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백조일손지지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서귀포시 지역구분(읍면) 대정면 지역구분(마을별) 상모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586-1번지 일대
GPS 위도 33.2203611111111, 경도 126.285694444444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 행정구역상으로는 상모리 지경이지만 사계리 공동묘지 한 자락에 위치한 백조일손지지는 1950년 8월 20일 송악산 섯알오름 자락 옛 일본군 탄약고터에서 학살된 모슬포 경찰서 관내 주민 132명의 시신이 집단으로 모셔져 있는 곳이다. 이곳은 현재 제주도내에 위치한 4․3 희생자 집단묘지 3군데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이 집단묘역은 주민들이 학살된 6년 후인 1956년 5월 18일(음 4월 9일) 유족들에 의해 조성되었다. 당시 유족들은 6년 간 시신 인도를 강력히 거부하던 군 당국과 가까스로 타협을 본 후 흙탕물 속에 뒤엉킨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양수기까지 동원하는 등 많은 고생을 했다. 이 과정에서 자타의 시신 구별이 어려워 132개의 칠성판 위에 머리뼈 하나, 등뼈, 팔뼈, 다리뼈 등 큰 뼈를 대충 맞추고 132구를 구성해 이장했다. 이런 이유로 유족회의 이름도 "百祖一孫 ('서로 다른 132분의 조상들이 한날, 한시, 한곳에서 죽어 뼈가 엉기어 하나가 되었으니 그 후손들은 이제 모두 한 자손이다'는 의미) 유족회"로 정해졌고, 묘지도 백조일손지지로 이름 붙여졌다. 그 후 유족회는 1959년 5월 8일, 묘역에 위령비도 건립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쿠테타 발발 후 유족들은 다시 한번 시련을 겪었다. 쿠테타 직후인 1961년 6월 15일 경찰에서 위령비를 파괴하고 일부 유족들에게 묘지를 이전할 것을 강요했던 것이다. 그 즈음 23위가 다른 곳으로 이장됐으나, 4․3 진상규명운동이 시작되면서 현재 7위가 다시 원래 위치로 재이장됐다. 

 현재 이곳에서는 해마다 음력 7월 7일에 합동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사건의 경과와 132명의 희생자들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百祖一孫 英靈 合同慰靈祭> 팜플렛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출처: 제주4·3연구소, 『제주4·3유적 Ⅱ』(2008)>

 

 

 ○ 모슬포 예비검속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과 반정부혐의자들에 대한 ‘예비검속’을 실시했다. 6월 25일 당일 오후 2시 25분 치안국장의 명의로 각 경찰국에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을 전화통신문으로 긴급 하달하였다. 이 지시문은 제주도경찰국장에게 하달되었는데, ‘전국 요시찰인 전원을 즉시 구속할 것’과 ‘전국 형무소 경비를 강화할 것’을 명령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7월 8일 계엄령이 선포됨에 따라서 경찰‧검찰‧법원 조직 등은 모두 군의 관할로 귀속되었고, 이에 따라 계엄사령관이 예비검속을 주관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부로부터의 예비검속 지시에 따라 제주도에서도 즉각 요시찰인에 대한 일제 검거가 이루어졌다. 6월 말부터 8월 초에 이르기까지 공무원‧교사에서 학생과 부녀자 등에 이르기까지 예비검속이 이루어졌다. 당시 예비검속 인원은 경찰 공문서에는 820명이라고 적혀 있고, 미국 대사관 직원의 보고서에는 경찰이 국민보도연맹 임원 700명을 별도로 관리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전국적으로 예비검속이 행해지고, 검속자들에 대한 군 당국의 총살 집행이 계획적으로 이루어졌다. 제주지역에서는 7월 말부터 8월 하순에 이르기까지 제주읍과 서귀포‧모슬포 등지에서 여러 차례 대대적인 집단 총살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는 인민군이 남하하여 8월 8일에 낙동강 전선에서 유엔군과 대치하며 격전중인 때였다. 따라서 인민군이 경남ㆍ부산 지역을 점령할지도 모르는 위기상황 속에서 미리 제주도를 반공기지로 삼고자 예비검속자에 대한 처리를 단행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경찰서에 수감된 예비검속자에 대한 총살 명령 및 집행은 육군본부 정보국 제주지구 CIC와 당시 제주지역 계엄군인 해병대, 그리고 제주경찰국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를 뒷받침하는 문건은 제주 주둔 해병대 정보참모 해군 중령 김두찬이 1950년 8월 30일 성산포경찰서에 내린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의뢰의 건’으로서 아래의 내용과 같다.

 

수제건(首題件)에 관하여 본도에 계엄령 실시 이후 현재까지 귀서에 예비구속 중인 D급 및 C급에서 총살 미집행자에 대하여는 귀서에서 총살 집행 후 그 결과를 내(來) 9월 6일까지 육군본부 정보국 제주지구 CIC 대장에게 보고하도록 자이(玆以) 의뢰함( 「예비검속자 총살 집행 의뢰의 건」, 1950. 8. 30(이도영, '죽음의 예비검속', 95쪽).

 

이 짧은 명령에 의하면, 육군본부 정보국 지방조직이 직접 경찰에 총살을 지시했고, 지역 주둔 계엄군과 경찰이 총살을 집행했음을 알 수 있다. 경찰은 예비검속과 검속자 총살을 자체적으로 결정‧집행할 수 없었다. 당시 서귀포경찰서장이던 김호겸은 “예비검속은 경찰 수준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다. 나 역시 경찰서장임에도 불구하고 예비검속 당한 친구를 살려내지 못했다”고 증언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해군 포항경비부 사령관이었던 남상휘 예비역 준장은 1950년 7월 초 자신의 명령으로 경주‧포항‧영덕 일원에서 예비검속된 주민 200여 명을 군함에 태워 바다로 나가 총살한 뒤 모두 수장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독자적으로 총살 명령을 내린 게 아니라, 신성모 국방부장관으로부터 명령을 받았다고 하였다. 한편 예비검속자에 대한 총살 명령이 육군본부 정보국 제4과(방첩대, CIC) 과장 김창룡에 의해 내려졌다는 증언도 있다.

 

이와 같은 예비검속자 사살은 극도로 비밀리에 수행되었다. 모슬포경찰서 관할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이 송악산 ‘섯알오름’에서 총살된 현장은 우연히 주민들에 의해 발각되었지만, 나머지 제주‧서귀포경찰서에 검속되어 있던 사람들의 희생 일시 및 장소 등 당시 상황은 철저히 기밀로 처리되었다. 국무회의에서 대통령 유시사항으로 “경찰의 예비검속은 공표하지 말라”고 할 정도로 정부는 보안 유지에 철저를 기했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가족들은 행방불명된 희생자의 시신 암매장 장소는 물론 사망일조차도 몰라서 애를 태우고 있다.

