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4·3유적지
유적지명 섯알오름
유형

지역구분(행정시) 서귀포시 지역구분(읍면) 대정면 지역구분(마을별) 상모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1597-3번지 일대
GPS 위도 33.2055833333333, 경도 126.279194444444 약도보러가기

 유적지내력

 

 ○ 모슬봉에서 남쪽으로 해안마을까지 동서로 나뉘어진 대정면 상모리와 하모리는 보통 모슬포로 불린다. 4․3당시 상모리는 이교동, 대동, 서상동, 중하동, 서하동, 산이수동의 6개 자연마을로, 하모리는 돈지동, 영수동, 상동, 중하동, 서상동, 당전동, 하동의 7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모슬포는 일제시기 모슬포항이 개발되고, 대정고을(보성·안성·인성리)에서 면사무소와 소학교가 이전해온 후부터 대정면의 중심지가 되기 시작했다. 또한 일본군이 사용하던 오오무라(大村) 병사를 9연대가 사용하고, 모슬포지서가 위치하고 있어서 제주도 서부지역 토벌대의 거점이 되었다. 특히, 1948년 3월 14일 대정중학생 양은하(梁銀河, 영락리)가 모슬포지서에서 고문치사 당한 사건은 도민의 감정을 극도로 자극시켰으며, 대정중학교 교사 이승진(李承晋)이 ‘김달삼(金達三)’이란 가명으로 무장대 총책이 됨으로써 대정중의 교사와 학생들은 토벌대의 주목을 받았다. 

 

토벌전이 강화되기 시작한 1948년 10월께부터 경비대 주둔지인 대촌병사에는 연일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11월 6일에는 9연대로 끌려가 고문 받던 대정면사무소 직원과 청년단체원 및 지역주민 16명이 동일 2리 천미동 입구 밭에서, 12월 13일에는 이교동 향사 앞밭에서 주민 48명이 토벌대에 의해 공개총살 당했다. 이때  조남수 목사가 소위󰡐자수운동󰡑을 벌였고, 이후 모슬포 주민들은 당시 조남수 목사와 면장 김남원의 공로를 기려 속칭 '진개동산'에 <牧師 趙南洙․面長 金南元 공덕비>와 <4․3사건 위령비>를 함께 세우기도 했다. 1949년 1월 10일에는 주민들 중 경찰을 돕던 특공대원 11명이 모슬봉 기슭에서 총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48년 11월 중순 제주도 전역에 소개령이 내려지면서 모슬포에는 인근 지역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소개되어왔다. 이 시기 마을 경비를 위해 축성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상모리의 9연대 본부 정문에서 시작되어 동일리를 거쳐 일과리까지 이어지는 장성(長城)이었다. 한편, 송악산 섯알오름 옛 탄약고터는 190년 6·25발발 직후 한림, 안덕, 대정면 관내 예비검속자들이 총살·암매장당한 곳이기도 하다. 

 

한편, 모슬포에는 알뜨르비행장에 설치된 비행기 격납고, 섯알오름 고사포 진지, 이교동 일제 군사시설, 송악산 진지동굴 등 태평양전쟁과 관련한 국가지정 등록문화재만도 8개에 이르고 있다. 섯알오름 학살터를 비롯한 제주4·3사건 유적지와 6·25 한국전쟁 당시 설치된 옛 육군제1훈련소, 강병대교회, 해병훈련시설지 등, 모슬포는 마을 전체가 지붕 없는 역사박물관이나 다름없다. 

