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조천중학원 옛터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제주시 지역구분(읍면) 조천면 지역구분(마을별) 조천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2347번지
GPS 위도 33.5383055555556, 경도 126.640305555556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〇 해방이 되면서 국민학교와 더불어 중등학교 설립 붐이 일어난다. 조천중학원은 그 시기 다른 지역의 중학원과 마찬가지로 지역 유지와 주민들의 자발적인 힘에 의해 1946년 3월에 설립된다. 5개 학급에 1,2학년 200여명이 재학하고 있었다.

 

당시 교사로는 현복유(학원장, 국어), 김민학(수학, 과학), 김동환(영어), 이덕구(사회, 체육), 김석환(역사), 김응환, 한평섭 등이 근무했다. 이들은 대부분 일본 등지에서 공부한 유능한 인재들이었다. 교사들은 또한 당시 친일파 척결 등을 주장하는 좌익단체에 알게 모르게 관련하고 있었다. 이후 교사들은 4․3의 와중에 대부분 희생된다. 특히 이덕구는 해주대회 참가차 제주를 떠난 김달삼사령관의 후임으로 인민유격대 사령관이 된다. 

 

조천중학원은 1947년 3․1절 시위 및 총파업 이후 미군정과 서청의 탄압을 받아 사실상 수업이 어려웠다. 교사와 학생들이 수시로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경찰의 감시도 심했다. 좌파적 분위기가 압도했던 당시 분위기로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민애청 등의 조직원이 되었고 이 때문에 탄압을 피해 입산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이 와중에 1948년 3월 6일 2학년 김용철(당시 21세)이 조천지서에 잡혀간지 이틀만에 취조 중 숨지는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5․10선거 후에는 교사와 학생들이 대부분 피신했으며 이후 조천중학원은 '빨갱이학교'라 하여 폐원조치됐다.

<출처: 제주4.3연구소, 『4.3유적Ⅰ』>

 

  

〇 조천중학원생 김용철 고문치사사건

1948년 3월 경찰에 연행됐던 청년 3명이 경찰의 고문으로 잇따라 숨지는 사건이 발생, 제주사회의 민심을 동요시켰다. 조천지서에 연행됐던 조천중학원 2학년 학생 김용철(金用哲, 21세)이 유치 이틀 만인 3월 6일 별안간 숨졌다. 사체의 검시 결과 그는 고문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3월 14일 모슬포지서에서 유치 중이던 대정면 영락리 청년 양은하(梁銀河, 27세) 역시 경찰의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다. 3월 말에는 서청 경찰대에 붙잡힌 한림면 금릉리 청년 박행구(朴行九, 22세)가 곤봉과 돌로 찍혀 초주검상태에서 끌려가다가 총살당한 충격적인 사건도 발생했다. 

 

제주도에서 해방 이후 1947년 3‧1사건 이전까지 경찰의 고문문제가 제기된 적은 없다. 그러나 3‧1사건 이후 경찰의 고문이 사회문제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응원경찰의 취조는 매질부터 시작했다고 증언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특별수사과의 강압적인 수사기술은 공포대상이 되곤 했다. 응원경찰이 철수하면서 교체 경찰력으로 제주에 들어온 철도경찰과 이북출신 경찰관들은 제주사람들을 사상적으로 불온하다는 시각으로 본 반면, 현지 주민들은 이들 외지출신 경찰관들을 ‘육지 것들’이란 반감과 경원의 눈초리로 볼 때가 많았다. 이런 심적인 갈등은 날이 갈수록 증폭되면서 다양한 고문형태로 표출되기도 했다.

 

조천지서 고문치사 사건은 사건 발생 6일만에야 지방언론에 처음 보도됐다. 󰡔제주신보󰡕의 보도 내용은 다음과 같다.