 

모슬포경찰서 관내 대정면‧한림면‧안덕면 예비검속자의 전체 숫자 및 총살 희생자 수는 현존 경찰 자료에 관련 기록이 남아 있어 그 실상 파악이 가능하다. 또한 예비검속자 희생 당일 새벽에 총살 현장을 목격한 마을 주민에 의해 삽시간에 유가족들에게 전해졌기 때문에 그 희생 실태가 잘 알려져 있다. 우선 모슬포경찰서 예비검속의 실상을 표로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모슬포경찰서 예비검속 수용 상황(1950년 9월 3일 하오 5시 현재)

 

 

 

 

즉, 모슬포경찰서 관내 한림면ㆍ대정면ㆍ안덕면 예비검속자 총 수는 344명이었고, 이들 가운데 252명이 군에 송치되어 희생되었던 것이다. 1950년 7월 7일 제주도경찰국이 각 경찰서에 예비검속자 명부를 제출하라고 지시한 공문에 따르면, 예비검속자 등급을 분류할 때 D급은 가장 중요한 자, C급은 중요한 자, B급은 경한 자, A급은 애매한 자로 기준을 정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D급과 C급에 해당하는 예비검속자는 경찰이 군에 송치하여 집단 총살되었다. 모슬포경찰서의 경우 군에 인계한 예비검속자의 명단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그 숫자는 252명으로 적혀 있는 것이다.

 

이들 희생자는 모슬포경찰서 관할 절간고구마 창고에 수감되었던 사람들과 한림지서 관할 한림항 어업조합 창고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이었다. 모슬포 절간고구마 창고에 갇혀있던 사람들은 1950년 8월 20일 새벽 5시에 총살되었고, 한림 어업조합 창고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은 같은 날 새벽 2시에 총살되었다. 총살 장소는 남제주군 대정면 상모리 ‘섯알오름’에 위치한 일제시대 탄약고로 쓰이던 굴속이었다. 같은 장소이지만 모슬포에서 끌려간 희생자들과 한림에서 간 사람들이 희생된 위치는 약간 달랐다. 총살 당일 현장을 목격한 주민에 의해 알려져서 유가족 400~500여 명이 모여들어 시신을 수습하려 했지만 방첩대 소속 군인들이 제지하여 수습하지 못했다.

 

1956년 3월 30일 한림지역 유족들은 총살 현장에서 비밀리에 시신을 수습하였다. 한림지역 유족들은 수습하여 온 시신 61구를 한림면 금악리 2754번지 속칭 ‘만벵듸 공동장지’에 안장하였다.

 

1956년 5월에는 모슬포 절간고구마 창고 수감 희생자 유가족들이 모여서 관계 기관에 청원하여 허가를 받아서 시신 수습에 나섰다. 그 결과 132구의 시신을 거두어서 대정면 상모리 586-1번지 묘지를 매입하여 안장하고 ‘백 할아버지의 한 자손’이라는 의미로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라 명명하였다.

 

<출처: 제주4·3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2003)>

 

 

〇 백조일손지지의 조성

1950년 8월 20일(음력 7월 7일) 새벽 3시에 고기 잡으로 가던 상모리 거주 이경익 님과 정공삼 님은 섯알오름 부근에 소를 보러 갔던 같은 동네 노인 유계돌 님으로부터 여러대의 군 트럭에 실려 간 예비검속자들이 집단학살 되었다는 사실을 전해듣게 되었는데, 이들은 이 학살 사실은 유족들에게 알렸고, 비보를 접한 유족들은 당일 아침 학살현장에 집결했다. 이날 현장에서 유족들에 의해 시신 27구를 끌어올렸는데, 제보를 받은 군경이 공포를 쏘며 달려와 해산하도록 협박하므로 끌어 올린 시신들을 다시 제자리에 옮겨놓고 산이수동 쪽으로 피신하였다.

 

학살현장에서 시신 수습을 위하여 집결하였으나 군경의 제지로 불가능해지자 언제가는 혼백을 거두어가겠다는 결연한 각오를 다짐하며 헤어졌다. 하지만 몇 몇 마을대표들은 故 이영화님(희생자 이자익의 부) 댁을 모임의 본거지로 정하고 때로는 숙식을 제공받아 가며 故 이성철님(희생자 이현필의 부)을 주축으로 유족들의 의지를 결속하고 체계적인 연락망을 구축하는 한편 만약의 사태에 일사불란하게 대응하기 위한 논의를 계속 진행해 나갔다. 그러나 2~3년이 지나도 시신 인도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유족들의 불안한 조바심은 나날이 더해 갔고 시신이 부패하고 유해가 뒤엉키는 자타 구분이 안될 혼란한 사태가 야기되는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여 150여 위의 시신이 안장될 합동장지 마련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래서 파악된 116명의 유족으로부터 1인당 1,000환(당시 화폐 단위)씩 116,000환을 거출하여 대정읍 상모리 586-1번지 484평(현 묘역)을 91,880환에 매입, 장지를 마련하게 되었다. 

 

1956년 3월 30일, 한림 유족(만벵디유족)은 새벽을 틈타 63구의 시신을 수습, 지금의 만벵디 묘역에 안장했다. 백조일손 유족들은 군 당국과 협의를 거쳐 1956년 5월 17일 유골 수습을 시도했으나, 암매장된 웅덩이에 물이 가득 차 수습이 불가능하자, 이튿날인 5월 18일 모슬포 거주 좌용진(희생자 좌용운의 형) 님이 양수기를 갖고 와서는 물을 빼낸 다음에 시신 149구를 인양하였다. 

 

수습된 시신 149위 중 연고를 주장하는 17구는 현장에서 가족들에게 인도되어, 별도의 개별 장지에 안장됐다. 나머지 식별이 안되는 132구는 준비해간 칠성판 위에 머리와 팔 다리들을 짜 맞추어 미리 마련해 놓은 484평의 묘지에 안장하였다. 그 후 유족들은 ‘칠석합동묘 유족회’로 간신이 명맥을 유지하며 묘역의 벌초와 유족간 연락을 취해오다 故 이성철 님과 故 이치훈 님의 제안에 의하여  ‘조상이 각기 다른 일백 서른 두 자손이 한날 한시에 죽어 시신이 엉켜 하나의 자손으로 태어나 한 곳에 묻힌 땅’이란 의미를 담아 묘역을 ‘百祖一孫之地’라 명명하게 되었다. 

