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9연대 본부 옛터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서귀포시 지역구분(읍면) 대정면 지역구분(마을별) 상모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3376-3번지 일대
GPS 위도 33.2305277777778, 경도 126.261833333333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 모슬봉에서 남쪽으로 해안마을까지 동서로 나뉘어진 대정면 상모리와 하모리는 보통 모슬포로 불린다. 4․3당시 상모리는 이교동, 대동, 서상동, 중하동, 서하동, 산이수동의 6개 자연마을로, 하모리는 돈지동, 영수동, 상동, 중하동, 서상동, 당전동, 하동의 7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모슬포는 일제시기 모슬포항이 개발되고, 대정고을(보성·안성·인성리)에서 면사무소와 소학교가 이전해온 후부터 대정면의 중심지가 되기 시작했다. 또한 일본군이 사용하던 오오무라(大村) 병사를 9연대가 사용하고, 모슬포지서가 위치하고 있어서 제주도 서부지역 토벌대의 거점이 되었다. 특히, 1948년 3월 14일 대정중학생 양은하(梁銀河, 영락리)가 모슬포지서에서 고문치사 당한 사건은 도민의 감정을 극도로 자극시켰으며, 대정중학교 교사 이승진(李承晋)이 ‘김달삼(金達三)’이란 가명으로 무장대 총책이 됨으로써 대정중의 교사와 학생들은 토벌대의 주목을 받았다. 

 

토벌전이 강화되기 시작한 1948년 10월께부터 경비대 주둔지인 대촌병사에는 연일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11월 6일에는 9연대로 끌려가 고문 받던 대정면사무소 직원과 청년단체원 및 지역주민 16명이 동일 2리 천미동 입구 밭에서, 12월 13일에는 이교동 향사 앞밭에서 주민 48명이 토벌대에 의해 공개총살 당했다. 이때  조남수 목사가 소위󰡐자수운동󰡑을 벌였고, 이후 모슬포 주민들은 당시 조남수 목사와 면장 김남원의 공로를 기려 속칭 '진개동산'에 <牧師 趙南洙․面長 金南元 공덕비>와 <4․3사건 위령비>를 함께 세우기도 했다. 1949년 1월 10일에는 주민들 중 경찰을 돕던 특공대원 11명이 모슬봉 기슭에서 총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48년 11월 중순 제주도 전역에 소개령이 내려지면서 모슬포에는 인근 지역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소개되어왔다. 이 시기 마을 경비를 위해 축성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상모리의 9연대 본부 정문에서 시작되어 동일리를 거쳐 일과리까지 이어지는 장성(長城)이었다. 한편, 송악산 섯알오름 옛 탄약고터는 190년 6·25발발 직후 한림, 안덕, 대정면 관내 예비검속자들이 총살·암매장당한 곳이기도 하다.

 

한편, 모슬포에는 알뜨르비행장에 설치된 비행기 격납고, 섯알오름 고사포 진지, 이교동 일제 군사시설, 송악산 진지동굴 등 태평양전쟁과 관련한 국가지정 등록문화재만도 8개에 이르고 있다. 섯알오름 학살터를 비롯한 제주4·3사건 유적지와 6·25 한국전쟁 당시 설치된 옛 육군제1훈련소, 강병대교회, 해병훈련시설지 등, 모슬포는 마을 전체가 지붕 없는 역사박물관이나 다름없다. 

 

현재는 해병부대가 자리하고 있는 이곳은 4․3사건 당시 제9연대와 해병대사령부가 주둔했던 주둔지이다. 2007년 3월에는 대정역사문화연구회에서 ‘평화군의 양성소’라는 설명과 함께 ‘평화의 터’를 조성하게 된 배경이 되는 곳이다. 현재 육․해․공 3군상징표상탑이 3군의 창설과정을 적은 안내문과 함께 세워졌다. 

 

국군의 전신이랄 수 있는 국방경비대 제9연대는 처음엔 향토연대로 1946년 11월 모슬포에서 창설됐다. 다음해 3월부터 제주도내 청년들을 대상으로 모병하여 1948년 4월까지 모두 8차례에 걸쳐 500여 명을 충원했다. 일제시기 일본군이 사용했던 오무라(大村)병사를 그대로 사용했다. 창설 초기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나 1948년 초토화작전이 시행되면서 군경토벌대의 주축이 된다.