 

1구서(1區署) 조천지서에 작년 3‧1사건의 피의자로서 유치 중이던 동리 청년이 유치장 내에서 급사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즉, 동 사망자는 조천면 조천리 하동에 주소를 둔 김용철(당년 22세)이란 청년인데, 작년 3‧1사건의 피의자로서 경찰에서 수배 중이었는데, 지난 3월 4일 미명 동면 대흘리 2구에서 피신 중이던 것이 경찰에 체포되어 유치 중이었던 바, 6일에 이르러 돌연 급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검찰당국에서는 이 보고를 접하여 익(翌) 7일 채용병(蔡龍秉) 검찰관 지휘 하에 의사 장시영(張時英)씨 외 관계관 등이 급거 현지에 출장하였는데 경찰감찰 부청장 박근용(朴根容)씨와 CIC 미인(美人)도 동행 입회 하에 사체를 해부 검시하는 한편 사인에 대하여 면밀한 현장조사를 마치고 귀읍(歸邑)하였다는 바, 앞으로도 의사의 감정서에 의하여 조사를 계속하리라 하며 CIC에서도 검찰당국과 병행 조사를 진행하고 있어 그 귀추가 주목된다.

 

이 보도 이전에 벌써 조천 지역에서는 지역민들이 김용철의 죽음을 고문에 의한 사망으로 여기고 민심이 들끓었다. 경찰 측에서는 지병에 의한 사망으로 둘러댔으나 시신 전체에 시커멓게 멍이 들어 있어서 설득력이 약했다. 조천중학원 학생들은 사인규명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지역 유지들도 사태가 심각하다고 보고 철저한 조사를 군정당국에 요구했다.

 

이 조사는 검시의사 선정에서부터 잡음이 일었다. 경찰 측에서는 당시 제주도청 보건후생국장 송한영 의사를 검시의사로 적극 추천했다. 공교롭게도 송 의사나 제1구경찰서장(문용채) 수사과장(성범용), 그리고 사건을 유발한 조천지서 주임(조한용)이 모두 이북출신이었다. 그러나 검찰당국은 검시의사로 제주출신 장시영을 선택했다.

 

부검은 이례적으로 두 차례 실시됐다. 1차 부검은 경찰 측의 훼방으로 건성으로 마쳐졌다. 이 문제가 논란이 되자 미군 고문관은 재부검을 지시했다. 다음날 실시된 2차 부검 결과 외부 충격에 의한 뇌출혈이 결정적인 사인으로 밝혀졌다. 의사 장시영은 경찰의 계속되는 회유를 뿌리치고 “타박으로 인한 뇌출혈이 치명적인 사인으로 인정된다”는 감정서를 제출했다. 이 한 장의 감정서가 조천지서 경찰관 5명 전원의 구속사태를 몰고 왔다. 고문현장 목격자의 증언에 의하면 경찰관들은 김용철을 거꾸로 매달아 곤봉으로 쳤다는 것이다.

 

조천지서 사건의 여파가 채 가라앉기도 전인 3월 14일에는 모슬포지서에서 또다시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제주신보󰡕는 이 사건을 이렇게 보도했다.

 

지난 6일 조천지서에 검속 중인 한 청년이 급사한 사건에 대하여 아직 그 진상이 판명되지 못한 관계로 일반의 억측이 구구하고 있는 이때, 또다시 모슬포지서에서 검속 중에 있는 한 청년이 작 14일 아침 돌연 급사한 사실이 있었다. 즉 대정면 영락리에 거주하는 양은하(27)란 청년은 포고령 위반 피의자로서 모슬포지서에 검속되어 있던 중 작 14일 아침 4시 돌연 급사하였다는데, 이 급보에 의하여 제주검찰청 박 청장 및 제주경찰감찰청 수사과장과 십자의원 문종후 의사가 급거 현장에 출장하여 검시한 결과 ‘고환’(불알)이 상해서 급사한 것으로 판명되어 담당 취조경찰 고응춘(高應春‧순경) 및 변태문(邊太文‧형사) 2명을 경찰청장 명의로 즉석에 검속하고 방금 엄중 취조 중에 있다 한다.

