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대정면 4.3사건 위령비 (문형순 공덕비, 조남수·김남원 공덕비, 4·3사건 위령비)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서귀포시 지역구분(읍면) 대정면 지역구분(마을별) 하모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 1224번지 일대
GPS 위도 33.2253888888889, 경도 126.248472222222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 모슬봉에서 남쪽으로 해안마을까지 동서로 나뉘어진 대정면 상모리와 하모리는 보통 모슬포로 불린다. 4․3당시 상모리는 이교동, 대동, 서상동, 중하동, 서하동, 산이수동의 6개 자연마을로, 하모리는 돈지동, 영수동, 상동, 중하동, 서상동, 당전동, 하동의 7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모슬포는 일제시기 모슬포항이 개발되고, 대정고을(보성·안성·인성리)에서 면사무소와 소학교가 이전해온 후부터 대정면의 중심지가 되기 시작했다. 또한 일본군이 사용하던 오오무라(大村) 병사를 9연대가 사용하고, 모슬포지서가 위치하고 있어서 제주도 서부지역 토벌대의 거점이 되었다. 특히, 1948년 3월 14일 대정중학생 양은하(梁銀河, 영락리)가 모슬포지서에서 고문치사 당한 사건은 도민의 감정을 극도로 자극시켰으며, 대정중학교 교사 이승진(李承晋)이 ‘김달삼(金達三)’이란 가명으로 무장대 총책이 됨으로써 대정중의 교사와 학생들은 토벌대의 주목을 받았다. 

 

토벌전이 강화되기 시작한 1948년 10월께부터 경비대 주둔지인 대촌병사에는 연일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11월 6일에는 9연대로 끌려가 고문 받던 대정면사무소 직원과 청년단체원 및 지역주민 16명이 동일 2리 천미동 입구 밭에서, 12월 13일에는 이교동 향사 앞밭에서 주민 48명이 토벌대에 의해 공개총살 당했다. 이때  조남수 목사가 소위 '자수운동'을 벌였고, 이후 모슬포 주민들은 당시 조남수 목사와 면장 김남원의 공로를 기려 속칭 '진개동산'에 <牧師 趙南洙․面長 金南元 공덕비>와 <4․3사건 위령비>를 함께 세우기도 했다. 1949년 1월 10일에는 주민들 중 경찰을 돕던 특공대원 11명이 모슬봉 기슭에서 총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48년 11월 중순 제주도 전역에 소개령이 내려지면서 모슬포에는 인근 지역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소개되어왔다. 이 시기 마을 경비를 위해 축성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상모리의 9연대 본부 정문에서 시작되어 동일리를 거쳐 일과리까지 이어지는 장성(長城)이었다. 한편, 송악산 섯알오름 옛 탄약고터는 190년 6·25발발 직후 한림, 안덕, 대정면 관내 예비검속자들이 총살·암매장당한 곳이기도 하다.

 

한편, 모슬포에는 알뜨르비행장에 설치된 비행기 격납고, 섯알오름 고사포 진지, 이교동 일제 군사시설, 송악산 진지동굴 등 태평양전쟁과 관련한 국가지정 등록문화재만도 8개에 이르고 있다. 섯알오름 학살터를 비롯한 제주4·3사건 유적지와 6·25 한국전쟁 당시 설치된 옛 육군제1훈련소, 강병대교회, 해병훈련시설지 등, 모슬포는 마을 전체가 지붕 없는 역사박물관이나 다름없다. 

 

 

모슬포 짐가동산은 대정읍 하모리와 동일리 경계에 있으며 김가(金家)가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제주말로 ‘김가’를 ‘짐가(또는 짐개)’라고 부른데서 연유한다. 

 

1996년 지역주민들에 의해 4․3사건 위령비와 함께 조남수 목사, 김남원 민보단장의 공덕비가 세워지고, 2005년 7월에는 문형순 당시 모슬포 경찰서장 공덕비가 세워진 곳이다. 다음은 관련증언들 중 일부다.

