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상규명의 긴 여정

■ 43 진상규명운동과 수난

1960년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몰락하자 4·3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가 시작됐다. 1960년 5월 제주대학생 7명이 ‘4‧3사건진상규명동지회’를 조직, 진상조사 작업에 나섰다. 이어서 5월 27일에는 남제주군 모슬포에서 유가족 등 주민들이 집회를 열어 ‘특공대 참살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1960년 5월 23일 국회에서 거창·함양 등지의 양민학살사건에 관한 조사단이 구성되자, 제주출신 국회의원들이 제주4·3사건의 진상도 조사하여야 한다고 발의했다. 국회는 이를 받아들여 경남반(반장 최천)의 조사지역을 확대하여 6월 6일 하루 동안 4·3사건의 진상 조사를 실시하였다. 제주도의회 의사당에서 열린 국회 조사단의 증언 청취 자리에서 10년 동안 한을 품어온 희생자 유족들은 학살 당시의 불법성을 폭로하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촉박한 일정이었지만, 3일 동안 제주신보에 접수된 피해 건수는 총 1,259건, 인명 피해는 1,457명에 달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비로소 시작된 4‧3사건에 대한 논의는 다음해에 일어난 5‧16 군사쿠데타로 다시 중단되었다.

5‧16 발생 이튿날인 1961년 5월 17일 4‧3사건 진상규명동지회 회원 이문교·박경구가 구속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피해자 신고 접수에 앞장섰던 제주신보 신두방 전무가 구속됐고, 진상규명을 호소했던 모슬포 유족들도 경찰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었다. 6월 15일 경찰은 모슬포 지역 예비검속 희생자 유족들이 전년도에 세운 ‘백조일손 위령비’를 부숴 땅속에 파묻어 버렸다.

5‧16 쿠데타 이후 20여 년간은 군사정권 하에서 4‧3사건에 대한 논의가 다시 금기시 됐다. 반공법·국가보안법과 연좌제 등의 구도 하에서 4‧3사건에 대한 발설조차 힘들어졌다. 이제 4‧3사건은 역사 속으로 묻혀지고 있었다.

4‧3에 대한 재인식은 1978년 소설가 현기영이 「순이삼촌」이라는 소설을 통하여 그 진상과 상처의 일부를 사실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비롯되었다. 작가는 4‧3사건을 소재로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정보기관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었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운동 이후 4‧3에 대한 논의는 다시 일어났다.

1987년 시민항쟁 이후 4‧3은 학생운동권·사회운동권 내에서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다. 고조된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레 4‧3의 논의는 활발하게 전개되어 갔다. 4‧3의 진실회복운동은 민족민주운동의 거대 역량을 방풍림으로 삼아 상당한 정도의 이론적 자양분과 인적 자원을 공급받으며 저항적 사회운동의 모습으로 출발하였다.

1987년 4월 3일 제주대학교 총학생회에서는 4‧3 발발 이후 첫 위령제를 치렀으며, 4‧3을 민중항쟁으로 공식 규정하는 대자보가 나붙어 관련자가 경찰에 연행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4‧3을 앞두고 대학가에서는 추모 집회와 시위를 통해 4‧3 진상 규명 운동을 벌였다.

1989년 제주지역 시민사회 단체와 서울의 제주사회문제협의회는 41주기 4‧3추모제 준비위원회를 꾸리고 제주시민회관에서 추모제를 봉행했다. 이는 4‧3 이후 공개적으로 행해진 첫 추모행사였다.

같은 해 5월 10일 제주4·3연구소가 발족됐다. 제주4‧3연구소는 창립 이후 증언집 등을 발간하여 사실 증언의 축적과 학술적 논의의 바탕을 마련하였다. 또한 제주신문은 1989년 4월 3일을 맞아 “4‧3의 증언”을 연재하기 시작하였다. 1989년 말 제주신문의 내부 사태로 이 연재는 중단되고 제주신문 출신 사원들이 창간한 제민일보가 창간 기획으로 “4‧3은 말한다”를 연재함으로써 4‧3 관련 증언을 체계적인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다.