 

그 해 12월 29일, 여순사건을 진압한 2연대로 교체되기 전까지 9연대에는 많은 사건이 있었다. 1948년  4월 28일 소위 4․28평화회담의 주역인 김익렬 연대장이 미군정에 의해 해임되고 박진경 중령이 부임한다. 그리고 육지에서 창설된 11연대가 제주도로 진주하여 주둔하면서 9연대는 11연대로 편입된다. 1948년 5월 20일, 연대 병사 41명이 탈영하여 대정지서(당시 보성리 위치)를 습격한다. 이때 대정지서에서는 5명의 희생자와 2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6월 18일 박진경 연대장은 대령으로 승진하고 이날 피로연에서 부하인 문상길, 손선호 등에게 암살된다. 그 해 7월, 11연대가 다시 수원으로 돌아가고, 이후 송요찬이 연대장으로 부임하면서 9연대는 전도적으로 주둔지를 넓히고 2연대로 교체되기 전까지 제주도 토벌대의 핵심이 된다.

 

1949년 12월 28일 해병대가 진주에서 제주도로 이동하여, 제주읍과 모슬포에 나뉘어서 배치된다. 해병대의 주 활동은 4·3사건의 마무리였다. 도민 계몽활동을 비롯하여, 군의관의 무의촌 순회 진료, 도민들을 통하여 도로보수공사를 하는 등 적극적 원조에 나섰다. 그동안 진행 된 대토벌로 인한 군에 대한 경각심을 없애기 위해 해병대는 나름 도민을 대하는 규칙을 정하여 활동하였고, 신뢰심을 높여 갔다. 이런 와중에 많은 제주도 청년들이 해병대에 자원입대하기도 하였다.

 

1950년 7월 15일, 해병대 3개 중대가 우선 한국전쟁 참전을 위하여 제주항을 떠나 군산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7월 16일에는 모슬포경찰서 관내 예비검속 관련 구금자 347명 중 60명이 해병대로 인계되어 집단학살 되었다(장소 미상, 경찰 자료). 그리고 동년 8월 20일(음력 7월 7일) 새벽 모슬포 주둔 해병 제3대대(대대장 김윤근 소령)에 의해 ‘섯알오름 대학살’이 진행되었다.

 

1950년 9월 해병대는 제주를 완전히 떠나게 되고 제주에서 훈련시킨 신병 3000여명(3,4기생. 여기에는 여자들도 포함되어 있어서 최초 여성군인이다)을 1개 연대와 독립 5대대로 편성하여 한국전쟁 당시 거창양민학살, 인천상륙과 서울탈환 등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게 하였다.

 

현재 ‘평화의 터’ 가 조성되면서 새로운 화두를 던지고 있는 이곳, 어쨌거나 이 일대는 일제강점기 오무라(大村)병사를 시작으로 국방경비대 9연대, 11연대, 2연대, 그리고 해병대, 최종적으로 육군 제1훈련소까지 ‘죽임’의 연습장이었다. 현재 이곳에는 해병부대와 공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서, 모슬포의 역사를 현재에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끝없이 ‘평화’에 대한 고민과 갈등을 생각해 보게 하는 역사적인 곳이 되어 가고 있다.

 

<출처: 제주4·3연구소, 「4·3역사의 길 조성 기본계획 수립 용역보고서」(2015)>

 

 

 ○ 제주도가 도로 승격됨에 따라 1946년 11월 16일 제주도 모슬포에서 조선경비대 제9연대가 창설되었고 초대 연대장에는 장창국(張昌國) 부위가 발령되었다. 9연대의 발족도 도제 실시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1946년 조선경비대를 발족시킨 미군정은 각 도별로 1개 연대씩을 창설한다는 ‘뱀부 계획(Bamboo plan)’에 의거해 각 지역별로 향토연대를 조직해 갔다. 뱀부 계획이란 ‘일정한 주둔지를 기준으로 하여 고안된 경찰예비대로서 필요한 병력을 그 지역의 지원자로 충원하는 방식’인데, 이미 미군이 필리핀에서 시도한 바 있었다.

 

 이 계획에 의해 1946년 1~4월 사이에 8개 도에 각각 1개 연대씩 조직한 데 이어 제주도에는 도 승격 이후 전국에서 가장 늦게 향토연대인 제9연대를 창설하게 된 것이었다.