 

 

모슬포가 온통 난리가 났습니다. 집 식구 중에 산에 올라간 사람, 산사람에게 식량이나 옷을 갖다 준 사람들은 자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자수하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어느 누가 앞장 서 자수하겠습니까. 그러나 군과 경찰은 ‘명단’이 있다며 주민들을 협박했습니다. 자수할 수도,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죽음만을 기다릴 수도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 바로 조남수 목사와 김남원 민보단장(리장)이 나섰습니다. 당시 모슬포 경찰서장이 문형순이었는데 두 분이 문 서장을 만난 것이죠. ‘주민들은 아무 잘못도 없다. 이들은 빨갱이가 아니다. 자수시킬 테니 살려달라’고 부탁한 것이죠. 문 서장은 두 분의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조 목사는 문 단장과 함께 마을 주민들을 공회당에 모이게 한 후 ‘마을 사람들이 다 죽게 됐다. 자수해야 산다. 이제 내 말을 안 들으면 하늘이 진동하고 땅이 요동을 치며 핏물이 흐르게 됐다. 명단이 (경찰에) 다 들어갔다’며 주민들을 설득했습니다. 결국 100여명의 주민이 조 목사와 민보단장의 말을 믿고 경찰서로 줄을 지어 자수하러 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저 역시 산사람들에게 쌀을 날라준 경험이 있었고 주민들과 함께 ‘왔샤(시위때 외치는 구호)’도 했었기 때문에 죽을 걸로 알고 경찰서로 간 것이죠. 사찰주임이 우리를 보자마자 ‘전부다 빨갱이들이다. 다 쏴 죽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서청이 우리들의 조서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영락없이 죽게 되는구나 생각했죠 그 때 문 서장이 나타나 서청들에게 호통 쳤습니다. ‘너희들 지금 뭐하는 거냐. 다 나가라. 자수하러 온 사람들이다. 전부 나가라’며 그들을 내쫓았습니다. 그리고는 조 목사와 문 단장에게 ‘이들을 민보단으로 데리고 가서 자수서를 써 오도록 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대정읍 하모리 고춘언) 

마을주민들이 자수서를 들고 경찰서에 찾아오자 서청단원들이 다시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문 서장이 다시 말했죠. ‘자수한 주민들이다. 강요하지 말라. 때리지도 말라’고 엄명을 내렸습니다. 그 때문에 아무 탈 없이 주민들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경찰이 ‘누구누구는 산사람과 내통했다. 또 누구네 자식은 산으로 올라갔다’고 이야기 하면 문 서장은 ‘왜 말을 함부로 하느냐. 그 말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느냐. 조사해서 사실이 아니면 너를 처벌하겠다’며 오히려 경찰에게 호통을 쳤습니다. 그 때문에 모슬포 주민들은 밀고에 의해 죽은 사람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대정읍 하모리 이병언) 

 

선량한 마을 주민들의 생명을 살려내기 위한 문 서장의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문 서장을 '한국판 쉰들러'라고 불릴 수 있도록 한 것은 그가 성산포 경찰서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였다. 4·3이라는 엄청난 희생을 치른 후라 마을마다 다시 잡아들일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군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적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자'를 검거할 것을 지시했고, 예비검속에 붙잡힌 사람들은 대부분 집단 총살을 당했다. 예비검속으로 마을마다 수백 명씩 전 도 차원에서 수천 명이 다시 희생됐다. 모슬포 '백조일손' 사건은 대표적인 예비검속 집단 학살사건이었다. 

 

1950년 8월 30일 제주주둔 해병대 정보참모 해군중령 김두찬은 성산포경찰서장에게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의뢰의 건' 공문을 보낸다. 김두찬은 이 문서에서 "귀서에 예비구속 중인 D급 및 C급에서 총살 미집행자에 대해서는 귀서에서 총살집행 후 그 결과를 9월 6일까지 육군본부 정보국 제주지구CIC 대장에게 보고하도록 이에 의뢰함"이라며 총살집행을 명령했다. 그러나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은 전쟁상황에서 계엄사령부의 총살명령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러나 문형순 서장은 '부당(不當)함으로 불이행(不移行)'이라며 군의 총살명령을 거부했다. 1950년 8~9월 경 제주도 전역에서 수천 명이 죽어간 예비검속에서 성산면 지역의 예비검속자들만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수 있었던 문형순 서장의 '용기' 때문이었다.

