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함덕백사장 & 서우봉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제주시 지역구분(읍면) 조천면 지역구분(마을별) 함덕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 1008번지
GPS 위도 33.5434166666667, 경도 126.669777777778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〇 함덕 평사동 학살

정방폭포,일출봉 등 제주도의 유명 관광지는 대부분이 4․3당시 집단학살지였다. 특히 여름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해수욕장 가운데 4․3 당시 학살터였던 곳도 있다. 제주에서 잘 알려진 함덕, 표선해수욕장 등이 바로 그곳이다.

함덕 해수욕장의 경우 함병선 연대(제2연대) 주둔지로, 각지에서 끌려온 주민들이 이곳에서 학살된다.

 

학살은 1948년 11월경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듬해인 1949년 함병선 연대가 철수하기까지 지속적으로 자행됐다. 특히 1948년 음력 10월 중순경에 들어서면서 중산간 마을에서 소개돼 내려온 주민들과 입산자 혹은 도피자 가족 등을 무더기로 연행,감금했다가 마을이나 경찰관서가 유격대의 습격을 받으면 그에 대한 보복으로 공공연하게 학살하였다.

 

4․3 당시 군부대가 주둔했던 다른 지역의 주민들은 피해가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적은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북제주군 함덕 4구 평사동은 예외였다.

 

당시 50여가구정도 되는 평사동은 함덕에서도 가장 외진 마을이었다. 마을 바로 동쪽으로 서모봉이 막혀있고 북으로는 해수욕장이어서 이 마을은 당시 고즈넉하기까지 한 마을이었으며 어느곳보다도 평화로워 보였다고 한다.

 

평사동 주민 학살사건은 48년 12월21일(음)에 이뤄졌다. 48년 10월(음)경부터 군․경의 공공연한 트집에 위협을 느낀 청년들은 마을에서 생활하지 못하고 밤에는 인근 들판이나 마을 어귀에 잠시 몸을 숨겼다가 밤에만 집에 들어와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유격대에 의해 납치된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와중에 중산간마을 소개령이 내려졌다. 중산간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소개를 내려오지 못하고 마을 근처에 숨어 지냈으며 내려온 사람들도 단지 중산간마을 사람이라는 이유로 군경에 의해 검속된다. 그리고 평사동 사람들도 집에 장정이 한사람만 없어도 무조건 ‘도피자가족’으로 몰아 가족 전체를 감금하기에 이른다. 이 사람들은 근 한달 사이에 군인과 경찰에 의해 끊임없는 취조를 당한다. 한 주민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우리 남편은 대동청년이라고 순경나라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대동청년에 들어서 활약을 하고, 우리 아주버니는 폭도들이 하도 닦달하니까 임시로 산에 갔습니다.선흘이라는데 산 위에, 거기는 거기서 그냥 죽고, 우리는 폭도 가족이라고 해서 수용소에 갖힙디다. 동서는 있는데...수용소에 가면 안된다고, 형네 가족이 가라 해서 나하고 남편, 우리딸 두살인 때인데 데리고 해서 집단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함덕 사래물에 이장이라는 사람하고 군인하고 수용소에 버럭 날려듭디다. 우리동네에서 폭도들이 많다고... 황집이는 황대진이가족이라고 있었는데 황대진이 가족을 첫번에 불릅디다.

첫번 황대진이 가족 불런, 그다음은 고병균가 고병진인가 하는 디 아들이 올라부난 남편이 나갔수다. 김주생이라는 그 가족, 송서준이라는 가족, 한재봉이 가족, 그 가족을 명단을 보면서 불러낼 것 아니우꽈. 경허난 마지막에 우리는 남편하고 딸하고 서으새끼라 방구석에 있는데 젊은 군인이 나오라고 하고는 구석에 송키(채소)써는 칼이시난 그것 들고 해서 거기서부터 그렇게 겁을 주면서 데리고 나옵디다. 데련 나완게 먼첨 나온 사람들은 그날 거기서 다 전멸을 시키고 우리는 더 젊으니까 하루 더 고생을 하면서 위협을 주고 하는데, 나는 거기서 나오지 못하고 해서 안봤지만 본 분들이 철창 서른 몇개 씩 찌르면서 하니까 살끈천지가 어서마씀. 바른말을 하라고 하는데 이분은 본것도 없고 하니까 바른말을 할 수가 없어마씀. 바른말을 하지 못하니까 이틀을 억압을 주다가 옷도 다 벗견 맨몸에 신발이고 뭣이고 일절 내버려두고 죽인거라마씀.

