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진아영할머니 집터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제주시 지역구분(읍면) 한림면 지역구분(마을별) 월령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월령1길 22
GPS 위도 33.3763333333333, 경도 126.214194444444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〇 온 마을이 선인장 천국이다. 밭과 우영에도, 울담과 올래길에도 손바닥을 세운 채 검은 열매를 키우고 있다. 한림읍 월령리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손바닥 선인장 자생지면서 대부분의 주민들이 선인장을 키우는 우리나라 유일의 선인장 마을이다.이 마을에는 죽어서야 역사의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 무명천 할머니의 지난한 삶이 녹아있는 작은 집이 하나 있다. 불러도 대답 없는 문패가 뚜렷하고, 그 집 이마에 새겨진 한 마리의 새는 할머니의 한 많은 세월을 하늘나라로 잘 인도하고 있을까.한국현대사 최대의 비극인 4·3이라는 죽음의 광풍 속에 숱한 아픔을 간직한 채 평생을 남모르게 울음을 삼키며 살아왔던 무명천 할머니. 그녀는 '진아영'이라는 예쁜 이름을 갖고 있었다.무명천 할머니는 1914년생으로, 4·3이 일어난 다음해인 1949년 1월 35살의 나이에 한경면 판포리의 집 앞에서 경찰이 무장대로 오인해 발사한 총탄에 턱을 맞고 쓰러진 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 뒤 할머니는 무명천으로 턱을 가린 채 말을 할 수도 없고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55년의 외롭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오다 2004년 9월 8일 한 많은 세상을 등졌다.무명천 진아영 할머니는 4·3당시 고향 판포리의 오빠 집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던 순박하고 평범한 서른 다섯의 아낙이었다.1948년 10월 11일, 이승만 정부는 4·3 토벌의 중심 부대로 제주도경비사령부(사령관 송요찬 중령)를 새로 설치하여 강력한 토벌정책을 실시한다. 게다가 11월 17일에는 대통령 령 31호로 제주도에 한정된 계엄령이 선포돼 이후 군경의 토벌은 점점 무차별 학살로 변해 갔다. 특히 국군 9연대와 2연대의 교체시기였던 1948년 12월과 1949년 1월, 2월의 잔인한 토벌에 따른 도민들의 희생은 엄청났고 제주도는 '죽음의 섬'으로 가엾게 존재할 뿐이었다.바로 이런 상황에서 한림 주둔 2연대(연대장 함병선 대령)와 한림지서 경찰들에 의한 판포리 토벌이 이뤄졌고, 1949년 1월 무명천 할머니는 경찰 토벌대의 총에 턱을 맞고 만 것이다.

 

월령리에서 할머니를 도우며 살았던 진위현(사촌·사망) 할아버지는 "4·3사건 당시에도 그 할머니는 귀가 멀어났주. 토벌대가 들이 닥치자 울담 쪽에 숨었는데 경찰이 쏜 총에 턱을 맞은 거라. 그때가 판포에 폭도가 들어온 때였어. 그때 턱이 없어져 버렸지. 내가 가봤는데 걸레로 상처를 싼 채 할머니에 의해 눕혀있었어. 죽은 사람을 왜 눕혀놨는지 하며 생각했는데 살아있었어. 근데 턱이 없었져서 차라리 죽는게 나았었지. 어려운 시절이어서 그냥 내버려 두어도, 살이 썩어 가면서도 모진게 생명이라 살아나더라"고 증언했다. 

 

한 많은 고통의 세월 무명천 할머니는 판포리의 부모님의 돌아가시자 언니와 사촌들이 살고 있는 월령리로 와서 살게 되었다. 할머니는 늘 사람들이 밭에 나가 텅 비어 있는 마을 울담 귀퉁이에 앉아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아니면 자신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던 4·3의 세월을 탓하며 놀란 눈으로 세상을 응시했다."잠깐 집을 비울때도 할머니는 안팎으로 자물쇠를 꽁꽁 잠그고 다녔지. 자물쇠를 얼마나 자꾸 열고 닫았는지 반들반들 길이 잘들어었주." 옹색한 살림에 누가 가져 갈까 두려운게 아니라 4·3 당시의 그 공포가 아무도 자신의 집에 들여 놓을 수 없는 그 상처의 후유증이 너무 지독했기 때문이리라. 이것은 역사의 상처가 개인의 마음을 옭아메었던 쓰라린 트라우마로 그녀의 삶을 평생 지배했던 것이다.할머니는 그 누구한테도 음식 먹는 모습을 보인적이 없다."할머니는 턱이 없어서 입안이 심하게 헐었지. 턱이 없으니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없고 말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지. 잔치집이나 상가집에서 음식을 주어도 꼭 싸가지고 집에 가서 혼자 먹었주." 이웃에 살던 송민순 할머니의 증언이다.무명천을 풀어 흉한 자신의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지 않고자 했던 자기나름의 배려의 생활이 몸에 베여 있었기 때문이었다.무명천 할머니의 삶은 이웃의 도움을 받기보다는 스스로 바다에 나가 톳을 채취하고 김메기 등 날품팔이를 하며 매일매일 소요되는 약값을 벌어야 했다. 먹는 것이 부자유 스럽다 보니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었다. 특히 위장병과 영양실조가 평생 따라다니며 그녀를 괴롭히기도 했다.무명천 할머니는 별세 3년전 성이시돌 요양원에 들어가 생활하다 2004년 9월, 자신을 지켜주었던 수녀님의 손을 꼭 잡고 고통은 긴세월을 건너 한의 세월을 마감했다.지금 그녀의 처소는 무명천 할머니가 평생 살았던 월령리의 작은집는 '삶터보존위원회'에 의해 소박하게 단장되어 그녀의 비극적인 삶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자주 찾곤한다."할머니의 삶터를 위해 돌담을 차곡차곡 쌓듯이 작은 정성들을 모았습니다. 진아영 할머니를 기억하는 사람들, 4·3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해 온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재주만큼 힘을 보탰습니다. 비가 새던 천장에 방수공사를 하고 도배도 새로 했습니다. 서툰 솜씨지만 돌담도 직접 정비하고 마당에는 잔디를 깔고 작은 화단도 꾸몄습니다. 방 안 구석구석에 쌓여 있던 세월의 먼지들도 햇볕에 말려냈습니다"며 '삶터보존위원회' 정민구 공동대표는 이야기 한다.