 

 8‧15 직후 광복군을 비롯하여 일본‧중국 등지에서 군대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속속 귀향한 뒤 군사경력과 연고를 중심으로 사조직 성격의 군사단체를 형성해 갔다. 이런 사설단체가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났기 때문에 1945년 11월 군정청에 등록된 군사단체의 수는 무려 30여 개에 이를 정도로 난립상을 보였다. 미군정은 이를 정비하기 위해 1945년 11월 군정법령 제28호를 공포, 군대조직을 통괄할 국방사령부와 군무국을 설치하고, 사설군사단체와 치안단체를 불법화하였다.

 

미군정은 당면한 언어장벽을 해결하기 위해 1945년 12월 5일 군사영어학교를 설치하고 광복군‧일본군‧만주군 출신을 같은 비율로 입교시키려 하였다. 그런데 광복군 출신 중 주류파가 이를 거부함으로써 일본군과 만주군이 대거 입교했다. 1946년 군사영어학교 임관자 110명의 출신을 보면 일본군 출신이 87명, 만주군 출신이 21명으로 압도적으로 많았고, 광복군 출신은 2명에 불과했다. 결국 군 조직도 경찰과 비슷하게 일본군 경력자가 주로 기용되었다.

 

1946년 1월 15일에는 조선국방경비대를 발족, 지역별로 향토연대를 창설하기 시작하였다. 제주의 9연대는 다른 지역의 8개 연대가 창설된 지 6개월 뒤에 후발부대로 출범한 탓인지 인적 구성에서 본토와는 다른 형태를 밟았다. 즉 다른 지역의 향토연대는 기간요원까지도 현지 지원자로 구성한 반면에, 제주의 9연대는 광주 4연대로부터 기간요원 54명을 지원 받아 부대를 창설했기 때문이다. 국방부에서 나온 자료는 “(이들) 기간병들이 불량성, 아니면 사고뭉치 또는 좌익 불순분자들이라 애로가 많았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9연대가 본부로 사용한 곳은 일제시대 해군항공대가 있었던 모슬포 ‘오무라(大村)병사’였다. 제주도 최초의 비행장으로 건설된 이곳은 1937년 중‧일 전쟁 때 도양 폭격의 기지로 사용되기도 했었다. 일본군 병영을 막사로 삼은 제9연대는 이듬해인 1947년 3월부터 제주도내 청년들을 대상으로 모병활동을 벌였다. 3월 25일 제주북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제식훈련을 선보이는 등 섬을 일주하면서 읍면 소재지에서 모병활동을 전개하였다.

 

9연대는 이런 모병활동을 거쳐 1947년 한 해 동안 모두 8차례에 걸쳐 많게는 80명, 적게는 40명 단위로 청년들을 입대시켰다. 이들 병사들은 입대 기수 별로 ‘1기생’에서 ‘8기생’으로 불렀다. 1948년 1월에 와서야 9연대의 병력이 비로소 400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후에 제주뿐만 아니라 경상도, 전라도 청년들을 대상으로 사병 모집활동을 벌여 ‘4‧3’직전에는 800명에 달하였다.

 

9연대의 초기 모병활동은 여러 가지 난관이 있었다. 보급이 시원치 않아 때로는 수제비로 끼니를 때울 정도였으며 장비도 경찰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무렵 “경비대는 경찰의 보조기관이며, 정식 군대가 아니다. 정식 군대는 추후 모집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고, 젊은 층 사이에는 ‘경비대는 미국의 용병’이란 주장도 나돌았다.

 

초대 연대장으로 발령 받은 장창국은 부임 전에 서울에서 미국인 경비대사령관과 육사 교장 방에 인사차 들렀더니 제주도에는 좌익세력이 강하니 조심하라고 일러 주었다고 회고했다. 또 그는 제주에 내려와 마을 주민들이 마련한 환영연에 참석했다가 젊은 사람으로부터 “경비대가 미국의 용병이지 무슨 군인이란 말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직감적으로 과연 좌익세가 세구나 하는 것을 실감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때만 해도 전국적으로 경비대 모병심사를 할 때 사상문제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미군정은 초창기 ‘불편부당’을 내세워 비이념화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의 경비대 침투를 막기 위해 신원 보증제를 도입하자는 한국인 고문의 조언도 무시하였다. 이런 결과 조선공산당에서 후원한 국군준비대 대원들이 대거 경비대에 침투하게 되었고, 공산당 후신인 남조선노동당은 군사부를 두어 이를 관리하였다고 한다. 제주도 무장유격대의 자료에는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에서도 9연대 1차 모병 때 모슬포 출신 4명을 프락치로 입대시켰는데, 이중 2명이 이탈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 하나 주목되는 일은 9연대에서 모병 광고를 하면서 ‘국방경비대는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님’을 강조한 점이다. 󰡔제주신보󰡕 1947년 4월 22일자부터 여러 차례 게재된, ‘청년에게 고함!’으로 시작된 모병광고는 제9연대장 장창국 소령의 명의로 실려 있는데, 눈길을 끄는 대목은 다음과 같다.

