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현의합장묘역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서귀포시 지역구분(읍면) 남원면 지역구분(마을별) 의귀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수망리 893번지
GPS 위도 33.3125833333333, 경도 126.719833333333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 의귀리는 1935년까지 남원면 소재지였을 정도로 마을의 역사가 깊고, 남원면 일대의 문화․산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마을 사람들이 일본 유학을 많이 다녀와 개화사상 및 평등의식과 민족의식을 갖추어 의식 수준이 높은 마을이었다. 

 

 4․3 발발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의귀리는 평온했다. 몇몇 청년들이 5․10선거를 거부해 산으로 피신했지만 군경이 호위했기 때문인지 큰 충돌 없이 선거를 마쳤다. 다만 이 즈음에 좌익 단체활동을 하던 김OO의 부친이 경찰에 끌려가 총살당했다. 이후 가끔 토벌대가 마을을 수색했지만 마을 중심부에 있는 넉시오름 정상에 소위 ‘빗개’를 세워 경찰과 토벌대 병력의 이동을 알렸기 때문에 이렇다 할 희생도 없었다. 하지만 1948년 11월 이후 불어닥친 광풍은 중산간 마을인 의귀리를 통째로 삼키며 수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몰고 왔다. 

 

서귀포시 무장대 습격이 있던 1948년 11월 7일, 토벌대의 보복인지 아무런 예고 없이 의귀리에 들이닥친 토벌대는 무조건 방화와 학살로 의귀리 주민들을 내몰았다. 이렇게 초토화 작전을 방불케 하는 토벌대의 마을 방화와 학살은 4․3기간을 통틀어 의귀리가 맨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당장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주민들은 일부 해변마을로 연고를 찾아 떠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불타버린 집을 의지해 움막을 짓거나 숲 속의 동굴 혹은 냇가의 궤를 임시 피난처로 삼아 가족 단위로 피신생활을 해야만 했다. 노약자나 불구자들은 타다 남은 집에 있다가 수색 나온 군인들에 발각되어 현장에서 희생당하기 일쑤였다. 이 때부터 대부분의 의귀리 주민들은 토벌대에 쫓겨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산야를 헤매는 시련을 겪었다. 은신 중 토벌대에 발각되면 현장에서 총살당했고, 이 때의 희생엔 남녀노소 구분이 없었다. 

 

한편 1948년 12월 26일 의귀국민학교에 군인이 주둔하면서 마을 사람들의 희생은 크게 늘어났다. 당시 초등학교에 주둔한 병력은 국군 제2연대 1대대 2중대였는데, 중대장은 설재련이었다.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전개되면서 군인들은 수색 중에 발견되는 사람들을 마구 죽이는가 하면 일부는 학교 안에 임시로 수용했다. 그들은 수용된 주민들을 대상으로 무차별 고문을 가하더니, 급기야 1949년 1월 10일과 11일에는 약 20여명을 학살하기에 이르렀다. 수망리 출신 김명원 씨는 이때 어머니를 잃고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됐다.

 

토벌대가 마을을 불태우자 온가족이 인근 야산에 숨어 지냈습니다. 그러다 1949년 1월 9일 군인들에게 발각됐습니다. 군인들은 아버지(김병하, 34)를 현장에서 총살하고 어머니와 우리 5남매를 학교에 가뒀습니다. 학교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의귀국교 4학년 동급생인 김일석도 있었습니다. 그는 ‘어제 들어왔다’고 하더군요. 군인들은 수감자들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한 원칙도 없이 20세부터 50세에 이르는 사람들을 지목하며 ‘너 나와!’하며 끌어냈습니다. 1월 11일에는 어머니가 지목됐습니다. 어머니(강매전, 35)는 피신 중 딸을 낳아 보름도 지나지 않았을 때입니다. 어머니를 포함해 10여명이 함께 끌려 나갔는데 곧 총성이 울렸습니다.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 마저 돌아가시니 우린 졸지에 고아가 됐습니다. 장남인 나에게 12살, 9살, 3살, 그리고 생후 보름된 갓난 동생들이 남겨졌습니다. 젖을 못 먹어 울어대는 아기를 달래고 있는데 아버지와 알고 지내던 현 면장님이 나타났습니다. 현 면장님은 군인들에게 부탁해 우리를 남원리에서 올라온 급수차에 태웠습니다. 우리 외에도 7~8명의 아이들이 급수차에 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내려온 다음날 새벽 폭도들이 군인들을 습격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노인과 어린아이까지 모두 총살했습니다. 국민학교 동급생인 김일석도 그 때 죽었습니다.(김명원 증언, 대정읍 하모리)