<출처: 한라일보(2008.7.22.)>

 

 

〇 2008년 3월 25일, 월령리 무명천할머니 생전의 집을 전시관으로 탈바꿈하여 오픈하였다. 진아영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집이 헐리게 되자, 시민단체 사람들이 ‘진아영 할머니 삶터 보존위원회'(공동대표 정민구, 박용수)를 구성하여 4.3의 상징인 진아영 할머니의 생전 모습을 복원하여 알리자는데 뜻이 모여져 진행된 일이었다.

 

진아영 할머니는 이름보다 무명천 할머니가 익숙하다. 얼굴을 감싼 무명천 때문이다. 진아영 할머니는 1914년생으로 4.3사건을 판포리에서 만났다. 1949년 1월 12일 한밤중에 날라든 총탄에 아래턱을 맞아 극적으로 살아난 진아영 할머니는 그 후로 무명천으로 얼굴을 감싼 채 살아가야 했다. 턱이 없어 말도 못하고, 음식도 못 씹어서 건강도 잃어갔다. 한평생 후유증으로 고생하며 사시다다가 2004년 9월 8일 향년 90에 생을 마감했다.  

 

월령리가 인연이 된 것은 아무도 돌봐줄 사람이 없는 할머니를 언니가 월령리로 데리고 가서 살면서부터이다. 이곳에서 할머니는 선인장 열매나 톳을 따다가 품팔이를 하면서 연명했다. 턱과 이가 없어 씹지를 못하니 소화불량으로 인한 위장병과 영양실조는 늘 달고 다녀야 했다. 일주일에 이틀은 병원에 가는 날이다. 이처럼 4.3사건의 후유증은 진아영 할머니의 삶을 좌지우지했고, 이런 할머니의 모습을 1998년 다큐멘터리 제작단(감독 김동만)에 의해 ‘무명천 할머니’로 제작되어 상영되었다. 이 작품은 대학가, 시민단체, 각종 행사에서 자주 상영되면서, 4.3하면 ‘무명천 할머니’를 떠올리게 했다.

 

 

 

 

 현장사진

 

 

 

 

 

 

 

 

 

 

 

 

 

 

 

 

 사료(문서, 사진, 증언)

  

 

무명천 할머니

-  월령리 진아영

                                                    허영선(시인)

 

한 여자가 울담 아래 쪼그려 있네

손바닥 선인장처럼 앉아 있네

희디 흰 무명천 턱을 싸맨 채  

 

울음이 소리가 되고 소리가 울음이 되는

그녀, 끅끅 막힌 목젖의 음운 나는 알 수 없네

가슴뼈로 후둑이는 그녀의 울음 난 알 수 없네

무자년 그날, 살려고 후다닥 내달린 밭담 안에서

누가 날렸는지 모를

날카로운 한발에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턱

당해보지 않은 나는 알 수가 없네

그 고통 속에 허구한 밤 뒤채이는

어둠을 본 적 없는 나는 알 수 없네

링거를 맞지 않고는 잠들 수 없는

그녀 몸의 소리를

모든 말은 부호처럼 날아가 비명횡사하고

모든 꿈은 먼 바다로 가 꽃히고 

어둠이 깊을수록 통증은 깊어지네

홀로 헛것들과 싸우며 새벽을 기다리던

그래 본 적 없는 나는

그 깊은 고통을 진정 알 길 없네

그녀 딛는 곳마다 헛딛는 말들을 할 수 있다고

바다 새가 꾸륵대고 있네

지금 대명천지 훌훌 자물쇠 벗기는

베롱한 세상

한 세상 왔다지만

꽁꽁 자물쇠 채운 문전에서

한 여자가 슬픈 눈 비린 저녁놀에 얼굴 묻네

오늘도 희디흰 무받치고

울담 아래 앉아 있네

한 여자가

 

 

 

 

여기 무명천할머니 잠들다

 

                                             김경훈

 

 

무명천 풀고

오늘 여기 누웠네

멍에처럼 날아간 턱을 옥죄던

무명천 벗어두고

꽃상여도 없이

호곡할 복친도 없이

여기 오늘 홀로 누웠네

고운 잔디옷 입고

서천 꽃밭 가는 길

외롭지 않네

부끄러이 숨어 핀 가을꽃 벗 삼고

날아오른 마음이 새소리 길 삼아

저 세상 가려네 

악귀 같은 이승의 기억일랑

가는 길 낮잠 삼아 벗어버리고

이제 고운 얼굴로 도올라 환생하려네

무명천 매지 않은 맨 얼굴로 살려네

그렇게 다시 여기 온다고 말하려네

말을 하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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