동짓달 열하룻날 들어간에 섯달 스무하룻날은 다 죽여분것 아니라마씀. ( 함덕 평사동 백○○ )

 백씨 할머니의 경우는 11월 11일(음)에 수용소에 들어가서 학살이 있는 날까지 근 40여일동안 생활하였다고 한다. 다른사람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당시 수용소에는 도피자가족 명단이 있었다. 그 명단을 군인들은 들어가는 입구에 붙여놓고 차례차례로 불러내어서 문초를 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소개를 내려온 중산간마을 사람이 마을에 있으면 무조건 불러들여 학살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친구도 없었수다. 어머니 아버지도 없고. 앞에 닥쳐도 ‘나 어머니우다. 아는 사람이우다’ 말할 수가 없어. 그 때 그날 우리 어머니 아버지네도 다 돌아가셨수다. 딸네 집이엔 허연 피난왔다가 이동네 단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저 사람들은 선흘서 이디 피난온 사람’이엔 허여부난 심어단 죽여부러서 마씀. ( 함덕 평사동 백○○ )

1948년 12월 21일(음)에 학살된 사람은 20여명이 훨씬 넘는다고 증언자들은 밝히고 있다. 대부분 50대 노인들과 여자, 그리고 다섯살도 채 안된 어린애들이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희생자명단참조)

한편으로는 도피자가족이라고 하여 무차별 학살당한 이들과는 달리 마을 근처에 숨어있던 사람들은 1949년 봄, 선무공작이 있을 때 마을로 내려와서 살게된다.

 

그때는 하도 흉흉하니까 마을에 있으면 무슨 해를 당할 것 같기도 하고 해서 엉물근처에 숨어지냈습니다. 무료하니까 짚신을 꼬아 팔기도 하고 그랬지요. 평사동 집에는 처와 갓난 딸이 있었습니다. 설마하니 내가 없는 것 때문에 처와 딸까지 무슨 피해가 가랴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집사람도 내게 피하라고 권했으니까 별다른 생각이 없었습니다. 나는 1949년에 귀순하면 죄를 묻지 않는다는 얘기들이 돌고 내려간 사람들이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 내려왔는데 집사람과 딸은 도피자가족으로 몰려 죽었습니다. 당시에 보니까 나 말고도 여러사람이 내려와서 살았는데 병들어서 죽고 해서 살아남은 사람이 거의 없어요 (함덕리 김순호) 

증언자들은 당시의 상황을 한마디로 무법천지였다고 말을 한다. 한 두살 어린아이들과 50살이 넘은 늙은이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죽었겠느냐는 것이다. 

 

47년이 지난 오늘에는 함덕 평사동은 당시보다는 마을이 커졌다. 여름이면 대부분이 민박집으로 관광객들을 맞아들이면서 생활도 한다. 그러나 관광객들 그 누구도 4․3당시 이 해수욕장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 지 묻지 않는다.

 

<출처: 제주4.3연구소, 「연구소소식지 21호」>

 

 

〇 함덕리는 4.3당시 대대본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 대대본부 군인들은 주둔지 인근에서 크고 작은 학살을 수도 없이 저질렀다. 적게는 한 두 사람에서부터 많게는 100여명 이상의 학살도 서슴치 않았다. 특히 북촌리에서는 300여명의 주민을 무차별학살하기도 했다.