 

국방경비대는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다. 동포를 사랑하고 조국을 위하여 순국하려는 피끓는 젊은이들의 애국군사기관이다. 우리들은 모국(某國)의 주구도 아니다. 일개 정당의 이용기관도 아니다. 다만 안으로는 자주독립을 추진시키고 밖으로는 국방의 중책을 완수하려는 국가의 간성이다.

 

이런 광고문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미군정의 좌우합작정책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미군정은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어 무기 휴회에 들어가자 소련 지향의 정부 수립을 막는다는 방침 아래 남한에서의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정책은 바로 미군정 스스로 극좌주의나 극우주의를 배제하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따라서 9연대의 ‘좌도 우도 아니다’란 선언은 그 당시의 이런 정치흐름을 반영한 것으로 판단된다.

 

<출처: 제주4·3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2003)>

 

 

 

 현장사진

 

 

 

 

 

 

 

 

 

 

 

 

 사료(문서, 사진, 증언)

 

 

9연대 배치도

<출처: 제주4·3연구소, 「4·3유적 Ⅱ」(2008)> 

 

○ 서울신문 1946년 5월 11일

제주도 군사시설 조사

일본으로부터 빼앗은 제주 도내의 군사시설을 조선국방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에서 사용하기 위하여 경기도 해안경비대 장교로 된 조사단이 금반 제주도에 파견되었는데 군정청 국방부장 담(談)에 의하면 국방부 용도국 □□로 이 물품을 이관할 문제에 관하여는 방금 연구중이라고 한다.

 

 

○ 제주신보 1947년 4월 28일

광고 : 국방경비대 모병

청년에게 고함!

국방경비대 제9연대가 본도에 진주 이래 어언간 5개월. 착착 성장하여 융창의 길을 밟고 있음은 오로지 도민 제현의 적극적인 원조와 애호의 덕임을 자각하여 자(玆)에 만강(滿腔)의 경의와 감사의 뜻을 표하노라. 회상하건대 1905년 한국군대가 왜적에게 해산당한 이후 33년간 군인없는 나라, 나라없는 백성으로 갖은 압박과 가혹한 착취를 받아 왔으나 이에 대항할 아무런 무기도 군인도 없이 다만 억울하고 통분한 가슴을 움켜 주고 복수의 기회만 고대하였던 것이다. 과연 하늘은 무심치 않아 1945년 8월 15일 해외해내(海外海內)에서 활약하신 혁명투사 제형들의 혈투와 강력한 연합군의 무력 앞에 불구대천의 원수 왜적은 드디어 항복하여 물러가고 삼천만 동포는 노예의 쇠사슬에서 해방이 되어 자주독립을 목표로 1946년 2월 25일 대망의 우리 국군의 모체인 조선국방경비대가 탄생하여 재생의 거대한 초보를 내딛게 되자 혈육의 노는 동포는 감격에 넘쳐 우뢰 같은 환호로 맞이했으며 눈물어린 만세소리에 행진하는 대원들의 가슴에는 새삼스레 각기 책임이 중차대함을 통감하였었다. 해방 후 2년, 해방은 되었다 하나 자주독립 평화의 길은 아직 요원하다. 순박한 인민은 정치모리배들의 간계에 넘어 좌우 양진영으로 놓여 골육상쟁하는 어리석은 멸망의 길로만 빠지고 있다. 인민들은 조국의 자주독립을 갈망하고 있다. 우리 손으로 나라를 세우고 우리 손으로 일하는 나라를 원하고 있다. 이 위대한 공동목적에 단결 못될 이유는 나변(奈邊)에 있는가? 조국은 바야흐로 존망의 기로에 서고 있다. 이 위급한 순간에 주의나 이론은 무용의 장물(長物)이다. 오직 행동만이 능히 조국을 구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국방경비대는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다. 동포를 사랑하고 조국을 위하여 순국(殉國)하려는 피끓는 젊은이들의 애국군사기관이다. 우리들은 모국(某國)의 주구(走狗)도 아니요, 일개 정당의 이용기관도 아니다. 다만 안으로는 자주독립을 추진시키고 밖으로는 국방의 중책을 완수하려는 국가의 간성이다. 분열과 모략만을 일삼고 사리사욕과 권력만을 야심하는 우리의 열악한 국민성을 완전히 청산하여야 한다. 자기 자신이 영웅 되기 전에 먼저 복종의 미덕을 배우자. 복종은 단결의 길이다. 이론보다 실천을 사랑하고 타(他)를 비방함보다 복종을 사랑하는 애국청년들은 다 오라. 군내(軍內)는 그대들의 입대를 쌍수로 환영한다. 오라! 다같이 철석같은 단결 하에 조국광명의 길로 지도하자.