 

이어 1959년 5월 8일 유족들이 성금을 모아 2m 높이의 비석을 세우면서 정면에는 ‘百祖一孫之地’라 새기고 뒷면에는 희생자 신위의 이름을 새겨 묘역 전면 중앙에 건립하였다. 

 

5.16군사혁명이 일어나자 군정 당국과 경찰에서는 이승만 정권하에 부당하게 자행된 인권탄압의 흔적을 없애기 위하여 섯알오름에서 예비검속으로 인해 희생 당한 상징물인 백조일손묘역의 묘비를 철거하도록 유족들에게 강권하였다. 그러나 유족들은 이를 거부하며 강력히 항의를 하였지만 경찰은 1961년 6월 15일 10시에서 12시경에 서귀포경찰서장(강규하) 지휘하에 대정지서 급서로 하여금 묘비를 파괴하는 만행을 자행하였으며 이어 묘역마저 해체하도록 회유하였지만 유족들은 오히려 반감을 가지고 항의하는 사태까지 발전하였다. 여하튼 비석을 부순 후에도 계속 압력이 있었다 한다. 경찰과 방첩대 등에서의 압력에 시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을 것이라고 김경육씨는 말했다.

 

상모리의 한 유족은 남편이 검속되는 날 딸을 낳아서 지금은 41살이 되었다. 그리고 고산리의 양원숙씨는 남편이 학살된 한달 후 낳은 아들이 지금 41살이다. 두 분의 차이가 있다면 낳은 후의 마음고생이 그래도 나았던지 상모리의 유족은 그래도 행복하게 산다고 하는데, 만삭의 몸으로 남편의 죽음을 지켜본 양씨는 병신 아들에 자신은 허리가 꼽추 모양으로 굽어버렸다고 울먹였다.

 

학살이 있고 나서 얼마동안은 모슬포의 개들까지도 전부 미쳐 헤매다녔다고 한다. 8월 한여름에 200구의 시신이 썩어 가는데 그럴밖에 더 있는냐고 한숨을 쉬면서 말을 하던 하모리의 이모씨는 마침내 분노를 터뜨리고 만다. “비석은 무사(왜) 뿌솨부러. 자기네가 세워준 것도 아닌디. 이제난 우리가 어디 가서도 허릴 펴고 말도 햄주, 그때사 우릴 추접허게 볼 걸로만 생각허연 어딜 밖에 나가나졌어.”

 

워낙 살기 등등한 공포 치하인지라 4.3망령이 되살아 날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겁에 질린 유족들은 자타 구분이 불확실함을 인지하면서도 무작정 야밤을 이용하여 2~3개월 사이에 23위를 이장하게 되었다. 관할 경찰서에서는 유족들의 집단적 묘역 참배를 불순한 모임으로 간주하여 집회 자체를 불허하였음은 물론 그날이 돌아오면 유족들의 동태를 파악, 상부에 보고하는 등 감시를 계속 받아왔다.  1970~80년대 까지도 경찰의 감시와 사찰이 계속되었지만 유족들은 산발적 혹은 집단적으로 묘역을 참배하면서 이를 계기로 어느 정도 유족의 단합을 도모하게되었고, 이를 계기로 자력으로 묘비를 복원하자는 논의가 진행되었다. 

 

부서진 비석 조각들은 모두 묘역 울타리 담장 속에 넣어 버렸던 바 후일 유족들이 합동 벌초시 돌담정리 과정에서 부서진 조각들을 하나씩 찾아내어 한 곳에 모아 시멘트로 봉해 두었던 것을 1999년 6월이 이도영 박사가 개봉했고, 유족들이 부서진 조각들의 일부를 재수집해 현 위령비 옆에 전시해 놓고 ‘비석훼손사건 경위’의 푯말을 1999년 8월에 세워놓았다.


 <출처: 백조일손유족회, 『백조일손 영령 60년사 – 섯알오름의 한』(2010); 제주4.3연구소, 「4.3장정 3」> 

 

 

 

 

 현장사진

 

 

 

 

 

 

 

 

 

  

 

 

 사료(문서, 사진, 증언)

 

 

 〇 자료 

50년의 恨 百祖一孫(백여 할아버지 자손의 뼈가 엉켜 하나가 되다)

- 저자: 백조일손유족회(대표 집필: 이도영 박사)

- 1999년 11월 자료 보완 재편집 

 

∙ 양민학살의 표본 百祖一孫: 사건의 발생 경위 

해방공간에서 일어난 양민 대학살극(1948-1949, 약 1만 5천명 또는 3만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산)인 제주사건(통칭 4.3사건)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 무렵, 1950년 6.25 동란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빈약속만을 남기고, 한강교를 폭파하고(수천명의 민간인과 군인이 희생)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대전에서 부산으로 도주해 버렸다. 치안국장은 즉각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6월 25일)," "불순분자 구속의 건(6월 29일)," "불순분자 구속처리의 건(6월 30일)" 등의 '치안국 통첩'을 각 도 경찰국에 하달하여, 소위 "보도연맹원" 및 "요시찰 인물들"에 대한 예비검속을 단행하고 무고한 양민들을 수감하였다. 제주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외라기 보다는 오히려 육지부보다 더 심각한 사태가 암암리에 진행되었다. 예비구금된 이들을 A, B, C, D의 4등급으로 구분했다. A는 사상이 애매모호한 자, D는 '극히 위험한 인물'이었다. 처형과정에서는 C, D급뿐만 아니라 A, B급 및 구속되지 아니한(집에서 잠자던) 사람도 혼합 처형하여 암매장하거나 수장하여 버렸다. 혹자는 구속자 중 경찰들이 뇌물을 받고 봐주고 석방시킨 결손 인원을 채우려고 애매모호한 양민들을 되는데로 잡아들여 대신 처형(소위 '대살')했다고 보고 있다. 경찰은 잡아 가두고 등급을 메기고 군에 인계하면 군은 처형하는 일을 도맡아 했다. 대부분의 양민들은 '애매모호한' 태도를 지니거나 '모르쿠다'라는 답변을 하는 수밖에 제주도에서 살아남을 방법이 없었다. 이쪽이다 저쪽이다 태도를 분명히 하면 어느 한쪽의 미움을 사고 반대쪽에 의해서 희생되어 가던 시대였다. 아니면 육지부나 일본으로 도피하는 수도 있으나, 재정적 여유가 어느 정도 있어야 가능했고, 만약 본인은 피하여 살아남더라도 남아 있는 가족들은 '도피자 가족'이 되어 욕을 당하였다. 