이에 무장대는 학교에 수용된 주민들의 안위를 도모함과 동시에 토벌대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1949년 1월 12일(음력 1948년 12월 14일) 새벽 의귀초등학교를 습격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미리 간파한 2중대의 화력에 밀린 무장대는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채 퇴각했다.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학교에 수용 중이던 주민 60여명은 습격 당일 학교 동쪽 약 200m 지점(의귀리 1506-6번지)의 밭으로 끌려가 학살당했다. 무장대와 내통했다는 구실로 군인들이 양민들을 보복 살해한 것이다. 

 

1월 12일 무장대가 2연대를 습격한 사건은 토벌대와 무장대, 그리고 주민들에게 큰 변화를 가져왔다. 미군비밀보고서는 무장대의 습격 사건을 이렇게 기록했다.

 

1월 12일 새벽 6시30분께 약 2백여 명의 유격대가 제주도 의귀리에 있는 2연대 2중대를 습격했다가 패퇴했다. 2시간에 걸친 접전 끝에 유격대는 51명의 사망자를 내고 퇴각했다. 반면 한국군은 2명이 사망했고 10명이 부상했다. 유격대로부터 M-1소총 4정, 99식총 10정, 카빈총 3정을 노획했다.(주한미군사령부, 「G-2 일일보고서」 1949. 1. 14.)

1월 10일부터 12일까지 3일 동안 희생된 80여구의 시신들은 원만한 수습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일부는 유족이 거두어간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의 시신들은 흙만 대충 덮은채로 방치되고 있었다. 썩어가던 시신들은 그해 봄 의귀, 수망, 한남리 주민들이 의귀리 중심지에 성을 쌓게 되면서 ‘개턴물’ 동쪽(의귀리 765-7번지)으로 옮겨졌다. 수개월 후 마을로 복귀한 유족들은 구덩이에 방치된 시신들을 구별할 수 없었다. 김신생 할머니는 남편의 시신을 찾으려 애썼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남편(안순길)은 이빨이 특이해 그것으로 찾으려 했지만 워낙 시신이 많아 구별할 수가 없었습니다. 입은 옷으로 볼 때 한 시신이 꼭 남편 같았지만 확신할 수 없어 따로 수습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듬해에는 남편이 꿈에 나타나 ‘자네가 만지던 시신이 바로 나야’라고 하더군요.(김신생 증언, 남원면 신흥리) 

결국 시신은 구별되지 못한 채 큰 구덩이 세 개에 나뉘어 이장됐다. 유족들은 1983년 묘 앞에 ‘현의합장묘(顯義合葬墓)’라는 비석을 세웠다. 이곳이 바로 ‘현의합장묘(顯義合葬墓)’ 구(舊)묘역이다. 현의합장묘는 유족회(회장 양봉천)에 의해 2003년 9월 20일 수망리 ‘신산ᄆᆞ루’지경(893번지)으로 이장되었다. 현재 묘역에는 전시관과 조형물이 세워져 있고, 주변은 잔디밭으로 예쁘게 잘 조성되어 유족들의 정성어린 손길이 느껴지는 곳이기도 하다. 

 

  <출처: 의귀리, 『말과 귤의 고장 의귀』(2016);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5』(​(1998)>

 

 

 ○ 1949년 1월 12일 벌어진 ‘의귀리 전투’는 무장대의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약 200여 명의 폭도가 1월 12일 새벽 6시 30분에 제주도 의귀리에 주둔하고 있는 2연대 2중대를 습격했다가 패배했다. 2시간의 접전 끝에 폭도는 51명의 사망자를 내고 퇴각했다. 반면 한국군은 2명 사망, 10명이 부상했다. 폭도로부터 M-1소총 4정, 99식총 10정, 카빈총 3정이 노획됐다.(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1037, January 14, 1949.)