조선국방경비대 보병 제9연대장 육군소령 장창국(張昌國)

 

- 모병 -

△전형일시 : 5월 16, 7, 8일(3일간) 매일 자(自)오전 9시 지(至)오후 5시

△장소 : 모슬포 보병 제9연대

△지원 자격 : 연령 만 18세 이상 30세 미만, 학력 국민학교 졸업정도 이상, 정신과 신체가 건강하며 다년간 군무에 복무할 수 있는 애국청년

△수속서류 : 이력서 2통, 호적초본 1통, 부모승락서 1통

△제출기한 : 자(自)4월 18일 지(至)5월 15일

조선 국방경비대 보병 제9연대

 

 

○ 육군 역사일지 1집(1945. 8. 15~1948. 8. 14)

  조경 제9연대 본부 이동 / 7월 22일

조선경비대 제9연대는 작전상 필요로 제주도 모슬포(慕瑟浦) 대촌(大村) 병사에서 제주도 제주읍으로 이동하다.

 

 

〇 진압부대 교체

1948년 12월 29일 제주 주둔군이 제9연대에서 제2연대로 교체됐다. 대전에 주둔하고 있던 제2연대(연대장 함병선)와 제주 주둔 제9연대가 서로 맞교대한 것이다.

 

그런데 앞서 있었던 주둔군 교체와 달리 제9연대와 제2연대의 교체는 그 까닭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즉 1948년 5월 15일부로 제9연대가 제11연대에 합편된 것은 그간 제9연대가 적극적으로 진압에 나서지 않은데 대한 문책으로 연대장을 교체하고 병력을 보강한 뒤 새롭게 진용을 갖추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1948년 7월 15일부로 제9연대를 재편하고 곧이어 제11연대를 철수시킨 것도 한 달 전 벌어졌던 박진경 제11연대장 암살사건의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한 목적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면 1948년 12월 말로 제9연대를 철수시키고 제주사건 진압작전의 책임을 제2연대에게 맡긴 이유는 무엇일까. 제9연대를 제11연대에 합편할 때나, 다시 제9연대를 재편하면서 제11연대를 철수시킬 때에는 제주 주둔군 전체가 이동한 게 아니라 연대장이 교체되면서 병력 일부가 이동한 것일 뿐이었고, 기존 제주출신 9연대 병사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9연대와 2연대의 교체는 기존 제주 주둔군을 송두리째 대전 주둔군과 교체한 것이어서 그 배경이 무엇인지 의문이다. 더구나 그간 제9연대의 강경진압작전은 미군도 ‘성공적’이라고 평가할만큼 무장대 활동을 무력화시켰고, 그 결과 연대 교체 직후인 1948년 12월 31일부로 계엄령이 해제되기도 했다. 따라서 단순히 제2연대에게 ‘실전 경험’을 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왜 그 시점에 연대 교체가 이뤄졌는지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의문에 대한 실마리는 1949년 1월 21일 ‘미국의 원조를 받기 위해서는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제주사건을 발근색원하라’고 지시한 이승만 대통령의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제주사태에 관한 이승만의 조급증에 대해 초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응준(李應俊)은 그의 자서전에 이렇게 적었다.