 

발굴된 경찰문건에 의하면, 이러한 등급매김은 4.3 사건 당시 피검거자들을 A, B, C, D 및 甲, 乙의 6등급으로 구분하고 "A, B는 사형으로 사료됨"이라고 기록되고 있었다 ( '예비검속' 당시에는 정반대의 분류를 했고, 전기한 바와 같이 4등급이 적용되었다). 이들에게 내려진 형량은 사형, 무기, 15년, 10년, 7년 등으로 상당히 중형으로 최근에 공개된 "수형인 명부"에 의해서 확인되고 있다. 이들은 재판소(미군정 군법회의)에서 형을 언도 받기 이전에 이미 경찰에 의해서 형량이 미리 정해지고 재판과정에서는 1심 단판으로 구형량 그대로 선고되고 집행되었음이 발견되었고, 대부분의 수형인들은 형무소에 가서야 자신의 형량을 형무소 간수들이 알려주어서야 알았다는 것이 현재 생존자들과 유가족들의 증언이다. 대부분의 수형자의 가족들 또는 처형된 자들의 유가족들은 형무소로 갔는지 처형되었는지조차 최근까지 알지 못하다가 일부 수형인 명부가 발견(1999년 9월), 공개됨으로써 겨우 어렴푸시나마 알기에 이르렀다. 육지 형무소에 수감된 뒤 궐석재판으로 서류상 형량들이 기록 조작(?)되었다는 반증들이 최근에 나오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육지 각 형무소에 분산 수용되었던 이들은, 인천형무소(소년범)를 제외하고, 6.25 동란이 나자 퇴각하는 아군과 미군에 의해서 소위 '싹쓸이'되어 버렸다. 최근에 필자가 접근중에 있는 미군 정보 문서에 의하면 각 형무소에 수감중이었던 '정치범들이 처형'되었다고 보고된 문건이 보존되어 있으나 아직 '비밀에서서 해제되지(declsssified)' 아니하여 그 내용은 공개되고 있지 않다. 인천 형무소에는 대부분의 소년범들이 수감되어 있었는데, 북한 인민군에 의해서 옥문이 열리는 바람에 대부분의 수형인들은 월북하였음이 최근에 해외거주 교포들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제주에서는 820명(1950. 8. 4. 현재, 경찰문건에 나타난 예비검속자 집계, 그후 계속 구속 수감되었으므로 정확한 숫자는 미상)의 무고한 양민들이 예비검속되어 있던 중, 1950년 8월 9일에는 제주지방 법원장 및 제주지방 검사장 등 소위 '제주유지 12인'이 군경에 의해 구속되는 일대 무법천지의 상황이 벌어졌다. 이런 상황은 약 1개월 이상 진행되었다. 文 洋 변호사(79세, 당시 제주지방법원 판사, 1999. 6. 14.)의 증언에 의하면, 이러한 상황은 약 1개월 이상 지속되었으며, 문 판사는 무고로 수감된 유지들의 탄원을 위하여 밀사로 부산으로 나가려고 애를 썼으나 군당국에 의해서 저지당했다. 문 판사의 처남은 당시 경감(최정식)으로 경찰 고위 간부였으나 속수무책이었다. 부산으로 가는 민간인 편에 검찰청에 알려져서, 선우 검사가 제주에 와서 진상을 조사하고 무고로 구속되었던 유지들은 석방되고 복직되었으며, 역으로 이응호 등 다수가 무고죄로 구속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복직된 제주 지방법원장은 고문 후유증인 정신문제로 사직하였다. 와중인 8월 12일과 8월 20일 사이에 서귀포 경찰서에 수감되었던 양민 350명중 약 200명이 경찰에서 군에 인계된 후 행방불명되었고, 모슬포 경찰서에서는 약 210-250명의 양민이 '섯알오름'에서 총살 암매장되었다. 제주경찰서에 수감되었던 양민 중 상당수(약 400-500 추산)이 행방불명되었다. 행방불명된 자들은 수장, 또는 장소 불명의 곳에서 비밀리에 처형(주로 제주비행장과 도두봉 근처에 암매장)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처형은 계엄군(제주주둔 해병대와 육군 CIC, 일명 '방첩대') 단독으로 실행하였기 때문에 경찰 고위 간부도 법원판사도 알길이 없었다. 필자가 이러한 상황을 문 양 변호사에게 문의하였으나, "판사로써도 전혀 알지 못하였다, 친구가 구속되어 빼내려 했으나 얼씬도 못하였다"고 술회했다. 

 

당시 제주지방 법원 판사였던 김영길(대구에서 변호사 개업, 작고)씨도 자신의 친동생 김영두(현재 대전에 거주, 1947년 3.1사건 파업에 가담, 1950년 모슬포 경찰서 관내에 예비검속 당함)를 빼내려고 탄원서, 보증서(해병대 입대조건) 등을 제출하였던 경찰 기록이 발굴되었다. 필자가 김영두씨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확인한 결과, 석방후 "부산으로 나가버렸기 때문에 해병대 입대 통지서를 받지 못했다"고 하였다. 

 

 

서귀포 경찰서장(김호겸)은 예비검속되었던 절친한 친구가 처형장으로 향하는 해병대 군 트럭에 실려진 것을 목격하고 현장에서 빼내려고 했으나, 악명높은 강 모 경위(모슬포 출신, 사찰계)의 거부로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야 했다고 전해진다. 

 

서귀포 경찰서 문서 '서사서 제2034호(1950.9.16)'에 의하면, A급(43명)과 B급(77명) 석방, C, D급(10명)은 계속구금중이었다. 당시 예비검속되어 수감되었다가 나중에 풀려나온 이재준(당시 서귀국민학교 교감)교장의 증언에 의하면, 서귀포 경찰관내에는 약 350명이 수감되어 있었다고 하였다. 수감자중 약 220명이 비밀리에 처형 암매장된 셈이다. 이들의 행방은 오늘날까지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교장은 형 이동준(4.3사건 당시 고산 국민학교 교감, 3.1 사건 파업에 동조 날인하였다는 이유로 4.3 사건 당시 군 토벌대에게 총살됨)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예비검속 당하여 수감 중 '서북청년단' 사무실에 불려가 간단한 취조를 받고 사태가 진정되어 석방될 때까지 입고 간 옷차림 그대로 가족과의 면회도 없이 지냈다고 증언하였다. 경찰기록에 의하면 "항상 우익인사와 교류함"이라고 되어 있어서 학살에서 면제된 것으로 보인다. 필자와의 면담에서 이 교장은 "이북에서 피난 와서 교사로 있는 동료와 같이 한 하숙집에서 기식을 하고 있었지"라고 술회했다. 