군인 희생자는 두 명이 더 늘어 모두 4명이 희생된 것으로 밝혀졌다. 남원읍 충혼묘지 비석을 보니, 이날 희생된 군인은 ‘일등상사 문석춘(文錫春), 일등중사 이범팔(李範八), 이등중사 안성혁(安星赫), 임찬수(林燦洙)’였다. 기습을 받아 4명의 희생자를 낸 제2연대의 충격도 컸겠지만, 이날 전투는 무장대에게 더욱 큰 타격을 주었다.

 

무장대원 200명이란 숫자는 여러 정황을 볼 때, 당시 무장대 세력이 거의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무장대는 이 기습공격에 전력을 쏟은 셈인데 이 중 51명의 사망자를 내고 패퇴함으로써 그 세력이 급속히 약화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이날 사건 이후 1월 중에 무장대가 마을을 습격해 경찰을 공격하거나 주민들을 살해한 사건은 있었지만, 군대를 직접 공격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에 대해 1949년 2월초 미군 보고서는 “제주도의 추가 보고에 따르면 폭도들의 활동은 여전하지만 과거와 같은 대규모의 활동은 없다”고 기록했다.(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1055, February 4, 1949.)

 

한편 무장대의 공격은 곧 민간인에 대한 진압부대의 보복 총살로 이어지는 등 악순환을 초래했다. ‘의귀리 전투’ 때에도 군 주둔지인 의귀국민학교에는 중산간을 헤매다 잡혀온 주민 8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제2연대 군인들은 사건 직후 이들을 학교 뒷밭으로 옮겨 모두 사살하였다. 이 때 희생된 80여  구의 시신은 나중에 마을 주민들에 의해 합장되었으며 현재 의귀리에 소재한 합장 묘역에는 ‘현의합장묘(顯義合葬墓)’라는 큰 비석이 세워져 있다.(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⑤, 전예원, 1998, 141~142쪽.)

 

<출처: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2003)>

 

 

 ○ 해방 후 의귀리는 4․3사건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제주의 여러 마을 중에서도 특히 그 피해를 많이 입은 마을로 손꼽히고 있다. 4․3 사건 후 7개월 동안은 마을에 단 한사람도 살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의 의귀리는 4․3사건 후 재건된 마을의 형태로 그 이전의 모습은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4․3 사건 때 모든 건물이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의귀리는 한동안 면 소재지였기 때문에 이 지역 문화, 산업의 중심지였다. 또한 마을 사람들이 일본 유학을 많이 다녀와 개화사상 및 평등의식과 민족의식을 갖추어 의식수준이 진보적이었다. 당시 유학생들을 포함한 상당수의 지식인들이 4 ․3사건 당시 좌익에 동조하였다고 한다. 해방 후 인민위원회의 활동이 이 마을에도 있었는데 야간모임을 가지면서 조직적으로 활동했다.

마을 중심부에 있는 넉시오름 정상에 마을 사람들이 대나무 깃발을 만들어서 세우고 내림으로서 경찰과 토벌대 병력이 이동하는 방향을 표시하곤 했다.

 

1948년 5월 10일, 의귀국민학교에서는 군인 12명과 남원지서장이 직접 감시하는 가운데 5 ․10선거가 치뤄졌는데 마을 청년 7명이 투표를 거부하고 산으로 올라갔다. 이들은 후에 지서습격의 주범으로 몰린다.

 

토벌이 본격화되면서 1948년 12월 26일부터 1949년 1월 20일 까지 지금의 의귀국민학교에는 당시 제2연대 1대대 2중대가 주둔했다. 당시 2중대원이었던 이윤의 「진중일기」에 의하면 2중대는 학교주변에 4개의 초소를 세우고 옥상에는 기관포를 설치했으며 주위에는 모래가마니로 바리케이트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들은 매일 '폭도를 소탕하러 간다'고 나가서 오후 6~7시에 출발하였는데, 어느 날 토벌대는 거짓정보를 흘려 유격대를 유인했다. 군인들이 토벌을 위해 학교를 나간다고 거짓정보를 흘리자, 그 정보를 접한 유격대들은 학교를 습격했다. 이날 토벌대 6~8명이 전사한 반면 유격대는 훨씬 더 큰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유격대의 피해정도는 80여명정도로 알려지고 있으나, 그 부상자와 사망자가 동료들에 의해 산으로 이송된 경우가 많아 정확한 피해 상황을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유격대가 후퇴한 후 군인들은 유격대에게 자신들의 토벌작전 정보를 제공해줬다는 혐의로 마을 사람들 100여명을 총살하였다.