 

<출처: 제주4·3연구소, 「4·3역사의 길 조성 기본계획 수립 용역보고서」(2015)>

 

 

 

○ 1948년 12월 13일 상모리의 자연마을인 ‘이교동(伊橋洞)’ 향사 앞밭에서 군인들이 난사한 요란한 총격 끝에 모슬포 주민 48명 가량이 쓰러졌다. 체험자들은 희생자 중 36명은 하모리, 12명은 상모리 주민인 것으로 분류했다. 그 이전에 2~3명씩 끌려가 총살되던 것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큰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하모리 주민들은 ‘자수 사건’이라 하고, 상모리에서는 ‘대살(代殺) 사건’이라 부른다. 한 주민은 이때 공개 총살을 했다하여 ‘관광총살’이라 말하기도 했다. 이런 명칭들은 사건의 성격을 함축적으로 말해 준다.

 

사건의 발단은 9연대의 총살극이 극에 달했을 무렵인 1948년 12월 초순께, 하모리 이 아무개가 모슬포 부대에 ‘자수’를 하면서 비롯됐다. 자수강연은 대정면 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당시 군에서는 전도에 걸쳐 유행처럼 자수를 권유했다. “자수하면 살려준다. 그러나 후에 ‘명단’이 나오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게 자수강연의 요지였다. 조천면에서는 “이미 폭도 협조자의 명단이 확보돼 있다.”고 위협해 자수한 주민을 대량 학살하기도 했다.

 

자수강연을 한다는 것은 실제 ‘명단’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도 이 아무개가 자수했던 것은 앞서 ‘도장찍은 명단이 드러났다’며 일부 주민을 총살한 사건에 큰 위협을 느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미 토벌대에 의해 치안이 확보된 지역에서 과거 무장대의 영향력이 남아 있던 시절의 단순협조 사실을 굳이 자백하라고 강요한 것은 교체를 앞둔 9연대가 ‘전과’를 올리기 위해 함정을 판 것이라고 밖에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이즈음 자수를 했던 사람들은 그후에도 계속 꼬리표로 남아 6․25직후 발생한 예비검속자 학살 때 희생되기도 했다.

 

아무튼 군 부대에서는 자수한 이 아무개로부터 무장대 지원자 명단을 확보해 총살했다. 혹독한 고문 끝에 나온 이 아무개의 진술 외에는 아무런 재판이나 검증도 없었다. 이 아무개도 며칠 후에 결국 총살됐다. 이것이 하모리 주민들이 이 사건을 ‘자수사건’이라 부르는 연유이다.

 

한편 상모리에서는 이때 도피자의 가족이 대신 죽었다 하여 이 사건을 ‘대살 사건’이라 한다. 희생자 허창영의 아들인 허승수 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그날 군인들이 상모리 향사 앞에 주민들을 모두 집결시켰습니다. 이때 하모리에선 일반 주민들이 온 게 아니고 총살시킬 사람만 트럭에 태워 왔습니다. 곧 모슬포지서 고 아무개 형사가 일부 상모리 주민들을 호명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이름도 부르는 게 아닙니까. 호명된 사람들은 소위 ‘도피자가족’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당시 대정중학생이던 동생이 숨은 죄로 총살된 겁니다. 군인들은 ‘총살은 이렇게 하는 것이니 잘 보라’며 향사 인근 밭으로 끌고 가 주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총살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동생은 집 천장 위에 숨어 있었습니다. 당시 대정중학생은 무조건 잡아들일 때라 무서워 숨었던 것인데 이 때문에 아버지가 희생된 겁니다. 그 후 동생 허승복(許承福, 20)은 몇 명과 함께 자수했으나 1949년 1월 3일 군인들에게 총살됐습니다. 그 후 마을에서는 죽을 때 죽더라도 자수하지 말자고 했습니다.(대정읍 상모리 허승수)

 

그런데 이즈음 전개된 자수강연과 관련, 하모리에서는 당시 모슬포교회 조남수(趙南洙) 목사의 공덕을 기리고 있다. 1996년 5월 11일 일부 모슬포 주민들은 하모리 진개동산에 희생자 위령비와 함께 조 목사의 공덕비를 세우기도 했다. 고춘언 씨는 이렇게 말했다.