 

그래서 대대본부가 주둔하고 있던 함덕리 주변은 학살터가 산재해 있다. 대표적인 학살터로는 관됫모살, 진동산, 골연못 서우봉 생이봉오지, 몬주기알, 상장머체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서우봉 생이봉오지학살터는 학살방법의 잔인함도 잔인함이려니와 군인들의 잘못을 숨기기 위한 보복이 함께 이어졌다.

 

생이봉오지는 서우봉 북쪽의 바다와 맞닿은 벼랑이다. 이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함덕해수욕장의 동쪽 끝 평사동에서 서우봉으로 이어진 시멘트포장도로를 따라 오르막길을 올라가야한다. 올라가다 보면 옛날에는 경작을 했던 다랑이밭들이 계단처럼 정상으로 이어진다.

 

서우봉의 서북벽 가파른 경사면을 타고 몬주기알로 가다보면 바닷가에 새의 주둥이처럼 생긴 커다란 바윗돌이 있다. 그 모양새에 따라 󰡐생이봉오지󰡑라 불리는 곳이다. 몬주기알이란 지명도 절벽이 너무 가팔라서 오르내리기가 어렵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이 생이봉오지에서 1948년 12월 26일(음 11.25) 26명의 사람들이 군인들에 의해 집단학살되었다. 26명의 사람들 가운데 몇사람의 노인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20대의 젊은 여성들이었다. 이 학살의 이유를 지금까지는 수용소에 무장대사령관 이덕구의 부인이 숨어들었고, 그를 확실하게 찾지 못하자 비슷한 나이의 사람들을 모두 학살했다는 것이었다.

 

강간과 살육 시신유기로 이어졌던 당시의 상황을 은폐하기 위하여 이덕구의 부인이 등장했던 것이다. 학살의 현장이었던 생이봉오지와 시신들을 던져버린 몬주기알은 57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음력)10월 28일 대흘에서 신촌으로 소개를 내려오다 두 가족 아홉명의 사람들이 군인들에게 붙잡혀 함덕대대본부로 끌려갔습니다. 같이 온 다른 사람들은 가벼운 취조를 받았는데 저는 질기고 넓적한 고무줄로 온 몸이 거멓게 되도록 매를 맞았습니다. 옷을 모두 벗으라 입으라하며 군인들이 희롱을 했었고, 매로 정신이 잃은 저를 패대기 치듯 던지는 것을 반복했습니다. 아무런 혐의가 없자 찬물을 끼얹어 가마니 위에 던지듯 내쳐졌습니다. (음력)11월 8일에 90여명의 사람들이 군인들에 의해 모래사장에서 학살되었고, 그날 살아남은 사람들은 수용소에 가뒀습니다. 저는 함덕3구 수용소에 가둬졌는데, 그 곳에서의 하루하루는 공포와 다름 없었습니다. 

밤중에 군인들이 수용소에 난입하여 얼굴을 들게 하고는 젊고 얼굴이 예쁜 여자들만 골라 데리고 나가서 강간을 했습니다. 군인들은 여덟명이었습니다. 밤중에 그렇게 다닌 것으로 봐서 다들 소위급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강간은 하루 이틀이 아닌 일주일동안 매일같이 이뤄졌습니다. 그렇게 당한 여자들은 수용소로 돌아오면 밥도 먹지 못하고 울기만 했습니다. 보다 못한 노인들과 유지들이 대대장에게 진정을 하게 되었고, 여덟명의 군인들은 감방에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유지들과 노인들은 다시 노심초사했습니다. 감방에 있는 군인들이 나오면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은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군인들은 죄가 없으니 감방에서 나오게 해달라는 진정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 군인들은 풀려나왔습니다. 그리고 며칠 없어서 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음력)11월 25일 오전입니다. 그날은 비가왔어요. 3구 수용소에 군인들이 몰려왔습니다. 오전인데 술을 먹어서 얼굴들이 벌겋게 되어 있었는데,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마당으로 나오라고 해서 이름을 불러 나누고, 다시 마루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을 몇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한낮이 되어서야 살아남을 11명을 구분하고 나머지 젊은 여자들과 노인들을 대대본부로 끌고 갔습니다. 3구 수용소는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창문으로 대대본부를 볼 수 있었는데, 오후 4시경에 끌려간 사람들이 하얗게 서우봉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열아홉살의 시누이와 스물두살의 동네 친구도 포함되어 있었지요. 저녁 무렵 총살을 하였는데 스물여섯명 중에서 시신을 찾은 사람은 열두명 뿐이었습니다. 열 네사람의 시신은 벼랑으로 바다에 던져버렸는데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시어머니가 시누이 시신을 찾으려고 노력을 해도 허사였습니다. 제 친구는 벼랑 밑으로 떨어졌는데 바위 위에 걸쳐져서 시신이나마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학살을 한 그 곳에 있던 시신들은 팔도 잘라버리고 다리도 잘라버려서 눈뜨고는 볼 수 없게 만들어놓았습니다. 