 

시신은 한 곳에 가매장했었는데 수 개월이 지난 후에야 가족들이 찾아보게 되었다. 그러나 시신은 누구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되어 있었다. 몸에 신표가 있는 시신들은 가족들이 찾아갔으나 나머지 10여구의 시신들은 개턴물에서 동쪽으로 100미터 쯤 떨어진 곳에 합장을 했다. 

이 의귀리의 4 ․3사건의 이야기는 문학작품에서도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현길언의 「깊은 적막의 끝(1989)」과 고시홍의 「유령들의 친목회(1989)」는 그 배경 자체가 의귀리이며, 한림화의 「한라산의 노을(1991)」에도 의귀리에서의 4 ․3 참상이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었을 정도로 이 마을의 4 ․3 피해는 대단히 컸던 것이다.

 

<출처: 제주도 4.3사업소, 「의귀리 4.3피해실태 전수조사 보고서(제목확인 필요)」(2003)>

 

 

 ○ 의귀국민학교 동녘밭에서 총살당한 희생자들의 시신을 집단 매장했던 곳이다. 1949년 1월 10일과 12일 의귀국민학교 주둔 2중대에 의해 희생된 시신은 학살현장 일대에 흙만 씌워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1년쯤 지나 마을을 재건하라는 명령에 따라 주민들이 올라와 성을 쌓는데, 그 매장지가 성 안에 들어가게 됐다. 경찰은 민보단에게 시신을 옮기라고 했다. 이 때 의귀, 수망, 한남리 등에서 알음알음 소식을 들은 유족들이 찾아와 시신을 수습했다. 하지만 경찰의 눈치를 봐가며 쫓기듯 수습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군인에 의해 희생된 시신을 수습하는 데는 또 다른 각오를 하지 않을 수 없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특히 옷가지나 소지품 등으로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시신도 많았고, 더욱이 시신이 서로 엉켜 있어 구분조차 어려운 지경이었다. 또 유족들이 미처 소식을 듣지 못하거나, 시신을 수습할 가족이 없을 정도로 몰살당한 경우, 혹은 그 유족이 어려서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이유 등 이러저러한 이유로 상당수의 시신은 다시 한번 집단 매장해야만 했다.

 

경찰의 명령에 따라 민보단은 시신을 들것에 실어 이 곳에 와 아무렇게나 매장했다. 구덩이 세 개를 파고 시신을 쓸어 담은 것이다. 몇 달 후 유족들이 시신을 찾으려고 구덩이를 파헤쳤으나 도저히 누가 누군지 구분할 수 없어 다시 묻어버렸다.

 

이후 이 곳에 가족이 매장되어 있다고 확신하는 유족들을 중심으로 봉분을 쌓고 성묘를 하며 1976년 '삼묘동친회'를 결성했다. 세 무덤에 묻힌 사람의 후손들은 같은 친척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1983년 '현의합장묘(顯義合葬墓)'비석을 세웠다.

 

한편 ‘현의합장묘 4·3유족회’는 2003년 9월 16일 의귀리 765-7번지에 있던 집단매장지의 봉분을 파묘해 유해발굴을 했다. 봉분을 파헤친 결과, 뼈들이 얽히고 설킨 상태이며 일부는 심하게 부식돼 그 흔적조차 없어 당시 참상을 짐작케 했다. 유해발굴 결과 서쪽 묘에서 17구, 가운데 8구, 동쪽에서 14구가 발굴되었다. 또, 숟가락, 비녀, 혁대, 머리에 박힌 총탄 등의 유물이 나오기도 했다. 이 날 발굴된 39구의 유해는 화장을 거쳐 9월 20일 수망리 893번지에 ‘4·3현의합장 영가 하관 및 추도식’을 갖고 안장됐다. 

