 온 트럭 2대에 분승시켜 태우기 시작한다. 죽음을 모면한 이들도 공포에 떨어야 했다. 

 

당시 저는 열네살인데 몸집이 외소하고 키가 작아서 더 어려보였어요. 거기다가 호적에도 나이가 줄여져 있어서 열두세살로 보여서 살 수 있었습니다. 저보다도 한 두살 어린 사람들도 덩치가 있어서 죽은 사람들도 있었어요. 죽이다가 남아있는 사람들은 군인들이 군홧발로 지근지근 밟기도 하고 몽둥이로 때리는데 눈앞이 파래지고 정신이 아예 없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남은 사람들을 한쪽으로 몰더니만 그들이 타고온 트럭에 실었습니다. 트럭 두대에 나눠 실었는데 앞서가는 차에는 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제가 탄 뒤에 차에는 어린이 부녀자 노인들이 몸을 움직일 틈도 없이 가득했습니다. 백문길(64세 조천읍 함덕리)

이러한 모습의 일부를 지켜보았던 사람이 김상효씨다. 그는 토벌대에게 잡혔다가 목시물굴 학살이 있었던 당일날에 기회를 보고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였다. 그러나 그는 탈출하는 과정에서 온몸이 가시에 긁히고 찔려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으며, 특히 전날에 도틀굴에서 한번 죽음의 고비를 넘긴 터였다.

 

우리 뒷동산이 우리 어릴 때는 겨울에 연을 띄우는 동산입니다. 거기 가서 앉안보니 그 흥개동산이라고 하는 곳이 어떻게나 잘보이는지, 군인이 왔다갔다 하는 것도 보이고 거리는 먼데도 사람들이 사는 굴(목시물굴)이 거기 홍개동산 옆에 있는데 거기가 뵈이는 겁니다. 내가 볼 때는 마을 사람들을 다 죽여놓고 거길 불을 지르는 모양이었습니다. 연기만 많이 나고 있었고 그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군인들 보였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보니 여자들은 제하고, 남자들 취조헐만헌 사람들은 차에 태우는 것 같았습니다. 차와 차 사이를 띄엄하니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거기서 그게 모두 보이는데……. 여자들은 호상옷이나 줏어 입었는지, 옛날에 호박단 저고리라고, 그 고름이 사람 팔 길이만큼 길었어요. 바람이 그날 불었습니다. 그게 반들반들 불리는데 사람을 막 홀리는겁니다. 자꾸 가고 싶어졌어요. 정신이 그냥 이상해진 모양인지 자꾸 그 호박단 저고리의 고름이 손짓을 하는 것 같아 그것을 쫓아 가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무조건 몇발자국 놓고 그 쪽을 향해 가다가 생각해보니 내가 이거 뭔 생각을 허는거냐. 내 머리를 한대 쳤어요. 죽을 고비를 구사일생으로 두번이나 넘겨서 그런 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정신을 차려서 가만히 있다가 군인들이 다 가버린 다음에 어두워졌습니다. 부락이나 한바퀴 돌아본다고. 아무도 없겠지. 나혼자서 부락을 돌아보단 보니 개를 하나 만났는데, 그 개도 그렇게 친해요. 그것도 사람이 그리우니까 벗하려고 아주 오래 자기를 길러준 사람처럼 해요. 사실 나도 같이 있으니까 좋아뵈고. 

 