수용소에서 숨죽여 20여일을 더 살다가 북촌사람들 들어오니까 집을 비우라고 해서 섣달 열여드렛날에 수용소를 나왔습니다. (홍 77세. 제주시거주)

〇 서우봉은 함덕 대대본부에 주둔한 군인들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곳이다. 특히 중산간마을에서 내려온 주민 중 도피자가족들이나 중산간 마을 인근에 숨어살던 피난민들이 토벌대에 발각되어 함덕 주둔 대대본부를 거쳐 즉결 처형당하는 희생이 많았다.

 

이 서우봉 절벽에서 1948년 12월 26일 총살이 있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선흘리 주민들로써, 선흘리의 모든 집이 하루아침에 불타버리자 올데 갈데 없어 마을 인근 굴속에 은신했다가 토벌대에 붙잡혀 온 민간인들이었다. 이때 외숙 송봉구(교래리 출신, 50세)를 잃은 고사의(高仕義, 남, 03년 79세) 씨는 "희생자 대부분이 집단수용소에 수용되었던 장년층의 주민들이었다. 몬주기알이 가파른 절벽이기 때문에 절벽 위에서 총을 쏘아 바다로 던져버리려고 이곳에서 총살했다."고 증언한다. 실제 유족들은 희생 소식을 듣고 절벽 밑 바닷가로 내려가 시신을 등에다 새끼줄로 묶어서 가파른 절벽을 오르며 시신수습을 했다.

 

서우봉의 서북벽 가파른 경사면을 타고 몬주기알로 가다보면 바닷가에 새의 주둥이처럼 생긴 커다란 바윗돌이 있다. 그 모양새에 따라 '생이봉오지'라 불리는 곳이다. 이곳에서도 선흘 출신 처녀가 옷이 모두 벗겨진 처참한 모습으로 숨져 있었다고 위의 증언자 고사의 씨는 말했다.

 

생이봉오지와 몬주기알로 가는 길은 가파르다. 예전에는 여기까지 계단식 밭을 일구어 경작을 했기 때문에 좁은 길이 있었다고 한다. 그 길로 희생자를 끌고 갔는데 이제는 경작을 않기 때문에 그 길도 없어져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죽으러 가는 길도 험난했다'고 여겨질 정도로 당시 갔던 길은 험했다. 더군다나 몬주기알까지는 사람의 근접조차 쉽지 않다. 

 

몬주기알이란 지명도 절벽이 너무 가팔라서 오르내리기가 어렵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출처: 제주4.3연구소, 『4.3유적Ⅰ』>

 

 

 현장사진

 

 

 

 

 

 

 

 

 

 

 

 

 

 

 

 

 

 

 

 

 

 사료(문서, 사진, 증언)

 

 

 


상처받은 영혼을 향한 희망이 불어오는 곳
평화·상생·해원 바람의 진원지

제주4·3평화재단

4·3유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