 

‘섯알오름 탄약고 터’는 일본군이 1944년 말부터 알뜨르 지역을 군사요새화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일본군 탄약고가 있었던 자리이다. 당시 일본군은 야트막한 섯알오름의 내부를 전부 파내어 탄약고로 사용했으며, 탄약고 위쪽 오름 정상 부근에는 두 개의 고각포진지를 만들었다. 이 탄약고는 일제가 패망하면서 미군에 의해 폭파됐다. 이 때 오름의 절반이 함몰되면서 큰 구덩이가 만들어졌고 고각포진지 하나도 같이 폭파되어 사라져버렸다. 이 때 생긴 커다란 구덩이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예비검속 된 주민을 학살하는 총살장으로 활용됐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계엄당국은 전국적으로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사람들을 체포했다. 이 때 제주지구 계엄사령부에서도 820여 명의 주민을 검속했다. 당시 모슬포경찰서 관내 한림면, 한경면, 대정면, 안덕면 등지에서도 374명이 검속됐는데, 이들 중 132명이 대정면 상모리 절간고구마 창고에 수감됐다가 1950년 8월 20일(음 7월 7일) 계엄당국에 의해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서 새벽 4~5시경 총살당했다. 한림지서에 수감되었던 63명도 전날 저녁 대정지역으로 옮겨져 이날 이들보다 앞선 새벽 2시경 집단 학살당했다. 이 때 희생된 사람들은 당시 모슬포경찰서 관내(현재 한림읍, 대정읍, 한경면, 안덕면)에 거주하던 농민, 마을유지, 교육자, 공무원, 우익단체장, 학생들이었다. 

 

유족들은 시신수습을 위해 당국에 계속 허가를 요청했으나 번번이 묵살당해 오다 군부대 확장공사 당시 일부 유해가 드러나면서 사건발생 6년만인 1956년 3월, 한림지역 63명의 시신은 유족들에 의해 수습되어 한림읍 ‘갯거리오름’의 ‘만벵디공동장지’에 묻혔다. 또 모슬포지역 희생자 132명의 유해는 1956년 5월 시신수습 허가를 받고 사계리 공동묘지에 부지를 마련하여 안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신수습 당시에는 이미 오랜 시간이 경과되어 희생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어, 대강의 뼈를 추슬러 무덤을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유족들은 공동으로 마련한 장지에 묘비를 세웠는데 ‘조상은 1백이 넘되 자손은 하나이니 자손 한 사람 한 사람이 일백 할아버지를 모두 내 할아버지 모시듯 모시라’라는 의미의 ‘百祖一孫之地’라는 비석을 세웠다.

 

섯알오름 학살터는 2005년 제주도로부터 제주4·3중요 유적지로 선정되어 2006년부터 학살터 정비사업이 추진되었다. 국비로 학살터를 매입, 추모비 및 제단이 건립되었고, 추모정시설, 학살터 재현, 진입로, 주차장 시설 등이 마련되었다. 이후 2008년부터 백조일손 유족회와 만벵디 유족회가 공동으로 섯알오름 희생자 위령제단에서 매년 음력 7월 7일 ‘예비검속섯알오름희생자영령 합동위령제’를 봉행해오고 있다. 

 

<출처: 제주4·3연구소, 「4·3역사의 길 조성 기본계획 수립 용역보고서」(2015)>

 

 

 

 〇 6·25발발후의 가장 큰 학살사건

모슬포에 가서 4·3항쟁에 대한 증언을 듣다보면 흔히 그 분들은 “누구든 대살(代殺)당핸 죽었주”하는 말씀 끝에 “송악산 굴에 강 많이 죽었주”하는 말씀을 꼭 덧붙이는 걸 많이 경험하게 된다. ‘대살’이라면 검거 대상자를 잡지 못했을 때 그 가까운 인척을 대신 잡아들여 죽인다는 말이겠는데, 사실 대정지역에서는 그렇게 한 경우도 부지기수였다는 사실을 많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송악산  굴’ 이라면 일제식민지시대 말기에 일본군들이 송악산 지역을 군사기지화 하면서 비행장을 만들고, 송악산에 굴을 파서 소형 특수잠수정을 숨겨두었다가 연합군 함정이 접근해 오면 어뢰를 싣고 돌진해서 자폭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그 굴을 말하는 것이겠다.

 

그러나 6·25 후 제주도에서는 가장 큰 학살사건으로 볼 수 있는 ‘백조일손 지지’의 희생자들은 그 굴에서 학살당한 것은 아니었다. 백조일손지지의 희생자들은 송악산 서편 자락에 위치한 ‘섯알오름의 탄약고터’에서 집단학살을 당했던 것이다.