이날 새벽녘에 시작된 군인들의 토벌은 저녁무렵이 되어서야 거의 끝났다. 이틀에 걸쳐 이어졌던 학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두대의 트럭에 태워진 목시물굴에 숨어있던 사람들은 연대본부가 주둔하고 있던 함덕국민학교에 수용이 되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취조였다. 이미 두번의 토벌을 거치면서 군인들은 마을 주민들의 길안내가 없으면 숨어있는 사람들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서인 지 때로는 유화적으로, 또는 강압적으로 대하였다. 젊은 사람들은 취조를 하는 동안에 학교마당을 돌라고 시키기도 하였고, 밤이 되면서 수용소 안에서는 사람들을 때리는 소리, 고문을 하는 소리 등으로 살아있는 사람들 모두가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군인들은 사람들을 마치 노리개취급을 하였던 것이다. 특히 젊은 여자들의 경우 몹쓸짓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선흘리 고씨 할머니(73세)의 말에 따르면 목시물굴에서 잡혀간 그 날 트럭 안에서 공적을 많이 올렸다고 신이 나서 떠들더니만 함덕국민학교에 이르러서는 열여덟, 스무살 가량의 처녀들을 골라 겁탈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행태는 수용소가 있는 동안에 계속적으로 이뤄졌으며 일부의 젊은 처녀들은 군인들을 따라 육지로 가기도 했다고 증언한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선흘리 주민들은 목시물굴에서 살아오기는 하였지만 언제 죽을 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10월27일(음) 아침이 되자 군인들은 전날 취조를 통하여 선흘곶에서 피하여 살아남은 사람들이 숨을만한 곳을 파악하고 있었다. 군인들은 안아무개씨를 길잡이로 하여 선흘곶과 맞붙은 웃밤오름 지경으로 토벌을 나선다. 웃밤오름 남쪽 사면으로 밴뱅듸라는 굴이 있는데, 그 곳에는 전날의 목시물굴에서 도망쳐 온 주민들과 인근의 선흘2리 선인동 주민들 그리고 와흘, 와산 등지의 주민들이 피신하고 있었다. 웃밤오름 근처에는 밴뱅듸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제시대부터 만들어 놓은 굴들이 많았으므로 군데군데 숨어 있었다. 전날 모시물굴에서 도망쳐 밴뱅듸굴에 재차 피신했었다는 김형조씨와 고적석씨 등은 토벌대들이 들이닥치자 이제는 죽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돌을 쌓아 군인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방호벽을 만들고 계속 굴 안쪽으로 피하여 들어갔다. 굴의 안쪽에는 가느다랗게 빛이 들어오는게 보였고, 돌 하나를 들어내니 몸이 빠질 정도의 구멍이 생겨 살아날 수 있었다. 이날 선인동주민 등 20여명 이상이 현장에서 학살되었으며 김형조씨 등 4명은 공기구멍을 통하여 밖으로 나와 구사일생하게 된다. 그 굴에서는 전날 목시물굴에서 군인들에게 총을 맞고도 살아남은 안창세라는 사람이 피신을 와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는데 군인들은 그를 학살함은 물론, 그 곳에서 길안내를 하였던 안아무개씨까지 학살한다. 이 곳에서도 군인들은 일부 주민들을 함덕본부로 연행해 간다.

 

인근의 토벌을 마친 군인들은 다음날인 10월 28일(음) 대대본부 수용소에서 수용하고 있던 사람들 중에 일부를 불러냈다. 이들에게도 비운이 다가와 있었다.

 

군인들은 그 사람들을 북촌지경의 엉물(억수동)로 끌고갔다. 그곳은 엉물의 공동묘지 인근 밭이었다. 기관총을 걸어놓은 토벌군인들은 끌려온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집단학살한다.

 

당시 이 밭은 8마지기의 큰 밭이었고 콩을 심었었다고 전해진다. 주로 여자와 어린 아이들이 많이 죽어 널려 있더라고 당시 시신을 찾으러 갔던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이곳에서의 피살자 수는 70명정도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고 50여명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희생자는 선흘사람들 9명(남자 7명,여자 2명)은 물론 조천읍 전역과 심지어는 제주시에서 함덕연대로 끌려온 사람들도 있었다.

한편, 엉물에서 학살이 진행되고 있을 그 시간에 목시물굴 근처에는 밴뱅듸굴에서 살아남은 김형조씨 등이 돌아와 시신을 훑어보고 있었다. 

 

밴뱅듸에서 살아와서 마을에 있는 노인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노인은 나에게 먹을 것을 주면서 동편굴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는 얘기를 침통하게 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 먹던 음식이 갑자기 턱하고 목에 걸려 삼킬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곳에는 제 아내를 비롯해서 일가친척들 거의 대부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배도 고프고 했는데, 그 다음부터는 아무 생각도 없었어요. 날이 밝는대로 서둘러 목시물굴 앞 학살터로 가 보았습니다. 학살터는 참으로 입에 담을 수 없을만큼 처참하였습니다. 일부에 휘발유를 뿌려서 불을 태웠기 때문에 사람들의 시신 주위로 온통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습니다. 시신들을 둘러보는데 숙부님과 숙모님 등의 시신이 있고, 친척 몇사람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집사람과 몇몇 친척들은 없더군요. 하도 기가 막혀 잠시 망연히 서 있는데 따발총 소리가 아주 요란하게 들렸습니다. 그날따라 하늬바람이 불었는데 그 하늬바람에 실린 총소리는 마치 선흘 우리동네에서 들리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렸습니다. 엉물에서 함덕으로 끌려갔던 사람들의 일부가 학살된 것이지요.

