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만벵듸 공동장지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제주시 지역구분(읍면) 한림면 지역구분(마을별) 금악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 2754번지 일대
GPS 위도 33.3763333333333, 경도 126.295888888889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〇 명월 상동 갯거리오름 서남쪽에는 1950년 음력 7월 7일 모슬포 섯알오름 탄약고터에서 집단학살된 민간인들을 매장한 '만벵듸 공동장지'가 있다. 같은 날 희생된 백조일손지지의 희생자와는 다른 구덩이에서, 다른 시간에 학살된 만벵듸 공동장지의 희생자는 한국전쟁 직후 한림 및 무릉지서에 검속되었던 사람들이다. 만벵듸 희생자들은 주로 한림 지역의 우익인사에서부터 유족들 표현대로 '농사밖에 모르던 농투성이들'과 여성들을 포함한 모든 계층 사람들이다. 

현재 유족들의 증언이 서로 엇갈리는 부분이 있으나 이 사건의 희생자는 63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희생자들은 여러 사유로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부터 검속되기 시작했다. 검속은 희생된 전날(1950년 음 7월 7일, 양 8월 20일)까지 약 두 달 동안 이루어졌다. 이들의 구금장소는 당시 한림면 어업창고였다. 만벵듸 희생자들은 음력 7월 7일 새벽 2시에 섯알오름 탄약고터 작은 구덩이에서 학살됐다. 그 날, 몇 시간 후에는 큰 구덩이에서 백조일손 희생자들이 학살됐다. 몇몇 증언에 따르면 백조일손 희생자들은 트럭이 중간에 고장나는 바람에 한림지역 희생자보다 학살 시간이 늦어졌다고 한다. 

 

시신 수습은 1956년 3월 30일 이루어졌다. 일부 유족들이 모여 군인들 몰래 칠성판이며 광목, 가마니를 준비하고 새벽 2~3시경에 트럭으로 섯알오름에 가서 수습해 왔다. 당시 유족들은 시신을 쉽게 구별했다고 한다. 머리 모양이나 치아, 썩지 않고 남은 옷, 소지품 등으로 일부의 시신을 구별했다는 것이다. 만벵듸 공동장지는 다행히 유족 중 한 분이 무상으로 내놓았다. 유족들은 그 날, 매장을 하면서 서로 약속했다. 우리 앞으로 단 한 사람이 여기 벌초를 오더라도 '메도, 술도, 벌초도 같이 하자'고. 

 

현재 제주도와 북제주군의 지원으로 묘역은 잘 정비되어 있고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묘역 안에는 섯알오름 희생자 외에 원래 그 곳에 묻혔던 토지 주인의 묘소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출처: 제주4.3연구소, 『4.3유적Ⅰ』>

 

 

〇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또 다시 비극이 찾아왔다.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및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 되었다. 예비검속으로 인한 희생자와 형무소 재소자 희생자는 3,0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유족들은 아직도 그 시신을 대부분 찾지 못하고 있다.

 

제주에서도 예비검속이 실시되었다. 경찰 공문에 따르면, 1950년 8월 4일 당시 제주도내 4개 경찰서에 예비검속된 자의 수는 820명이었다. 그 뒤 계속 구금이 이루어진 끝에 8월 20일(음 7월 7일) 제주읍 비행장, 제주항 앞바다, 송악산 섯알오름 등지에서 1천여 명을 집단적으로 총살 암매장 또는 수장하였다. 경찰은 검속된 자들을 A・B・C・D 네 등급으로 분류했는데, C・D급은 예비검속자 등급별 사정 과정에서 군 송치 대상자로 분류되어 계엄군에 넘겨져서 총살되었다.

 

전쟁이 터졌을 때 모슬포경찰서 관내 한림면・대정면・안덕면 예비검속자 총수는 344명이었고, 이들 가운데 252명이 군(해병대)에 송치되어 희생되었다. 이들 희생자는 모슬포경찰서 관할 모슬포 절간고구마 창고, 한림지서 관할 한림항 어업조합 창고, 무릉지서 창고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이었다.

 

해병대에 송치된 예비검속자들은 두 차례에 걸쳐 집단총살 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1차 총살은 해병대 모슬포부대에 의해 1950년 7월 16∼20일경에 집행됐다. 모슬포 해병대원들은 총살장소인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 미리 도착해 대기한 후 트럭에 실려 온 민간인들을 굴 입구로 한 사람씩 끌고 가 총살을 집행했다. 이어 1950년 8월 20일 모슬포 주둔 해병대 제3대대 대원들은 경찰로부터 인계받은 예비검속자들을 군 트럭을 이용, 1차 총살 때와 같은 장소인 섯알오름 탄약고 터로 끌고 가 예비검속자들을 총살한 것으로 드러났다.