 

이 사건은 미 24군단 정보보고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경찰, 불법행위로 체포. 3월 14일 2명의 경찰관이 모슬포에서 죄수 1명을 구타해 치사시킨 혐의로 동료 경찰에 의해 체포됐다”는 내용이다. 

 

<출처: 제주4.3위원회,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2003>

 

 

〇 조천중학원생 3·1기념식 참가 

 - 양희순(1933년생, 조천리) 증언(2013.1.22.)

4.3사건 당시, 1947년 3.1운동 당시 조천중학원 1학년이었습니다. 

 

그때는 우리 초등학교 은산데, 황병화 선생님. 그 선생이 인민위원회 소년부 부장이었어요. 그 선생이야기로 중학생은 몇 시까지 모이라고 한거죠. 각기 행동을 하는데, 중학원까지 왔는데, 이제 선생이 없는 거예요. 나중에 수소문 끝에 가보니, 어느 여선생 댁에서 같이 말하고 있는걸 이야기해가지고 행동을 했죠. 

 

1차 집결지는 조천중학원 앞이었어요. 그때 조천중학원 1학년 약 20명 정도가 모였습니다. 모였는데, 황병화 선생님이 안보여서 수소문을 해서 찾은거죠. 황병화 선생님과 함께 계시던 여선생님 역시 조천초등학교 여선생님었습니다. 이름은 모르겠고 차선생님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다 모였다고 선생님께 알린 후, 같이 행동을 한거죠. 거기서 이제 선생님을 만나서 황개모루 바로 남쪽으로 큰 소낭밭이 있어요. 거기서 이제 집결을 한거죠. 가보니까 청년들, 어른들도 많이 모여 있었고. 

 

가보니까, 나이든 청년들도 다 모여 있었어요. 여자는 없고 모두 남자였어요. 거기서 모여서 다같이 이젠 대흘초등학교로 가는거죠. 2차 집결이 대흘초등학교가 되는 거죠. 

 

거기서 이제, 대흘에서 집결, 함덕청년들이 오기로 한 모양이예요. 가면서 이제 연락이 다 닿은거죠. 가고 있다는. 우리는 간다. 그래서 와흘가기 전에 가는데, 경찰관이 도로에 있으니까, 그러니까 논흘 이장(와흘 이장 고경찬) 아드님이 경찰관에 있었어요. 그 양반 이름이 고태종이? 고태준. 그 양반이 경찰관으로 있었는데, 자신이 이제 경찰관으로 있으니까, 이제 무슨 변이 있을까 해가지고, 그 밤중에 제주시로 나간거예요. 아버지가. 그래서 연락을 한거예요. 

 

그래서 이제 행동이, 가는 도중에 신촌서도 왔다. 모였다 해가지고, 같이 논흘서 이제 다 신촌, 조천, 함덕 이렇게 해가지고 시로 나가는데, 삼양 가니까 연락이 닿은 거예요. 벌써. 제주경찰서로. 그니까 각자 이제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모이지 말고. 게서 이제 올라가는데, 삼양에 내려가가지고 삼양 청년으로 가장을 해가지고, 게서 이제 북교까지 간거예요. 

 

삼양을 거쳐서 갈 때, 조천에서 제주시로 넘어갈 때 경찰에 걸려보지는 않았어요. 경찰들이 있었지만, 검문을 하거나 잡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무사히 북교까지 들어갔어요. 

그때 따로 준비를 하거나 한 거는 없었어요. 

 

황개모루에서 대흘초등학교에 갈 때는 오후 9시 내지 10시쯤이었어요. 밤에 갔어요. 밤에 넘어간거죠. 그래서 새벽에 3월 1일 새벽에 행동을 한거죠. 3.1절 행사 전날 넘어간거예요. 