 

<출처: 제주도·제주4·3연구소, 『제주4·3유적 Ⅱ』(2003)> 

 

 

 ○ 참고: 현의합장묘 구묘역

 

‘의로운 영혼들이 함께 묻혀 있는 묘’라는 의미의 ‘현의합장묘(顯義合葬墓)’는 남제주군 남원읍 의귀리 의귀초등학교에서 동쪽으로 약 400m 떨어진 길가에 자리잡고 있다. 이 마을은 일제 강점기 때 남원면사무소가 있고, 5일장이 열릴 정도로 부촌의 하나였으나 중산간 지역에 위치한 탓에 4·3 때 참혹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현의합장묘’에는 1948년 음력 12월 12일, 14일 양일에 학살된 의귀, 수망리 주민들과  표선면 가시리 등지 주민 50~60명의 시신이 무더기로 안치돼 있다. 부부의 시신을 한무덤에 안장하는 일반적인 합장묘와 다르다는 것은 비의 명칭으로도 알 수 있지만 비문을 읽어 내려가면서 더욱 뚜렷해진다. 

 

‘아! 여기에 의로운 영혼들이 고의 잠드시도다. 36년간에 걸친 일제통치의 질곡에서 해방된 조국산천. 그러나 사상대립과 좌우 충돌로 빚어지는 갖가지 비극들. 1948년 4월 3일 4·3사건은 본도 전역을 휩쓸었고 이 처참한 와중에서도 일편단심 조상전래의 내고장을 지키다 산화하신 아 갸륵하신 그대 이름들이여 <의귀리; 김윤생, 고경평, 김일석, 양기원, 양기필 이상 음 48년 12월 12일 졸. 김인호, 김재철,  오승윤, 고창숙, 수망리; 이춘수, 김영칠, 이춘협, 이춘방, 김애옥 이상 14일 졸 (필주: 나머지 30~40명 이름은 미상)> 이제 후손들이 효식모아 이비를 세우고 유덕 기리며 명복을 비옵니다 고이 잠드소서. 1983년  합장묘 후손 일동.’ - 현의합장묘 비문 중 -

 

‘현의 합장묘’는 특이하게 3기의 봉분으로 되어 있다. 두개의 봉분은 나란히 있고 한기의 봉분은 고른 땅을 찾다보니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차도(車道)가 인접해 있지만 일터로 향하는 차만 간간히 보일뿐 인적은 쉽게 찾아 볼 수가 없어 적막한 느낌을 준다. 이 무덤은 여느 곳에 비해 비교적 넓은 산담(무덤의 둘레에 돌로 울타리를 쌓은 것)으로 되어 있고 길게 뻗은 삼나무가 그 주위를 감싸안고 있다. 1948년 4·3 당시 불법적 계엄령(49년에 계엄령 제정)이 내려지고 이어 해안에서 5km 떨어진 중산간 마을은 해안으로 이주하라는 소개령이 떨어지게된다. 그러나  같은 해 음력 10월 18일, 소개령 없이 초토화 작전을 감행하는 군인들이 이 마을에 갑자기 들이닥쳤다. 아래 마을부터 불을 붙이기 시작해 초등학교를 뺀 인가는 모두 불태우고, 보이는 사람마다 총으로 쏘아 마을은 폐허가 됐다.

 

토벌대의 무차별 토벌작전에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힘겨운 피난생활을 해야 했다. 잿더미가 된 집터 주위를 맴돌며 산으로 쫒고 쫒기는 피난 생활 속에서 일부 마을사람들은 토벌대의 포로가 되고, 일부는 귀순삐라를 보고 자수하기도 했다. 이렇게 마을로 돌아온 주민들은 2연대 군인이 주둔하고 있던 의귀초등학교에 모두 수감됐다. 그러나 이 곳에 수용된 사람들은 피난 생활의 굶주림과 힘겨움을 벗기도 전에 군인들의 취조와 고문에 시달린 끝에 집단학살을 당했다.

 

학살이 있기 전날 새벽, 의귀리에 주둔했던 군인들이 산부대 습격을 받았다. 군인들은 주민 가운데 산사람과 내통한 자가 있기 때문에 습격을 받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주민들을 통비분자로 몰아세우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 통비분자라는 낙인이 찍힘으로써 주민들의 목숨은 이미 살아 있는 목숨이 아니었다. 학살 다음날 군인들은 총을 쏘면서 시신을 건드리는 사람은 죽인다고 하며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곤 시신을 찾아가지 못하게 의귀리에 인접한 한남리 민보단원들에게 밭돌담 한켠으로 시체를 옮기게 하고 그 상태로 3개월 동안 방치하게 했다. 

 

이들 시신은 이듬해 3월 마을에 성을 쌓으면서야 비로소 지금 합장묘 위치로 옮겨졌다.