 

당시의 무법천지의 상황에서 특히 군경의 만행은 남상휘 장군(74세, 뉴욕거주, 4.3 사건당시 해안 경비부 소속, 제3함정대 사령관, 중령, 13척의 군함으로 제주해안 봉쇄, 지휘관)의 증언에서도 확인되었다. "4.3사건은 서북청년들의 횡포가 사건을 유발 확대시켰다... 순박한 제주도민들은 '모르쿠다(모릅니다)'하면 죄가 되어 목숨을 잃어야 했다... 6.25 전후로 해병대들이 제주에 와서 판사들도 두들겨 패고...하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나중에 제주에 부임(계엄민사부장)했을 때 부하들로부터 전해 들었다.... 전쟁터도 아닌 곳에서 수많은 양민을 죽이고 '초토화' 한 것은 당시 군이 너무도 잘 못한 것이다... 4.3 사건을 '폭동'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잘 못이다. 당시 군경이 저질른 만행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붙여진 것이다... 당시 군 책임자의 한 사람으로써 상당히 미안하게 생각한다..."(1999년, 5월 14일 백조일손 유족회 주최, 제주도민의 방에서, 제주 언론인과의 간담회에서) 증언하였다. 

 

6.25 당시 예비검속되어 처형된 자 또는 행방불명된 자의 총계는 약 600-700명으로 추산된다. 당시 중문면 도순리의 행방불명자 중 11인의 명단은 최근에 발견된 문건에 의해서 처형된 날자(8월 12일, 음력 6월 29일)가 밝혀져서 유가족에게 통보되었다. 그 동안 그 유족들은 소위 '까마귀도 모르는 날에 제사'를 지내왔다. 

 

예비검속되어 수감된 사람들의 죄명은 "사상이 의심스럽다" "경찰과 다투었다" "군경에 비협조적이다" 또는 "3.1 운동관계로 총파업에 가담하였다" "4.3사건에 가족중 누군가가 희생되었다" "산 사람들이 내려오면 위험하니 신변을 보호해 준다"는 등의 이유로 구금되었다. 이때 구금되었다가 다행히도 무사히 풀려나온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4.3 사건' 때와는 달리 경찰이나 군에 의해서 취조를 받거나 고문을 당한 적은 없었다는 것이 각 경찰서의 구치소내 당시 동정이었다. 갇힌자와 가둔자 그 누구도 이들이 죽음에 이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감시도 상당히 허술하여 얼마든지 탈주할 수도 있는 그러한 상황과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 한여름의 긴긴 무더위를 한 마디의 불평도 없이, 입고 간 옷차림 그대로 참고 견디어 내면서, 언젠가는 곧 풀려서 귀가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었다. 

 

서귀포 경찰서(서장 김호겸) 관할, 서귀포 농협창고(솔동산 근처)에 예비검속 수감되었다가 풀려나온 이재준 교장(백조일손 희생자 이태실, 이현필과 대정국민학교 동창)의 증언에 의하면, 비가 장대 같이 내리는 칠 흙과 같은 밤중에, 해병대의 군 트럭 3-4대가 와서 불려나가서 처형된 사람들(약 130명)에게는 "사태가 벌어져서 한라산에 작전도로 공사를 해야하니 일차로 사역을 나간다, 나머지 사람은 이차로 나갈 것이다"라고 했다. 모슬포 경찰서(서장 강문식)관할의 소위 절간창고에 수감되었던 예검자들에게는 "이 수감 장소는 비좁으니 일부는 넓은 곳으로 옮긴다, 같이 있다가 헤어지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은 섭섭히 여기지 말라"고 하였다. 그 행차가 저승 길이 될 줄은 남은 자나 떠난 자나 그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였다. 

 

'백조일손 희생자'란, 모슬포 경찰서에 수감되었던 347명의 양민 중 처형된 약 210-250명 중 1957년에 발굴되어 현 공동묘역에 안장된 132명을 일컫는다. 제주 계엄사령부의 지시에 의해, 1950년 8월 20일(음력 칠월 칠석) 새벽 2시와 5시경 두 차례에 걸쳐서 61명과 149명을 모슬포 동남쪽 속칭 '섯알오름' 일본군이 만들어 놓은 폭파된 탄약고 언덕에서 총살 구덩이에 던져넣어 매장하였다. 2시경 희생된 61구의 시신은 유족들이 3년후 경찰의 눈을 피하여 몰래 가지고 가서 한림읍(갯거리오름 공동묘지)에 안장할 수 있었다. 약 40명의 명단과 시신의 행방은 아직 알지 못하고 있다. 전기한 61명의 명단은 일부만 확보되어 있다. 

 

이경익씨(75세, 상모리 거주)의 증언에 의하면, 학살현장은 새벽 3시경 근처에 소를 먹이러 나왔던 한 노인(유계돌)과 5시경 바닷가로 작살을 가지고 고기를 잡으러 가던 두 청년(이경익 본인과 정공삼)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이경익씨의 형이 예비검속되어 모슬포 절간창고(고구마를 썰어 말려서 보관해두는 창고, 현재 대정읍민관 자리)에 갇혀 있었다. 이 두 청년보다도 먼저 현장에 와 있던 여인(희생자 이동원의 누이)은 학살현장에서 넋을 놓고 울고 있었다. 처형할 사람들을 가득 실은 군 트럭 3대 중 한 대가 하수구에 바퀴 한 쪽이 빠져서 그곳에서 빠져나오느라고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동네사람들이 알게 되고 그 트럭들이 간 방향을 잡아서 가다 보니 신발과 옷가지들이 가는 길위에 버려져 있어서 그것을 따라 현장까지 이르렀다. 이경익은 친구 정공삼에게 빨리 집에가서 식구들에게 알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라고 부탁을 하고 정신없이 시신들을 파내고 있었다. 비보를 전해들은 약 300여명의 유가족들과 친지들이 몰려들었다. 소수의 장정들만이 새벽 4시경 희생된 시신들중 꺼내어진 27구를 그늘진 곳에 임시로 두면서 인양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구덩이가 너무 비좁아 여러사람이 들어가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대정면사무소에 근무하고 있는 한 소녀가 숨을 헐떡이면서 뛰어와, "아버지 어머니, 저기 순경들이 왐수다. 빨리 피허십서!"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몇 사람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이수동 쪽으로 피신하였다. 누군가에 의해서 경찰에 통보되고 군인들이 공포를 쏘으면서 나타나 "누가 여기에 사람죽였다고 알려주었느냐?"고 하면서 고문과 협박을 하는 바람에 꺼내 놓았던 시신마저도 도로 묻고 "다시 접근하여 시신을 인양하면 모두 죽인다"는 말에 돌아서야 했다. 그후 약 7년 동안 그 학살 장소는 무장한 군인들이 경계하는 "출입금지"구역이 되어버렸다. 유족들은 가까운 지척간의 곳에서 밭농사를 지으면서도 눈길만을 주어야 했다. 

