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중문리 신사터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서귀포시 지역구분(읍면) 중문면 지역구분(마을별) 중문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중문동 1498번지 일대
GPS 위도 33.2538888888889, 경도 126.421083333333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〇 '신사터'는 일제 시기 일본인들이 신사를 모셨던 곳이라 해서 그렇게 이름 붙여진 곳이었다. 해방이 되자 지역주민들은 제일 먼저 이 곳을 때려부쉈다. 이 곳은 원래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으슥한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4․3 당시 토벌대는 이 곳을 지역 주민들을 일상적으로 학살하는 장소로 이용했다.

   

신사터에서 형님(이종남)이 희생되었다는 이치근 씨는 대동청년단과 민족청년단 간의 알력에서 민족청년단이 밀리게 되고, 결국 민족청년단 총무부장을 맡았던 형님은 모함에 의해서 당시 돌아가시게 된 것이라고 토로했다. 신사터에는 1957년에 중문천주교회가 들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당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출처: 제주4.3연구소, 『4.3유적Ⅱ』>

 

 

  〇 중문리 집단 학살 터 중 가장 참혹한 학살극이 벌여진 곳은 중문리 ‘신사터’이다. ‘신사터’는 일제강점기에 신사가 있었던 곳으로 현재 중문천주교회가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는 중문리 주민 34명을 비롯하여, 강정리 주민 6명, 대포리 주민 1명, 도순리 주민 2명, 상예리 주민 2명, 상천리 주민 5명, 색달리 주민 17명, 하예리 주민 2명, 하원리 주민 1명, 회수리 주민 1명 등 총 71명이 희생되었다. 특히 12월 17일 중문리 주민 20여명은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80대 노인에서부터 2살 난 아기에 이르기까지 무참히 희생됐는데, 일가족이 함께 집단 총살되는 비극이 많았다.

 

중문리 ‘신사터’에서 총살당한 이유생의 동생 이치근 씨에 의하면, 당시 중문리에는 이승만 박사가 영도하는 조직인 대동청년단과 국무총리 철기 이범석 장군이 영도하는 조직인 민족청년단이 있었는데, 같은 우익단체인데도 지역으로 오면 알력이 생겼다고 한다. 대동청년단은 대청, 민족청년단 족창이라 하여 분리되어 족청이 많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이치근 씨의 형님 이유생은 민족청년단 중문면 총무부장을 맡고 있었던 관계로 희생된 것이라 한다.

 

중문리 ‘신사터’에서는 중문리 주민이 가장 많이 총살당했는데, 전부 34명이 희생되었다. 1948년 11월 12일에는 2명이 군경에 의해 희생되었고, 12월 5일에는 무장대 관련자로 오인 받아 8명이 희생되었다. 같은 날인 12월 5일 색달리 주민 고두회 외 1명도 무장대 관련자로 오인 받아 총살당했다. 12월 17일에는 도피자 가족이라는 명목으로 중문리 주민 20명, 색달리 주민 강유생 외 6명, 회수리 주민 1명 등 총 28명이 토벌대(9연대 군인, 경찰)에 의해 집단 총살당했다. 이후 중문리 주민은 12월 22일과 24일에 각각 1명, 1949년 1월 5일과 8일에 각각 1명이 무장대 관련자로 오인 당해 토벌대(응원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

 

강정리 주민은 모두 6명이 희생되었는데, 1948년 12월 10일 임수연의 일가족, 처와 며느리, 손자, 손녀 등 5명은 아들 임경욱이 무장대 관련 활동으로 인해 무장대 관련 가족이라는 이유로, 이병출은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토벌대(응원경찰)에 의해 총살당했다. 같은 날 하예리에서도 부부 2명이 무장대 관련자로 오인 받아 경찰에 의해 총살당했다.

 

대포리 희생자 임선은 아들 전재평의 행방을 모른다하여 도피자 가족으로 오인 받아 1948년 12월 15일 토벌대에 의해 총살당했다. 도순리 주민 2명 중 희생자 이평연은 1948년 11월 25일 토벌대에 연행된 후 희생되었고, 한봉옥은 12월 1일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토벌대(경찰)에 의해 총살당했다.

 

상예리 희생자 강시인은 무장대와 관련 있다는 이유로 1948년 11월 17일, 희생자 김경득은 1949년 1월 5일 도피자라는 이유로 응원경찰에 의해 총살당했다.

 

중문리 ‘신사터’에서 총살당한 상천리 주민 5명은 일가족이다. 부친 정태옥이 1948년 12월 15일 군인에 의해 연행된 후 총살당한 후, 처 백유생과 딸 3명은 12월 18일 연설이 있으니 모이라고 하여 중문지서에 모였다가 남편 정태옥이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항의하다가 총살당했다. 

 

색달리 주민은 총 17명이 희생되었는데, 1948년 10월 11일 희생자 변상찬은 도피생활을 하다가 순경에게 발각되어 연행된 후 총살당했으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채 행방불명되었다. 11월 11일 희생자 김정수는 무장대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중문지서에 연행된 후 경찰에 의해 총살당했다. 12월 16일 최기열의 일가족 아들과 딸 등 6명은 남편 송희창이 입산하자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된 후 토벌대(경찰)에 의해 총살당했다. 하원리 희생자 김규남은 도피생활 하던 중, 1948년 12월 13일 토벌대에 발각되어 중문리 ‘신사터’에서 총살당했다.

 

 

 

 

 

현장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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