 

섯알오름의 탄약고터는 일제가 항복하면서 탄약고(주.  금은 많이 메워져 있었지만 섯알오름의 동편 자락을 허물고 들어가 입구를 만들고, 또 오름 정상까지 부수고 지하 깊숙히 까지 파서 만들었던 창고는 그 실면적이 실히 3~4백 평은 될 듯 싶을 정도로 넓었다. 창고터의  면적 등 여러 가지 면을 고려해볼 때 통상적인 군수물자 창고였다고 증언하는 분도 있었음)를 폭파시키자 지상의 건물 형체는 사라져버린 채 큰 웅덩이로 변해버린, 입구에서부터 보면 굴로 보일 수도 있는 그러한 곳이었다. 해서 몇 년 후 시신을 수습할 때도 밑바닥이 콘크리트여서 물이 고여 있었고, 그 물을 퍼내고 나서야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남쪽으로 송악산이 우뚝 서있는 ‘사계리공동묘지’ 한켠에 132구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는 ‘백 할아버지의 한  자손의 땅’  이라는 의미의 ‘백조일손지지’의 희생자들은 그렇게 먼 발치로 내려다보이는 섯알오름의 탄약고터에서 유족들이 이야기하듯 “맬젖 담듯이”, “여자들은 들어올리지도 못할 만큼 큰 돌덩이에 눌린 채”학살되었다고 한다.

 

입구쪽 큰 웅덩이에 132명, 몇 발자국 안으로 떨어진 작은 웅덩이에 한림 사람들 62명, 합쳐서 194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6·25 얼마후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를 건너 사랑을 속삭인다는 칠석날 새벽 무참히 학살되었던 것이다.

<출처: 제주4·3연구소, 「4.3장정 3」>

 

 

 

 ○ 유족들은 1950년 8월 20일 사건 발생 당일부터 총살 현장에 들어가 유해를 수습하려고 하였으나, 군․경 당국의 출입통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56년 3월 말, 희생 장소인 남제주군 대정면 상모리 섯알오름 탄약고터가 군부대 확장공사로 붕괴되어 유해가 드러나자, 군 당국은 유족들의 요구를 수용, 유해 수습을 허가했다. 

 

한림 어업조합창고 수감 희생자 유족들은, 군 당국과의 협의를 거치지 않고 유해를 수습, 1956년 3월 30일 유해 63구를 한림면 금악리 275번지 부지에 안장했다. 이곳이 현재 ‘만벵디공동장지’로 조성된 묘역이다. 이후 유족들은 유족회를 결성하고, 2001년 제51주기 위령제를 시작으로 매년 음력 7월 7일, 만벵디공동장지에서 위령제를 개최하고 있다. 

 

1956년 4월, 모슬포 절간고구마창고 수감 희생자 유족들은, 군 당국에 시신 인도를 요구, 당시 육군 제1훈련소장(백인엽)으로부터 허가를 받고 유해를 수습, 5월 18일 수습 유해 132구를 대정읍 상모리 586번지 부지에 안장하고, ‘백조일손지지’라 명명하였다. 이후 2000년 9월 총살 현장에 대한 발굴 작업이 한차례 더 실시되었지만, 추가로 유해가 수습되지 않았다.(백조일손유족회는 2000년 8월 24일 국방부에 학살터인 섯알오름 탄약고터에 대한 시신 추가 발굴 허가를 요청, 2000년 9월 20일 공군 제5315부대 제8546부대장으로부터 국방부 토지 내 시신 추가 발굴 허가 통보를 받고 2000년 9월 21일부터 2001년 2월 20일까지 5개월 동안 유해 발굴을 실시해, 잔해 뼈 34구, 이빨 3개, 신발창 2개, 옷 1점, 실탄 1,700여발, 탄통 2개 등을 발굴했다. 백조일손유족회,『백조일손영령 제15회 합동위령제 자료집』, 2007.) 유족들은 1993년 유족회를 창립하고, 제43주기 위령제를 시작으로 매년 음력 7월 7일, 백조일손지지 묘역에서 위령제를 거행하고 있다. 