 

한 발굴된 경찰 문건에 의하면, "본도 계엄사령부에서 보도연맹원 및 좌경사상 포지자 등 133명을 예비검속 동 계엄사 소속 허욱 육군대위가 지휘하는 중대에 의해 1950.7.7(음) 05:00시 경 제주도 남군 대정읍 상모리 속칭 송악산 서측 서란봉 굴 내에서 전원 총살 합동 매장 시켰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 희생된 양민들은 모두 소위 '예비검속'되어 수감되었던 사람들만이 아니고 집에서 잠자던 사람들도 밤중에 "면사무소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하면서 불러내어 수감 중인 사람들과 함께 밤 사이 극비로 처형하여 버렸다(李賢弼, 左龍雲, 당시 대정면 사무소 공무원). 서두에서 제기한 '대살'의 의문을 뒷받침 해주는 경우이다. 왜 이들은 한결같이 거짓말을 하면서 양민들을 연행해가서 재판과정도 없이 몰래 죽여서 암매장하였을까? 

 

이런 사태가 극비에 진행되는 와중에서도 성산포 경찰서(서장, 文亨淳,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약, 황해도 출신, 당시 60세 가량)의 경우, 해병대 金斗粲(김두찬) 중령으로부터 "C와 D급을 처형, 9월 5일까지 보고하라"는 공문서상의 지시를 받았으나 "지시가 부당함으로 불이행"하겠다고 하여 그곳 관내에서는 다행이도 희생을 막을 수가 있었다. 당시의 군 CIC에서 재심사한 결과가 기록되어 있는데 거의 모두가 "개전의 정이 현저함"이라고 되어있다. 문형순 서장(모슬포 경찰서장 재직, 1948년)은 하모리 청년들의 속칭 '자수사건'에도 관련, 조남수 목사와 김남원(하모리장 겸 민보단장)의 자수권유로 자수한 자 110여명을 무죄방면했던 장본인이다. 조 목사와 김 리장의 끈질길 자수설득에도 불구, 미자수 모슬포 청년들(그 가족들) 48명은 공개 처형되었다(속칭 '대살사건', 1948. 12. 13). 조 목사와 김 리장의 공적비는 高春彦(현재 하모리 노인 회장)의 발의로 주민들의 성의와 성금으로 모슬포(속칭 '진개동산', 1996. 5. 11)에 세워졌으나, 당시 文 서장의 공적비는 일부 유가족의 반대로 세우지 못하였다. 아이러니컬한 사건은 김남원 리장도 자신의 아들의 목숨을 구해낼 수가 없었다(희생자, 金熺鍾, 속칭 모슬포 '특공대 사건,' 모두 11인 희생). 

 

4.3 사건 당시는 관련자 및 그 가족들을 대신 불러내어 대중 앞에서 연설 후 공개처형한 다음, 시신을 유가족에게 인수케 하였던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으로 예비검속자의 학살은 은밀히 밤중 또는 새벽에 총살 암매장 또는 수장하였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당시 각 경찰서장에게 '살인 명령서'를 발부하였던 "김두찬(해병대 중령)은 어떤 인물이며 왜 그러한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을까?" 필자가 추적한 결과는... 김두찬은 제주도에 입도하기 바로 직전 그는 경북 묵호지역을 방위하는 해군 경비부 책임자(사령관?)였다. 6.25 동란이 발발하자 인민군이 남하하여 경상도 지역으로 쳐들어 오고 있다는 정보를 먼저 입수하고 군 장병들을 적전에 놔둔체, 군함을 한 척 몰고 해상으로 도주하여 버렸다. 그는 해상에서 체포되었고, 그의 잔여 병력은 해군 중령 남상휘와 미 해군의 지휘하는 부대에 예속되었다. 김두찬은 진해의 해군본부로 송환되었다. 그는 묵호에 있을 당시에도 군부대의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장인(한씨)을 시켜 군납업을 하여 막대한(?) 이득을 챙겼다. 제주도로 유배(?)된 그는 과잉충성을 하기 위하여 온갖 악행을 저질렀고, 그후 그는 축재한 것을 이용하여 장성으로도 진급하였다. 5.16후 예편되어 부산에 있는 국영기업체(조선공사)의 사장으로 부임하기도 하였으나, 경영진과 트러블이 생겨(부정, 부당이득 관계로) 몰매를 맞고 결국 파면되었다. 현재 서울근교에서 부유하게 살고 있다. 그는 제주에 와서 사람 목숨을 놓고 흥정을 벌이고 부정한 짓으로 축재하는데 여념이 없었음에 틀림없다. 과거나 그후의 행적으로 미루어 보아서 판단할 때 그렇다. 

 

고 '손원일 해군제독의 회고록'(홍은혜 저, 1990)에서 보면, 해병대를 창설(1949. 4. 15)함에 있어서 "초대 사령관에는 신현준씨가 임명되었으나 당시에는 해병대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어 지원자가 거의 없는 상태였다. 부대의 구성원이 없자 각 참모부별로 일정인원을 할당하니 일부 문제장병을 포함한 강인하고 거친 성격의 소유자들이 모여져 해병대 창설대원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기질과 물불을 가리지 않는 용맹성은 밖에서 1대 10, 1대 100이라도 싸움에는 반드시 이기고 돌아와야 한다는 전통이 자연스럽게 생겼고 이 강한 전통과 백전불퇴의 훈련이 후에 귀신잡는 용감한 해병대로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당시 해병대는 취약지역으로 판단되던 제주도와 진주에 많이 주둔하고 있었다" (pp. 146-147). 해병대의 편성에 '문제장병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남상휘 장군도 인정하였다. "해군에서 골치거리들을 모두 골라 해병대로 보냈지..."라고 남 장군도 술회한다. 문제는 '귀신을 잡은게 아니라 후방에서 무고한 양민을 잡은 것'이 문제다. 