 

자수한 이 아무개의 입을 통해 오전 8시께 주민들이 줄줄이 끌려가자 마을이 발칵 뒤집어 졌습니다. 뒤에 끌려간 주민들까지 고문을 받아 자백을 하면 살아남을 남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산측의 강요로 한번쯤은 왓샤시위나 도로차단에 가담했었으니까요. 그날 오후 3시께 하모리장 겸 민보단장이던 김남원(金南元) 씨와 조남수 목사는 주민들을 급히 모아 놓고 자수를 권유했습니다. 자수하지 않은 채 명단이 드러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끌려간 사람들이 자백을 하기 전에 서둘러 자수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모슬포경찰서장 문형순으로부터 ‘자수자의 생명을 보장한다’는 약속도 받았다는 겁니다. 처음엔 머뭇거리던 주민들이 하나 둘씩 손을 들더니 1백여 명이나 되는 사람이 자수했습니다. 문형순 서장은 자술서를 직접 받지 않고 민보단에게 맡겼습니다. 이 덕분에 주민들은 비교적 ‘큰 죄’는 빼고 주로 식량 제공 등을 입을 맞춰 가며 자수할 수 있었습니다. 문 서장이 일부러 그런 기회를 준 것으로 봐야 합니다. 결국 이 아무개의 진술로 앞서 끌려간 사람들은 사흘 후 이교동에서 죽었지만 나머지 주민들이 살 수 있었던 겁니다.(대정읍 하모리 고춘언)

한편, 자수강연은 애꿎은 희생을 막으려는 조 목사의 노력이었지만 일부 부작용도 있었다. 문봉석은 동일1구 주민 중에선 초토화작전의 첫 희생자로 기록되고 있다. 일주도로변 마을이라 소개되지도 않아 동일1구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다. 그런데 1949년 1월 5일 이만보(李萬保, 29) 강달호(姜達鎬, 27) 송대일(宋大一, 25) 김인광(金仁光, 22) 등 동일1구 주민들이 토벌대에게 끌려가 총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한동안 무사하던 동일1구에서 왜 이런 희생이 벌어졌을까. 앞서 희생당한 문봉석의 아들 문창언 씨는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끌려가시던 날(12월 13일) 낮에 조남수 목사의 자수 강연이 있었습니다. 동일1구 주민들이 모두 향사에 모였지요. 조 목사는 ‘지금 자수하면 목숨을 보장받는다’고 했습니다. 가족의 입산 사실이나 산에 식량 제공한 것을 밝히고 떳떳하게 살라는 것이었지요. 그땐 산에서 식량을 요구하면 거부할 수 없는 때였지만 겁이나 처음엔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어요. 그런데 잠시 후 5명 가량이 손을 들었지요. 조목사는 ‘이 동지들은 절대 죽지 않는다. 안심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 끌려가 총살당했습니다. 이때 희생된 송대일이란 분은 아버지와 의리형제를 맺었던 분인데 초상을 치르는 우리 집에 와서 ‘형님, 우리도 자수는 했지만 다시 호출을 당했으니 죽어질지 살아질지 모르겠습니다’며 망인에게 혼잣말하듯 하고는 울고 있는 우리를 위로하던 것이 생각납니다.(대정읍 동일1리 문창언)

그런데 ‘문형순 모슬포경찰서장’이란 표현은 증언자의 혼동으로 보인다. 모슬포경찰서가 생긴 것은 사건 발생 한달 여 후인 1949년 1월 18일이기 때문이다([ 4․3은 말한다 ] 제1권과 제2권에는 모슬포경찰서 신설을 언급하고 있는데, 제2권에 기록된 ‘1949년 1월 11일’은 오기이므로 정정함). 앞서 증언한 이상봉 씨는 모슬포지서에 근무 중에 경찰서 승격을 맞는 등 모슬포에서 약 2년간 근무 후 성산포경찰서로 옮겨간 경력을 갖고 있다. 이상봉 씨는 “문형순씨는 초대 모슬포경찰서장으로 부임했다.”며 “그 전엔 제주도 전체를 관할하는 ‘기동대장’이었는데 그 때 모슬포에 들렀을 수는 있다.”고 증언했다(한편 󰡔제주경찰사󰡕에는 ‘초대 모슬포경찰서장에 강문식(康文植), 초대 성산포경찰서장에 문형순(文亨淳)’이라고 잘못 기록돼 있다. 문형순은 초대 모슬포경찰서장을 역임한 후 제2대 성산포경찰서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취재반이 입수한 사진에는 ‘文署長 送別記念撮影 4282(1949). 11. 1’이라고 쓰여 있다).

 

<출처: 제민일보 4‧3취재반, [ 4‧3은 말한다 5 ](1998)>

 

 

 

 현장사진

 

 

 

 

 

 

 

 

 

 


 

상처받은 영혼을 향한 희망이 불어오는 곳
평화·상생·해원 바람의 진원지

제주4·3평화재단

4·3유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