 

“성 쌓을 땐디 시신을 가져 갈려고 하니까  군인이 총을 빵빵쏘면서 시신을 건드린 사람은 죽인다고 하면서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도록 했어. 그리곤 한남리 사람들을 데려다가 구덩이를 파고 시신을 매장해 버렸어. 의귀, 수망 사람들에게 시키면 혹 시신을 찾아갈까봐 한남리 사람들을 시킨거라. 감져(고구마) 구덩이를 파듯 땅을 파서 쇠스랑으로 시신들을 긁어 산태(들것)에 담아다가 구덩이에 ‘멜젖 담듯이’ 담아서 묻어 버렸어. 한구덩이에 20-30여구씩, 하루에 한구덩이 씩 묻었어. 시체 묻는데만 3일 걸린거라.” (고운희․의귀리․유족)        

시신을 옮겨서 그 위에 흙을 덮기는 했지만 엉성하고 봉분이 없는 무덤이라 희끗거리는 사람의 뼈를 흔히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물론 다른 마을 주민들도 무덤 옆으로 난 길은 귀신이 나오는 길이라 하여 감히 가까이 할 수 없었다. 

 

계엄령이 해제된 뒤 음력 10월께 유족들은 구덩이를 파보았지만 시체가 썩고 엉크려져 누가 누구인지 구분할 수 없어 도로 시신을 묻었다. 그리고 시신들이 매장된 구덩이 위에 흙을 올려 봉분을 만들고 묘지를 조성했다. 그때가 64년 12월. 동친회가 조성된 것은 아니어서 지금은 세상을 떠나버린 2명의 유족이 중심돼 묘지 100평을 매입했다. 그 후에야 묘지에다 축장도 할 수 있었다.

 

유족들은 3개의 묘에 벌초를 하는 후손들이 한 형제자매가 되어서 공동으로 묘를 돌보자고 제의하여 76년 2월 유족회를 만들었다. ‘세무덤에 묻힌 사람의 후손들은 같은 친척’이라는 뜻의 ‘삼묘동친회(회장 양봉천)’는 음력 4월 8일과 7월 7일에 모여 차례를 지내고 벌초를 해오고 있었다. 그리고 35년이 흐른 지난 83년에야 후손들은 이들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하기 위해 뜻을 모아 ‘현의합장묘’라는 비석을 세웠다. 그 굵게 패인 ‘현의합장묘’ 비석 앞에 서 본 사람은 안다. 떠도는 원혼, 엉켜버린 시신들이 풀리지 않은 매듭처럼 꼬여버린 역사와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또 그 속에 비춰지는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출처: 제주4·3연구소, 「연구소소식지 통권 24·29호」(1996)> 

 

 

 


 현장사진

 

 

 

 

 

 

 

 

 

 

 

 

 

 

 사료 (문서, 사진, 증언)

 

 

 

○ 현의합장묘 희생자 학살터: 의귀국민학교 동녘밭


1949년 1월 10일 30여 명, 1월 12일 80여 명의 주민들이 총살된 곳이다. 의귀국민학교에 주둔한 2연대 1대대 2중대는 주변 수색을 계속하여, 초토화 이후 집을 잃고 은신하던 의귀리, 수망리, 한남리와 가시리 주민들을 현장에서 총살하거나 붙잡아 국민학교에 수용했다. 또 자수하면 살려준다는 소문에 찾아온 주민들도 수용했다. 군인들은 이들 주민들을 대상으로 모진 취조를 하는 등 은신한 주민들을 소탕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젊은 청년들을 1949년 1월 10일 이곳에서 총살한 것이다. 이 때 희생된 주민은 김재춘, 양기필 등 30여 명에 이른다.

 

이곳에서의 희생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49년 1월 12일, 의귀리 주둔 군부대에 대한 무장대의 기습으로 치열한 전투 끝에 4명의 전사자를 낸 2중대는 곧바로 의귀국민학교에 수용됐던 주민 80여 명을 끌어내 이곳에서 총살했다. 전형적인 보복학살로 김일석, 김윤생, 고경평, 허성만, 김순옥, 고창숙, 양을영, 양기학, 양기원, 양복선, 부갑출, 오승윤 등 의귀리뿐만 아니라 이웃 한남·수망·가시리 등 중산간 마을 출신의 노인은 물론 어린 아이들도 이 때 대거 희생됐다. 이곳에서 어머니와 채 이름도 짓지 못한 동생을 잃은 김명운(남, 03년 71세) 씨는 “생후 15일 된 어린 동생이 어머니 품에서 같이 죽었다.”고 말했다.