 

6.25 사변이 나자 제주도의 청년들은 해병대 3-4기에 약 3000명이 지원하여 인천상륙 작전에 참전하였다. "나의 손에도 총만 쥐어주면, 저 육지것들을 모두 쓸어버릴텐데..."하는 그런 원한이 인천상륙 작전에 참전한 제주출신 장병들 가운데는 없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4.3사건 당시, 모슬포 9연대에 입대한 많은 제주출신 장병들이 무기를 들고 탈영하여 동네의 경찰서를 습격하는 사건들이 종종 있었다. 육지부에서 온 경찰들에게 너무도 억울하게 당하기만 하니, 집에서 비무장으로 가만이 있다가 토벌 경찰에 죽느니, 군에 가서 내손에도 총이 쥐어지면... 그 방법밖에는 보복할 방법이 없었다고 본 것이다. 동족상잔이란 이런 것이다. 필자의 이런 글을 보고 혹시 "해병대 명예훼손이다"라고 발끈할 제주출신 해병대원들이 있을 것이지만, 해병대의 명예를 훼손하고자 이글을 쓴 것은 아니다. 필자의 외사촌(김평문, 김희종의 동생), 외삼촌(김남주, 김남원의 동생)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상당수가 해병대 3-4기 출신들이다. 이분들은 거의 모두가 상이용사가 되어 귀향하거나 운명을 달리했다. 고향의 부모와 형제들은 '빨갱이'로 몰려 죽고 있을 때, 이분들은 육지에 가서 '빨갱이'들을 소탕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컬한 민족의 비극이 아닌가.... 

 

∙ 공동묘역 "百祖一孫之址(백조일손지지)" 조성경위 

"분묘 조성과 비석 건립상황"이라는 한 발굴된 경찰 전언통신문에 의하면, "모슬포 소속 육군 제1훈련소의 확장공사로서 합장된 굴이 붕괴되어 유골이 토출하게 되자 당시 제1훈련소장 백인엽 준장이 유골 처리 문제를 당시 남제주군 강필생(전직 경위)과 협의한 후 동 형살자 가족에게 통지 일정한 장소에 매장토록 지시하였음. 1956.4.8. 동 형살자 가족 128명(133명 중 5명 가족 불상)이 남제주군 안덕면 사계리 공동묘지 옆에 약 200평 면적의 일정한 구획을 정하고 개별로 분묘를 조성...함과 동시에 공동 묘지장 정면에 약 2미터 높이의 비석을 건립, 비문은 전면에 '백조일손지지'라 하고 이면에는 총살자의 성명을 기입하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강필생은 4.3사건과 6.25 사변 당시는 경찰의 사찰계 경위였고, 유골 발굴당시는 대정읍장이었다. 

 

이경익씨의 증언에 의하면, 유족들의 끈질긴 탄원에 의해서 약 6년 8개월만에 유해발굴 인양허가를 군당국으로부터 얻어낼 수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동네에 미친개들이 많아 광견병이 유행하자, "유족대표들은 사건때 희생된 유골들이 방치되어 있으니 그것을 개들이 뜯어먹고 그런다고 군과 경찰에 계속 진정을 내어서 '시신발굴 허가'를 받았다"고도 한다. 

 

유해발굴은 1957년 4월 8일 첫 시도되었으나, 깊은 웅덩이에 물이 고여있어서 실패, 4월 28일 모슬포 좌용진(현재 생존)씨의 양수기 지원으로 재시도 하여 현재의 묘역을 이루었다. 묘역 구입 자금은 유족들의 갹출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위령비 건립도 1960년 6월에 유가족들의 기금을 모아 이루어졌다. 

 

'백조일손'이란 "일백여 할아버지의 자식들이 한날 한시 한곳에서 죽어 뼈가 서로 엉키어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다. 실지 묘역의 크기는 483평이며, 비명은 "百祖一孫之址"(백조일손지지)였다. 지경은 대정읍 상모리이다. 안덕면 사계리 공동묘지와 인접한 관계로 사계리 지경으로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 공동묘역 해체 및 비석파괴 사건 

5.16 구테타가 나자, "반공을 국시의 제1위로 삼고..."라는 '혁명공약'을 표방한 군사반란자들은 미국으로부터의 자신들의 용공혐의를 벗어버리려고, 또는 과거의 군경에 대한 민중의 반감의 흔적을 없애버리려고, 구세력과 규합하여, 소위 "빨갱이 소탕 놀이"를 벌였다. 4.19학생 의거로 자취를 감췄던 구정권의 앞잡이 경찰들이 다시 복권되었다. 

 

1961. 6. 15. 10:0-12:00경 서귀포 경찰서장(강규하)의 지휘하에 유족들의 완강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전기한 비석을 모슬포 지서 급사에게 술을 먹인 후 헴머를 주어 산산조각 내어 버렸다. 공동묘역에 안장되어있던 23구의 묘가 당국의 강압에 의해서 후환이 두려운 유족들이 어디론가 각자 이장하여 갔다. 어떤 이는 엉겁결에 바로 이웃 사계리 공동묘지의 공터에 이장하였는데 후일에 와보니 어디인지 찾을 수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구분이 안되는 유골들을 파내어서 화장을 하고 재로 나누어 가라는 지시도 있었으나 "조선천지에 이런 법이 없다"고 이성철은 완강히 거부했다. "공동묘역 해체 명령"이 서귀포 경찰서장을 통하여 유족대표에게 일방통보되었다. 

 

백조일손 유족대표인 이성철의 요청에 의하여 공동묘역 현장에 나온, 오봉헌(일명, 오봉길, 4.3사건 당시는 대정국민학교 및 보성국민학교 교사, 5.16 당시는 하모리장, 1999. 5. 30.)씨의 증언에 의하면, 오 리장의 현장에서의 중제에 의해서, 경찰서장은 비석을 철거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짓기로 타협하여 비석이 철거되었다고 한다. 부서진 조각들은 모두 산소담장 속에 넣어 버렸다. 부서진 묘비의 뿌리도 유족들에 의해서 시멘트로 봉해두었다가 최근에 필자에 의해서 개봉되고(1999년 6월), 유족들이 부서진 조각들을 재수집 현 위령비 옆에 전시해 놓고 '비석 훼손사건 경위'의 푯말을 세워 놓았다 (1999년 8월). 