 

제주도 공비토벌이 시일을 끌게 되어 대통령 이 박사의 독촉을 받은 일도 있었다. 공비토벌작전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보고는 관두고 공비가 없어졌다는 보고가 듣고 싶다는 것이다.(李應俊, 回顧 90年, 汕耘기념사업회, 1982)

 제9연대와 제2연대의 교체는 이승만 대통령이 제주사태를 시급히 해결하기 위해 1948년 11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할 무렵부터 이미 계획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몇차례 탈영사건을 일으키거나 심지어 연대장 암살까지 저지른 기존의 제주 주둔 병사들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진압부대 수뇌부에서는 제주출신 병사를 포함해 일부 병사들을 공산주의자라고 믿고 있었다. 1948년 5월 21일 경비대원 41명이 탈영하는 사건이 벌어진 후 한 미군보고서는 이렇게 기록했다.

 

어떤 관측자들은 이 연대 장병들의 많은 숫자가 중산간지역의 공격자들에 동조하고 있는 것 같아 신뢰할 수 없다고 여긴다. 단기적으로 보면 그 연대를 없애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설령 현재 그 부대 안에 공산주의자가 있을지라도 언젠가 그들은 탈영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게 될 것이고 남아 있는 대원들은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이승만은 ‘신뢰할 수 있는 토벌대’로서 우선 서북청년회를 지목했다. 미군 역시 무차별 강경진압작전이 막 시작된 1948년 11월 중순경부터 서북청년회 단원의 군 투입에 관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했다. 대부분의 군 병력을 서북청년회 단원으로 충원한다는 계획이었다. 12월 중순경부터 제주 주둔군과 경찰에 서북청년회 단원들이 투입됐다. 미군은 서청이 제주 주둔군과 경찰을 지원하는데 대해 칭찬을 하며 유도하기도 했는데, 서청에 관한 미군의 인식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서북청년회는 이북에서 온 피난민으로 구성돼 있다. 그들은 과격한 반공주의로 주목받고 있으며 공산주의자를 발견하기만 하면 시위를 한다. 그들은 적극적인 시설방어와 정보수집 면에서 오랫동안 경찰과 경비대의 작전에 가담해 왔다.

미군과 토벌당국은 제주사건 진압작전의 주역으로 서청에 이어 제2연대를 주목했다. 대전에 주둔하고 있던 제2연대는 바로 ‘여순사건’을 진압한, 실전경험이 있는 부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대 교체가 완료된 것은 1948년 12월 29일이지만, 그 계획은 늦어도 12월 초순경 수립돼 있었다. 고문단의 풀러(H. E. Fuller) 중령은 12월 6일 “제주도 주둔 9연대를 본토로 이동시키고 2연대로 교체 투입할 계획”이라고 보고했다. 연대 교체 계획에 따라 제2연대 선발대가 12월 16일 제주도에 도착했고, 제9연대 선발대가 12월 19일 대전에 도착했다. 또한 지난 1948년 10월 19일 제주 출동을 앞둔 여수 제14연대가 총부리를 돌려 반란을 일으켰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제2연대 장병들에 대한 이른바 ‘사상검증’으로 보이는 ‘예방책’까지 실시했다. 이에 관해 미군 보고서는 “제2연대의 모든 공산주의적인 요소는 대전을 출발하기 전에 깨끗이 제거됐다”고 기록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제주 주둔군을 제9연대에서 제2연대로 교체하고, ‘과격한 반공주의자’인 서청 단원들을 토벌대에 합류시킨 것은 제9연대보다 더욱 더 강경한 작전을 통해 조속히 사태를 끝내기 위한 조치이며, 이는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와도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은 연대 교체 계획과 추진은 철수를 앞둔 제9연대에게 경쟁심을 촉발시킴으로써 무모한 진압작전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즉 ‘성공적인 작전’을 펴는 제9연대를 철수시켰다기보다는 연대 교체 계획이 제9연대로 하여금 경쟁심을 자극해 ‘성공적인 작전’을 촉진시킨 것이다. 실제로 제9연대는 선발대가 대전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12월 중순경부터 이동이 완료된 12월 말까지 가장 가혹한 진압작전을 벌였다.

 

이 무렵 제9연대는 해변마을에 멀쩡히 살고 있는 사람들을 집합시켜 가족 중 젊은이가 사라진 집안 사람들을 ‘도피자 가족’이라 하여 총살했고, 과거 시위사실 등을 자수하면 살려준다고 한 후 자수자들을 집단 총살하는 등 마치 ‘전과(戰果) 올리기’에 급급했다는 인상을 줄 정도로 무모한 작전을 벌였다.

 

<출처: 제주4·3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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