 

이곳에 흙만 씌운 채 아무렇게나 버려졌던 희생자들의 시신 일부는 1년쯤 지난 1950년 마을 재건 즈음에 유족들이 찾아갔다. 이 때 옷가지나 기타 특이사항으로 신원을 확인 할 수 있는 시신 일부를 유족들이 훔치듯 찾아간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 시신들은 토벌대의 명령에 따라 민보단에 의해 다시 한 번 들것에 실려 의귀리 765-7번지(현의합장묘 구묘역)에 집단 매장되었다.

 

 

○ 2연대 1대대 2중대 주둔지: 의귀초등학교


의귀초등학교는 4․3당시 의귀국민학교로서 1948년 12월 26일부터 1949년 1월 20일까지 제2연대 1대대 2중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실제 2중대원으로 이 곳에 근무했었던 이윤는 『진중일기』에 “1대대 2중대는 1948년 12월 16일 제주에 들어와 12월 26일 이 곳 의귀리에 주둔을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 또 2중대는 학교 주변에 4개의 초소를 세우고 옥상에는 기관포를 설치했으며, 주위에는 모래가마니로 바리케이트를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토벌이 본격화되면서 이들은 매일같이 주변 수색에 나섰고 마을 주변의 숲이나 궤에 숨어 있는 주민들을 발견하면 즉시 총격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부상을 입거나 잡힌 사람들, 내려오면 살려준다고 하여 귀순한 사람들이 학교 창고에 수용되어 있었다.   

 

이들 주민을 구출하려고 했는지 몰라도 1949년 1월 12일, 무장대는 군 주둔지 습격을 감행했으나 대패하고 말았다. 이날 교전 중에 4명의 군인 전사자와 무장대 수십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성을 잃은 군인들은 피의 보복으로 국민학교에 수용됐던 주민들에게 돌아갔다. 그날  80여명이 군인들에 의해 집단 총살되었다.

 

 『진중일기』에 의하면 이들 군인들은 무장대 습격 직후인 1월 20일 이 곳에서 철수하여 태흥리로 이동했다고 한다. 

 

<출처: 제주도·제주4·3연구소, 『제주4·3유적 Ⅱ』(2003)>

 

 

○ 현의합장묘 비문

 

<전면>

顯義合葬墓

 

<측면 및 후면>

아! 여기에 의로운 영혼들이 고이 잠드시도다. 36년 간에 걸친 일제통치의 질곡에서 해방된 조국산천, 그러나 사상대립과 좌우충돌로 빚어지는 갖가지 비극들. 1948년 4월 3일 4 ·3사건은 본도 전역을 휩쓸었고, 이 처참한 와중에서도 일편단심 조상전래의 고장을 지키다 산화하신 아, 갸륵하신 그대 이름들이여!

의귀리 김윤생, 고경평, 김일석, 양기원, 양기필 이상 음 48년 12월 12일 졸. 김인호, 김재철, 오승윤, 고창숙, 수망리 이춘수, 김영칠, 이춘협, 이춘방, 김애옥 이상 14일 졸

이제 후손들이 효식 모아 義碑를 세우고 遺德을 기리며 명복을 비옵나니 고이 잠드소서.

1983년 계해(癸亥) 춘(春), 문학박사 김인호(金仁顥) 글, 청석(靑石) 변영탁(邊榮卓) 서(書)

 

 

○ 제주MBC, 「4·3증언 나는 말한다」 2회(1999.05.27)

 •김명원, 67세, 남(당시 16세)

“저는 그때 16살적에 저희 동생, 여동생 서이하고, 여동생 너이죠 너인데 하난 생후 1개월이 못 되었습니다. 그래가지고 그 생후 1개월이 못된 동생을 어머니가 안고 젖을 물리고 있는데 군인 그 중사 지금으로 말할 거 같으면 중사지. 중사가 부하 몇 명을 데리고 와가지고 무조건 20세에서 40세 사이 남녀 막론하고 전부 뽑아내는 거라. 그래 뽑아 낼 적에 우리 어머니는 그때 1개월 못된 여아를 안고 젖을 먹이고 있었어요. 그래 그 저 젖먹이는 아이를 나한테 떠맡기고 어머니를 데리고 나가가지고 그 날 총살을 시켜버렸어요.