 

8월 20일 총살은 두 차례 이루어졌다. 모슬포 절간고구마 창고에 갇혀있던 사람들은 새벽 5시에, 한림 어업조합 창고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은 같은 날 새벽 2시에 총살되었다. 같은 장소이지만 모슬포에서 끌려간 희생자들과 한림에서 간 사람들이 희생된 위치는 약간 달랐다. 총살 당일 현장을 목격한 주민에 의해 알려져서 유가족 400~500여 명이 모여들어 시신을 수습하려 했지만 방첩대 소속 군인들이 제지하여 수습하지 못했다.

 

그 뒤 1956년 3월 30일 한림지서 예비검속 희생자 유족들이 61구의 시신을 수습하여 한림읍 금악리 ‘만벵듸 공동장지’에 안장하였다. 같은 해 5월 18일 대정지역 유가족들은 132구의 유골을 수습하여 안덕면 사계리에 부지를 마련해 묘역을 조성했다. 이 묘역은 1960년 유족들이 성금을 모아서 비를 세우고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라고 이름을 붙였다.

<출처: 제주4.3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〇 한림읍 명월경에 있는 작은갯거리오름 남쪽에 ‘만뱅듸모슬포공동장지’라는 묘지가 있다. 남서쪽으로 금악오름이 보이고,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작은 갯거리 오름에는 한림읍 관내 ‘4개리(협재, 명월, 금릉, 옹포리) 공동장지’가 조성되어 있다.


이 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62구의 시신도 백조일손지지와 마찬가지로 50년 칠석날 섯알오름 탄약고터에서 학살된 분들이다. 지금은 절반 이상이 이장을 해버려서 군데군데 빈터가 보이고, 이장한 자리에 다시 산을 쓰고 해서 백조일손지지와는 대조가 되어 보이는 ‘만뱅듸모슬포공동장지’. 10여 년 후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비석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섯알오름에서 학살된 분들의 묘지 8기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묘지의 크기로 보아 같은 것으로 보이는, 지금은 버려져 골총이 되어버린 묘지도 6기나 있었다. 

 

 여기에 안장되어 있는 분들도 결국은 백조일손지지와 동일한 희생자이다. 그러나 학살된 위치가 백조일손지지의 희생자들이 학살된 곳보다 몇 발자국 안으로 떨어져 있고, 학살된 시간도 다르며, 한림지서에서 직접 옮겨져 왔다는 사실 등 백조일손지지의 희생자들과는 다소 차이점이 있기는 하다. 

 

 현재 명월리에 거주하는 김달천(현, 88세)씨의 증언으로 학살의 진상을 살펴보자. 

 김씨는 당시 섯알오름에서 육촌형 김태선(당시 60여세)씨와 구촌조카 김태국(당시 30여세)씨를 잃었다고 한다. 그래서 임진년(1952년) 인가 계사년(1953년)에 기습적(?)으로 섯알오름에서 시신을 수습해올 때도 같이 갔었다고 한다.

 

 섯알오름으로 가잰허믄 지서 앞을 지나야 하거든. 그래서 전에 모슬포지서에 근무해난 사름도 태우고, 한림, 명월 유족 스무명쯤이 아침 일찍 출발했지. 지서 앞에서, 순경했던 사름은 지서에 강 우리가 올 때까지 놀고 있으라고 해 놓고 우린 섯알오름으로 갔주.

 

죽은 장소는 사건이 금방 난 때 봐둔 사름덜이 있어서 금방 찾았지. 총뽀랭이(총알) 보관해난 곳이라 꼭 방모양으로 세맨헌 흔적도 있고 옴막 들어간 웅뎅이라. 두 사름은 그 웅뎅이로 내려간 뼈를 추려내고, 나는 밖에서 광목에 머리뼈에 긴뼈 몇 개씩 맞추멍 한 사름치씩 고르는 거라. 그래서 세 사름치가 되믄 가마니에 담고 했지.

 

처음에 갈 때는 59구로 알았지. 유족들이 따라가던지 못가는 사름은 부탁도 해서 59고로 알아신디 파다보니 3구가 남는 거라. 그것도 그냔 담아단 묻었지. 

 

파다보믄 그 옆에 신착도 있고, 시계도 있고....... 한림 김권홍이는 개화장(지팡이) 이 이시난 쉽게 찾았어. 또 어떤 사름은 이빨 보고, 뼈다구 보고....... 어떻든 59구는 다 주인을 찾았을 거라고 기억되는군. 그런데 머리가 더박허고 긴 것이어선 보난 여자 영장이라. 그게 2구나 있었지.

 

순경이라도 올까허연 서둘러 2~3 시간만에 다 파고는 갯거리오름에 완 토롱을 했지. 원래 토롱헌 영장은 숭험(흉험)이 없댄허는 것이라, 나중에 택일을 해서 지금의 만뱅듸공동장지에 묻었지. 그 밭도 한림 김권홍이네가 자기네 산이 있던 밭을 내놓아서 쓰게된 거라.