 

<출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제주예비검속사건(섯알오름) 진실규명결정서』(2007)>

 

 

 

 

 

 현장사진

  

 

 

 

 

 

 

 

 

 

 

 

 

 

 

 

 

 

 

 

 

 사료(문서, 사진, 증언)

  

 ○ 증언

 

∙ 양신하(梁信河, 1938년생) 증언(2002.08.23)

 

“내가 백조일손에 미치다시피하는 이유가 우리 형님은 대신 숫자 채워서 대살시킨 것이다. 우리 형님이나 이도영 박사 부친도. 

왜 우리 형님이 그러냐면 형님이 영락리인데, 앞에 우리 아버지가 살던 초가집인데 바로 제주도에서 봄에 일어두었다가 언제 뜸들였다가 줄을 고쳐매지 않나? 그런데 바로 잡혀가는 날은 음력으로 6월 보름날이다. 잡혀가는 날이 바로 제주도에서 ‘보름 물찌’라고 하지 않나? 나는 방학 때라서 집에 가서 있었는데, 우리 아버지가 나는 키가 작으니까, 우리 형님은 키가 아주 큽니다. 그래서 형에게 집줄을 잘 매라고 해서 집줄을 곱게 매어두고는 형님이 그러지 않아도 유월보름이어서 바다에 가려고 했는데 집줄을 매어 주니까 하도 무덥고 하니까 조카들 데리고 바다에 가는데 영락리에서는 서림쪽으로 간다. 딸을 둘 데리고 가면서 형수에게 “나는 바다에 가니까 소 먹이러 가라.”고 말을 해두고 갔어. 우리 형수는 소를 먹이러 가려면 사계쪽에 가야 된다. 소를 이끌어서 가다 보니까 먹구슬 나무 있는 곳에 김대식이란 분이 있었어. 백조일손 회장했던 김정배의 아버지이다. 그 대식씨가 두 살된 아기를 안고 있었는데 그 아기가 김정배이다. 나중에 백조일손 회장까지 했지. 아이를 안아서 있다가 우리 형수에게 “형님 어디 갔습니까?” 하니까 “바다에 갔는데 왜?”하니까 “영락리 사람들 전부 향사에 모이는데 형님만 빠졌다고 한다. 잘 이야기 해 줍서” 하니까, 우리 형수도 그냥 소 먹이러 갔으면 될 걸. 돌아와서 쇠막에 소를 매어두고 바다에 간 거다. 유월보름 물찌는 오후 두시, 세시 되야 물이 싼다. 낮에 딸 둘을 데려서 갔으니 바다에 앉아서 물 싸기를 기다리고 있더라는 거다. “동네 사람들 향사에 모이는데 가서 얼굴 비쳐 버립서” 하니까 딸들에게 “두어시간 있어야 물이 쌀 것이니까 얼른 갔다 오마” 하고 영락리 향사로 간 거다. 향사에 가보니까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주변 누구한테 물어 봤는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향사에 모였던 사람들이 전부 무릉지서에 갔다고 하니까, 우리 형님은 그냥 돌아왔으면 될 것을 너무 고지식해서 무릉지서까지 간 것이다. 간 것이 소식이 없고 저녁에 딸 둘은 바구니 들고 기다리다가 돌아왔으니까 “아버지 어디가시니?” 하니까 “어머니가 오라고 해서 갔는데 안 왔습니다”라고 해서 이때는 알아보니까 향사에 간 사람들이 무릉지서 갔다고 하니 저녁밥을 하고 갈아입을 옷 하고 해서 간 것이다.

 

갔는데 밥을 안 들여주더라는 거다. 뒷날 또 가보니까 무릉지서가 동산에 있었는데 그 남쪽에 트럭을 대어놓고 통나무를 싣고 있었더라고, 우리 형님이 키도 크고 하니까 형님이 통나무 싣는 것을 보고 ‘저 것 다 실으면 밥이라도 들이자’고 해서 있었는데, 통나무 다 실은 다음 그 차에 타라고 해서 모슬포에 가버렸다는 거다. 그 길로 여기 절간창고에 와서 구금이 돼버린 거지.