 그때 생각을 하믄 그 군인들 와가지고 그 젖먹이 그걸 때어 놓고 사람을 데리고 가가지고 그걸 죽인다는건 그건 인간들도 아니에요. 솔직한 얘기로. 그렇게까지 악랄하게 사람을 죽였으니 그래가지고 우리이제 그날 남원리 가가지고 신흥리로 가가지고 그날 밤에 여기 습격이 들었어요. 그날 밤에 습격. 그래서 그 이튿날 나머지 여기 70~80명 있는 사람은 전부 몰살되부런 전부. 다 죽여부렀주. 그래가지고 그러니까 전날 이제 희생된 분하고 이제 그 이튿날 희생된 분하고 다 이제 한 무덤에다 여가지고 첨 이렇게 되부렀죠.

이 몰살되기 전에 그 군인들이 와가지고 차출해가지고 죽은 사람은 20세에서 40세까지. 이런 사람은 뭐 묻지 말고 다 끌어다 총살시켜버렸어요. 그리고 나머지는 10대에서 50대 이상 이 사람들은 남았다가 그 이튿날 그 습격 후에 다 총살됐어요. 살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렇지만은 습격 들고 난 다음에 첨 뭐 보복이나 마찬가지죠. 뭐 첨 그래가지고 몰살 시켜부렀으니까 보복이나 한가지죠. 여기가 내통을 했으니까 습격든 거 아니냐.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뭐 우리야 그런걸 알겠습니까만은 이게 알고 생각해보니까 그렇게 밖에는 인정이 안 돼요. 그땐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할 시절이랐습니다. 솔직한 얘기로 입이 있어도 말을 못했어요”


 •  양봉천 회장 / 삼묘동친회

“1948년도 12월달이니까 그 이듬해 그러니까 1949도 봄에 이쪽으로 왔습니다. 민보단들이 뭐 당가 그러니까 들것에 들고 와가지고 이렇게 그 잘 놔가지고 흙을 덮어준 것이 아니고 그 상황 그때 그 사람들이 얘기하는 거를 들으면은 뭐 아무렇게나 이것이 시신이라면 그냥 그 들고 와가지고 확 버리듯이 이렇게 아무런 무작위로 이렇게 버리니까 이게 어떻게 썩어지면은 머린 이래가고 발은 이래가고...”

 

• 김해백, 67세, 남(당시 16세)

“어멍이 그 애기를 업어가지고 총을 맞았는데 뒷날 아침에 강 보니까 애기가 살아가지고 가슴 앞에 와가지고 어머니 젖만 빨고 있더라 그래서 하도 안타까워가지고 이 애는 하늘에서 준 생명이다 해가지고 십시일반 해가지고 군인들이 해가지고 그해 보육을 했다하는 그런 소문들 들었습니다.”

 

• 김홍석, 62세, 남(당시 11세)

“보육을 하는데 누구 키울 사람 없냐고 하니까 어디 남원 쪽에 어떤 분이 데리고 가셨다고 한 말까지만 들었는데 나중에 그 설에 의하니까 그 애기도 그냥 죽어버렸다고 그런 얘기까지 얘기가 분분하던 거예요. 어머니는 돌아갔는데 다음날 아침에 보니까 그 겨울에 애기가 살아가지고 앞으로 돌아와 가지고 젖을 빨고 있었어요. 이런 얘기가 아주그냥 우리 마을에 허다 했던 얘기에요.”

 저 자기 부모가 저기 죽어있는 거 눈 앞에 봐도 울지도 못했어요. 표정을 절대 굳은 표정을 가져야지 어떤 다른 표정을 가지면은 아 너도 하는 그런 시대이기 때문에 당최 그렇게 못했어요.

완전히 여기 풀 속에 전부 뼈에요. 그래서 내가 기억하기로는 여기 요만치를 제외한 저쪽으로 전부 사람인데 겹치기 겹치기 그냥 막 뭐하니까 몇 명이라고 확인할 도리 없고 당최...”  

 

 

상처받은 영혼을 향한 희망이 불어오는 곳
평화·상생·해원 바람의 진원지

제주4·3평화재단

4·3유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