 

참 애무헌 (애매한) 사름 다 죽었지. 우리 육촌형은 그때 예순 댓살이나 먹은 늙은인디 여름에 물외밭(오이밭) 지키면서 북선이 어떻고, 남선이 어떻고 한마디 아는 척 했다가 밀서들어간 죽은 거라.

 

칠석날 며칠 전이라실 거라. 소까이 갔단 다들 올라완 성도 쌓고 민보단허연 보초도 서는디, 한림에서 도리우찌 쓴 육지말 쓰는 토벌대 사름 하나가 나타난 거라. 민보단 사무실에 오더니 며칠 조사허고 보내준다고 허면서 이름을 부르는 거라. 이름 부른 사름 중에 그 디 있던 사름들은 바로 잡아가고, 없는 사름은 집을 가리키라고 해서 우리 중동에만 8켱을 잡아다 놓더니, “여기 귀순자는 없느냐”고 또 물어봐. 오요승이랜 헌 스물댓 난 놈이, 이 놈은 미련허게 가만히 있었으믄 안 죽었을 건디, “네, 여기 있습니다.” 허고 대답헌 거라. 대답했단 같이 간 죽었지.

 

명단을 애초부터 가져완 누구누구허고 부른 건디....... 우린 다 알지. 누구가 밀서헌 걸. 그 밀서헌 놈도 경찰에서, “너 같은 놈은 또 배반헌다”고 죽여부렀댄 허대.

 

다 애무헌 사름덜이지. 오용승이도 겁난 산에 도망갔단 귀순헌 아이고, 나머지는 경찰에 한번 안 잡혀가본 사름덜이라. 

 

한림지서에 2~3일 갇혔던 칠석날 밤 2시쯤에 모슬포에 데려단 죽여부렀다고 나중에 소문이 났대. 우린 예비검속이랜허는 말도 들어보질 못 했어. 보초 나가는 사름덜 호명허고 데려가더니 그냥 죽여분거라.

 

우리 명월 사름덜 허고 한림사름덜만 62명이 죽은 거지. 시신도 파내잰 보난 큰 돌덩이로 꽉 눌러놨어. 산 사름도 그 돌에 눌련 죽은 거 닮아.

 

우리가 시신을 파는데 보니 몇 사름이 완 구경허면서 물어보데. “어디 사름덜이 완 파가느냐”고. 우린 한림서 왔댄 허난, 자기넨 “옆에 백 몇 사름이 죽은 디 사름덜이라”고 했어.

 

우린 옆 웅뎅이에 백 몇 사름 죽었다는 것만 알지 자세한 건 몰라.

 

김달천씨도 큰 웅덩이에서 132명이 어떻게 학살되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백조일손지지의 유족들도 대충 옆에 있는 작은 웅덩이에는 한림 사람들이 학살됐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학살 장소와 그 날짜만 동일하다는 것인데 그럼 이 두 학살사건은 연관이 없다는 말인가.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당시 한림지서는 모슬포 경찰서 관할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모슬포 ‘창고’에 있던 사람들은 모슬포 경찰서 책임 하에, 그리고 여러가지 이유로 해서 채 모슬포 ‘창고’로 이송되지 못 했던 사람들은 관할 지서 책임하에 검속자들을 처리하라는 명령이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중에 한림지서에 있던 사람들은 섯알오름 탄약고터로 이송하라고 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증명하는 것으로, 현재 상모리에 거주하는 우모씨는 전에 이 사건을 알아보다가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창고에 있던 사람들을 밤 2시에 차에 태워 섯알오름으로 가려했는데 차 한대가 고장이 나서 고치다 보니 새벽이 되어 버렸고, 그래서 학살 후 돌아오던 차가 유족들에게 발견되어버렸다” 고.

이 말을 한림 유족들의 말과 연관시켜 보면 그때의 상황이 뚜렷이 부각된다. 

 

모슬포 창고에 있던 사람들과 한림지서에 있던 사람들을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학살하려 했는데 사고가 생겨서 한림 사람들이 먼저 학살당한 것이라고. 사실 한림 사람들이 학살된 작은 웅덩이는 탄약고터의 조금 안쪽에 있고, 백조일손지지의 희생자들이 학살된 큰 웅덩이는 작은 웅덩이와 입구쪽으로 몇 발자국 떨어져 있는 바깥쪽이다. 결국 같은 시간에 학살하려던 계획이 몇 시간 간격으로 학살이 이루어지게 되면서 장소도 약간 차이가 나게 된 것 같다.

 

<출처: 제주4.3연구소, 『4.3장정』 통권 3호, 1990>

 

 

 현장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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