 

그 이후에 우리 형수에 물어보니까 하는 말이 “음력 7월 칠석날이 양력으로 8월 20일인데, 나흘 전인가 8월 16일인데 어디서 연락 오기를 쌀하고 부식하고 가지고서 모슬포로 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6일이 모슬포 장날이니까 쌀하고 부식도 사고 해서, 우리 사촌도 한 분이 양은하 제일 큰 형님, 양윤하인데 같이 구금됐었어. 거기 어머니하고 사촌 두 동서가 쌀을 걸머매고 무릉지서 가서 통행증을 끊고 해서 그날은 오지를 못하고 바로 오는 날이 칠월 칠석날인데 쌀을 걸머 매고 영락리에서 걸어서 오는데, 모슬포 들어가는 세거리가 있는데 당시에 헌병초소가 있었어. 초서에 근무하는 분이 두 동서가 쌀을 매고 가고 있으니까 “어디 가느냐?”고 해서 무릉지서에서 끊어준 통행증을 보여주니까, 헌병초소에 있던 분이 “여기 있던 분들 어젯밤에 다 없어졌다” 하는 거다. 다 없어졌다고 해도 그래도 가보자고 해서 가보니 문은 열어졌고 다 없더라는 거다. 그때 걸머매고 간 쌀은 영락리 분 경찰관 부인 홍집인데 그분에게 주어 버리고 돌아왔다는 거라.

 

어디 간 줄을 모르고 있었는데, 형수네 생각에는 죽인 줄을 모르고 어디로 간 줄만 알았지. 며칠 후에 다 여기서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성복제를 할 때 바로 누가 돌아왔냐고 하면은 송성규라는 분이 돌아왔어. 그분이 예비검속 되었다가 성복제 끝난 다음에 돌아왔다는 거다. 우리 집과 앞뒷집인데 그 분은 돌아오고 하니까 형수가 덤벼들면서 “형님과 같이 갔는데 왜 너만 돌아왔느냐, 어디 갔느냐?” 하면서 막 아우성을 쳤어. 그 다음에 궁금해서 내가 90년대부터는 살아온 분들을 찾아다니고 있다.

 

‘잡힌 사람은 살아 돌아오고 우리 형님은 임시 갔는데 왜 죽었는가?’ 해서. 그런데 대살이라는 것이 개념이 생각이 나는 것이, 아까 영락리에서 유명한 고술생과 외사촌인가 해서 친족이 되는데, 바로 모슬포에 조합장네 집 앞에 살던 외5촌이 있는데 송영호 어머니라고 그 분은 원래가 고씨이다. 그래서 고순경네하고 친족이고 시집가서 보니까 송성규네 하고 친족이고 이리저리 친족인데 그 분 송영호 어머니를 내가 찾아 가서 물은 거라. “그때 너희 형도 빼내려고 하니까 못 빼겠더라” 그러는 거라. 고순경한테 우리 시조카는 무슨 죄가 있어서 잡아갔냐니까 그분은 그렇게 해서 빼준 것이었고, 우리 형님은 못 빼냈다는 거라.

 

바로 지금 명단이 희생자 252명이라는 숫자가 나왔지만은 명단이 없다보니까... 그 명단이 확보 된다면 이 수수께끼가 다 풀리게 되어 있어. 이도영 박사 아버지도 출근하려는 사람 잡아간 거라. 자료에 보면 AB는 빨리 내치고 CD급은 방첩대에 의뢰해서 방첩대가 처단을 했는데, 그러면 분명히 CD급이지만은 나왔고, AB급이지만은 죽은 결과가 있을 거라는 거다. 숫자적으로 C급 몇 명, D급 몇 명은 나왔지만 명단이 없기 때문에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는거지.”

 

  

〇 변해운(1925년생, 신도리, 당시 대한청년단 훈련교관) 증언(2002.09.09.)