 

공동묘역을 파헤치고 비석을 파괴하는 현장 지휘자, 강 서장(제주도 안덕면 상창리 속칭 모록밭, 일제때 학병출신, 4.3사건 당시 문순봉 제주도 경찰국장 휘하에 있었음, 1998. 11월 육지부에서 운명)의 심정도 상당히 괴로웠을 것이다. 그의 바로 밑의 동생(제주 농업학교 재학중)은 4.3 사건 전에 자원하여 산에 올라갔다가 토벌대에 투항(피신한 마을 주민들 110여명과 함께), 군법회의 재판에서는 무죄로 판정 석방되어 귀가하여 칩거하고 있었으나, 악질적인 경찰들이 다시 그를 체포, 민간 재판에 회부, 징역 3년을 언도받고 김천 형무소에서 수감되어 있었다. 6.25 동란이 나자 퇴각하는 아군에 의해서 수감자 전원이 "싹쓸이"되어 버렸다 (강용택씨 증언, 강서장의 둘째동생, 1999. 5월 증언). "모슬포에 가면 친구들이 술좌석에서 나의 형이 모슬포 사람들에게 불미스러운 일을 저질렀다고 하는데...." 형은 이사실을 생전에 부인하였다. 강씨는 필자에게 자기의 형의 '불미스러운 행동'을 대신 사과하였다. 강씨의 어머니는 생전에 "김천에 가서 흙 한 줌만 가져다주면, 돌아간 아들의 봉분을 만들겠다"고 살아있는 아들들에게 부탁했으나 들어주지 아니했다. 

 

"1966. 1. 12. 본도 출신 국회의원 현오봉이가 대정읍 사무소에서 귀성간담회 당시 동 유족인 이성철로부터 철거된 비석을 복귀하여 줄 것을...건의의 발언...그에 대한 하등의 대책이 없었다"라고 한 발굴된 경찰 문건(전언 통신문)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자리를 같이 했던 사람들은 이성철을 "미친 사람이다"하며 그를 몰아내어 버렸다(이성철의 외손 정익형의 증언). 그후 유가족들은 힘을 모아 비석을 재건해 보려는 시도를 했지만, 시대상황과 유족들의 재정난, 그리고 회장의 노령으로 인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성철은 1969년 4월 82세로 운명했고, 그후 유가족들의 활동은 한 동안 미미하다가 최근에 이르러 자손들이 장성하여 유족회가 재결성 활동이 재개되고 있다. 현재의 위령비는 제주도 4.3사건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회장 김병언, 희생자 이현필과 이태실의 제주농업학교 동기)가 제주도와 장정언씨의 후원으로 1993년 건립되었다. 

 

∙ 불문율 '연좌제'에 의한 유가족들의 피해 

묘지가 파헤쳐지고, 산담(산소의 담장)이 무너지고, 비석이 부서지는 것보다도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유가족들의 뒤를 유령처럼 따라다니던 속칭 '연좌제'였다. 구 조선시대의 소위 '역적은 3족을 멸한다'하던 법이 헌법의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는 몰라도 우리 유족들에게 족쇠로 옥죄었다. 그 수많은 유족들에 대한 탄압의 한 예로서, 李賢弼(이현필)의 아들 李道英(이도영)[이성철(李聖哲)의 손자]은 경북대 사범대를 졸업, 교사로 발령(1969), 육군에 사 

 

병으로 복무(작전과 서기병,1970), 경북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취직(1975), 그리고 미국으로 유학(1979)하려고 할 때마다, 신원조회가 문제시 되었다. 그 아내 高春姬(고춘희)는 그로 인하여 실성하고 병(심한 우울증)을 얻어 결국 사망하였다(1979. 10. 26.). 

 

자녀들이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 중 한가지는 "호로자식" 또는 "빨갱이 자식"이라는 호칭이었다. 고 3때(1964년 6월,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회담' 반대투쟁인 '6.3 사태' 발생, 사태와는 무관한 대정고교 3학년 약 90명의 시험거부 '백지동맹 사건'), 서북청년 출신 宋 모 교장과의 조우에서, "빨갱이 사주..."운운하는 교장에게 "그 말씀 취소하십시오!"라고 하면서 맞서던 이도영은 고막이 터지도록 얻어맞아야 했다. 이도영은 미국서 근 20년간 '망명아닌 망명생활'을 하다가 최근에야 귀국하여 교단에 섰다. 

 

어떤 유가족 자녀 鄭 모 교사(1999년 교장으로 승진, 재직중)는 신원조회를 우회하여 군 장교로 복무했고, 그후 제주도내 모 고교에서 교사로 재직 중 숙직을 하다가 '교실 방화사건'으로 신원이 들어났다. 중앙 정보부에 잡혀가서, 실성을 할 정도로 곤욕을 치루던 중, 방화주범(재학생)이 잠복했던 형사들에 의해서 두 번째 방화를 시도하다가 현장에서 체포되는 바람에, 그는 고문의 악몽에서 다행히도 풀려날 수 있었다. 

 

강 모씨 유족의 경우는 대가 끊어져 양자를 데리려고 애를 썼으나, 그의 친족들은 후환이 두려워서 아무도 양자로 오지 아니했다. 공무원이었던 모 씨는 자신의 보직이 위태함을 느끼고 자신의 조카에게 조차 유족임을 알려주지 않다가, 최근에야 유족회의 통지를 받고, 사건 경위와 부친의 묘소를 찾고 또 제삿날을 늦게나마 알 수가 있었다. 

 

육군보안대 황규봉 상사(모슬포 주재, 1960-1970년대, 현재 인천에 거주)는 이성철로부터 '백조일손' 관계 서류를 압류해 갔고, 이성철은 노령에 실성하여 운명했다(며느리, 김경육의 생전 증언, 김경육은 1996년 6월 폐암으로 운명). 1999년 최고령(103세) 생존 유족인 윤희춘 할머니는 지금도 당시를 회상하면 온 몸이 마비되어 온다. 아직도 4.3사건 전후와 예비검속 사건으로 희생된 아들들(양은하: 47년 2.7사건에 연루,모슬포 경찰서의 고문치사로 희생, 양윤하: 예비검속으로 희생)과 며느리(양은하의 부인: 경찰들이 연행해 가서 토벌대에게 총살당함)가 살아 돌아올 것을 기다리며 눈을 감지 못하고 있다. 젊었을 때는 목에서 피가 궨아져 나왔고 그러다 보니 목주위에 혹이 커다랗게 생겼다고 한다. 이외에도 혼자 속앓이를 하다가 화병으로 돌아간 이들의 숫자는 모두 다 헤아릴 수 없다. 유가족들은 창살없는 감옥에 갇혀, 일거수 일투족이 감시 감독을 받아야 했다.

 

 

상처받은 영혼을 향한 희망이 불어오는 곳
평화·상생·해원 바람의 진원지

제주4·3평화재단

4·3유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