 

북교에 도착했을 때는 아주 밝았어요. 삼양 가니까, 오전 8시쯤? 그러니까 대흘서 출발을 아주 늦게 출발을 한거죠. 황개모루에서 대흘초등학교에 도착한 이후에 대흘초등학교에서 날이 새기를 기다린거죠. 

 

그래서 3월 1일 새벽에 출발해서, 삼양에 도착하니까 오전 8시쯤, 북교에 도착할때는 오전 10시쯤이었어요. 북교에 가보니까, 각 면에서 간 청년들도 있고, 시 관내 청년들도 있고 그랬어요. 

 

우리가 갈때는 학생과 청년들만 갔어요. 학교 운동장이 꽉 찼어요. 당시 연설을 했던 사람은 조천리 안세훈 선생님이 기억이 나요. 당시 안세훈 선생님이 연설했던 내용은, 일제 강점기 내용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일제 강정기때 했던 얘기 같아요. 

 

연설을 하고, 선봉대가 어느 읍에서 나가느냐 하는데, 우리 조천에서가 먼저 나가겠다고 해가지고. 옥신각신 하다가 송순필씨가 그때 농업학교에서는 그 양반이 주도해가지고 제일 먼저 나갔죠. 이게 가두행렬을 할 때 제일 먼저 앞장을 선거죠. 

 

당시 송순필씨가 농업학교 3학년이었을 거예요. 송순필씨가 맨 앞장을 서고, 조천면 청년들이 그 뒤를 따른거죠. 가두시위를 하는데, 갑자기 선봉에 섰던 사람이 달려와가지고는 “멈추라!”고 한거예요. 그러고는 사람이 죽었다는 얘기를 해줬어요. 

 

이제 칠성통까지 들어갔는데, 진짜로 총을 쏘았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가운데를 중심으로 양 길가로 쫙 벌어졌어요. 그때 몇 명이 죽었어요. 그 통에 우리 중학원 같이 다니던 김용현 학생이 잡혀가지고, 도라무통속에서 막 굴렸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해산이 된거예요. 자연히. 중간에 오는데, 단체로 오다가 진드르 오니까 함덕 양반 김양권(?) 김양군(?) 그 양반이 앞으로는 각자 행동해서 개인적으로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어요. 계엄령이 내렸으니까. 그날 계엄령이 내리니까, 그 이후엔 모이지도 못했어요. 행사는 그날 한번 뿐이었어요. 

 

나는 김응삼이하고 같이 돌아왔어요. 돌아오는 과정에서 경찰에 걸려보지는 않았어요. 조천에서 그날 걸린 사람은 김용현이 한 명 뿐이었어요. 그런데, 그 김용현이도 그날 나왔어요. 바로. 

 

그날 같이 갔던 친구들은 강두봉, 그 분은 A클라스였어요. 한석두, 그분도 A클라스, 황병익이, A클라스 이렇게 같이 같어요. 이 사람들 역시 소년부 연라받고 같이 모여서 같어요. 

 

이튿날은 학교에 갔어요. 그때 조천관내 애들만 갔으니까, 북촌, 함덕 이런 아이들은 못갔죠. 당시 조천중학원은 A클라스, B클라스 합쳐서 120명 정도 됐는데, 그중에 조천리 관내 20명이 같이 모여서 갔다 온거죠. 

 

나는 3.1운동 이후에도 쭉 집에서 살았어요. 워낙 꼬맹이어서 어디 경찰을 봐도 걸려보지 않았어요. 김응삼이가 피해본 기억도 없어요. 김응삼씨는 그 후에 부산으로 갔어요. 4.3사건 난 후에. 부산에 나갔다는 말만 들었죠.

 

 

 

 

 

 현장사진

 

 

 

 

 

 

 

 

 사료(문서, 사진, 증언)

 

 

 

 

상처받은 영혼을 향한 희망이 불어오는 곳
평화·상생·해원 바람의 진원지

제주4·3평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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