제주 지역 방송에서도 4‧3을 주제로 한 기획특집 프로그램을 방송함으로써 공중파 방송에서도 4‧3 영상이 방송되기 시작했다.

문화예술인을 포함한 각계 각층에서 진상규명운동이 이어졌고, 1993년 10월에는 제주지역총학생회협의회가 4‧3특별법 제정과 특위 구성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또 1995년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는 「제주4‧3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를 발간했다.

한편 1997년 4월 ‘제주4·3 제50주년 기념사업추진 범국민위원회’가 결성되는 등 4·3진상규명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4‧3특별법의 제정

1997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는 4·3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이에 따라 새정치국민회의는 1998년 3월 당내에 ‘제주도 4·3사태 진상조사특별위원회’(약칭 : 국민회의 특위)를 구성했고, 국민회의 특위는 5월 7일 제주에서, 9월 28일 국회에서 각각 ‘4·3사건 공청회’를 개최했다.

1999년에 접어들자 제주에서는 더욱 구체적인 진상규명 운동이 전개됐다. 그 해 3월 ‘제주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가 결성됐다. 진상규명에 앞장섰던 사람들은 1999년 12월말 제15대 국회 폐회 전에 특별법 제정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제주에서는 10월 24개 유족단체와 시민사회단체가 결집된 ‘4·3특별법 쟁취를 위한 연대회의’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특별법 제정 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제주도민들은 특별법 제정 촉구 서명과 성금 기탁 등으로 성원했다. 나아가 이 연대회의는 ‘제주4·3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전국시민사회단체 활동가 184단체 694명 선언’을 이끌어냄으로써 특별법 제정의 당위성을 전국적으로 홍보했다.

결국 국회 행정자치위원회는 여·야가 각각 제출한 ‘4·3특별법(안)’을 단일안으로 만들어 국회 본회의에 회부했고, 1999년 12월 16일 국회 본회의에서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을 통과시켰다.

2000년 1월 11일 청와대에서는 그동안 진상규명 운동에 앞장서 온 유족·시민단체 대표 8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대중 대통령이 4·3특별법에 서명했다.

4·3특별법은 ‘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줌으로써 인권신장과 민주발전 및 국민화합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그 취지를 밝혔다(제1조). 4·3특별법은 4·3사건이 발발한 지 50여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국가 차원의 진상 규명의 방임과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데 대한 반성과 해결의 의지를 보여준 결과였다.

4·3특별법에 따라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약칭 : 4·3위원회)가 출범하여 △진상조사보고서 작성과 확정 △희생자와 유족 신고접수 및 결정 △4·3평화공원 조성과 4·3평화기념관 건립 △희생자 유족의 의료지원금 지원과 후유장애인에 대한 생활지원금 지급 등의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4·3특별법은 2007년 1월 처음 개정 공포되었다. 개정 내용은 현행법상 사망자·행방불명자·후유장애자로 국한되어 있는 희생자의 범위에 수형자(受刑者)를 추가하`였고, 종전 ‘희생자의 배우자, 직계 존비속, 또는 형제자매’로 한정된 유족의 범위를 ‘형제자매가 없는 경우에는 4촌 이내의 방계 혈족으로서 희생자의 제사를 봉행하거나 분묘를 관리하는 사실상의 유족’으로 확대하였다.

추가 진상조사와 기념관·공원의 운영·관리 등의 사업을 수행할 4·3평화재단의 설립과 정부 지원 근거가 마련되었다. 위원회의 심의·의결사항 중에 ‘집단학살지·암매장지 조사 및 유골의 발굴·수습에 관한 사항’이 추가되었다.

4·3특별법은 2013년 8월 다시 개정되었다. 국회는 이 개정안을 통과시키면서 4·3 법정 기념일과 관련해 부대 의견으로 대통령령인 ‘각종 기념일에 관한 규정’을 개정해 추념일로 지정하도록 명문화함으로써 법정 기념일 지정을 위한 물꼬를 텄다.

또한 희생자 및 유족에게 국가가 생활지원금을 보조할 수 있는 법적 근거도 마련했다. 4·3평화재단에 자발적으로 기탁되는 금품을 사업 목적에 부합하는 범위에서 접수할 수 있도록 하는 특례도 신설됐다.