불안하여 잠시 피하였다가 다시 생각하니 시신들이 문제였습니다. 하루 이틀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사이에 남은 사람들을 더러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나보다 두어살 위였던 고적석 형이 시신을 수습하고 표적이라도 남겨야 한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우선 확인할 수 있는대로 종이에 적어서 새동이라는 곳에 항아리에 묻어두고, 또 하나를 만들어 품에 넣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그 시신을 감장하기 시작하였는데 엎드려서 죽은 사람들은 그나마 형체라도 알아볼 수 있었지만 하늘을 보고 죽은 시체들은 불에 그을리고 해서 정확하게 얼굴을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옷과 체격 등을 보면서 구분을 하고 태역을 파서 까마귀가 쪼아가지 못하도록만 하였습니다. 한사람씩 외따로 묻을 수가 없어서 두사람씩을 좌우에 놓고 태역을 덮었습니다. 첫날 죽은 도틀굴의 사람들, 다음날 죽은 목시물굴의 사람들을 합하여 모두 94명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시신들이 하도 많아서 고적석형과 나는 나무를 깎으면서 두사람의 시신이 있는 앞에 작은 나무팻말을 꽂아 두었습니다.그 가운데에는 시신을 구분할 수 없었던 두사람이 있었습니다. 한사람은 정창호라는 스무살도 안된 청년이었고 다른 한사람은 오씨 집에 살았던 사람인데 체격이나 시신이 엇비슷하여 구별도 못하고 나무팻말도 붙이지를 못하였습니다.  김형조( 77세. 조천읍 선흘리)

 

이 때 마을사람들이 도틀굴과 목시물굴에 숨어있다 학살된 사람들의 숫자는 증언자의 증언이 일치한다. 김상효씨도 이 시신들을 수습하는데 함께 있었는데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시신의 숫자는 94명이라고 했다. 또한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태역을 덮는 작업을 3일에 걸쳐서 했다고 증언한다. 이들은 군인 토벌대가 언제 들이닥칠 지 몰라 전전긍긍하면서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아남은 도리를 해야 한다면서 서로 교대로 망을 보면서 그 시신들을 수습하였던 것이다. 

가족 중에서 누군가가 희생된 사람들은 경찰에게 돈을 주면서까지 시신을 수습하려고 애를 썼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도 언제 어떻게 될 지 몰라 하면서 소개지에서 불안하게 살고 있었다. 특히 도틀굴에서 잡혀간 사람들 가운데에는 먼저 학살된 사람들 말고도 함덕연대에 잡혀 있던 사람들도 거의 대부분이 토벌대에 의해 학살되어서 25명 이상 되었던 사람들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김상효씨 한사람 뿐이었다. 또한 함덕연대에 잡혀있던 소개민들 중에서 2-30대 젊은 여자들이 수용소 생활 한달 간격으로 한꺼번에 열명 가까이 학살되는 일이 두어번에 걸쳐 있기도 했다. 

 

1948년 11월 26일(음)에 있었던 학살은 무장대사령관 이덕구의 부인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덕구의 부인이 토벌대에게 잡혀와 전날 저녁 함덕3구의 수용소에 들어왔다. 처음에 이덕구의 부인이라는 것을 확인하지 못하였던 군인들은 그날에야 잡혀와서 수용소에 있는 사람이 이덕구의 부인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3구 수용소에서 그를 구분하지 못하자 그 수용소 안에 있었던 사람들 대부분을 끌고가서 서우봉 절벽에서 학살한 것이었다. 이 때 희생된 사람들의 시신을 수습하였던 유족들의 말에 따르면 학살당하면서 절벽 밑으로 사람이 떨어져 시신을 구분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저 쉬쉬 하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사는 길인가만을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자연 시신을 수습하는 것은 생각 밖에 일이었다. 

 

선흘리는 4․3을 거치면서 근 300여명의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특히 1948년 10월 25일(음)에 도틀굴을 시작으로 한 학살은 다음날 목시물굴에서 그 절정을 이뤘고, 27일과 28일의 엉물학살에 이르기까지 나흘동안에 12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학살되었다. 또한 선흘곶 일대에 숨어지내다가 한 두 사람씩 토벌대에 의해 희생된 사람까지 합하면 동백나무군락이 무성한 선흘곶은 피냄새가 끊일 날이 없었던 것이다. 마을도 결딴이 나 있었다. 300 여가호의 본동을 비롯하여 백해동(15가구), 새동네(현재의 새동네인 신성동이 아니라 선흘과 선인동 사이에 새동네가 있었는데 10여가구가 있었다.), 큰굴왓(25여 가구), 실물가름(30여가구), 낙선동(2개의 동네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두 동네를 합하여 30여 가구) 등이 전부 불타 폐허로 변하여 있었다. 선흘을 재건할 당시에 낙선동에 성을 먼저 쌓았으므로 선흘 본동을 아예 낙선동으로 옮기자는 이야기도 있었으나 태손 땅을 떠날 수 없다는 의견들이 강하여 대부분의 주민들이 낙선동을 먼저 세우고 선흘로 돌아와 마을을 재건하였다. 그러나 백해동,해동네,큰굴왓,실물가름,낙선동 등 100여 가구가 넘는 옛 마을들이 끝내 잃어버린 마을이 되어 지금은 집 한 채 없는 옛 마을터로 변하고 말았다. 

 

<출처: 제주4.3연구소, 「연구소 소식지 제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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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료(문서, 사진,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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