4.3사건이 일어난지 후에 9연대인가? 이 청년들이 길에 걸어다니고 있으면 다 몰아서, 각 지역마다 몰아서 병사(=모슬포 9연대 兵舍)로 갔던 적이 있거든. 나도 소금밭까지 갔다왔지. 동일리 소금밭까지 몰아가서 3열 종대로 딱 세웠거든. 다 손을 검사하면서 3열종대로 세우는데, 석줄로 딱 세워. ‘이상하다. 이거 어떡할려고 하는가?’ 하다보니 한 줄은 나이가 좀 든 분들이여. 이렇게 하니까 “너네랑 집에 가!”. 하니까 두 줄을 세우는데 ‘어떻게 할건고?’하면서 서 있는데, 두 줄을 세웠는데 한 줄은 병사로 끌고갈 눈치란 말이여. 나도 그 케이스에 들었어. 이렇게 하니까 그때 9연대에 있던 무릉리 분, 그 분이 나하고 친구란 말이여. 그 분이 나를 빼. “거기 뭐하러 서느냐!” 나를 빼내. 그래서 나는 집에 돌아왔어. 근데 양경호란 분은 그 때 병사에 가서 고문도 많이 당하고 했지. 그러니까 거기 가서 말을 잘못했거나 한 거지, 어디 경찰에 가서 눌러 앉거나 한 것은 아니지.

 

손을 보면서 골라냈는데 손 고운 사람을 골랐어. 손 곱고 젊은 사람. 그러니까 나도 ‘손 곱고 젊은 사람이라고 사상이 다 나쁜 사람은 아닌데 그런 걸 보면서 검사한다’고 생각했었지. 나이 든 사람들도 골라서 집으로 보내버리고. 그때 여자는 별로 없었어. 이렇게 몰아가는게 4.3사건이 일어난 후에 있었거든.

 

그때 부규방, 양경호, 양한병, 오인백, 조봉천네가 다 갔어. 그들은 며칠 있다가 거기서 석방됐어. 그런데 6.25 터질 무렵에 잡혀간 거라. 석방돼서 가만히 있었어. 김태인 같은 사람은 대한청년단 조직부장으로 있었거든. 나하고 같이 대한청년단 활동하다가 그렇게 됐어. 그러니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상당히 많거든. 억울하게, 어떻게 해서 모략에.

 

동일리 소금밭에 끌고 간 것은 신도리 사람들만이 아니고 저 청수, 낙천 등 저쪽에서 모두. 한 200~300명은 모여진 거 같아.

 

나를 빼내준 무릉리 출신 군인은 처음부터 국방경비대로 들어간 사람이라. 국군준비대 했던 사람이 아니야. 강맹하하고 강봉선이라. 그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나를 빼준거라. 그 사람들은 6.25터져서 육지부 전선으로 갔는데 소식이 없어. 그때가 추운 겨울은 아니고 8월? 9월?

 

나도 병사(兵舍)에는 가서 한 일주일 살았지. 그때는 이거는 모략이지. 성 다 두르고 보초서다가 (무장대의) 신도 습격이 닥친 후에 일이니까. 내가 대한청년단 훈련교관 노릇을 하다 그렇게 됐지. 그러니까 모략을 해버린 거지. 내가 훈련 가르치면서 이렇게 해서 하다보니까.

 

나는 대한청년단 신도리 훈련담당이었어. 대정읍 전체로는 훈련부 차장으로 있었어. 훈련 가르치려면 조금 모질게도 허지. 이렇게 하다 보니까 모략이 들어갔어. 그때 이 동네 너댓사람 갔다가 돌아왔어. 그런데 6.25 터지니까 멀쩡한 사람도 굴에 가서 가서 희생시켜버렸지.

 

그때 6.25 터져서 희생당한 사람은 7명이라. 변봉훈, 양한병, 조봉천, 김태인, 양경호, 강인하, 오인백이라. 백조일손에 묻힌 사람도 있고 갯거리오름에 묻힌 사람도 있어. 우리동네는 두군데 묻혔어.

 

상처받은 영혼을 향한 희망이 불어오는 곳
평화·상생·해원 바람의 진원지

제주4·3평화재단

4·3유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