 진상조사보고서 확정과 대통령 사과

2003년 10월 15일 4·3사건의 진상을 담은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보고서가 확정됐다.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도를 방문하여 진상보고서에 근거해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을 공식 사과했다. ‘국가공권력에 의한 대규모 민간인 희생’ 사실을 정부가 인정한 것이다.

2005년 1월 27일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지정 선언문에 직접 서명함으로써 제주도가 평화의 섬으로 공식 지정되었다. 이 날 서명식 자리에서 대통령은 “제주도가 평화의 섬으로 지정된 것은 제주도민들이 간절하게 염원하기도 했지만 실질적으로 그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제주도는 ‘삼무(三無)의 섬’으로써 평화를 가꿔온 역사를 가지고 있고, 4·3사건이라고 하는 역사적인 큰 아픔을 딛고 과거사 정리의 보편적 기준이라 할 수 있는 진실과 화해의 과정을 거쳐 극복해나가고 있는 모범을 실현하고 있다.”라고 하여 평화의 섬 지정의 의미를 특별히 강조했다.

 국가 기념일 지정

4·3희생자 추념일을 국가 기념일로 지정한 것은 정부의 진상보고서 확정, 대통령의 사과에 이은 4·3의 국가적 해결 과제 중 마지막 안건을 해결한 것이다. 2012년 12월 박근혜 대통령 후보는 추념일 지정을 제주지역 대선의 주요 공약으로 제시하였다. 2013년 8월 국회는 4·3특별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면서 4·3 법정 기념일과 관련해 부대 의견으로 대통령령인 ‘각종 기념일에 관한 규정’을 개정해 4·3추념일을 법정 기념일로 지정하도록 명문화함으로써 법정 기념일 지정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결국 2014년 3월 18일 정부는 국무회의에서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고 3월 24일자 관보에 게재함으로써 ‘4·3희생자 추념일’ 지정을 위한 대통령령 개정안이 마침내 공포됐다.

법정 기념일 지정을 계기로 4·3문제의 해법은 국민통합과 화합의 국정 과제를 실현한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지금까지 4·3사건을 둘러싸고 빚어진 이념 논쟁과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4·3추념식은 국가 기념일의 위격(位格)에 맞추어 국민적 행사로 치러지고 나아가 대한민국의 추념 행사를 넘어서서 세계를 향해 ‘평화정신’을 선포하고 구현하는 보편적 행사로 정착해 갈 것으로 기대된다.

과거 4·3은 반세기 넘도록 금기의 영역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유가족들은 희생자들을 위령하는 행사조차 공개적으로 열기 어려웠다. 4·3희생자 추념일을 법정 기념일로 봉행하기까지는 험난한 과정을 거쳤다.

1989년 제주도내 11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제주4·3사월제공동준비위원회가 ‘제1회 4·3추모제’를 봉행함으로써 위령제는 공식행사로 치러지게 되었다.

1990년 6월 유족들은 ‘제주도4·3사건 민간인희생자 유족회’를 조직했고, 1991년 4월 처음으로 유족들이 주체가 된 4·3사건희생자위령제를 봉행했다.

이때부터 유족회와 시민 사회단체들은 4·3위령제와 4·3기념행사를 각각 따로 치렀는데 1994년 제주도의회가 중재에 나서서 민간인희생자유족회와 ‘사월제공준위’가 공동으로 위령제를 봉행하게 되었다.

1997년에는 4·3의 상처를 범도민적으로 승화시킨다는 취지로 ‘제주4·3사건 희생자위령사업 범도민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4·3 50주년인 1998년부터 매년 합동위령제를 봉행하였다.

4·3특별법이 제정된 2000년부터는 ‘제주4·3사건 희생자 범도민위령제’로 명칭을 바꿨고, 새로 확보한 제주시 봉개동 4·3평화공원 부지에서 봉행되었다.

2006년 4·3 위령제에는 국가 원수로는 처음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여 제주도민들에게 다시 공식 사과하고 참배하였다.